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신 글을 읽고 많이 섭섭하시고 힘드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특히 집안의 경사로 인하여 기쁜마음으로 종친을 찾았는데 그 결과에 대한 허탈감에 대하여
카페운영자 한사람으로 우선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식이 짧아 인터넷에서 한산이가의 통례공파에 대하여 찾아 보았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혹? 참고가 되셨으면 해서 카페 자료실에 있는 것을 다시 올립니다.
한산이씨(韓山李氏)
[유래]
한산이씨는 같은 뿌리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한산이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그러나 시조라 할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 이동(易東),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시조 이윤우(李允佑)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올라 왕의 신임을 얻어 동생 이윤경과 함께 각각 한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장공계의 족보에는 두사람이 형제였다는 내용이없다.
권지공계는 여러대를 독자로 자손을 이어 왔으므로 아는 사람이 드믈고 현달한 사람도 없다.
[가문의번영]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이씨는 조선시대 상신 4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 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문성유후(門城留後)에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개국 후 141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 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중 간신들에의해 주중폭사(舟中暴死)하였다.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 또한 한산이씨 가문을 불사이군의 충절로서 빛낸 인물이었다. 그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1456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