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해맞이 기행을 경주와 울산, 그리고 창녕으로 갑니다.
2023년 12월 30일(토요일)에서 2024년 1월 1(월요일)까지 경주 남산과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고, 나라 안의 명승이자 천연기념물인 읍천리 주상절리에서 보고, 울산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를 보고 함양 울산간 고속도로를 타고서 창녕의 명승 관룡사 용선대를 보고 창녕시내의 문화유산을 답사할 것입니다.
소나무가 아름다운 천년의 고도 경주에 나라 안에서 기장 아름다운 종주길인 경주 남산 종주길이 있습니다. 경애왕릉에서 금오산 정상을 거쳐 용장사지와 신선암과 칠불암을 지나 남산사지까지 이르는 경주 남산 길을 걷고,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 중 한 곳인 경주불국사와 석굴암을 갑니다.
일요일엔 읍천리 주상절리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명승으로 지정된 울산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 일대를 돌아보고, 창녕으로 가서 용선대와 창녕시내를 답사하고 귀로에 오를 예정입니다.
“경주의 진산은 남산인데,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하며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 남산을 비롯한 경주에 원효元曉스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요석궁瑤石宮이다.
신라의 승려 원효가 일찍이 말하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터인가, 하늘 고일 기둥을 내가 깎아 주겠네.”
라고 하였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기를 , “이는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어진 이가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로움은 없다.”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왕실의 과부가 있었다. 임금이 요석궁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하였더니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유교楡橋를 지나다가 요석궁 관리와 마주쳤다. 거짓으로 물속에 빠지니, 그 관리가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대로 묵도록 했다. 과연 과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다. 그 요석궁의 터는 향교 남쪽에 있고, 유교는 궁터의 남쪽에 있다.
<여지도서>에 실린 글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중에서
불국사와 토함산의 석굴암을 비롯하여 반월성․포석정․괘릉(掛陵) 등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신라는 대소 가야국을 다 차지한 뒤 당나라와 연합작전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 잠시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쳤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신분층이 진골(眞骨)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6두품 이하에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방사회에서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실력자들은 자신의 처지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만큼 국가에 더 이상 애착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중앙의 귀족들은 지방에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화려한 생활을 누렸고 급기야는 왕위쟁탈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통일 이후의 안정기는 150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반란이 빈발하면서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갔다. 지방에서는 현지의 유력자들이 성장하여 권력에 대한 욕구를 키우고 있었으나 골품제(骨品制)가 유지되는 한 이들의 욕구는 충족될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진흥왕 때의 설계두라는 사람이 “신라에서는 사람을 쓸 때 골품을 따지므로 정해진 신분이 아니면 비록 큰 공을 세워도 한계가 있다”며 신라를 등지고 당나라로 떠나 버렸을까.
그 당시 이런 저런 이유로 신라를 등진 사람들이 많은데, 남산 자락의 폐사지인 남산사南山寺에 남겨진 이야기 한편이 흥미롭다.
대세大世라는 신라 사람은 세속을 초월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평왕 9년인 587년에 담수淡水라는 승려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신라의 산골짜기 사이에서 한평생을 마친다면 연못 속의 물고기나 새장 안의 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다녀서 오吳나라. 월越나라와 같은 먼 나라에서 가서 이름난 스승을 따라 이름난 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려 합니다. 만약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신선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다면, 광활한 하늘 너머로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니, 이는 천하의 기이한 유람으로 웅장한 구경거리일 것입니다. 그대는 나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담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세가 그 자리에서 물러 나오다가 구칠仇柒이라는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는 굳세고 절개가 빼어났다. 드디어 그와 함께 남산사에서 노닐었는데, 별안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낙엽이 뜰에 괸 물에 떴다. 그것을 본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노닐러 가고 싶은 뜻이 있습니다. 각각 나뭇잎 한 개 씩을 취하여 배로 삼아서, 그것이 떠내려가는 차례를 가지고 우리가 떠나가는 차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 잠시 뒤에 그들은 나뭇잎에 올랐고, 대세의 나뭇잎이 앞서 떠나기 시작하자 대세가 웃으며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곳으로 갑니다.” 그 말을 들은 구칠이 성을 발끈 내며 말했다.“ 나도 남자인데, 어찌 나만 남아 있으란 말입니까.” 마침내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어 남해 바다에서 배를 타고 떠나갔다. 그 뒤로는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신라 8대 종찰의 하나였던 관룡사
불우했던 한 시대의 희생양이며 혁명가였던 신돈의 자취어린 옥천사터를 지나 관룡사로 가는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돌장승 한 쌍이 길손을 맞는다. 커다란 왕방울 눈에 주먹코가 인상적인 관룡사 돌장승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대나무 숲 뒤편의 관룡사에 이른다.
관룡산(739m) 중턱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26대 진평왕 5년에 증법국사가 창건하였고 원효대사가 천 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장을 이룩하여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오색채운이 영롱한 가운데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놀라서 원효대사가 하늘을 쳐다보니 화왕산 마루의 월영삼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관룡사라 지었고, 절의 뒷산 이름을 구룡산 또는 관룡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절은 그 후 경덕왕 7년에 추담선사가 중건하였고 몇 번에 걸쳐서 중수를 거듭하다가 1704년 가을의 대 홍수 때 약사전만 남기고 금당, 부도 등이 유실되었으며 이 절의 스님 20여명이 익사하는 큰 재난을 당하였다.
그 뒤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는데, (보룰:212호)인 관룡사의 대웅전은 앞면 3칸인 다포식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보물 146호인 약사전은 규모는 작지만 그 모습이 고풍스럽고 균형미가 빼어난 건물로서 맛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집이다. 언뜻보면 부석사 조사당을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사방1칸의 맞배지붕의 와가에 삼중대들보가 특이한 우리나라 조선 초기의 건물로 송광사의 국사당과 함께 건축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표본으로 꼽힌다. 이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은 집체와 지붕의 구성 비례를 볼 수 있다. 기둥사이의 간격에 비하여 지붕의 폭이 두배 가까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커서 소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매우 균형 잡힌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약사전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 519호)이 안치되어 있고 문밖에는 작고 아담한 석탑이 서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관룡사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용선대의 석가여래좌상에서 받은 강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요사채의 담 길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20여분쯤 오르면 커다람 암벽위에 부처님 한분이 날렵하게 앉아있다. 대좌의 높이가 1.17㎡에 불상의 높이가 1.81㎡인 이 석불좌상은 높은 팔각연화대좌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결과부좌하고 앉아있는데 어느 때 사라졌는지 광배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석불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이고 직선에 가까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띤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우리 일행은 옛 사람들의 지혜와 부처에 대한 경이를 안고 배바위에 올랐다.
반야 용선을 타고 극락 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눈보라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들린다. 저 바람소리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들의 모든 흐르는 시냇물 소리들을 불러 모아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미세한 떨림 들을 한데모아 이곳으로 불어오는지도 모른다. 또한 저 바람 소리는 세상의 온갖 고난 세상의 온갖 슬픔들을 다 거두어 요원의 불길로 타오를 날을 기다리는 화왕산의 억새밭을 향해 달려오는지도 모른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앉아있는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보물295호)아래 털썩 주저앉아 거대한 분화구처럼 펼쳐진 세상을 바라본다. 관룡산을 병풍삼아 눈 쌓인 작은 산들이 물결치듯 펼쳐나가고 영산의 진산 영취산을 돌아 계성, 옥천의 자그마한 마을들이 점점 히 나타난다. 누군가의 기원이고 간절한 소망인지도 모르는 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꺼진 촛불아래 눈보라 맞으며 젖어 있고, 여기저기 던져진 동전들이 을씨년스럽다.
어쩌면 우리나라 부처님 중에 이보다 더 외롭게 혹은 드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없을 것이고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역시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2023년의 마무리를 나라 안의 최고의 답사 처 경주남산을 오르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오르고, 나라 안의 최고의 명소인 읍천리 주상절리에서 2024년의 일출을 보고,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그리고 창녕의 명소인 관룡사의 용선대 일대를 보고자 하는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1. 일시: 2024년 12월 30일(토요일) 2024년 1월 1일까지(월요일)
2. 출발 시간 및 장소: 서울 오후 5시, 양재역 12번 출구 서초구청 앞
전주 오후 5시 , 전주 고속버스 터미널,
전주는 출발전 장소 시간 확인하십시요.
3. 참가비: 20만원
4. 어디로 가나요: 경주남산 종주, 경애왕릉에서 용장사지, 칠불, 남산사지까지, 불국사, 석굴암, 경주 읍천리 주상절리에서 해맞이, 우산 천전리 각석,반구대 암각화, 창녕 관룡사 용선대, 창녕의 문화유산,
5 안내 도반. 신정일(문화사학자, 우리 땅 걷기 대표, 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신 택리지( 전라도의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코로나 접종을 마친 사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754801-01-479097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8. 참가비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 5일전 인지: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
(2) 행사일 4일전부터 3일전까지: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3) 행사일 1일전부터 당일까지(미참가 포함): 환불액 없음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 문의전화: 010-9144-2564
10. 주의사항: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첫댓글 이경찬 양재탑승 입금완료
기윤희, 황대호 참석합니다. 양재출발
참가합니다./정유순(남)/양재/감사합니다.
참가합니다/박선자, 임영남/여/전주.
참가(추가)합니다/국강옥, 이흥순/여/전주.
참가/윤석호/남/양재
추가신청 이승정/여/양재
추가참석/박영기/남/양재탑승/입완
신청합니다 / 전주출발
참석합니다 양재
저희 부부 김덕식 형현애 신청하고 입금 400,000 했고요 서울 양재 탑승입니다.
카페 가입후 처음 신청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해맞이 기행 서울 양재에서 오후 5시에 출발해도 될까요? 총무 폰 010-9144-2564 연락 바랍니다.
기행 출발 전 꼭 최종 일정표를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임제식1 양재, 임제식2 정안
감사합니다
참석합니다 / 매버릭/전주출발
오산 졸음쉼터 (하행선)
신갈까지 옮겨갈 시간이 안됩니다.
허남숙.윤유순.윤만섭.박철성/참가합니다/전주
참가합니다 / 조옥희 /전주/ 여 /호남문에서 탑니다
참가/미지와 남편/출발지는 추후에 ~/수고하십시요
김순태/양재출발/입금완료
전주/최숙희/호남제일문
참가합니다./김화심.박연님/안성출발
이연순 참가합니다 전주
정숙녀/양재/입금
참가 합니다/장해숙 /전주출발
참가합니다/한석희/양재
참가합니다/최춘희, 김승주/신갈 탑승/입금완료(입금자: 김승주)
참가합니다/ 으아리2/남/전주
참가합니다/오경화/양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