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이광조
교감은 말이 적고 소박한 사람 같았다. 차츰 분위기를 파악하고 나서 보니, 그는 거세고 독단적인 교주 교장 밑에서 눈치를 보며 자리보전하는 처지이었지만 교사들과는 그런대로 잘 지내는 사람이었다. 교무실 전체를 관리하는 그에게 나는 시골 고등학교에서 몇 년 근무하다 시내로 옮겨온 고분고분한 신임 교사였을 것이다. 아직 환경에 익숙하지 않는 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며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아쉽게도 그런 무난했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근해 간 이듬해 봄에 학교에 돌풍이 불어닥쳤다. 전국적으로 전교조 운동이 가열되면서 외부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교사들이 술렁거리더니 학교 내에 평교사협의회가 구성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공동대표 명단에 내 이름이 오르게 된 일이었다.
내가 교육청에 출장을 간 날 협의회가 구성되었고 거기서 뽑힌 공동의장단에 내가 포함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표를 만났다. 가입 서류도 작성하지 않은 사람한테 무슨 횡포냐며 항의하자 힘을 실어주는 의미에서 회장단에 이름만 올려놓고 있어 달라고 통 사정을 했다. 나이가 어리고 근무 이력이 없는 걸 들어 발뺌할 수도 있었지만, 제 안위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 수락하고 말았다.
40대 선배들이 일을 꾸미고 30대인 나는 그냥 따라다녔는데 몇 달 지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중심부로 들어서게 되었다. 회의하다 방안을 찾지 못해 고민할 때 소소한 대안을 더러 제시했었다. 교감선생과 협상하는 자리에서는 변죽만 울리면서 핵심을 짚지 못하는 선배들이 답답해서 직접 문제를 파헤치기도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자 평교협 모임에서 내 의견에 무게를 싣기 시작했고, 학교측과 협상이 있을 때는 우리 측 대표가 말머리를 트고 나면 본론은 내가 물고 늘어진다는 시나리오가 그려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대표 네 사람과 교감이 중국집 이층 홀에서 마주한 일이 있었다. 수학여행을 위탁할 업체 선정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교감이 술자리를 마련해 그럴듯한 모양새로 돌파하려는 의도였다. 장황하게 얘기를 늘어놓으며 교감이 자기 의도대로 협의를 끌고 가는 데도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듣고만 있는 선배들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어 또 나서고 말았다.
“15년이나 한 업체에 수학여행을 맡겼다면 알만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 아이들한테 나오는 밥이 그 모양이지요. 바꾸십시오. 업체 선정은 저희들 의견을 존중하셔야 합니다.”
교감이 교장의 의중을 들먹이며 본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눈감아 달라는 투로 나오자 다시 나섰다.
“입장이 어려우면 교감 선생님은 빠지십시오. 저희들이 교장선생님 만나서 담판 짓겠습니다.”
교감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결론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교감이 내 욕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엊그제 전근해 온 놈이 이 학교에 평생을 바친 자신의 멱살을 잡는 꼴이니 힘들어서 못 해 먹겠다며 연거푸 한숨을 쉰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썩은 분위기를 갈아엎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무시하고 지냈다.
그렇게 웃고 울면서 일 년쯤 지났을 때 차츰 회의가 밀려왔다. 체제를 바꾸고 원하는 학교를 만들어 가려면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뀌어야 하는데, 회원들이 그런 제안은 대부분 외면했다. 게다가 간부 교사들의 사주를 받고 교장, 교감 편에 붙어서 우리 활동을 방해하거나 맞서려는 사람들의 장난이 심해지면서 학교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사안의 옳고 그름을 보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그들이 야속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데는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평교협 소속 남녀교사 사이에 커플이 생겼고 마침내 그들이 결혼하게 되자, 여교사가 사직한 다음 주 일요일에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상대편에 속해 있던 친목회 회장이 신부가 될 여교사는 더 이상 교직원이 아니니 축의금을 줄 수 없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고 나섰다. 말 같지 않은 일로 회의가 열려 왈가왈부하게 되자, 나는 절망감을 느끼며 책상에 그냥 엎드리고 말았다. 어이없는 일을 겪던 예비 신랑이 더러워서 축의금을 받지 않겠다며 퇴장하는 사태가 벌어진 그날 나는 퇴근하면서 마음을 굳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개돼지만도 못한 이 집단을 벗어나자!’
순리적으로 잘 지내던 학교를 떠나 내가 어쩌다 이런 소굴에 들어와 있는지를 한탄하면서 우울하게 가을을 보내는데, 친구로부터 모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뛸 듯이 기뻐하며 서류를 접수했고 면접을 거쳐서 임용통지를 받게 되었다. 하늘이 날 돕는다고 생각하면서 일사천리로 채용 서류를 준비하다 보니, 학기 중 전근은 재직교 교장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에 부딪히고 말았다.
학교 측에서는 앓던 이 빠지는 것처럼 좋아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의 앙금을 가지고 괴롭히려고 마음먹는다면 전근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그동안 학교에 맞서 싸운 사실이 누군가를 통해 옮겨갈 학교에 알려 질 경우 사태는 예측불허였다.
평교협에서 잘 통하던 공동의장 선배에게 내 일을 털어놓고 의논하자 교감을 만나서 해결해 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양주 한 병을 사 들고 그의 집을 찾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아해하며 내 눈치를 살피던 그에게 전후 사정을 다 털어놓은 다음 솔직하게 사과했다.
“교감 선생님은 10년쯤 지나 퇴직하시면 그만이지만, 저는 30년을 더 있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 손으로 근무 환경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가 교감 선생님보다 학교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대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러 온 것은 학교에 대한 저의 애정이 교감 선생님보다 못한 걸 자백하는 일입니다. 그동안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가 다소 당황스러워하며 담담한 미소를 보이더니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선생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아요. 나도 젊은 시절에는 울분을 토했던 적이 많고 아직 우리 학교에는 고칠 일이 많다는 거 잘 압니다. 공적인 일로 더러 얼굴을 붉혔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선생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젊은 시절 내 모습하고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는 자기 심정을 뒷받침하려는 듯 두어 가지 사실을 덧붙였다. 학교와 협상이 결렬되자 평교협에서 담임을 하지 말자고 결의하고 학급 조, 종례에 들어가지 않은 적이 있었다. 모두 교무실에서 바로 퇴근한 할 때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 눈을 피해 우리 반 교실에 가서 둘러보고 열린 창문을 닫거나 커튼을 친 다음 퇴근했었는데, 그걸 교감이 보았노라고 했다. 또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내가 학교에 나와 환경 정리하는 걸 지나가다 보면서 선생이라면 저런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단다.
그의 솔직한 칭찬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면서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는 교감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었고, 마주 앉아 얼굴을 붉힌 일들 때문에 서먹서먹해했었다. 그렇게 지냈는데 그에게는 벽이 없는 걸 알게 되자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자신이 미숙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다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예상 밖의 솔직한 대화를 나눴고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해 준 덕분에 나는 원했던 대로 새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사실 그의 태도를 한두 번 의심해 본 일도 있다. 그냥 두면 골치 아플 내가 사라지는 게 좋으니 선심 쓰는 척 쇼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나의 그런 의심을 날려 버린 건 몇 년 뒤 시내 예식장 로비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본 그의 환한 표정이었다. 안부를 물으며 손을 맞잡는 그의 모습에서 막냇동생을 걱정하는 큰 형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게 인간사라는데 그걸 잘하는 일이 쉽지 않다. 아득한 옛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며칠 전 겪은 엉뚱한 헤어짐 때문이다. 기를 쓰고 다가와 몇 해 알고 지내던 사람이 나하고 직접 관계도 없는 일을 빌미로 더 이상 안 만날 것 같은 인사를 남겼다. 허탈한 마음으로 뒤척이며 인간관계 자체에 대해 실망하던 중 문득 교감선생을 떠올리고는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교감선생처럼 잘 대해 준 사람이 있었으니, 이 친구처럼 막 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던 것이다.
살아계신다면 구십 대 중반이 되었을 김주정 교감, 나에게 사람의 진심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그는 진정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24년 4월 8일, 22.6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