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홍시
김양순
'오늘은 꼭 그 말을 해 볼 거다. '며칠 째 벼르고 있던 생각을 되짚어 본 대철은 현관문을 열었다. 강아지 진순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못 본체하는 대철이 섭섭한 듯 강아지가 짖어대자 경애가 주방에서 나왔다. 저녁을 먹었느냐고 묻는 경애에게 대철은 먹고 왔다며 소주나 한 잔 달라고 했다. 경애가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루라도 안마시면 큰일 나나. 소주는 없고 양주 한 병 있는데 그거 줄까?”
“그러든가.”
경애가 양주병과 잔을 가져왔다. 안주 접시에 땅콩 몇 개밖에 없는 걸 쳐다보던 대철이 말했다.
“당신 좀 앉아 봐요. 나 할 말 있는데.”
“무슨 말? 나 지금 진순이 씻겨야 하는데 이따가 이야기해.”
“그래! 강아지가 남편 말보다 더 중요하다 그거지?”
이상하리만치 상기된 목소리로 대철이 말을 질렀다. 당황한 경애가 소파에 앉으며 무슨 할 말이냐고 물었다. 조금 뜸을 들인 대철이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묻자 경애는 코웃음 치듯 대답했다.
“모처럼 일찍 들어와선 별걸 다 묻네. 그걸 몰라서 물어? 우리 애들 둘 다 결혼한 거 보면 세월 많이도 흘렀지 지겨울 만큼.”
“그렇지, 지긋지긋하지 그동안 당신 고생 많이 했는데 내가 선물 한 가지 해줄까 싶어서.”
“무슨 선물? 내 완치 선물이라면 의미는 있겠네.”
경애가 엷은 미소를 띠자 대철은 갑자기 마음이 바뀐 듯 선물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며 양주병 마개를 땄다. 뽁! 소리를 내며 코르크 마개가 열렸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경애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러면 그렇지 무슨 대단한 말 할 줄 알았더니 싱겁기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 경애 뒤를 진순이가 졸졸 따라 들어갔다.
일주일 후, 취기 가득한 얼굴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대철에게 경애가 쏘아붙였다.
“당신 오늘도 친구들과 한판 벌였지? 얼굴 빨간 거 봐. 퇴직하고 느는 건 술하고 뱃살밖에 없다니까.”
경애의 말투에 신경질이 들어있었다.
“저녁은?”
“먹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여기 좀 앉아보라고, 나 할 말 있으니까.”
“할 말 있으면 술 깨고 말해요. 내일 아침에.”
“취한 게 아니라고, 심경애 씨! 남편이 할 말 있다고 할 때 그냥 들어주면 벌금 나오냐고? 내일부터 나 안 보이면 당신 혼자 살아. 알았어?”
대철은 고함치듯 선언을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애가 소리쳤다.
“씻고는 자야지!”
대철은 못 들은 척 유튜브에서 ‘용두산 엘레지’를 찾아 크게 틀었다. 유명 여가수의 애절한 목소리가 거실까지 울려 퍼졌다.
다음날 아침, 대철은 정말로 짐을 꾸렸다. 겨울옷 외에도 얇은 옷 몇 가지를 챙기고, 지갑을 열어 주민등록증, 신용카드를 확인한 다음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반백발의 사내가 ‘어이! 문대철 지금 뭐 하자는 거냐?’ 묻는 거 같다. 대철은 ‘그래, 더 늦기 전에 내 맘대로 한 번 살아보는 거다. 더 늦기 전에’ 대철은 다짐을 하듯 옷매무새를 살폈다. 두툼한 진회색 패딩 코트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빨강 체크무늬 목도리를 둘렀다. 언젠가 딸이 사준 진한 청색 모자도 썼다. 흰머리를 가려줘서 썩 괜찮아 보였다. 검정색 마스크를 쓰고는 방 안을 한 번 둘러보다가 TV 곁에 있는 돋보기안경이 눈에 띄자 가방에 집어넣었다. 커다란 짐 가방이 두 개나 되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대철의 등 뒤로 경애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어딜 가는 거야, 아침밥도 안 먹고?”
대철은 대답하지 않고 마당에 있는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가방을 실었다. 차에 타기 전,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당분간 안 들어 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자동차 시동을 거는 대철을 넋 나간 듯 쳐다보던 경애는, 대철이 떠나자 대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거실로 들어와 씨근대는 경애 곁으로 진순이가 다가와 꼬리를 살랑거렸다. 경애는 진순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 진순이 네가 서방보다 낫다.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참 기가 막혀서.”
경애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 둘도 없을 만치 성실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 퇴직 후 적당한 일자리를 못 찾아 고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될 처지라지만 그래도 날마다 빈둥거리는 게 달갑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디 일자리 좀 알아보라고 잔소리 몇 번 한 거밖에는 없는데, 그거 때문에 저 난리를 치는가? 부부 사이에 그 정도 말도 못하나?
*
대철이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거부감을 갖기 시작한 건 지난 가을부터였다. 어느 날 경애가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남자가 돈도 안 벌면서 집에서 꼬박꼬박 삼식이 하는 건. 우리 집도 삼식이야. 날마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거 진력난다. 얘!”
남편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주방에서 통화를 하던 경애는, 거실에 서 있는 대철을 보고는 흠칫했다. 그날 저녁 대철은 밖에서 먹고 왔다며 굶고 자면서 밤새 뒤척였다. 퇴직 후 갈 곳 없는 남편에게 하루 세끼 밥 차려주는 게 그렇게도 귀찮은 일인가. 수십 년간 가족을 위해 죽어라 일했던 남편을 삼식이 어쩌고 하면서 비아냥거리다니 괘씸했다. 남편 코 고는 소리를 핑계로 각방을 고집하는 경애가 진즉부터 못마땅했다. 아내를 향한 불만이 들끓어 오르자 대철은 자신이 헛살았다는 생각에 서글펐다.
퇴직 전까지는 시계추처럼 집과 직장만을 오갔던 가장이었다. ‘퇴직하면 실컷 늦잠도 자고 여기저기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겠지.’ 바랐던 것과는 달리,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소파와 한 몸으로 지내는 처지가 말도 못하게 비참했다. 불규칙한 수면 습관은 몇 가지 부작용을 동반했다. 밤늦게 틸레비전을 보거나 유튜브를 벗 삼아 밤을 새우다가 잠이 들면 심하게 코를 드르렁거렸고, 아내는 그걸 못 참겠다며 건넛방으로 달아난 지 여러 달째다.
대철은 날이 갈수록 공허한 마음이 들자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딸이 다섯이나 있는 집의 외아들, 집안의 대들보감이라고 얼마나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가. ‘내가 우리집 희망이자 보물이었는데, 뭐가 남았지?’ 대철은 자기 인생이 텅 빈 자루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집에서 삼식이 취급은 안 받겠다고 작심한 뒤였다. 대철은 낮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점심이랑 저녁을 해결하고 들어가는 게 습관이 되었다. 값싸고 맛 좋은 음식점을 찾아내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다 보니 오래된 동네 골목에 있는 음식점들을 자주 기웃거렸다. 종로 5가 뒷골목 남해포차에 들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날도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자 포차 골목에 들어섰다. 어디선가 남진의 ‘나야 나’가 흘러나왔다. '아자~ 내가 뭐 어때서…….' 대철이 가장 좋아하고, 유일하게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대철은 끌리듯 남해포차 출입문을 젖혔다. 오십 세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휴대폰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인 남자 표정이 왠지 친근해 보였다. 출입구에 서있는 대철에게 그 남자가 말했다.
“손님, 오늘 첫 손님이신데 들어오십시오.”
대철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사각 테이블 큰 거 두 개, 작은 거 세 개뿐인 소규모였지만 청결해 보였다. 테이블 간격이 넉넉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표를 살피는 대철에게 남자가 다시 권했다.
“우선 앉으십시오.”
“아, 그러죠.”
벽에 붙어 있는 ‘양태구이 5,000원’ 에 대철의 눈길이 끌렸다.
“양태구이 맛보기 쉽지 않은데 여기서 맛볼 수 있겠네요.”
대철의 말에 남자가 대파를 썰면서 대답했다.
”네, 제가 좋아하는 생선이라서요. 여수 친구가 택배로 보내주는데,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아요.”
“몰라서들 그렇지, 양태는 고급생선이죠.”
대철은 빨강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면서 어머니 밥상을 떠올렸다. 고소하면서도 고들고들한 식감을 즐길 수 있는 양태 요리는 국으로, 조림이나 구이로. 자주 먹었던 음식이다. 따끈한 밥상 앞에 둘러앉은 식구들이 생각났다. 아버지, 누나들, 여동생들, 특히 양태살을 발라 대철의 숟가락에 얹어주던 어머니가 울컥 그리웠다.
양태구이가 나왔다. 대철은 고소한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노릿하게 구워진 중간 크기 양태 한 마리에 고향 냄새, 유년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손 닦을 생각도 잊고 양태살을 발랐다. 혀끝에 퍼지는 맛이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양태구이랑 떡국 한 그릇, 소주 한 병을 기분 좋게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잠들어 있는지 기척이 없다. 대철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오디션 프로에서 선발된 젊은 가수들이 트로트 쇼를 벌이고 있었다. 신나는 트로트를 들으면서 발가락을 까딱거리는 게 집에서 즐기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 후로 대철은 자주 남해포차에 갔다. 고향 냄새 있는 분위기가 편했고, 주인 세호와도 많이 가까워졌다. 대철은 대개 첫 손님으로 가서 세호와 몇 마디씩 주고받는 게 좋았다. 동향 사람을 만나서인지 가끔은 고향 말씨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어느 날 손님이 뜸한 틈을 타서 대철이 말했다.
“배 사장, 우리 형제처럼 지내보는 건 어쩔까잉? 나가 행님 허고 거그가 동생 허는 거.”
그러자 세호가 맞장구를 쳤다.
“저야 겁나게 좋지라. 그럼 오늘부터 지가 정 사장님 동생 할랍니다. 행님.”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 잔 부딪쳐 봐야제. 내가 살랑께.”
“아니죠, 지가 대접해야지라. 행님”
그날 세호와 나눈 술자리는 대철의 마음에 한줄기 숨구멍이 되었다. 대철은 손님이 뜸한 날엔 늦게까지 머물면서 세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수십 년간 착실하게 살아온 결과가 빈껍데기 같다는 속내를 비칠 땐 눈물을 훔쳤다. 어느날 늦게까지 남아 있는 대철을 본 세호는 머릿속 계산을 했다. ‘세상물정 잘 모르는 이 사람을 내가 좀 거들어준다고 손해 볼 일은 없겠지.’ 세호가 슬며시 제안했다.
“형님, 집에 들어가시기 그리 불편하시면 당분간 제 집에서 지내십시오. 저는 밤 장사하고 낮에 들어가서 조금 자고 또 나옵니다. 그러니까 형님 편하게 밤잠 주무시고 낮에는 취미 생활 하시고 여행도 다니고 하다 보면 기분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대철은 세호의 제안에 처음엔 대꾸하지 않았다. 아내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불편해진지는 한참 되었고, 그 오래된 주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그렇다고 잘 모르는 남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게 말이 안 될 일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경애에게 집을 팔고 외곽으로 이사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가 크게 싸울 뻔했다. 이 집이 어떤 집인지 몰라서 그러냐고, 친정 부모님이 처음으로 장만했던 이 집을 물려주신 건 끝까지 잘 지키라는 뜻인 걸 당신도 잘 알지 않느냐고, 화단 있는 마당, 월세 받는 방이 세 칸이나 있는 집에서 왜 이사할 생각을 하느냐고 버럭 화를 내는 경애에게 대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이만한 제안은 할 권리가 있는 거 아냐?”
옛날에 시골 어머니 모셔올 때, 별채를 증축하느라 시골전답 정리한 돈이 몽땅 들어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대철은 더 이상 다투고 싶진 않았다. 만약 우겼다가는 경애가 또 얼마나 피곤하게 따질지, 지나간 이야기들 또 꺼내서 속사포처럼 쏘아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알았소. 당신 좋을 대로 해야지, 내가 뭐…….”
언제나처럼 경애에게 져주는 대철의 머릿속에 불현 듯 세호의 제안이 생각나면서 명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래, 이 나이에 사고 한 번 쳐본다고 죽진 않겠지.’
대철이 명금을 처음 본 건, 지난 연말쯤이었다. 남해포차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막 자리를 뜨려는 참이었다. 앳된 중년으로 보이는 여자가 출입문 포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자주색 가죽 재킷을 입은 그녀가 가게를 둘러보며 서 있자, 세호가 스윽 쳐다보더니 찡그렸다. 그녀는 세호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짓고는 대철의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대철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아저씨, 여기서 제일 맛있는 안주가 뭐예요?”
“양태구이 시켜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양태구이라고요? 그게 뭔데요?”
“아, 남해에서 나는 고급생선인데 이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귀한 거죠.”
“좋아요,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양태구이 하나요.”
세호가 그녀 앞에 술과 양태구이 접시를 탁 소리 나게 놓아주었다. 뭔가 못 마땅해 보였다.
“어머나! 처음 먹어보는 건데 안주로 최고네.”
그녀의 반짝거리는 손톱 밑에서 양태 살점이 발라지는 게 대철은 신기했다. 웃으면서 눈을 크게 뜨는 표정이 막내 여동생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대철은 시간을 끌었다.
다음날 또 남해포차에 간 대철은 그녀가 나타나길 은근히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러던 그녀가 일주일 후 친구랑 같이 왔다. 두 여자는 소주와 양태구이, 달걀말이를 시키고는 큰 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그녀들 수다 내용에 대철은 자석에 끌리듯 귀를 세웠다. 그녀 이름이 명금이라는 것과 아들이 하나 있는 이혼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명금이 트로트를 좋아해서 공연장에 자주 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철은 그녀와 자기 사이에 어떤 끈이 하나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묘한 일이었다. 대철은 집에 가는 길에 ‘명금’이라는 이름 뜻을 헤아려보았다. ‘밝을명(明)에 비단금(錦)인가. 아니면 새길명(銘)에 쇠금(金)인가. 어떻게 해도 이름 뜻이 괜찮군.’
며칠 뒤 대철은 다시 명금을 만나게 되었다.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는 그녀에게 대철이 말을 건넸다.
“저! 명금여사님, 저랑 술친구 한 번 해보실래요?”
대철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호호, 술친구요. 그거 좋은데요. 그런데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실까요?”
두 사람이 술친구가 되자 명금은 활달하게 대철에게 다가왔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을 때 대철은 온 몸의 세포들이 옴질거리는 걸 느꼈다. 젊어지는 샘물을 벌컥벌컥 마신 것처럼 들뜬 대철은 건배를 제안했고, 두 사람은 청·바·지를 외치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
대철이 커다란 여행가방 두 개를 끌고 럭키오피스텔에 도착한 건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였다. 아침 겸 점심으로 설렁탕 한 그릇을 사 먹고 드라이브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가게에서 밤새고 들어와 쉬고 있을 세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어렵사리 주차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대철의 연락을 미리 받았던 세호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세호는 대철을 창가 쪽 방으로 안내했다. 창문 너머로 공원이 보이고 햇살이 살짝 비쳐든 방이 마음에 들었다. 세호는 대철에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고는 곧 출근했다.
방 두 개짜리 오피스텔, 대철의 집에 비하면 소꿉장난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밤엔 대철 혼자 지낼 거니까. 밤새도록 텔레비전을 봐도, 코를 아무리 심하게 골아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아침밥은 즉석밥이나 빵이면 됐고, 점심은 등산이든 낚시든 가서 현지에서 사 먹으면 될 일이다. 저녁은 남해포차에서 해결하면 될 거고, 무엇보다도 남해포차에 가면 술친구 명금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지 않은가. 대철은 마음이 둥실거리는 걸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윗벽에 부착된 회색 붙박이장 옆에 가방을 세워두고 누웠다. 침대는 아니지만, 세호가 준비해둔 황토 전기매트와 붉은 체크무늬 면 이불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생전 처음으로 집을 나와 남의 집에서 자는 낮잠이 꿀맛이었다. 눈을 떴을 땐 창으로 비치던 햇빛이 거의 다 사위어 있었다.
대철은 저녁 식사를 할 요량으로 남해포차에 갔다. 걸어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되도록 자동차 사용을 줄이겠다는 생각, 세호에게 방세를 미리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세호가 그냥 와서 지내라고는 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그 사람 형편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으니 월세랑 관리비 반절 정도를 미리 주는 게 도리일 것이다. 이제부터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연금은 오롯이 문대철 자신만을 위해서 쓰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 정도 지출은 문제가 안 될 일이다. 당분간 세호 집에서 지내다가 기회가 오면 거처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남해포차에 도착했다.
대철이 들어서자 세호가 요리를 하다 말고 반겼다.
“형님, 방은 마음에 들던가요?”
“오랜만에 푹 자고 나오는 길이야, 그런데 오늘 명금 씨가 올려나. 내가 술 한 잔 사고 싶은데”
“해방된 날 기념하시게요?”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잘 모르는 여자 너무 가까이하지 마세요.”
그 때 세호 전화기가 울렸다.
“난 잘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퉁명스럽게 통화를 마친 세호가 김치만둣국을 끓여 주었다. 김치와 돼지고기를 다져 만든, 속이 꽉 찬 만두 열 개를 먹고 얼큰한 국물까지 다 마셨다. 속이 든든한 게 몸과 마음이 다 채워지는 느낌이다. 대철은 트림을 하고는 세호를 바라보았다. 이 무슨 묘한 인연인가. 멀쩡한 집 놔두고, 아무런 연고도 없던 포차 주인집에 짐 풀고 나온 자신이 무슨 모험가 같았다. ‘어차피 시위 떠난 화살이야. 일단 저지른 일이니까 한 번 가보는 거다.’ 생각하고 있는데 명금이 생글거리면서 나타났다. 대철이 일어서며 반겼다.
“어서 오세요, 명금 씨. 그렇잖아도 기다렸어요.”
“아이 좋아라, 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오빠!”
“오늘은 내가 쏠 테니 마음껏 마십시다.”
이때 다른 손님들 대여섯이 우르르 들어왔다. 가게가 갑자기 분주하고 시끄러워지자 명금이 가만히 속삭였다.
“오빠, 우리 밖으로 나가요. 여긴 너무 시끄러워서.”
명금이 대철의 팔을 잡아끌었다. 대철은 주저 없이 일어섰다. 남해포차에서 나온 두 사람은 종로거리를 걸었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대철은 추운지 더운지 분간이 안 되었다. 자신의 팔을 붙들고 걷는 명금이 이끄는 대로 어디든 따라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오빠, 우리 맥줏집에 가요.”
“그것도 좋죠.”
두 사람은 종로 4가 뒷길로 접어들었다. 화려한 네온이 반짝거리는 2층 맥줏집 도킹은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커플로 보이는 손님들 얼굴이 발그레하게 보였다. 명금이 대철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서 속삭였다.
“이 집 분위기 좋죠? 저 사람들 러브샷 하는 거 좀 봐요.”
“여기 자주 오나 봐요?”
“몇 번 와 봤어요. 옛날 좋았던 시절에.”
명금은 맥주를 마시며 푸념했다. 어릴 적 공주 대접받고 자란 귀한 막내딸이었는데, 결혼 후 바람둥이 남편을 용서할 수 없어서 위자료 넉넉하게 받고 헤어진 이혼녀라고, 하나뿐인 아들은 외국 유학 중이고, 자기는 같이 술 마시고 여행 다닐 남자친구만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명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대철의 속에서 파도가 일었다. 취기가 적당히 오르자 명금이 러브샷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대철 역시 속으로 바라던 터였다. 두 사람은 끈적한 러브샷으로 마음을 나눴다. 헤어질 때 명금은 대철의 손에 입을 맞추었고 대철은 명금의 어깨를 몇 번 토닥거렸다. 명금이 대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나 이렇게 행복한 기분 정말 오랜만이야.”
아쉬운 발걸음으로 오피스텔로 돌아온 대철은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한두 달 만에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다니, 하긴 처음부터 특별하긴 했지.’
*
경애가 집 나간 남편에게 건 수십 통의 전화는 모두 무응답이었다. 문자폭탄을 퍼부어댔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냐고, 적어도 행선지는 알려줘야 할 게 아니냐고, 자식들이 알면 뭐라 하겠느냐고, 오랫동안 아팠다가 이제 겨우 회복된 사람에게 왜 그리 무정하냐고. 사흘째 되던 날, 경애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심경애 씨,
오랜 세월 당신과 자식들에게 할 만큼 했으니 내 의무는 다 한 거 같소.
우리 이쯤에서 끝냅시다. 즉 졸‧혼이란 말이요.
이제 내 인생 찾아서 살 거요. 당신도 훨훨 자유롭게 살아보시오.
이게 내가 주는 선물이요.
경애는 아찔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봐.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혹시 바람이 난건가? 아니 바람피울 위인이나 되나?’
경애는 드러누웠다. 황량한 들판에 울리는 까마귀 소리 같은 게 귓가를 맴돌았다. 느닷없이 몰아닥친 인생의 돌풍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알 수 없었다. 누구랑 의논해야 할지, 자식들이 알면 어쩌나…….
경애가 생각하는 대철은 천하의 순둥이에, 한 번도 고장 난 적 없는 시계 같은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손해 보는 일 있어도 누구를 원망할 줄 모르는, 남편이라기보다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다.
대학 일학년 때 경애네 집 하숙생으로 들어와서 졸업 때까지 식구처럼 살다가 진짜 가족이 된 건 대철이 취업하고 나서였다. 교육청 행정직에 취직했다고 인사차 들른 대철에게 경애의 어머니는 사위가 돼달라고 했다. 경애와 대철 두 사람이 누나 동생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걸 눈여겨 본 어머니는 대철의 착하고 무던한 점이 데릴사위로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이어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생각만큼 꽃길은 아니었다. 경애는 처가에 얹혀사는 대철이 불편해하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숙생 때와는 다르게 경애 부모님 눈치를 살피는 대철은 늘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 걱정을 했고 경애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시골어머니의 잦은 병원 출입이 시작되자 결국 경애네 집으로 모셔 오게 되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두 명의 시누이들도 같이 왔기에, 친정엄마가 하숙생을 거두던 별채를 개축하고 시댁 식구들을 들였다. 시어머니 병수발에 시누이들 뒤치다꺼리한 세월이 십 여년.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막내 시누이까지 결혼시키고 나니, 손위시누이들의 자식들이 별채에 들어와서 살았다. 손위 시누이들은 경쟁하듯 자식들을 서울로 학교를 보냈고 경애의 집을 친정삼아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경애와 대철 부부사이엔 애틋한 감정이 바닥나버렸다. 그저 가족으로서의 의무만 성실히 이행하는 두 사람은 배우자가 얼마나 귀한 존재임을 잊어가고 있었다.
시댁 피붙이들로 늘 복작거리는 분위기를, 경애는 어서 떨쳐버리고 싶었다. 얼마 되지 않은 부모님 유산을 대철이 독차지했다는 이유로 시누이들은 대철에게 크고 작은 부탁을 많이 했고 대철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경애는 말 그대로 시금치도 싫어질 만큼 시댁 피붙이들이 싫었다. 나중에 조카들이 독립하여 떠나고 좀 편하겠다 싶을 땐, 또 다른 불청객이 찾아왔다. 갱년기가 시작된 것이다.
갱년기 증상에 갑상선 항진증까지 겹쳐서 죽을 만큼 힘들었다. 걸핏하면 하늘이 노래 보였다.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것들이 많은지, 경애는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속에서 아들이랑 딸이 무난하게 성장해서 취직하고 때맞춰 결혼을 잘해준 게 경애의 유일한 보람이었다.
*
경애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남편에게서 졸혼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할 뿐 아니라 무서웠다. 그 동안 괴로웠던 증상들, 불면증, 체중 감소, 발작에 가까운 오한,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기복 등이 재발할까봐 두려웠다. 완치됐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던 그 벅찬 감격이 식기도 전에 졸혼이라니. 경애는 혼란스러웠다. ‘나 싫다고 나간 사람인데’ 고개를 젓다가도, 세상 물정 모르는 위인이 집 나가서 잠은 어디서 잘까. 그 순둥이 같은 남자가 사기꾼이라도 만난다면 대책이 없을 텐데 자꾸 걱정되었다. 아무리 취해도 늦게라도 꼬박꼬박 들어오던 사람이 집에 없으니 지나치게 고요했다. 유일하게 곁을 맴도는 진순이가 있지만, 말도 못하는 강아지가 나를 위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밤은 또 어떻게 보낼까 무서웠다.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오십오 분, 지금부터 누워 있으려면 밤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광교에 사는 딸이다.
“너 요새 입덧 심하다고 하더니.”
“좀 괜찮아지고 있어요. 휴직했더니 시간도 있고, 엄마 음식 먹고 싶어서. 그런데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요?”
“나 지금 졸려. 내일 다시 통화하자.”
경애는 전화를 끊고 고심했다. ‘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토요일 오후 딸 내외가 왔다. 사위는 바쁜 일 있다면서 바로 갔다. 다음날 데리러오겠다면서 제 아내를 바라보는 사위의 눈빛이 하도 그윽해서 경애는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다정한 눈길을 주고받은 적이 있던가.
사위가 가고 난 뒤 경애는 대철의 가출 사실을 딸에게 말했지만 딸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경애는 내심 섭섭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며칠 전 아빠가 나한테 전화해서 그랬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맘대로 살고 싶다고.”
그런 말을 왜 이제 하냐고 경애가 묻자 딸이 말했다. 엄마는 본인 건강만 챙기느라 다른 사람 생각하는 법을 잊고 사는 거 같아서 말 못했다고 했다.
“내가 뭘?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온 지 잘 아는 네가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아빠도 퇴직하고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이라는 걸 엄마가 인정해줘야 해요. 엄마가 서러운 것처럼 아빠도 서글플 거라고요.”
경애는 딸의 말이 따끔했다. 딸이 다시 말했다. 아빠도 퇴직하고 상실감이 클 텐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일탈한 거라고. 밤이 되자 딸이 거실에 잠자리를 펴면서 나긋하게 말했다.
“엄마, 아까 먹은 소고기 뭇국이랑 김치전 최고였어요. 입덧이 싹 가라앉을 만큼.”
“오랜만에 만들어봤는데 잘 먹어줘서 좋다.”
“엄마, 오늘 나랑 같이 자면 잠도 잘 올걸요.”
“그러자, 오랜만에 우리 모녀 같이 자보자.”
경애 곁에 나란히 누웠던 딸이 바짝 다가와 경애 어깨에 얼굴을 대며 말했다.
“엄마, 이집 팔고 우리 집 근처로 오세요. 공기 좋고 주변에 멋진 호수도 있고 가까운 곳에 큰 병원도 있어요. 이 집 너무 오래 되었잖아요”
“그게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야, 네 아빠 지분도 있어서.”
“그러니까 그걸 핑계로 아빠 돌아오시게 하면 되죠. 만약 두 분이 화해 안 하시면 호주로 전화해서 오빠한테 다녀가라고 할 거예요.”
“그건 안 돼, 네 오빠 아직 업무 파악도 다 못했을 텐데 걱정 끼치면 쓰겠니?”
경애는 딸이 자기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거 같아 창피하면서도, 든든한 지원군처럼 미더웠다. 다음날 사위가 왔다. 딸 내외는 마트에 가서 먹거리를 잔뜩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주었다. 끼니 잘 챙겨 드시고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딸과 사위의 말이 그 어떤 약보다도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차에 오르기 전 딸이 경애의 귀에 대고 말했다.
“곧 아빠 한 번 만나볼게요.”
딸 내외가 다정하게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경애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기운을 내야지, 자식들에게 걱정 끼치는 못난 짓은 하지 말아야지. 경애는 현관문 옆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서 있는 여자가 늦가을 나무처럼 쓸쓸해 보였다.
“요즘 육십 대 초반은 제2의 청춘이라는데, 이게 뭐니?”
경애는 마음을 다잡고 외출 준비를 했다.
*
세호의 오피스텔에서 지내는 대철은 처음 며칠은 여행자 기분이었다. 남의 집이라지만 아무 눈치 볼 거 없어 자유로웠다. 하지만 혼자서 하는 건 뭘 해도 별 재미가 없고, 명금과 가까워진 뒤로는 더 진한 외로움을 느꼈다. 젊고 사근사근한 그녀와 함께 있으면 온 몸의 감각들이 깨어나 전율했다. 하지만 더 이상 가까워지기는 어려운 일. 집을 나오고 아내에게 졸혼이라고 통보는 했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일 뿐 합의된 게 아니지 않은가. 법적으론 명백한 불륜이라는 생각이 들어 편치 않았다. 만약 경애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지금쯤 경애가 어떻게 지낼지는 안 봐도 뻔하다. 항상 수족처럼 부리던 남편 문대철이 없으니 엄청 고달플 테지, 생각하니 통쾌하면서도 씁쓸했다.
문득 고향 생각이 났다. 한 번 다녀올까! 옛집에선 누가 살고 있는지. 마을은 어떻게 변했는지. 하지만 고향까지는 기차도 안 닿고, 혼자 운전해서 다녀오기엔 너무 먼 거리다. 명금이랑 같이 갈까 기대하며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이다. 한참 후에야 연결이 되었지만 명금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오빠, 멋진 계획인데 거긴 너무 멀어요. 그 대신 콘서트장에 같이 가는 건 어때요?”
“무슨 콘서트?”
“가수 송OO 좋아하시죠? 공개방송 때 방청객으로 같이 가는 거요.”
“좋겠지만 난 어떻게 가는지 방법을 모르는데.”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대철의 마음에 반짝 햇빛이 들었다. 이 무슨 행운인가 싶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저녁식사도 해결할 겸 남해포차에 갔다. 꽉 찬 손님들 때문에 세호는 몹시 바빴다. 대철은 세호를 도와 음식을 날랐다.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힘들기 보다는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자정이 다 될 무렵 손님이 뜸해진 틈을 타서 대철이 말했다. 명금 씨 덕에 곧 방송국 구경 갈 거 같다고. 세호가 흠칫 놀랐다. 대철은 의아해하며 말을 이었다.
“왜 안 믿어지나?”
세호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형님, 제가 정말 친형님처럼 믿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 여자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그 여자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형님에게도 오빠라고 하면서 주위를 맴돌다가 나중엔 같이 살자고 할 거예요. 그게 안 통하면 교묘하게 속여서 목돈을 뜯어낼 거고요. 그렇게 더럽게 사는 여자예요 그 여자.”
“뭔 소리야 돈 많은 이혼녀라던데”
“이혼녀 맞아요. 그리고 아들 하나 있다는 것도 맞고요. 하지만 그거 말고는 다 거짓이라니까요. 그 여자 전남편 지독한 가난뱅이에요.”
세호는 명금이 돈 많은 이혼녀가 아니라 괜찮아 보이는 남자 유혹해서 사기치는 상습범이라며 명금을 비난했다. 대철은 넋이 나간 듯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이제 이곳엔 못 오겠구나. 세호 저 사람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볼까!’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포차를 나가는 대철을 본 세호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명금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명금,
내 가게에 한 번만 더 오면 고발할 거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우리가 한 때 부부였다는 게 내 평생의 수치다.
조금 후, 세호 휴대폰에도 문자가 왔다.
고발 좋아하시네
얼른 내 돈이나 갚으셔
그러면 오라고 해도 안 간다
이 웬수야.
문자를 읽은 세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잊을만하면 나타나서 포차손님들을 유혹하는 명금을 어떻게 차단해야 할지, 사람 좋은 대철을 친형님처럼 의지하고 싶었는데.
남해포차에서 나온 대철은 생각했다. 명금이 정말 그런 여자일까? 혹시 세호가 시기하는 건 아닐까. 명금을 직접 만나서 확인해볼까. 그럴 필요 없이 아예 럭키오피스텔을 떠나야 할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대철은 럭키오피스텔이 몹시 멀다고 느끼며 차가운 밤거리를 걸었다.
*
어둑해질 무렵, 경애는 친구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있었다. 경애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머리에 펌약을 바르고 의자에 앉아서 잡지를 뒤적이는 경애에게 원장이 대봉시 두 개를 내왔다.
“출출하지? 이거 하나 먹어봐.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걸 녹였어”
“홍시네, 하나 맛볼까!”
경애는 조금 덜 물렁해 보이는 거 하나를 베어 물었다. 차갑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떨떠름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떫은맛이 좀 거슬렸지만 뱉어내기 아까워 다 삼켰다.
“달지?”
“응, 근데 조금 떫네!”
“어머, 미안! 하필 덜 익은 걸 집었구나. 내 건 괜찮은데”
“그럴 수도 있지, 혹시 커피 말고 다른 차 있을까?”
원장이 율무차를 타주며 말했다.
"이거 마시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율무차의 따뜻하고 구수한 맛이 입안에 남아있던 떫은맛을 싹 가셔주자 경애는 후련했다. ‘그래, 떫은맛이 있으면 이렇게 씻어내 주는 맛도 있는 거야.’ 경애는 자기 부부가 덜 무른 홍시 맛 같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