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은퇴를 하고 제주를 오면서 한 가지 불안한 것은 내가 그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무원 은퇴를 했으니 뭐 밥 먹을 거리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적당한 소일거리를 필요로 했던 겁니다. 자원봉사를 한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해야지 아무 일이나 무조건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국에서 40년을 살면서 주류사회의 직장을 다니면서 영어라는 언어를 늘 했으니 언어자원봉사를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제주는 생각한 만큼 국제적인 행사도 많지 않고, 영어를 사용하는 관광객도 그리 많지 않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발품을 열심히 팔고 이 곳에서 친구들을 사귀면서 그런대로 내가 할 만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자원봉사라는 것도 여러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간단한 언어통역을 하는 것에서부터, 실제 회의에서의 통역, 번역, 무대의 사회를 보는 일, 영어 가르치기 등의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번에 제주올레재단의 주관으로 지난 1월 13일 한 주간 이 곳 제주에서 세계도보여행길대회(World Trail Conference)가 열렸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150여명이 모였는데, 내가 이들의 제주일일관광과 한라산 가이드를 맡게 되었습니다. 원하는 사람 만에 한해 이틀에 걸쳐 2회 일일관광 가이드를 했습니다. 아침 9시의 중문에 있는 이들의 숙소에서 출발하여 서귀포의 천지연폭포, 표선민속촌, 중식은 오조해녀의집에서 전복죽으로 해결했고, 오후에는 성산일출봉, 마지막으로 김녕 만장굴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뭐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날씨도 좋았고 해서 대체로 만족스런 하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1월 18일에 있었던 한라산 영실 탐방이었습니다. 한라산에 오른 것이 뭐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이 번의 한라산 산행은 특별했습니다. 그냥 내가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7개국에서 온 9명과 안내를 위하여 나를 포함하여 제주올레재단에서 보낸 2명을 합하여 11명이 겨울 등반을 한 것입니다. 이 특별한 산행은 지난 주, 그러니까 2014.01.13.에서 17일까지 제주올레재단이 주관한 2014년 세계도보여행길대회(World Trail Conference)에 참가한 여러 나라의 참가자들 중에 겨울의 한라산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행사로서 계획되고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이 날의 기상예보는 아침에는 날씨가 흐리고 눈발이 날리다가 오후에는 개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 중에 날씨가 그렇듯이 이 예보는 전혀 빗나갔습니다. 날씨는 계속 흐렸고 간간히 눈발도 내려 시계도 아주 나쁜 상태였습니다. 윗새오름의 산장에 도착했을 때엔, 미리 나누어 주었던 김밥은 이미 온기는 사라졌는데, 그 곳에서 나누어 준 뜨끈한 사발면과 김밥을 인종과 국가에 관계없이 모두들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중식을 먹은 뒤 윗새오름에서 어리목으로 내려가려하자, 먼데서 오신 손님에게 한라산이 그리 만만한 산이 아니라는 듯, 겨울 한라산의 매운 맛을 톡톡히 보여주었습니다. 바람 많은 제주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칼같이 매서운 광풍과 얼굴을 가차 없이 때리는 내리며 얼어붙은 작은 알갱이로 변한 눈, 아름다운 한라산 영실의 모습을 그리 쉽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500나한 장군님들의 단호함까지 겹쳐 시계는 제로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7개국의 9명의 손님들은 이러한 한라산의 혹독한 대접에도 아랑곳없이 이 환영의 인사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앞에 가는 사람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도 않는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동안 서로에게 농을 건네며 격려하는 모습은, 과연 자연을 사랑하는 진정한 길 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기억이 남는 것은 스위스에서 온 Dr. Baumgartner라는 초로의 남자 분이었는데, 산에서의 기상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 하면서 차분하게 처음 만난 세계의 동료들을 격려하며 때로는 앞에서 또 때로는 뒤에서 그룹을 이끄는 모습은 멋진 산 사나이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물론 나보다는 산악을 훨씬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알프스는 분명 한라산보다 높고 험한 산이란 건 맞지만, 바람만은 제주를 당해낼 수 없다는 말로 주위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와 동년배이고 공통의 관심사도 많아서 이내 가까워졌습니다.
7개국의 사람들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각 사람은 자기나라의 대표가 됩니다. 묘한 것이 우리가 머릿속에 이미 들어있는 어느 나라에 대한 선입견은 대체로 들어맞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그 곳에는 이태리,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스, 레바논, 스위스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나라를 나타내는 표상이 되었습니다. 이러니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그 나라를 대표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외국의 전문 걷기의 달인들이 놀라워 한 것은, 한국 사람들의 등산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기였습니다. 날씨가 그렇게 안 좋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등산로에는 계속적인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더욱 놀란 것은 부모들을 따라온 초등학교 저학년의 아이들은 물론 그보다도 아주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이들도 끝까지 완주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도 미국이란 나라에 오래 살았지만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본격적인 산행을 하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에도 제주의 칼바람은 계속 이어졌고, 꽤나 수고스런 산행을 한 그 날 저녁에는 뒤풀이로 서귀포 중문동네 고기 집에 모였습니다. 오늘의 등산얘기로 한껏 고조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삶은 이런 겁니다. 우린 모두가 서로를 모른 채로 이 세상에 던져집니다. 부모도 마찬가집니다. 이 분이 네 부모라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 귀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만남을 통해 늘 즐거운 일만 있는 건 결코 아니지만, 열려진 마음과 따듯한 마음이 있으면 그 걸로 족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누구와도 길동무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이 제주에 와서 팔자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외국인을 상대로의 “여행 및 산악 가이드”가 되어 갑니다. 근데 내가 이런 일에 아주 잘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 때 전공도 지리학을 했고, 타고난 친화력과 어느 정도의 말솜씨도 있으니 앞으로는 이 타고난 저 마다의 소질을 계발해야 할까 봅니다.
첫댓글 저는 주노아톰님의 자유로운 삶이 참 부럽습니다,큰기대없이 시작한 은퇴후의 삶에서 보람을 찾으시는 모습 참 보기 좋읍니다, 제주 올래 주관으로 열리는 행사는 얼마나 자주 열리는지요?^^~
제주올레재단의 국제적 공식행사는 일년에 두 번 이어서 자주는 아닙니다만, 늘 여러가지로 도울일이 있지요. 그 밖에도 살림이 어려운 뜻있는 단체들이 많이 있으니 스스로 찾아 일하면 됩니다...^^
과연 우리카페에 롤모델이십니다.
긍정에 대가(代加)이신 아톰님의 생일을 추카추카!!! 저도 올해 팔월이면 회갑인데… 별 감회가 있을 것 같지 않네요.
마나님과 좋은 추억 만드시길 바랍니다.
아톰님과 듀크님과 함께 걷고 이야기 할 날을 기대합니다. 이미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가는 역이민 카페가 자랑스럽습니다. 활짝 열려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과 격려가 되는 멋진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추천해 드린 직업이 현실이 되었네요.
아름다운 좋은 article 입니다.
아톰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은퇴생활을 하시고 계시네요...제 은퇴생활에도 좋은 영향이 미칠것같아요...생일 축하드립니다...
인생은 60부터~~~
은퇴에 정수를 보여주시는것 같아요.
겨울산행 항상 만반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북한산가면서 고어택스 입는건 좀 오바지만
한라산갈땐 hypothermia 도 신경써야 할것같아요.서북미 산은 고도가 높아서 겨울엔 GPS꼭 챙기고 만반에 준비를 한답니다.
그래도 가끔 사고가 나요.
졸은모습 잘 읽고 갑니다
60 까지의 인생은 제 1 부 인생 , 환갑을 맞이 하면서 시작 하는 인생을 제 2 부 인생 이라고 합니다.
미리부터 준비 하셔서 확실한 제 2 부 인생의 시작을 맞이한 아톰님의 선견지명이 느껴 지네요...
아톰님 멋진 삶 좋은 글 ...나누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댓글도 못달고 그냥 가곤 하지만 항상 많은 영감을 받아가곤 한답니다. 그리고 60번째 생신 축하드립니다. 더욱 멋진 노년의 삶 보여주시기를요..건강하고 행복한 60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조만간 아톰님이 제주를 변화시키는 제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매김될 것 같습니다.
늘 생동감 있는 체험현장 나눠주주시고 긍정의 에너지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지난 한주에는 아톰님의 미국고향 엘에이에 다녀 왔는데 이미 그곳은 여름이 와 있더군요. 그곳 오렌지 카운티 언저리에서 아톰님 생각이 나는게 신기하더라구요.ㅋ
금년겨울 밴쿠버는 이상하게도 온화하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집니다. 예전의 비 많던 밴쿠버는 잊어주시길...ㅎ
참 멋있는 은퇴생활을 하고 계셔서 부럽습니다.
Happy birthday to you, Juneauatom. Edward Choi from Oak Hills California. Hope to see you on may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