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1.blog.daum.net%2Fimage%2F34%2Fblog%2F2008%2F11%2F25%2F14%2F27%2F492b8c8687248%26filename%3D147.jpg)
제목 : 비
광주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3학년 이현수
우리 고향마을 입구에는 드넓은 비상활주로가 있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가을걷이한 벼를 이곳 활주로에 넓게 널어 말린다. 잘 말린 그 벼를 모으고 담아서 집안의 창고 안에 들여놔야 가을걷이가 비로소 끝이 난다.
어느 구름 낀 가을날이었다. 다니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야야! 현수야! 비가 몰아올라고 헝께 빨리 나락 담으러 활주로로 와라!”
그렇게 말하고는 무작정 전화를 끊어버리신다.
이따금 가을날이면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부름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무조건 응해야 했다. 몸이 불편한 80이 가까워 오는 아버지가 일손 놓지 않고 고된 농사일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가을철 벼를 말리는 중에 몰아오는 비에 벼가 젖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농사철이면 우리 형제들은 각자 다니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농사일 돕기가 쉽지 않아 일손이 많이 딸린다. 모내기나 다른 일은 비가 오더라도 그리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벼를 말리고 있다가 비가 내리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제때 담지 않으면 큰비에 벼가 떠내려 갈수도 있었고 또 벼가 비에 젖어 썩거나 싹이라도 나면 어렵게 지어놓은 한해 농사를 아주 다 망치고 마는 것이다.
2남 2녀인 우리 형제는 다들 출가를 했기 때문에 부모님까지 합하면 성인으로 구성된 십 명의 비상인력이 되는 셈이다. 벼를 말리고 있다가 비가 내릴 것 같으면 아버지는 자식들 모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다급한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위급할 때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자식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하던 일을 제쳐두고 바쁜 마음으로 급히 시골로 향하고 있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지다.
“얀~마!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왜 빨리 안 오냐!”
다급하게 외치고는 또 전화를 끊어버리신다.
자동차 가속 페달을 밟으며 부랴부랴 벼가 널어져 있는 비상 활주로에 도착해보니 벌써 형수님과 여동생 등 식구들이 모두 모여 부지런히 벼를 담고 있었다. 비가 몰려오는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컴컴해지고 한 방울 두 방울 벌써부터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집사람과 둘이서 부리나케 포대에 나락을 담았다. 모으고 담고 쓸고 정신없이 일을 했다. 이러다가 갑자기 비가 몰아치면 큰일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벼를 절반도 담지 못했는데 비가 한꺼번에 주룩주룩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벼를 쓸어 담던 아버지가 문득 일하는 손을 놓고 비 내리는 하늘을 넋이 나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틀 동안이나 볕에 말린 탐스러운 벼에서는 그새 물이 고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와서 벼를 담았더라면.......’
망연자실한 표정의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만에 평상심을 되찾은 비에 온통 젖은 아버지가 ‘앞으로 삼일동안은 날씨가 좋아야 싹이 안날 텐데.......’ 하면서 물에 젖은 벼를 손으로 한주먹 쥐어 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신다.
다행히도 다음날은 가을볕이 따갑게 쏟아 내렸다. 비에 젖은 벼를 다시 잘 널어 말리면 되었다. 며칠 뒤 우리는 또 다시모여 갑자기 쏟아지던 비를 원망하며 가을걷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모내기를 마친 음력 오월 어느 날 논에 물고를 보고 오신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 아버지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그 길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출상을 하루 앞둔 그날 비가 왜 그렇게 많이도 내리던지......., 하루 사백미리가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를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 많은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여 명이 넘는 문상객들이 다녀갔다. 내가 소속 되어있는 산악회회원들도 비를 흠뻑 맞은 채 문상을 다녀갔다. 불시에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의 깊은 슬픔을 함께 나누어 줄줄 아는 좋은 인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많은 비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출상하는 날, 정작 아버지가 가시는 그날에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문상 온 사람들이 날씨가 궂으면 큰일이라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들 놀라는 눈치들이었다. 가난한 촌부의 오남매 막내로 태어나 열아홉에 고아아닌 고아가 되어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삶이 서러워서 가시기 전날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시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살아생전 지금은 서울대학교 3학년에 다니는 큰 조카의 합격을 그토록 고대 하셨는데........’ 마음속으로 소원해 하던 그 좋은 소식도 못 듣고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지금도 비가 온 다음날 날씨 좋은 날엔 인자하시고 자상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본다.(끝)
배움 - 그 아름다운 길
옛 선인들의 말에 세월(歲月)이 유수(流水) 같다더니 그새 3년의 시간이 흘러 졸업하게 되었다니 꿈만 같다. 뒤돌아보면 먼 바다를 항해해온 듯 아스라하지만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사랑하는 학우들과 함께 배움의 길을 걸어온 지난날이 소중한 길임에 틀림없다.
막상 정들었던 교정과 선생님과 학우들과 헤어지게 된다하니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모이는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됨을 말하던 인간사의 철리(哲理)를 깨닫게 한다.
세상을 살면서 인간에게는 세 가지 복이 있다고들 한다. 그 첫 번째가 부모의 복이다. 두 번째가 처의 복이요. 세 번째가 자식 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복이 사람들에게 천차만별로 적용되어 어떤 이는 많은 복을 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복을 누리지 못하고 헤매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성실하고 착한 부모를 만났으나 가난한 탓으로 중학을 마치고는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나의 복이 그만 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남들보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해 장학금의 혜택을 받고 다닐만한 능력도 못되었으니 곧바로 험난한 사회 진출이라는 난바다에 나설 수밖에 없었으니 이 또한 나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었다.
사회에 진출하여 성실하게 노력해온 결과 기술을 익혀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수 있었고 또 가난한 부모님께 논마지기라도 사서 보태드렸으니 이웃들은 나를 효자라고 칭찬했고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귀퉁이에는 늘 중학을 마치고 그만 둔 배움이라는 길에서 낙오하고만 내 인생의 설움이 가득 고여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학벌 중심의 사회라서 어디 가서 얼굴이라도 내 놓을라치면 늘 중학교 졸업뿐인 학벌이 걸림돌이 되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빨리 극복해야할 문제라고 의식 있는 사회 각계각층의 여러분들이 지적하고는 있지만 머리에 깊이 각인된 학벌중심주의는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학벌보다도 개인의 능력을 중요하게 여겨주고 그 능력에 따라 사람을 보고 쓰는 사회가 되었다면 우리는 학벌중심주의에서 오는 병폐를 극복하고 좀 더 이성적이고 선진적인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그러한 여건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가슴 한 귀퉁이에는 늘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배움의 길을 다시 걸으리라는 간절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다시 하리라!’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로 지내는 모 텔레비전 방송국 김모 아나운서와 고향 친구들이 함께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시사종합전문지 계간 ‘영산강’ 대표로 활동하면서 취재 기사도 쓰고 여러 고명한 인사들의 인터뷰도 하면서 바쁘게 지냈던 터라 사람들의 만남이 활발했었다.
김모 아나운서와 친구들과 함께 만나 어느 술좌석에 앉았는데 그때 어느 법무사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던 중학교 동창 최모가 나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는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런데 너 중학교 나왔지!”
청천벽력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짧은 내 학벌의 내밀한 아픔을 그리 쉽게 공개적으로 끄집어내 망신을 주다니 말이다. 나는 너무도 민망하여 그만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역시 우리 사회는 실력보다도 학벌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깊은 수모를 느꼈고 비몽사몽간을 지내다가 굳은 결심을 했다. 반드시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떳떳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일이 그리 창피한 일도 아니었고 다만 내 가슴 속에 갖고 있던 학력에 대한 열등의식의 발로였다는 생각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사랑하는 학우들을 만나 못다 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인생의 희열을 만끽했다. 비록 나이가 많고 머리가 둔해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고 또 생활에 쫓기며 사는 형편이긴 했지만 하나를 배워가면서 하나를 더 보태간다는 생활은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었다. 배움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의 길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치 십대의 청소년이라도 된 듯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생활은 그렇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움에 열의를 두고 틈틈이 익힌다는 것은 바로 공자가 말씀한 학문의 맛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만약 내가 어려운 가정환경을 만나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대학에 갔더라면 아마도 이러한 공자가 말씀한 깊은 배움의 희열은 맛보지 못하였을 것이리라! 목마름이 간절할 때 마시는 한 모금의 물은 평상시 마시는 그 물의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나이 오십이 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선생님들을 만나고 또 학우들을 만나 꿈결 같은 지난 3년의 세월을 지냈다. 그리고 비록 여러 모로 부족했으나 학생회장으로서의 직책을 맡아 대표로서도 노력했고 여러 학내외행사를 주관하고 진행하며 정말 알차고 보람찬 학교생활을 했다. 또한 내가 바라는 바대로 광주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내가 우리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방법으로 신문사를 운영하고 싶었는데 인터넷신문사 mynewstouch(mynews.or.kr)를 열어 대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마음속에 품은 뜻을 내 나름대로 실현한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이 모든 것이 아마도 그날 최군의 만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날 최군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들 감히 고등학교에 진학할 뜻을 실천에 옮겼을까?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가끔은 뜻하지 않는 채찍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당장은 수모요 창피일지는 몰라도 그 수모와 창피를 바로 자각하고 그 극복 대안을 찾아 모색한다면 반드시 그 수모와 창피를 극복하고 큰 뜻을 성취하는 계기로 삼기도 하는 것이었다.
한신 장군이 동네 양아치들의 가랑이를 끼어 갔다는 일화에서 그 한신 장군의 수모와 창피를 이겨내는 그 위대한 정신을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면 나를 오늘의 ‘배움 - 그 아름다운 길’로 나서게 한 것은 어쩌면 그날의 최군의 공이다.
“최군 감사하이! 다음에 술 한 잔 하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