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예술인, 서예가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4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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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남(菁南) 오재봉(吳齋峯 1908∼1991) : 오제봉은 1908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일찍이 인생무상을 느껴 출가하여 승문에 입문한 이래 서예에 정진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415번지에 있는 의곡사의 주지로서 시인·묵객·화가·서예인 등 예술가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등, 향토예술인 양성과 후원에 남다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성파 선생에게 추사체를 배웠다. 오제봉은 향토문화위원으로서 진주지역의 서예문화를 중흥하는 데 앞장섰으며, 만년에는 부산으로 이거하여 서예실을 운영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946년 서울에서 조선미술동맹 창립과 더불어 조선미술동맹 진주지부도 설립되었다.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반발한 오제봉은 조선미술동맹 진주지부를 탈퇴하고 박생광(朴生光) 등과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216번지 청동다방을 사무실로 하는 문화건설대를 조직하였다. 특히 오제봉은 진주지역 문인과 묵객 등을 의곡사로 초청하여 무료 숙식을 제공하는 등 향토예술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49년 11월에는 설창수·박생광·이경순 등과 함께 전국적인 규모인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오제봉은 정대기·정현복·정명수·강주식·김창국 등과 함께 서예부문 행사를 주관하였다. 1963년에는 허백련·김은호·이상범·김기창·임호·배길기 등과 유명작가 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예향도시 진주 건설에 앞장섰다. 이후에도 개인전과 초대전을 개최하는 등 작품 활동과 전시회를 통한 시민의 정서함양에 열성적으로 노력하였다.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 개최나 시인과 묵객 등 예술인에 대한 오제봉의 지원은 진주를 예향의 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제봉은 설창수·박생광·조영제·정현복 등과 이러한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진주를 예술문화의 도시로 건설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청남선생은 원래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말년 부산으로 이거하여 서예중흥에 앞장서신 영남의 대표적 서예가이다.
3) 추사체 전수 경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1856)의 추사체(秋史體)는 "흉중(胸中)에 고아청고(高雅淸高)함이 없으면 예법(隷法)을 쓸 수 없고 흉중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흉중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아니하면 나타낼 수 없다"하여 예서를 서(書)의 조가(祖家)로 보았다. 이처럼 모든 대가들의 장점과 다양한 서체를 집성하여 스스로 독자의 서법을 이룬 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박규수(朴珪壽)는 추사체의 독특함에 대해 "신기(神氣)가 내왕하여 마치 바다와 같고 조수처럼 보인다"라고 언급했다.
성파와 추사의 필적이 웬만한 감식안(鑑識眼)으로는 구별조차 못할 정도로 비슷하다는 점과 20 여년 전에 작고한 성파의 제자 청남 오재봉 선생이 9년 동안 성파공을 모실 때에 공은 항상 추사서첩 위에, 유리를 덮어 놓고 흠모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남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성파는 어떤 경로이든 ‘추사서첩’을 얻어서 이를 바탕으로 해서 추사체를 공부하였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인다. 성파선생의 필적이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이루지 못한 점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서예역사상 신필(神筆)이라고까지 존경하던 신라시대 김생과 쌍벽을 이루는 추사 김정희 글씨를 공부한, 제 일인자라는 점에서 국내 서단(書檀)에서 언제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은초와 도연, 청남 오재봉은 거제출신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1869∼1944) 선생의 문하생이었다. 성파는 평생 추사서첩을 소매 자락에 넣고 다니면서 스스로 추사체를 익힌 서예가이다. 제자들이 한결같이 추사서첩은 그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전하니 성파의 아버지 하지호가 어떤 경로인지는 몰라도 서첩을 입수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 <거제시 진양 하씨 하광열 세무사가 확인한 증언>
거제면 사무소에 보관된 제적부(除籍簿)에 성파선생의 출생연도는 조선개국 478년 2월1일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개국 원년이 1392년이니 이때부터 한산하면 고종 6년 1869년이 된다. 또한 성파 하동주 유묵집에 수록된 수많은 병풍, 비문, 주련, 족자 등을 살펴보면 대부분 그 글씨를 쓴 해의 나이 다음에 바로 성파 하동주라고 쓰고 낙관(落款)을 하였는데 다행히 쓴 해의 간지(干支)와 나이를 함께 표시한 2점의 작품에는 “임오 74작” “경진72성파”라고 해놓아 간지를 계산하면 경진년 1940년 72세 임오년 1942년에 74세가 되려면 1869년 기사년 생이라야 한다. 또 성파선생의 아들 정략의 요절(夭折)로 선생이 손수 키우고 공부시킨 손자 하형모씨가 1983년 세운 할아버지 상파의 묘지석에도 1969년 생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출생년도는 1869년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 그렇다면 추사서첩의 입수 경로를 추정해 보도록 하자. 그 당시 당대 인물들, 김정희 정혼성 하지호 하동주의 연보를 고려한다면, 서로 간에 시대적(연령 직위 거처 등) 상황이 맞지 않아 어떠한 연결고리도 찾기 어렵다. 단지 진양 하씨(晉陽 河氏) 세보에 기록된 하지호(河志灝 1827~1886)의 관직이 장사랑(將仕郞 종9품 문관)인 점을 고려해, 지호공의 나이 36세 때인, 1862년 추사의 수제자이자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1810~1888)에게서 입수 받았을 확률이 가장 크다. 이 당시 한산도 제승당과 통영의 세병관에 현판을 남겼고, 경남 고성군 옥천사의 <자방루(滋芳樓)>와 자방루 마루에 걸려있는 <연화옥천(蓮華玉泉)>이라는 편액도 썼다. ①이때 선천적인 서예의 기질을 타고났고 글씨에 조예가 깊었던 문관9품 하지호가, 상관인 통제사 신관호를 만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② 또 한편으론 추사 김정희 선생이 거제학자 동록 정혼성 선생의 문집을 읽고 감동하여 쓴, ‘정동록 혼성문집 뒷면에 쓰다[題鄭東麓渾性文集後]’, ”자고의 시격에다 채진의 놀음이라 열 자의 황진 속엔 두각(頭角)을 내지 않아 후파(侯芭)를 힘입어서 일판향(一瓣香)을 전수하니 옛날의 기주에는 현정이 적적하이.[鷓鴣詩格采眞遊 十尺黃塵不出頭 賴有侯芭傳一瓣 玄亭寂寂古岐州]“ 7언절구가 전하는 바, 이때 거제도로 추사서첩을 보내주었고 이를 제자 하지호에게, 다시 성파 하동주 선생에게 전해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③ 그리고 마지막으로 1881년 거제도로 유배 왔던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1814~1888)에게서 추사서첩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2002년 거제시지에서 언급하길, “일찍이 추사 김정희의 휘하에서 십가장(百家長) 또는 백가장(百家長) 벼슬을 하면서 글씨를 잘 써서 추사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 때 추사의 서첩을 입수해 가져와서 아들 하동주에게 추사체를 전수케 하였고 이후 추사체를 이어받게 되었다. 해서체(楷書)에 뛰어났고 선천적인 필체는 성파보다 더 나았다고 한다.”
거제시지 내용은 추사 선생께서 병조나 형조참판을 지낼 때, 또는 제주 유배 시절에 지호공이 “군관으로서 추사를 모신 적이 있었다”는 가설(假說)에서 기초한다. 추사가 형조 병조 등 참판을 지낸 시기는 1836년에서 1839년으로, 父하지호가 9살에서 12살 때에 해당되며, 제주 유배시절인 1840년에서 1848년은 13세와 21살 때로서, 전자의 경우 연령상, 후자의 경우는 지리적으로나 연령상으로 연결고리를 찾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바, 이는 구전(口傳)에 따라 기록한 글로 보인다. 십가장(百家長)∙백가장(百家長)이란 명칭도 이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일제강점기 만주 독립운동 때 널리 사용한 단어이다.
어찌되었건 현재까지 추사서첩의 입수경로는 어떠한 문헌과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아 뚜렷이 밝히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나, 추사의 수제자 위당 신관호를 통해 하지호가 입수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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