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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의 형성
I. 서론: 한국교회의 윤리적 이슈들
이 논문은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성품윤리적 측면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한국 교회의 윤리적 문제는 1990년 후반부터 주류 언론에 의해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2000년 이후 본격적으로 많은 언론에 의해 다루어 지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이 둔화되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가 일치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 성장의 둔화와 윤리적 문제점들을 직접적으로 원인과 결과로 연결시켜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능한 해석은 한국 교회의 윤리적 문제가 그전부터 잠재해 있었으나 급증하는 교회 성장에 의해서 감추어져 있다가, 성장이 둔화되면서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언론이 보도한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교회세습 문제, 목회자의 교회 재정 횡령, 성범죄, 교회의 사유화, 교회 지도자들의 비사회적 발언 등.1)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은 그와 같은 문제들을 초래하는 요인이 한국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을 성품윤리학에서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초래한 도덕적 성품이 한국교회에 형성되어 있다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윤리적 문제를 초래하도록 만든 도덕적 성품이 무엇인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의 형성을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리처드 니버의 이론을 통해서 분석하고 제시할 것이다.2)
1) Sung-gun Kim,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after Its Rapid Growth: A SociologicalStudy of Religion”, Christian History of Korea 38 (2013): 5-45.
2)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기독교윤리학자이며, 덕윤리를 기독교적 언어로 표현한 성품윤리와 교회윤리를 주장 한다. 그는 공동체의 덕을 강조하며, 근대이후 개인과 개인주의에 대한 강조가 초래한 도덕적 위기에 주목하여서, 현대 사 회에서도 개인의 행동은 여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교회윤리와 성품윤리에 관한 국 내 연구는 아래를 참조할 수 있다. Kim, “A Critical Reading of Stanley Hauerwas’s Ecclesial Ethic”; Kim, “Toward
II.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의 현황: 사회적 신뢰도 조사를 중심으로
한 종교 기관이 소속된 사회로부터 받는 사회적 신뢰도는 그 종교기관의 도덕성과 밀접한 관련 이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다른 주요 종교 기관들보다 더 많은 윤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수량화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만, 주요 한국의 종교 기관들의 상대적인 사회적 신뢰도는 측정 가능하 며 이로부터 각 종교기관의 상대적인 도덕 수준을 유추할 수 있다.
사회적 자본과 사회적 신뢰에 대한 아이디어는 21세기에 가장 두드러진 연구 주제 중 하나”이다. 로버트 푸트남에 따르면, 사회적 자본은 자본이 성장함에 따라 시민의 미덕을 증가시키는 도덕적 자원으로서의 관계와 집단 연대와 관련이 있다. 푸트남은 아래와 같이 사회적 자본을 기술한다.
1) 사회적 자본은 개인 간의 연결, 즉 사회적 네트워크와 그들로부터 발생하는 호혜성 및 신뢰성의 규 범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자본은 일부 사람들이“시민적 덕”이라고 부르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차이점은“사회적 자본”은 호혜적인 사회적 관계의 밀집된 네트워크에 연결될 때 시민 적 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결한 개인이 라도 고 립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가 반드시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것은 아니다.3)
한국교회의 사회적 자본을 측정하게 된 계기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 샘물교회 피랍사태이다. 이 사태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은 한국교회가 예상하거나 기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자국민이 아프간에 인질로 40일 이상 수감되었고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비난하였다. 한국교회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기보다,한국교회에 적대적으로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반응은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가 얼마나 심하게 약화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008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여론조사기관 한길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서 한국교회와 타 종교기관의 사회적 신뢰 수준을 조사하였다.
아래의 두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의 절대값과 상대값을 보여주고있다.4)
just Peace”; Moon, “A Study on Ethical Responsibility for Post-modern Moral Crisis”; Moon, “A Study on Ethical Responsibility for Post-modern Moral Crisis”; Moon, “A Study on Ethical Responsibility for Post-modern Moral Crisis”; Moon, “Church as the Base of Public Theology and Ecclesial Ethics”; Moon, “Hauerwas on ‘Being Church,’ ‘Discipleship,’ and ‘Social Spirituality’”; Moon, “Hauerwas on Being Church”; Moon, “Moral Sanctions, Being-Church, and Reading Hauerwas”; Moon, To Reform Ethics of the Church; Moon, To Reform Ethics of the Church; Moon, “Sociological Implications of the Roman Catholic Conversion Boom in Korea”; Yang, “A Study for Assuring Homiletical Public Spirituality of Korean Church.”
3) Putnam, Bowling Alone, 19.
4)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사』 (2008);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사』 (2009);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사』 (2010);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 사』 (2013);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사』 (2017).
<한국교회의 절대적 사회적 신뢰도>
<한국교회의 상대적인 사회적 신뢰도>
한국교회는 2009년을 제외한 모든 조사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반면에 천주교는 모든 조사에서 가장 높은 사회적 신뢰도를 얻었다. 점수를 더 세분화하면 한국교회는 한국 개신교 기독교인 중 가장 높은 사회적 신뢰도를 얻었지만 비신자들로부터 사회적 신뢰도가 매우 낮았다. 반면 천주교는 가톨릭 신자 와 비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신뢰를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낮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제시된다. 기독교윤리운동을 설립한 손봉호는 한국교회의 지난친 교회성장의 추구가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을 우상으로 만들어서 중요한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시켰다. 많은 한국교회가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번영신학을 전파하고 기복신앙을 부추기고 있다. 이 구조에서, 한국교회에서 성장은 도덕성보다 우선 할 수 있으며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저지른 비윤리적 범죄가 용서받고 교단에 의해 명목상의 처벌만을 받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양적 성장과 물질적 축복에 대한 강조가 한국교회 내에서 도덕적 교훈을 왜곡시켜 교인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지점이다.
III. 성품윤리와 문화유형론을 통한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점 분석
1.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성품윤리와 리처드 니버의 문화 유형론
이 논문은 스탠리 하우어워스 (Stanley Hauerwas)와 리처드 니버 (H. Richard Niebuhr)의 신학 적 방법론을 발전적으로 적용하여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분석하려고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질적 위기와 양적 위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질적 위기는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가 한국의 다른 주요 종 교에 비해 매우 낮다는 것이다. 한국의 일반 대중들은 한국교회에 비해 다른 종교기관을 더 신뢰한다. 둘째, 양적인 측면에서, 1990년대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이 둔화되며서 교회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 했고 앞으로 한국 교회 교인 수가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의 비도덕적인 모습들이 사회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매우 부정적으로 변했고, 사회로부터 교회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적 대적인 반응이 사회적 신뢰를 떨어 뜨리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국제 공공신학저널 (Interanational Journal of Public Theology) 편집자 김창환 교수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2008년 미국의 경제 위기와 신뢰 위기와 비교한다. 그는“한국의 개신교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다른 종류의 ‘신뢰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5)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로부터 신 뢰와 존경을 잃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이 2008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지금의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의 공적인 생활에 있어서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두 가지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 해결책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공공신학적인 접근이다.6) 리처드 니버의 책임윤리는 공공신학적인 측면에서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에 기여할 수 있다. 그는 교회의 공공 책임을 강조한다. 즉,이 관점은 공적 신 학의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공적 신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책임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또한 하우어워스의 성품윤리와 교회윤리는 교회 공동체의 윤리적인 생활 방식 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의 능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우어워스의 성품윤리적인 접근은 교회 가 도덕적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 덕을 소유한 교회가 될 때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성품윤리는 공동체의 내러티브가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도덕적 성품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으로부터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초래한 도덕적 성품의 형성을 분석할 방법론을 찾을 수 있다. 즉, 내러티브 접근법이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분석하는 이론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한국교 회의 도덕적 성품을 결정짓는 내러티브는 무엇이며 그 내러티브는 무엇에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는 방 식으로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다.
하우어워스의 내러티브 접근법과 함께, 리처드 니버의 문화 동화 이론이 한국교회의 지배적 내러티브 형성을 분석하는 중요한 이론으로 기능한다. 이 논문에서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로부터 한국 교회 가 한국 사회에 어떻게 동화되고 적응해 왔는지 분석할 방법론으로 니버의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이 사 용된다. 역사적으로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개신교가 국가의 주요 종교 기관으로 성장 한 적이 거의 없는 상황 속에서, 한국에서의 개신교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한국 사회 안에서 국가와 교회의 특별한 관계성을 주목할 필요를 보여 준다.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내러티브가 한국교회의 내러티 브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동화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니버의 “문화의 그 리스도 유형”을 살펴 볼 것이다.
5) Kim, “Editorial,” 131. 김창환(Sebastian Kim) 교수는 미국 풀러신학교의 “신학과 공공생활” 연구소 센터장이며, 한국 학 연구를 위한 조교수이다.
6)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공공신학적 접근에는 아래와 같은 책들을 참조할 수 있다. 임성빈. 『21세기 책임윤리의 모 색』(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2); 임성빈, 『21세기 책임윤리의 모색』(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2); 장동민,『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의 한국』 기독교 (서울 : 새물결플러스, 2019); 양낙흥, 『개혁주의 사회윤리와 한국교 회』 (서울 : 개혁주의신행협회, 1999); 이학준, 『한국 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 (서울 : 새물결플러스, 2011); 김 선일, 『한국 기독교의 성장 내러티브』 (서울: CLC, 2019).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미국의 많은 교회는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 사회의 동화되었다. 그의 주 장을 한국 교회의 상황에 적용하면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의 지배적 내러티브에 동화되어 왔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윤리적 위기를 내러티브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지배적 내러티 브를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니버의 문화 동화 이론과 하우어워스의 성품윤리는 한국 교회의 윤리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효과적인 이론으로 기능할 것이다.
2.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의 형성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공공연하게 비판 당하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한국교회 안에 무엇이 형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성경의 이야기에 의해서 본질이 변화된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내러티브의 형태로 전달된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성품윤리에 따르면, 한 공동체의 지배적인 내러티브에 의해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성품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한 공동체 또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내러티브가 의미하는 바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리처드 니버가 말한 것처럼 우리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고, 어떤 도덕적 성품이 우리 안에 형성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덕을 강조하는 중세 카톨릭의 전통을 마치 인간의 공로를 강조한 카톨릭의 교리의 일부처럼 간주하여서 카톨릭의 덕윤리를 배척해 왔다. 그 결과 도덕과 신앙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현상이 개신교 역사에서 나타났다. 그래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신앙과 도덕을 통합하는 것에 대해서 개신교가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신교의 편견이 기독교적 도덕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도덕적 이론과 형식 자체를 거부하게 되면, 기독교는 도덕 발달을 위한 해석학적 도구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영적 성숙과 영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보이면서도 도덕적 성숙과 도덕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게 되면 기독교 영성을 현실과 무관한 사변적인 영성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지닌 도덕적, 윤리적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가 윤리 또는 도덕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선택의 문제로 제한해서 이해하기 때문에 내면의 성숙과 도덕 발달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적 위기를 초래하였고, 현대 사회의 도덕적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선택을 실천해야 할 “자아”와 도덕적 선택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이론적으로 명백하게 밝힌다고 해도, 우리가 모두 도덕적 선택을 실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윤리적 선택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의 능력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도덕적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을 도덕적 성품이라고 부르며, 기독교적 성품윤리는 기독교인들이 도덕적 선택을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성품을 형성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품을 강조할 때, 성품 발달이 우리의 실천적 행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 성품의 형성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을 습득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이론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성품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때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서 성품을 함양하고 습득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기독교의 내러티브는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고 싶은 마음을 기독교인에게 형성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의 내러티브가 기독교인에게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성품 윤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동시에 성품을 함양하고 반복해서 실천하는 노력을 강조한다.
3. 성품윤리에서의 내러티브
먼저 “내러티브”또는“이야기”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성품윤리에서 내러티브 또는 이야기는 한 공동체의 가치와 덕을 형성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공동체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전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우어워스는 교회 공동체의 내러티브가 실제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성품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의 내러티브가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성품을 결정한다. 하우어워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특정 습관을 지니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이야기가 우리를 다른 사람들, 우리의 사회, 그리고 우주와 관계를 맻게 하는 방식을 알려준다는 점이 다. 이야기의 이러한 능력은 모험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모험을 피해갈 수 있는 자아란 어 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본질적 목적으로서의 존엄성이 아니라 존엄을 위한 노력에 참여하 는 것이다.7)
7)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문시영 역, 『교회됨』 (성남: 북코리아, 2010), 286
다시 말해서, 한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성품은 그 공동체의 내러티브에 영향을 받는다. 단순히 한 공동체 안에 여러 개의 내러티브가 있고, 그 중에서 가장 사람들이 선호하는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는 그 공동체 안에서 생존 방식, 삶의 체계, 가치관, 타인들과의 관계 방식 등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뜻한다. 따라서 성경의 내러티브는 교회 구성원들의 성품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서 내러티브는 그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고, 지탱시키는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내러티브를 의미한다.
고대의 서사인 일리아드에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맞서 싸우는 용기를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리아드는 고대 도시 국가를 지탱시키고 유지시킨 중요한 덕목들을 담고 있는 내러티브이다. 이와같이 한 사회 안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내러티브는 그 사회가 생존하고 유지되는데 결정적인 기여한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의 주인공의 성품이 그 사회가 본받을 성품으로 제시되며 그 내러티브의 주인공이 타인과 가족과 이웃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공동체 전체의 구성원들의 성품 형성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 사회의 내러티브, 한 공동체의 내러티브는 공동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스신화와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는 내러티브였다. 그리스 신화가 단순히 구전되는 이야기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 도시 국가를 통치하고 운영하는 근본적인 이야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도 성경 내러티브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이라고 하우어워스는 주장한다.
2)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에 상응하는 성품이 형성되어야만 알수 있는 “성경 내러티브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내러티브의 사람들 ”입니다. 그리고 내 러티브에 따른 성품의 형성은 공동체와 무관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내러티브가 충실히 구현되는 사회, 즉 내러티브의 사회가 있어야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성품이 형성됩니다.8)
8)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148.
내러티브의 사회가 있어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내러티브에 의해서 성품이 형성될 수 있다는 하우어워스의 주장은 그리스신화와 그리스 도시 국가의 관계성을 생각하면 만일 그리스신화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라는 특정한 사회와 맥락 안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그리스신화가 성품을 형성하는 내러티브로서 기능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론할 수 있다.앨리스데어 맥킨타이어도 내러티브와 공동체가 어떤 관계인지 이론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내러티브 안에서 구현됩니다. 그리고 그 구현은 그 내러티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이 꼭 개인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 이상의 개인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 또는 로마 시민이 그 내러티브가 구현되는 사람들이 되기도 합니다.9)
9)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260
따라서, 공동체에서 개인의 성품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상과 목표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사회의 내러티브는 그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인 내러티브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이 가장 거대한 내러티브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그 내러티브에 충실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의 신들이 자신들을 지켜 준다는 내러티브에 빠져서 출애굽 이후에도 금송아지를 만들기도 했고, 끊임없이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기도 했다. 로마 시민들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로마를 지키는 것을 칭송하는 내러티브가 있었다. 이와 같이 모든 공동체들이 그 공동체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덕이 있고 가치가 있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내러티브는 그 사회가 실제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을 담아내기 마련이고, 내러티브는 각 개인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서 그 사회에 속한 개인의 성품을 형성한다.
교회가 성경의 내러티브에 충실한 공동체가 되고, 예수님의 내러티브가 교회를 작동시키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 성경의 내러티브가 교회. 구성원들의 성품을 형성할 것이다. 성경의 내러티브가 교회를 작동시키고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내러티브가 아니라면, 교회의 구성원들은 성경의 내러티브로부터 성품을 형성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4. 리처드 니버의 문화 유형론과 한국교회
문화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리처드 니버의 기념비적인 저작, “그리스도와 문화”는 문화와 기독교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기독교가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5가지 유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유형이다. 그의 다섯 가지 유형 중에서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의 형성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는 유형은 그가 극단적인 유형으로 언급한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입니다. 한국교회는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를 지향하지만, 실제로는 “문화와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유형을 띄고 있을 때가 많았다. 또한 한국 사회로부터 동화되는 측면에서는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을 보이고 있으며, 세상 문화를 죄악으로 가득한 문화로 바라보는 측면에서는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리처드 니버에 따르면,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의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을 "인간 문화사의 위대한 영웅"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인류 문명의 가장 큰 업적이다.
이러한 유형의 견해를 대표하는 것은 문화적 기독교 또는 기독교 자유주의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긴장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유형은 성경적 가치와 오늘날 문화의 가치 사이의 갈등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버는 이 유형의 두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설명한다.
첫째,이 문화의 기독교 유형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다. 기독교의 가치가 동시대 문화에 침투해 들어가면 그 가치가 그 사회 전체에서 확산되어서 그 사회를 더 고결한 사회로 만들고 사람들을 변화시켜 종국적으로 그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따라서 이 유형은 기독교의 언어와 가치를 문화적 가치와 언어로 번역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은 복음의 보편적인 적실성을 효과적으로 세상에 소통시키는데 기여한다. 다시 말해서, 이 유형은 복음이 교회 안에서도 유효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세상의 문화 속에서도 별 다른 거부감이 없이 받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유형이 비기독교인에게 가장 열렬히 지지를 받는 기독교의 문화 유형일 뿐만 아니라 세상 문화에서 기독교를 가장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 유형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문화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복음의 왜곡과 변형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된다는 목적이 달성되고,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의무로써 온전히 수행하기 때문에 이 유형이 지지를 받기도 한다. 니버는 이 유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유형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이 유형이 지나치게 복음을 단순화해서 세상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5. 니버의 문화 유형과 한국교회
리처드 니버의 기독교 문화 유형론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특별히,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은 교회가 세상 문화에 어떻게 동화되는지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유형을 대외적으로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서는 세상의 논리를 따르고, 교회에서는 교회의 논리를 이원론적으로 추구하는 유형에 가까웠다. 또한 세상의 가치과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어와 교회를 움직이는 가치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설명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이라고 공표한 적은 없지만, 교회 안에 무엇이 형성되어 있는가를 중심으로 한국교회를 살펴 보면,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 기독교 문화 유형인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가 제시한 영적 축복과 물질적 축복을 추구한 복음은 한국 사회안에서 가난을 벗어나 부유하게 잘 살고 싶은 욕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한국교회가 제시한 복음은 한국사회의 문화적 요구에 부응하여 변형이 이루어졌고, 한국사회의 가치에 순응하여서 동화되었다.
리처드 니버의 기독교 문화 유형을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성품윤리와 연결시켜 적용할 때,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점은 한국교회의 내러티브가 한국사회로부터 어떻게 동화된 결과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을 형성하는데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는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내러티브가 성경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따르고, 성경의 내러티브가 한국교회를 움직여가는 가장 결정적이고 지배적인 내러티브였다면 성경의 내러티브가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을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의 내러티브는 성경적 내러티브에 충실하지 못했고, 세상 문화의 지배적 가치와 내러티브에 순응한 결과 “내러티브 동화 현상(Assimilation of Narratives)”이 발생했다.
IV.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내러티브 동화 현상
한국교회는 1960년대에서 80년대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동시에 한국사회도 그 시기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60 ~ 1980 년대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기에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내러티브에 동화되었다. 개인과 국가의 가난을 극복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성장 내러티브는 국가의 근대화와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 위한 하나의 지배적인 내러티브가 되어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제안한 경제 성장 내러티브를 한국사회 안에서 구현했고,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의 도덕성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 내러티브가 한국교회 안에서 교회 성장이라는 측면으로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서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1. 한국사회의 경제성장 내러티브
196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사회를 설명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 전쟁 이후의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가 그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5.16 군사혁명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박정희 장군의 군사 쿠데타는 쿠데타 시도 이후 주한 미국 대사관과 다수의 한국 국민으로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경험했던 한국 국민들은 근대화와 정치적 독립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던 박정희의 비전에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그 결과 박정희는 선거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비판하는 사람들 모두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기간 동안 한국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사회적 우선 순위였고 그 점에 있어서 박정희 정부가 성과를 내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경제적 빈곤은 한국 국민에게 매우 긴급하고 중대한 문제였다. 전쟁의 여파로 한국 국민들은 식량 불안과 기아를 빈번하게 걱정해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박 대통령은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 경제 발전과 성장을 이루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조선은 19 세기와 20 세기 초반까지 일본에 비해서 근대화의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한국은 일제의 식민 지배의 고통을 겪어야했고, 한국 전쟁의 결과로 극도의 빈곤과 기아를 견뎌야 했다. 1961년에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필요성을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들과 구별되는 성과를 달성했다. 이승만 정부는 민족주의를 강조했고,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를 강조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를 정권의 핵심 과제이자 목표로 설정했다. 따라서 근대화는 박정희 정부의 지배적 내러티브로 채택되었고 이는 국가 차원에서 가난을 벗어나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경제 성장 내러티브가 되었다. 그가 제시한 한국의 경제 성장 내러티브는 그가 실제로 어린 시절 경험한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고 싶은 개인적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경제 성장 내러티브에 힘을 더해 주었다. 박정희가 5.16 이후 출판한 연설문들과 저술들에서 경제 성장에 대한 그의 집착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 수 있다.
경제 성장 내러티브는 순수하게 내러티브적 측면에서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이 역 사적으로 근대화와 경제 성장에 실패한 이유를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과 이전 정부 지도자들의 무능 과 무책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전 정치 지도자들이 경제 성장 내러티브에서 악당으로 등 장하고, 절대적인 선이자 목표인 근대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는 주인공은 박정희 대통령과 박정 희 정부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 역사를 “외국의 억압, 정복으로 점철된 비참의 연대기”라고 평가했 다. 한국이 역사적으로 겪은 대부분의 침략이 한국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는 한국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이루어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경제성장 내러티브는 실제로 성과를 내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내러티브의 지위를 점점 더 획득하게 되었다.
2. 한국교회의 교회성장 내러티브
한국 교회는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 내러티브를 한국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서“영적”인 언어로 성장을 추구하는 내러티브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교회 성장 내러티브 형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조용기 목사였다. 그는 물질적 축복과 영적 축복을 강조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물질적 축복과 사회적 성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강조했고, 그로 인해서 기복 신앙을 한국 교회에 확산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서 많은 사람들을 그가 세운 교회의 성도가 되게 했다. 그 결과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가 되었다.
처음에 조용기 목사는 1958년 서울의 가난한 동네 대조동에 5 명의 성도들과 함께 천막교회를 세웠다. 천막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강력한 메시지와 치유 사역에 의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1961년에 600명의 규모의 교회가 되었고 1964 년에는 이미 3,000명 규모의 교회가 되었다. 조용기 목사가 소그룹 모임들과 그 모임들의 리더로 여성을 세운 것은 1960년대 당시 한국의 문화에서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조 목사는 여성들에게 소그룹이나 셀 모임을 이끄는 리더십을 부여했고,이 여성 지도자들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봉사 활동 덕분에 교회는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그의 소그룹 시스템은 그가 교회의 70 만 명이 넘는 성도들을 섬길 수 있었지만 여전히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3. 내러티브의 동화 현상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한국 사회를 하나의 경제 개발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 체제를 개발동원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개발 동원 체제는 이전까지 한국 사회 안에 팽배해 있던 공산주에에 대한 증오심을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환원시켰고 경제성장과 근대화라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한국 교회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증오를 교회의 전도 노력과 선교의 원동력으로 치환함으로써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교회는 정부와 동질화된 정책과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려는 많이 도시 빈민들이 한국교회에 유입될 수 있었고 교회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즉, 박정희 대통령이 제안한 경제 성장 내러티브는 많은 한국 교회에서 받아들여져 교회성장내러티브로 변형되어 교회 안에서 작동했다.
교회는 한국의 경제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을뿐만 아니라, 이 경제성장내러티브를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국가의 경제 발전은 교회성장이라는 종교적 언어로 대체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논문에서 이정연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성장 내러티브가 한국 교회의 종교적 언어로 번역되어서 영적“부흥”의 내러티브로 채택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성도 수의 증가를 교회의 부흥으로 이해했다. 이정연의 연구에 따르면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여의도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국교회가 교인의 증가와 교회의 성장을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 해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내러티브 구조 안에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무조건 성장해야했다. 이것이 경제 성장 내러티브가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교회의 내러티브는 한국사회의 내러티브에 동화되었다.
4. 내러티브 동화 현상에 따른 도덕적 성품의 왜곡
한 사회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가 문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는 기독교의 복음 메시지를 번역하고 전달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순전히 사회와 소통하고 복음을 전파한다는 측면에서 조용기 목사는 복음을 한국 사회와 문화가 이해할 수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한국 국민들과 기독교인들이 열망한대로 그 두 그룹 모두가 물질적 축복을 얻고 가난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70만 명 이상의 성도 규모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따라서 그의 교회성장 내러티브에서 윤리적 문제점과 도덕적 부작용을 무시한다면, 그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독교 목사로 평가받을 것이다.
또한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이 절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회와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고 국민 개개인의 경제적 수준을 향상시켰다는 것은 매우 큰 사회적 기여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내러티브 안에서 다른 도덕적 가치들을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한 것은 경제성장 내러티브에 의해서 나타난 부작용이고, 한국 사회 안에 왜곡된 도덕적 성품을 형성시켰다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 자체는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소중한 도덕적 가치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사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개인적인 부를 추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면 교회성장내러티브의 부작용 역시 작다고 할 수 없다. 특별히 한국교회에 있어서 교회성장내러티브의 문제는 조용기 목사의 교회 성장내러티브의 도덕적 부작용이 무시할 수 없을만큼 매우 심각하다는 데에 있다. 그가 일으킨 윤리적 문제와 횡령과 같은 범죄는그가 설교해 온“복음”에 과연 신뢰할만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또한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에게 한국교회가 소개하는 복음이 정말로 복된 소식인지 아니면 기독교적 언어로 포장된 물질주의인지 의아하게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경제 성장 내러티브에 동화된 조용기 목사의 교회 성장 내러티브는 현재 한국 교회의 가장 지배적인 내러티브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많은 윤리적 문제를 초래한 도덕적 성품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차.
5.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의 형성
하우어워스의 성품윤리에 따르면, 교회는 인격의 공동체 또는 미덕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미덕의 학교가 되어서 가르치는 덕과 성품은 그 교회의 지배적인 내러티브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내러티브가 한국 사회와 문화로부터 내러티브를 수용해서 동화될 때, 한국교회의 내러티브는 예수님의 내러티브에 충실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예수님의 내러티브에 충실하지 않은 교회의 도덕적 성품이 형성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성품을 충실하게 본받는 성품의 훈련장이 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자신이 부자가 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고통을 받고 목숨을 바쳐 많은 이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닌 물질적 축복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야기로 성품을 형성했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점들을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밖에 없는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이다.
V. 결론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 내러티브가 한국사회에 여러 도덕적 부작용을 낳은 것처럼, 조용기 목사의 교회 성장 내러티브는 한국 교회의 도덕적 성품을 왜곡되게 형성했다. 교회 성장 내러티브는 물질적 축복과 양적 성장을 강조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다른 어떤 목표보다 물질적 축복과 교회 성장을 우선시하게 만들었고 교회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도덕적 가치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을 왜곡시킨, 현재의 지배적 내러티브의 실체를 인정하고, 한국교회의 내러티브를 성경적 내러티브에 충실하게 변화시켜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강성호의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의 형성”에 대한 논평/한상화 (ACTS, 조직신학)
본 논문은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하락을 심각하게 문제 삼아 그 문제의 중심에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보고 성경적 내러티브에 충실한 공동체적 도덕적 품성을 형성하는 것을 그 해결 방안으로 제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본 논문의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한국 교회의 문제와 몇 몇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비판함으로써 한국 교회 전체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자화상에 심각한 손상을 끼치는 일부 미디어의 잘못된 네거티브 어법이 아닌, 교회가 그 본질에 충실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품성을 함양하는 것을 지향하며 제시하고 있기에 의미가 있는 논문이라고 사료됩니다.
더욱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성품윤리와 리처드 니버의 문화 유형론을 적용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현 한국교회의 도덕적 성품의 왜곡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한 점도 그렇고 그 해결 방향으로 성경적 내러티브에 충실한 도덕적 품성의 형성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야말로 본 논문의 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문의 요약은 생략하고 몇 가지 질문과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1. 현 포럼의 성격 상 이 논문이 박사학위 논문의 요약인지 궁금합니다. 논문의 각주도 별로 없고 논문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는데 단편의 연구 논문으로 기획되지 않고 이미 연구된 학위 논문에 대한 요약인지요? 이 글이 어떤 성격의 글인지 불분명하여 질문 드려봅니다.
2. 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점 분석의 이론적 도구로서 하우어워스의 성품윤리와 리처드 니버의 문화 유형론을 선택하게 된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널리 알려진 접근들 가운데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적용하신 것인지요? 왜 하필 이 둘인지? 혹시 이 둘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지? 예를 들면 니버의 분석은 보다 대외적으로 교회와 사회의 관계성에 대한 부분이라면, 하우어워스의 분석은 보다 대내적으로 교회의 공동체적 윤리 특별히 성품 문제에 관계되는 것이라던지? 논문으로 발전시키려면 이 부분에 대한 근거제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3. 논문의 III장 2번의 제목이 한국 교회의 도덕적 성품의 형성이고, IV장 5번도 같은 제목으로 표현되어 있고, 무엇보다 논문 전체 제목이 그러한데, 논문 전체 제목이 지향하는 바, 즉 본 논문의 논지가 진술되는 부분이 IV장 5번이고 그것이 결론부에 반복되어 맺어지는 것이라고 판단되기에, III장 2번의 제목은 달리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재 그 내용도 한국교회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교회의 도덕적 품성 형성에 대하여 진술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4. 니버의 문화 유형론을 한국 교회에 적용하여 분석하면서 한국 교회의 윤리적 문제가 세상에 동화되어 나타는 문제이기 때문에 “문화 속에 그리스도”의 유형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논점은 혼란을 일으킵니다. 실제적으로 니버의 “문화 속에 그리스도” 유형은 기독교 분파 중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진보진영의 유형으로 전반적으로 사회의 흐름과 발맞춰 함께 변화해 가는 유형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의 경우 오히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적극 표방하고 기독교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부류라고 보아야지 대부분의 보수 진영의 기독교 분파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회 가운데 보수진영의 교회는 “문화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를 표방하는 개혁주의를 지향하지만 과거 대다수 교회의 담론은 근본주의 형태인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현재도 많이 그러하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가르치고 실천하고 지향하는 바와 사회의 행동양식은 서로 대립되어서 실제 성도들의 삶에 있어 그 둘 사이의 괴리로 말미암아 신앙과 실천의 이원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그래도 전반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강조하며 통전적인 하나님 나라 삶의 양식을 강조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세상과 교회 사이의 이중적 삶의 방식 문제는 본질적인 교회의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여하튼 저자가 니버의 분석을 가져다 쓰는 방식이 그 다음에 나오는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내러티브와 한국 교회성장 내러티브가 서로 닮았다는 본인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적인 끼워 맞춤 같다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5. 역사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볼 때 교회와 사회의 내러티브 동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신앙적 혹은 윤리적 잣대만을 적용하여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그 이상의 보다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저자의 방향성과 의도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70년대의 가난과 굶주림의 문제가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조용기 목사님의 간증들을 들어보면 그렇게 쉽사리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의 눈으로 과거를 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윤리학자들은 조금 더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과거의 사건들을 반성하며 평가할 때, 과오와 부도덕한 행위들이 모든 평가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의 시대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보다 엄밀하게 보다 객관적으로 보다 다각적으로 보다 심도 있게 기술하고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회 성장 내러티브의 폐해도 많이 있지만 교회의 폭발적 성장이라고 말했던 그 시대에 있었던 신앙적 열의와 헌신의 열매로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6. 마지막으로 교회는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과 성품을 충실하게 본받는 성품의 훈련장이 될 수 있을까? 예수의 내러티브를 공유하는 공동체 속에서 예수의 도덕적 품성을 함양하는 것의 실질적 내용은 무엇인가? 자신만을 위해 살던 죄인이 이웃을 위한 존재로 변화되는 구원 사건은 실질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실질적인 답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나입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야 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인, “십자가 복음을 믿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변화를 받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믿음은 요즘에 매우 흔하게 개인주의적인 구원 개념으로 치부되며 평가절하 되고 대신에 공동체적 내러티브적 윤리적 버전의 복음을 말하는데 우리는 신학적 표현들과 내용들 가운데 실질적 영적인 핵심이 있는지 없는지 분별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 논문을 쓰신 저자께서도 이 복음의 핵심의 기초 위에서 오늘날 교회가 참으로 결여하고 있는 도덕적 품성 형성과 함양을 말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사한 글 잘 읽었고 좋은 논문으로 잘 발전되기를 소망합니다.
강성호 박사(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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