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올해 1월 취임 후 첫 100일 동안 64개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감염병 대유행을 극복하기 위한 행정명령이 15개로 가장 많았다. 두 번째는 이민(immigration)이었다. 이 기간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이민 관련 행정명령은 12개였다. 대부분은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반(反)이민 정책을 뒤집는 내용이었지만, 그중 2월 4일 서명한 행정명령에는 이른바 ‘기후난민’의 보호와 정착을 위해 기후변화에 따른 강제 이주의 영향을 연구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라니냐가 만든 캘리포니아 주 최악의 산불
1951년 제정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국제 협약’에 따르면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로 인해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 정의된다. 현재 기후난민은 이런 난민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함께 기후난민 문제는 점차 심화되고 있다. 정치적·종교적 갈등과 분쟁뿐 아니라 기후위기 또한 우리 눈앞에 다가온 문제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난민의 관점에서 보면 기후난민은 기후변화로 거주지가 위협을 받아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를 말한다. 가뭄, 홍수, 태풍 등 이상 기후로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거나 가까운 미래에 거주지가 사라질 위험이 커 원치 않는 이주를 택한 사람도 기후난민에 해당한다.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이주했다는 뜻에서 ‘환경 이주자(environmental migrant)’라는 더 포괄적인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미국 정부가 기후난민에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캘리포니아 주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는 매년 9~10월이면 연례행사처럼 산불에 시달려왔다. 3월쯤 시작된 건기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덥고 건조한 여름을 지나면서 절정에 달해 9~10월이 되면 숲은 타기에 딱 좋은 조건이 갖춰진다. 자연발화에 의한 산불도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늘 발생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2010년대 후반부터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산불의 규모와 피해가 갈수록 커졌다는 점이다. 2018년 11월 캘리포니아 주 산불은 3주간 이어졌고, 서울의 3배가 넘는 면적이 불타 없어졌다. 1,600여 채의 집이 전소했고, 85명이 사망했다. 당시 할리우드 스타 배우 러셀 크로우의 별장도 불타 잿더미가 된 사실이 그의 SNS를 통해 알려졌다. 집을 잃은 이들은 기후난민이 됐다.
2018년 산불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불일 줄 알았지만, 더 최악의 산불이 미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9월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작된 산불은 10월까지도 꺼지지 않았고, 불씨는 오리건 주와 워싱턴 주까지 연쇄적으로 퍼져 1만 6,187 km2를 태웠다. 이는 미국 역사상 산불에 의한 피해로는 최대 규모였다. 산불로 터전을 잃은 기후난민만 수십만 명이 발생했다.
산불 피해가 커진 원인으로는 캘리포니아 주의 극심한 가뭄이 지목됐고, 이런 가뭄이 일어난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기후변화가 꼽혔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라니냐가 자주 발생했고, 라니냐는 열대 태평양 지역의 해수면 온도를 낮춰 해수 증발량을 줄이면서 결과적으로 강수량을 감소시켜 캘리포니아 주의 가뭄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구온난화로 따뜻해진 겨울은 로키산맥의 적설량을 줄였고, 로키산맥의 눈을 수자원으로 이용하던 캘리포니아 주의 가뭄은 더욱 심해졌다.
일각에서는 기후변화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내 기후난민 논의를 지연시켜 피해를 더 키웠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 산불 피해 현장을 방문해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대형 산불의 원인을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대형 산불이 단순히 산림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점점 더워지고 건조해지는 기후변화가 주요 원인이라고 강조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변화 때문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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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사이클론 ‘이다이’로 큰 피해를 입은 모잠비크. 유엔난민기구(UNHCR)는 기후변화에 취약한 아프리카에서는 태풍,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닥칠 때마다 기후난민이 더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출처 : UNH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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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기후난민 2,150만 명 발생
바이든 행정부가 기후난민 문제에 행정명령까지 꺼내든 건 서부 산불 때문만은 아니다. 매년 미국 국경을 넘기 위해 남쪽 국경에 몰려드는 난민이 급증하고 있고, 그 배경에도 기후변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올해 3월 남쪽 국경을 넘어 미국 입국을 시도한 사람은 17만 2,000여 명으로 1년 전보다 34% 늘었다.
지난해 11월 허리케인 ‘에타’와 ‘이오타’가 잇따라 중앙아메리카를 강타하면서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에서 폭우, 홍수, 산사태, 농작물 피해가 대거 발생했고, 약 73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허리케인은 삶의 터전을 파괴했고, 이에 따라 식량 불안정과 폭력, 빈곤 등 악순환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기후난민을 자처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국경을 넘고 있다.
기후난민이 특정 국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맞닥뜨린 공통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은 최근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드러난다. 올해 4월 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유엔난민기구(UNHCR)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연평균 2,150만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중동의 아프가니스탄부터 중앙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에 걸쳐 있다.
지난해 호주 싱크탱크인 경제평화연구소(IEP)는 기후위기와 극단적 기상 이상 현상이 계속 이어지면, 2050년에는 전 세계에서 12억 명 이상이 기후난민이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별로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와 남아시아, 중동이 가장 많은 위협에 노출돼 있다.
가난한 남태평양 도서 국가인 몰디브, 투발루, 키리바시 등에서는 기후난민이 이미 당면한 문제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이들 국가는 수몰 위기에 직면해 있다. 몰디브는 이미 전 국토의 90%에서 조수 범람에 의한 홍수 피해가 났고, 97%에서 해안 침식이 일어날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 투발루는 2013년 일찍이 국가 위기를 선포하고, 주변국으로 이민 가는 기후난민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과 지하수 개발 등에 따른 지반침하 문제가 겹쳐 인구 1,000만 명인 수도 자카르타 이전을 진행 중이다. 자카르타는 해마다 7.5 cm씩 지반이 내려앉아 해안 제방을 쌓아도 바닷물이 제방을 넘어 들어오는 일이 반복되고, 매년 홍수 피해로 기후난민이 발생해 이를 복구하는 데만 10억 달러(약 1조 1,130억 원)가 넘게 들자 아예 수도를 통째로 이전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인도네시아는 33개 행정구역 중 24개 지역이 해수면 상승 위협에 시달리고 있어 언제라도 대규모 기후난민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도 기상 이변에 따른 자연재해 발생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1990~2019년 가뭄, 홍수, 태풍, 산불, 극단적 폭염·한파 등 기상재해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나라는 미국으로 조사됐다. 결국 지구상에서 기후난민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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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위성에 잡힌 1997년 몰디브 전경. 해수면 상승으로 섬의 많은 부분이 물에 잠겼다. (우)2020년 위성사진에서는 인공섬 ‘훌후말레’의 모습이 선명하게 잡혔다 (출처 : NASA) |
법적 난민 지위 부여 위한 논의도
기후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이제 막 시작됐다. 자구책으로 인공섬을 건설해 인구를 이동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몰디브는 나라 전체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해발 2 m 높이의 인공섬 ‘훌후말레’를 지어 도시를 조성했다. 현재 훌후말레 인공섬으로 이주한 국민은 5만 명이 넘는다. 2020년대 중반에는 몰디브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인공섬으로 이주할 예정이다.
덴마크도 수도 코펜하겐 앞바다에 축구장 400개 넓이의 거대한 인공섬 ‘리네트홀름’을 개발하기로 했다. 해수면 상승에 맞서 코펜하겐 시내를 보호하기 위해 항만 바깥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파제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섬 건설이 기후난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덴마크 환경 단체는 리네트홀름 건설이 해양 생태계와 수질에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6월 18일자에 기후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며 인공섬과 같은 물에 뜨는 부유식 정착지를 짓거나, 폭풍을 막을 수 있는 벽을 쌓거나, 해수면보다 한참 높은 공중 정원식 거주공간을 만드는 등의 방법을 거론했지만, 동시에 과학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 낙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사이언스」는 기후난민 문제에 접근할 때는 사회 정의, 환경, 건강, 문화유산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로드맵을 작성해야 하며, 기후변화로 강제 이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원주민의 경우 이주 논의에 원주민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기후난민을 난민의 법적 테두리에 포함하는 논의도 시작되고 있다. 2015년 키리바시의 한 남성은 해수면 상승으로 침수 위기에 처하자 뉴질랜드에 난민 보호를 신청했지만, 난민의 자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이에 대해 지난해 1월 유엔인권위원회는 기후변화로 탈출한 사람은 망명을 주장할 자격이 있다며 처음으로 기후난민을 난민의 지위로 인정했다. 유엔인권위원회의 결정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기후난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로 평가받았다.
올해 1월 프랑스 법원도 자국의 대기오염이 너무 심해 귀국할 수 없다는 방글라데시 남성에 대한 추방 명령을 철회하라는 결정을 내리는 등 최근 법적으로 기후난민을 인정하는 사례가 차츰 늘고 있다. 기후난민 문제를 연구 중인 에리카 바워 미국 스탠퍼드대 우즈환경연구소 연구원은 “전 세계에서 날씨 관련 재난으로 지난해에만 3,000만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했다”며 “국제법상 난민의 정의는 매우 좁고, 현재 기후난민은 국제법이나 국내법으로 지위를 인정받기 어려운 만큼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난민에 대한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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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6월 18일자에 기후난민 문제를 다루며 표지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에서 중앙을 가로지르는 장벽은 방파제로 바닷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방파제 왼쪽으로 버려진 이슬람 사원(모스크)이 인도네시아의 기후변화의 현실을 상징하는 듯하다. (출처 :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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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과학과기술」 8월호에 게재된 [Focus : 인공섬이 기후난민을 구할 수 있을까]를 옮긴 것입니다.(월간 「과학과기술」 구독 문의 : 02-3420-1243 / tkyou@kof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