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룩스 칼버트 로빈슨 주니어(Brooks Calbert Robinson Jr., 1937년 5월 18일 출생)는
미국의 전직 프로 야구 선수다.
볼티모어 오리올스(1955~1977)에서 23년 동안 메이저리그 경력을 모두 소화했는데,
이 기록은 여전히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팀에서 보낸 가장 긴 생애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타고난 왼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방망이를 치고 오른손을 던졌다.
인간 진공청소기 또는 미스터 후버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형 3루수로 평가받는다.
통산 16회 연속 골드글러브상을 수상,투수 짐 카트와 공동 2위, 어느 포지션에서나 역대 2위.
로빈슨은 1983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출되었다
[어린 시절]
로빈슨은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브룩스 칼버트와 에델 메이(네에 덴커) 로빈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리틀록의 콜로니얼 베이커리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리틀록 소방서의 선장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시어스 로벅 앤 컴퍼니에서 일했고, 그 후 카피톨 주의 통제실에서 일했다.
그의 아버지는 준프로 팀에서 2루수로 뛰었다.영 브룩스 로빈슨 주니어는 자전거로 아칸소 가제트를 배달하고
스코어보드를 운영하며 라마르 포터 필드에서 청량음료를 판매했다.
1955년 5월 27일 리틀록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파예트빌의 아칸소 라조백스 야구 프로그램에 스카우트되었고,
1955년 남미에서, 1957년 쿠바에서 뛰었다. 1956-1957년 비수기에, 그리고 다시 1958년에 리틀록 대학에서
두 번의 겨울 학기를 다녔고,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는 1959년[15년] 미군에 징집되기 직전 아칸소 주 방위군에 입대했다.
[야구 경력]
로빈슨은 1955년 오리올스로부터 아마추어 자유계약선수(FA)로 계약을 맺었다.
1955년 9월 17일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라인업에서 6번 타자로 데뷔했다.
3-1로 앞선 8회 1사 1루에서 첫 안타로 척 스터브스와의 경기에서 2타수 4안타를 몰아치며 4타수 2안타에 그쳤다.
1964년 로빈슨은 .318의 타율과 28개의 홈런, 118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선두를 달리며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20명의 1위 투표 중 18표를 받았고, 미키 맨틀이 2위를 했다.1966년, 그는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었고,
1966년 LA 다저스를 상대로 한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팀 동료인 프랭크 로빈슨에게 2위를 했다.
1970년 포스트시즌에서 로빈슨은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1970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타율 0.583을 기록했다.신시내티 레즈와의 1970년 월드시리즈에서 로빈슨은 타율 0.429에 2홈런을 기록했지만,
3루에서 두드러진 수비력[23]으로 레즈비언의 명백한 베이스를 빼앗은 인상적인 플레이를 여러 번 펼쳤다.
그의 활약으로 SPORT가 수여하는 월드시리즈 MVP는 물론, 히콕 벨트가 올해의 최고 프로 선수로 선정되었다.
1970년 월드시리즈 이후 신시내티 레즈 감독 스파키 앤더슨은 잠결에 브룩스를 보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이 종이 접시를 떨어뜨리면, 그는 그것을 한 홉으로 집어서 처음에는 나를 내쫓을 것이다.
로빈슨 감독은 선수 생활에서 15년(1960~74년) 연속 올스타팀에 선발돼 4차례 월드시리즈에 출전했다.
2848안타, 268홈런, 1357득점으로 통산 타율 0.267을 기록했다.
로빈슨 은 아메리칸리그에서 11번 사상 최다인 1할을 기록했고,
은퇴 당시 그의 개인 통산 타율 971은 3루수로는 역대 최고였다.3루에서 뛰었던 2870경기
합계, 2697경기, 6205경기, 8902경기, 618경기 더블플레이는 은퇴 당시 3루수 기록이었다.
로빈슨의 한 팀 23시즌은 칼 야스트르젬스키에 의해 동점이 된 이후 새로운 메이저리그 기록을 세웠다.
야스트르젬스키(3308), 행크 아론(3076)과 스탠 뮤지얼(3026)만이 한 프랜차이즈에서 더 많은 경기를 펼쳤다.
느린 바서너인 로빈슨은 메이저리그 기록인 통산 4번의 트리플 플레이를 기록했다.
그는 누군가가 나의 3중 플레이 기록을 지우는 것을 보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그는 1973년처럼 한 시즌에 두 번의 트리플 플레이를 시작한 첫 번째 선수다.
로빈슨은 1977년 8월 5일 애너하임 스타디움에서 8회초 마크 벨레인저의 핀치 안타로 마지막 타석에 섰다.
그는 키코 가르시아로 대체되기 전에 한 번의 출연으로 줄을 섰다.
로빈슨은 8일 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메이저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알봄브리의 대타로 들어갔지만 토니 머서에게 대타로 맞기만 했다.
[은퇴]
오리올스가 명예의 전당을 시작했을 때, 브룩스와 프랭크 로빈슨은 첫 번째 두 명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선수로서의 은퇴에 이어, 브룩스는 오리올스 텔레비전 방송의 컬러 해설자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82년,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는 지역 텔레비전 WMAR의 방송 뉴스 팀은 야구 시즌을 앞두고
두 달 동안 WMAR 본사에 피켓을 들었다. 로빈슨이 피켓 라인을 넘지 않으려 하자
WMAR 경영진은 협상을 재개했고 파업은 다음날 끝났다.
[명예]
1977년 그의 마지막 시즌이 끝날 때, 그의 5번 유니폼은 오리올스에 의해 은퇴되었다.
로빈슨은 1983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출되었고, 첫 번째 투표에서 예우된 16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1936년 1차 선거에서 선택된 5명의 헌장 멤버를 포함하지 않는다).
역대 최고의 오리올스 중 하나로 여겨지는 로빈슨과 그 남자는 보통 볼티모어 콜츠 축구 선수인 조니 유닛가
볼티모어 메모리얼 스타디움의 로비에서 명예로운 플레이크를 가졌다.
1991년 10월 6일 오리올스가 그곳에서 마지막 경기를 했을 때,
로빈슨과 유니타스는 초대되어 의식적인 첫 공을 던졌다.
경기 종료 후, 119명의 전직 오리올 선수들이 당대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서
그들의 예전 포지션에 섰다. 로빈슨은 가장 먼저 나온 선수로 뽑혔다.
1999년에는 스포츠뉴스 에 가장 위대한 야구선수 100인 명단 80번 에 올라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올스타전 올스타팀에 뽑혔다.
스카우트의 오랜 후원자인 로빈슨은 볼티모어 지역 위원회인 미국의 보이 스카우트 이사회에서 수년간 일했으며
은비버 상을 받았다. 2006년 12월 5일 바비브라건 청년재단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면서
현장 안팎에서 성과를 인정받았다. 2007년 5월 16일,
메릴랜드 주 피커스빌의 한 도로인 라디오 타워 드라이브가 로빈슨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브룩스 로빈슨 드라이브로 개칭되었다.
2008년 7월 2일, 로빈슨이 선발로 나선 펜실베이니아 요크 마이너 리그 팀은,
그가 올타임 롤링스 골드 글러브 팀의 멤버로 뽑힌 것을 기리는 기념식을 가졌다.이 상은 롤링스에 의해 만들어졌고,
시상식의 황금연휴를 기념하기 위해 팬들이 투표를 했다.
2011년 10월 22일, 볼티모어 시내 워싱턴 대로에
로빈슨이 1루에서 주자를 던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담은 동상이 공개되었다.
로빈슨은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으며, 그것이 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은 머리카락을 주었다 고 평했다.
이 조각상은 무게가 1,500파운드 이상 나가고, 금색 야수들의 야구 글러브를 제외하고 색깔이 짙은 회색이며,
베이브 루스의 캠든 야드 동상에서 약 300야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2012년 9월 29일, 오리올스는 야구장 20주년 기념시리즈의 일환으로 캠든 야드의 오리올 공원에서
로빈슨을 그린 실물보다 더 큰 청동 조각을 선보였다.공개는 이전에 2012년 5월 12일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2012년 1월 27일 무대에서 떨어진 후에도 브룩스가 여전히 서서히 회복되고 있기 때문에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2015년 로빈슨은 짐 파머, 프랭크 로빈슨, 칼 립켄 주니어와 함께 오리올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4명의 선수를
인정받아 오리올스 프랜차이즈 4인방으로 선정되었다.
[기타]
로빈슨은 선수들과 팬들이 경기장 밖에서 교류할 수 있도록 돕는 단체인 메이저리그 선수 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MLB의 전설 밥 분, 조지 브렛, 로빈 예이트, 러스티 스타우브, 칼 에르스킨, 알 칼린 등이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기구는 전 소유의 MLAM(Major League Alumni Marketing)과 MLAS(Marge League Alumni Services)를
통해 전직 메이저 리그 선수들을 돕는다. MLAM의 목표는 선수 풀을 구현하고,
이전 선수들의 이름과 유사성을 무단 사용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외모와 보증을 통해 이전 선수들에 대한 보상을 얻는 것이다.
로빈슨은 프로야구의 애틀랜틱 리그에서 4개 팀을 소유하고 있는 오프닝 데이 파트너 그룹의 투자자들 중 한 명이다.
이 단체는 그를 기리기 위해 펜실베니아 주 요크 퐁스뱅크 공원 입구에 있는 브룩스 로빈슨 플라자를 명명했다.
1970년대에 로빈슨은 자서전을 출판했다. 제3기지는 내 집이다.
그는 1959년 7월 캔자스시티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오솔레스 팀 비행에서
미래의 아내 콘스탄스 루이스 코니 버처 를 만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유나이티드 항공의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홀딱 반해서 아이스티를 계속 그녀에게 주문했다.
그의 동료들 중 일부는 그에게 그녀에게 가서 이야기하라고 격려했다.
세 번째 잔을 마신 후, 그는 갤리선을 타고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난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이 사람들 중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데이트를 신청하면
결혼한 남자랑 데이트하지 않는다고 말해줘 아시겠어요 나 혼자만 팀에 있어.
비행기가 보스턴에 착륙하기 전에 두 사람은 외출할 날짜를 정했었다.
[팀]
볼티모어 오리올스(1955~1977)
[커리어 하이라이트 및 시상]
18번의 올스타 (1960–1974)
2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자(1966, 1970)
AL MVP(1964)
월드시리즈 MVP(1970)
16번의 골드 글러브 상(1960–1975)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1972)
AL 타점 왕(1964)
볼티모어 5번 은퇴
볼티모어 오리올스 명예의 전당
메이저리그 올 센츄리팀
명예의 전당(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