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민중들의 역사
맹문재
1.
최기종 시인이 목포를 제재로 삼은 작품들은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에서 나타난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수도 공사」는 1년 동안 일해온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청부업자 중정 대리(中井 代理)의 농락으로 4달 동안 삯을 받지 못하자 경찰서에 몰려가 항의하는 내용이다. 업자는 하수도 공사를 78,000원의 경비로 6개월 안에 준공시키기로 하고 목포부와 청부계약을 했는데, 자신이 4할을 챙기고 나머지 47,800원으로 공사를 마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는 산본(山本)이라고 하는 자를 전주(錢主)로 하여 18,000원을 빌려 보증금으로 경비의 1/10인 7,800원을 목포 부청에 납입하고 일을 시작할 정도로 현금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챙기고 남은 돈 31,200원으로 공사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노동자의 삯을 착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는 보성과 벌교의 하수도 공사까지 맡아 그곳에 현금을 쓰느라고 목포 노동자들의 임금을 제대로 지급해오지 못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끈질긴 투쟁으로 마침내 밀린 임금을 받아내었지만, 외상을 갚고 나자 혹독한 추위와 폭염에 배를 주리며 뼈가 닳고 살이 깎이도록 일한 결과는 빈주먹밖에 없었다. 투쟁을 이끌었던 서동권이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마지막 밤에 자신이 공사한 하수도를 바라보면서 “이 굉장한 하수도를 보는 자, 돈과 문명의 힘을 탄복하는 외에 누가 삼백 명 노동자의 숨은 피땀의 값을 생각할 것이며 죽교의 높은 이 다리를 건너는 자 부청의 선정을 감사하는 외에 누구라 이면의 숨은 흑막의 내용을 짐작이나 하랴.”고 안타까워하는데, 노동자들의 허탈한 심정을 여실히 대변해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생활 환경뿐만 아니라 작업장을 지나가던 민간인들까지 다칠 정도로 작업장이 위험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조선 노동자들이 감독과 십장에게 자주 폭행을 당하는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고, 목포의 격문사건으로 조선인들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구속되는 상황도 알려주고 있다.
일제에 의해 조선인들이 철저하게 탄압받는 상황을 그려낸 「하수도 공사」는 실제 목포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1931년 3월 29일 1시경 하수도 공사장에서 일하던 50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이 부청과 경찰서로 몰려갔다. 청부업자 쓰보이 엔다이(坪井鹽大)가 3개월이나 삯을 주지 않자 찾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는 유달산을 중심으로 공사비 30만 원에 3년간의 계획으로 하수도 공사를 맡아 270여 명의 노동자를 동원했다. 그렇지만현금을 주지 않고 전표만 주어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큰 실망과 고통을 주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참다못해 투쟁했는데, 박화성은 이 사건을 1932년 『동광』에 소설로 발표한 것이다.
최기종 시인이 목포를 제재로 삼은 작품들에서도 이와 같은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볼 수 있다. 상업적 자본주의가 점점 심해지는 우리 시대에 시문학의 필요성을 제시해 준 것이다. 애드워드 핼릿 카(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하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임무는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라고 선언했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라는 관점인데, 시인에게도 해당된다. 시인이 역사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문학이 아무리 소외되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시인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는데, 최기종 시인의 목포 시편들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일제는 1913년 현대적 개념의 도시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인 부제(府制)를 실시했다. 이때 목포는 경성[서울], 군산, 대구, 마산, 부산, 원산, 인천, 진남포, 청진, 평양과 함께 부로 지정되었다. 이들 12개의 도시 중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도시로는 서울, 대구, 평양 3곳뿐이었고, 나머지는 1876년에개항된 항구나 어촌이었다. 개성, 전주, 진주, 해주, 함흥 등과 같은 전통적인 도시는 부에 포함되지 않았다. 결국 일제에 의해 추진된 도시의 형성은 우리의 전통적인 사회 기반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일제는 경제 침탈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하고 통상의 통로인 개항장을 중심으로 도시를 편제한 것이다. 일제는 도시 간의 이중성뿐만 아니라 도시 내에서도 계급적 차별과 민족적 차별로 이중성의 구조를 만들었다. 목포 역시 ‘각국 공동거류지’ 구역과 ‘목포부 부내면’ 구역으로 구분했다. 전자는 일본인 마을로 계획된 시가지였고, 후자는 조선인 마을로 무계획의 시가지였다. ‘각국 공동거류’는 일제의 강점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의 거류지가 된 것으로 그들은 생활하는 데 편리하도록 도시를 만들었다. 그에 비해 조선인들은 쌍교리 근처의 무덤을 이장하고 그 자리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조선인 마을은 기본적인 시설조차 갖추지 못해 박화성이 「추석전야」에서 유달산 아래를 바라보며 “집은 돌 틈에 구멍만 빤히 뚫어진 돼지막 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다.”라고 묘사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은 목포의 역사를 시인은 현재화시키고 있다.
개항기에 일제가 들어와서
목포 바다를 이따만하게 막아서는
요리조리 신작로를 내고 지들 거류지를 맹글었어
거그 항구도 앉히고 세관도 앉히고
유곽이며 동척, 은행, 백화점도 앉히고
핵교도 전보국도 무역상도 사교장도 앉히고
네모반듯한 지들 집들도 즐비허게 지어댔지
그러고 유달산 입구에 지들 영사관도 앉혔는디
목포항까지 뻔히 내다뵈는 명당자리였어
거그 거리를 혼마치라고 불렀는디
양품점, 양장점, 모자점 같은 상가들이 들어차
낮이고 밤이고 북적거렸지
조선인들은 밀려나
아리랑고개 넘어 온금동이고 서산동이고
유달산 등허리에다 초막을 짓고 춥고 배고프게 살았어
그렇고롬 옹색허고 헐벗어도 자존심 하나는 대단혔지
조선인 기업가들은 일제 자본에 대항하여 호남은행을 세웠고
제유공장 조선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허고 70일간의 파업투쟁에 나섰어
소아마비 짐꾼인 멜라콩은 사재를 털어
목포역 하천에다 다리를 놓아 조선인 왕래를 도왔고
마인계터니 죽거리니 청년회관이니 쌍교는 항일의 중심지였어
목포 옛길을 걸으면
로데오거리 미네르바에서 목포 바다가 달달허고
목원동 핏줄처럼 이어진 골목에서 옥단이가 튀어나오지
밀려난 사람들이 새로이 돌아오고
밀려난 거리들이 새로이 생겨나고
밀려난 파도들이 새로이 밀려오고
밀려난 역사들이 새로이 피어나고
가난도 서러움도 그만큼 다져지는 아픔이었어
―「목포 옛길」 전문
1876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불평등하게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한 데 이어 1897년 목포가 증남포와 함께 개항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더 이상 쇄국할 수 없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는 개항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목포는 개항한 뒤 인구가 늘고 땅값도 오를 만큼 활기를 띠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일제는 자국의 부족한 식량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기 위해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을 발표했다.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있던 조선의 법을 폐지하고 자신들이 토지 소유, 매매, 교환, 증여를 합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일제는 주도권을 장악하고 목포를 장악해 나갔다. “개항기에 일제가 들어와서/목포 바다를 이따만하게 막아서는/요리조리 신작로를 내고 지들 거류지를 맹글었”던 것이다. 아울러 “거그 항구도 앉히고 세관도 앉히고/유곽이며 동척, 은행, 백화점도 앉히고/핵교도 전보국도 무역상도 사교장도 앉히고/네모반듯한 지들 집들도 즐비허게 지”었다. 그리고 “유달산 입구에 지들 영사관도 앉혔는디/목포항까지 뻔히 내다뵈는 명당자리였”다.
일제가 도로를 넓히고 직선으로 “신작로”를 만든 것은 “목포”를 보다 손쉽게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로가 좁고 꼬불꼬불하면 긴급 상황에서 경찰이나 군대를 제대로 이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시위를 일으켰을 때 즉각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신작로”을 만들고 집들을 “네모반듯”하게 지었다. 일본 “영사관”도 개항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세웠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적인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과 함께 일제 권력의 위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거그 거리를 혼마치라고 불렀는디/양품점, 양장점, 모자점 같은 상가들이 들어차서/낮이고 밤이고 북적거렸”다. ‘혼마치(本町)’는 일본인들이 생활하던 밀집 지역으로 상권 중심지의 거리였다. ‘본정통(通)’으로도 불렸는데, ‘본정’이라는 말은 본래 마을, 중심가 등을 뜻한다. 일제는 조선의 땅을 마치 자신들이 원래부터 소유했던 것처럼 왜곡시켜 서울 충무로 등 여러 곳을 혼마치로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목포에는 일본인들의 도시와는 차별되는 조선인들의 마을도 있었다. “조선인들은 밀려나/아리랑고개 넘어 온금동이고 서산동이고/유달산 등허리에다 초막을 짓고 춥고 배고프게 살았”던 것이다. 1913년 일제는 도로를 기준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거류지와 목포역 앞 신개발지에 정(町)의 명칭을 부여했고,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에는 동(洞)을 붙였다. 남교동, 대성동, 북교동, 양동, 온금동, 죽동 등이 그러했다. 마을의 명칭을 통해 조선인들을 차별한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인들은 “그렇고롬 옹색허고 헐벗어도 자존심 하나는 대단혔”다. “조선인 기업가들은 일제 자본에 대항하여 호남은행을 세웠고/제유공장 조선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허고 70일간의 파업투쟁에 나섰”다. 광주와 목포의 지주자본과 상업자본들이 민족 자본을 지키기 위해 “호남은행”을 세웠고, 1926년 목포 “제유공장”에 다니는 12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인권 개선 등을 요구하며 70여 일간 파업투쟁을 한 것이다.
이외에도 “소아마비 짐꾼인 멜라콩은 사재를 털어/목포역 하천에다 다리를 놓아 조선인 왕래를 도왔고/마인계터니 죽거리니 청년회관이니 쌍교는 항일의 중심지였”다. 소아마비 짐꾼인 “멜라콩”은 불편한 몸으로 목포역 수하물 취급소에서 일했던 박길수의 별명이었다. 당시 인기가 많았던 중국 영화에 나오는 인물이었는데, 왜소하고 허약한 체격이 비슷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부른 것이다. 그는 어려운 몸으로 힘든 노동을 해서 모은 돈으로 목포항과 목포역 사이의 하천에 다리를 놓아 조선인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했다. “마인계”는 ‘만인계(萬人契)’라는 일종의 복권계(福券契)에서 유래했는데, 그 터가 조선인들의 마을이었다. ‘죽거리’(죽동)는 목포 축항으로 부두에 하역하는 인부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죽을 끓여 파는 가게들이 생겨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청년회관”은 목포 청년들의 항일운동 근거지로 『조선청년』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쌍교”리는 조선인들이 마땅히 살 곳이 없어 무덤을 옮기고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곳이다.
작품의 화자는 그 “목포 옛길을 걸”어가는 동안 “로데오거리 미네르바에서 목포 바다가 달달”한 것을 느낀다. 또한 “목원동 핏줄처럼 이어진 골목에서 옥단이가 튀어나오”는 것도 본다. “옥단이”는 유달산에서 항아리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달동네 비탈진 집까지 갖다 주고, 누군가 부르면 달려가 허드렛일로 인정을 베풀고, 춤추고 노래하며 흥을 돋아주었던 실존 인물이다. 그리하여 목포 사람들은 “옥단이”를 목포의 명물로 꼽는다. 결국 화자는 오늘날의 목포가 “밀려난 사람들이 새로이 돌아오고/밀려난 거리들이 새로이 생겨나고/밀려난 파도들이 새로이 밀려오고/밀려난 역사들이 새로이 피어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가난도 서러움도 그만큼 다져지는 아픔이었”다고, 일제 강점기에 당했던 가난과 서러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 세계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저장하였던 곳으로 알려진 “고하도”를 “목포를 지키는 수문장”이자 “목포 사람들의 자존심”(「고하도」) 으로, “유달산”을 “삼학도의 못다 푼 사랑이 묻어나고/달동네 찢어지던 가난이 묻어나고/철거민 돌탑에서 마른버짐이 묻어나오”듯 “목포만의 짜디짠 눈물이 묻어나”(「유달산」)는 것으로 그린 데서도 볼 수 있다. 갓바위 전설, 삼학도 전설, 온금동, 일등바위, 항동시장 보리밥, 봉후샘, 목포 4․8독립만세운동 등에 대한 노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
목포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어
3․1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박상렬은
남궁혁, 오도근, 김영주, 박상술, 박상오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혔어
양동교회 서기현, 곽우영, 서화일, 박종인, 박복영 등도
비밀결사 일심회를 만들고 거사를 도모혔제
두 조직은 거사를 한날한시에 허기로 혔지만
탄로 날 것을 염두에 두고 따로 준비혔어
구인회는 태극기를 그리고 전단지를 밀어서
쌀가마 속에 감추었고
일심회는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목판으로 태극기를 떠서
선교사 사택에 몰래 보관혔제
4월 8일 정오, 동시에 만세를 불렀어
서기현, 서화일, 박종인, 박복영은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허고
오재복, 이금득, 박상오는 보통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박상렬은 상업학교 학생들을 대동허고 시가지로 몰래 나왔어
정오를 알리는 오포 소리를 신호로 동시에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창평동, 죽동, 북교동, 수문통 거리로 쏟아져 나왔제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독립성
십 년을 참고 참아 이제 터졌네
삼천리 금수강산 이천만 민족
살았구나 살았구나 이 한소리에
만세 만세 독립 만만세
삽시간에 시가지는 흰옷 물결로 출렁거렸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면서 복사꽃 활짝 피워냈제
일경이 호각을 불면서 곤봉으로 막아섰고
기마헌병대가 칼을 빼어 들고 군중을 해산시켰어
서기현은 칼에 베어 체포되고 부상자가 늘어났어
일심회 회원들이 끝까지 저항혔지만 총칼 앞에 어쩔 수 없었어
박상렬, 남궁혁, 권영례 등을 비롯하여 100여 명이 연행되었제
9일에도 청년단이 선두가 되어 만세운동을 벌였어
곧바로 일경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20여 명이 연행되었어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아야 혔어
만세운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이어졌어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어
유달산 꼭대기에다 태극기를 꽂으면서 만세운동을 이어갔제
―「목포 4․8독립만세운동」 전문
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박상렬”은 “남궁혁, 오도근, 김영주, 박상술, 박상오 등과 함께/구인회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했다. “양동교회 서기현, 곽우영, 서화일, 박종인, 박복영 등도/비밀결사 일심회를 만들고 거사를 도모”했다. 만세운동에 가장 필요한 것은 태극기였기 때문에 “구인회는 태극기를 그리고 전단지를 밀어서/쌀가마 속에 감추었고/일심회는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목판으로 태극기를 떠서/선교사 사택에 몰래 보관”했다. 그리고 “4월 8일 정오, 동시에 만세를 불렀”다.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보통학교 학생들”과 “상업학교 학생들”이 함께했다. “정오를 알리는 오포 소리를 신호로 동시에/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면서/창평동, 죽동, 북교동, 수문통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목포 4․8독립만세운동”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학생들이, 특히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면은 “일심회” 소속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교내 기숙사며 지하실에서 “목판으로 태극기를 떠서”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선교사 사택에 몰래 보관”한 사실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하게 시가행진에 나선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거사에 목포 시민들도 기꺼이 합세한 것이다.
3·1운동은 물론 4․8운동이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제가 평화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조선총독부가 밝힌 것만 보더라도 3․1운동에 참가한 조선인들 중 7,509명이 사망했을 정도로 일제는 만세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일경이 호각을 불면서 곤봉으로 막아섰고/기마헌병대가 칼을 빼어 들고 군중을 해산시”킨 것이 그 모습이다. “서기현은 칼에 베어 체포되고 부상자가 늘어”난 것도, “박상렬, 남궁혁, 권영례 등을 비롯하여 100여 명이 연행”된 것도 그러하다. 결국 “목포 4․8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이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끝나지 않”았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결국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학생들이/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친 것이 “유달산 꼭대기에다 태극기를 꽂으면서 만세운동을 이어”졌고, 조선의 독립운동에 힘을 보탠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은 다음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네가 있어서
목원동 골목길이 환해지는구나
행복동 옛 노래도 다시 뜨는구나
목포 바다 거친 파도도 잔잔해지는구나
아리랑고개 고개 쉬엄쉬엄 잘도 넘어가는구나
유달산도 고하도도 목포대교도 손을 맞잡았구나
흰옷 입은 사람들 꼬투리 열고 무럭무럭 피어나는구나
―「목화」 전문
일제 강점기의 목포항은 삼백(三白)의 집산지, 즉 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군산항을 통해 많은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면, 목포항을 통해서는 많은 면화가 실려 나갔다.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호남에서 생산되는 목화가 목포에 집산되어 일본 고베[神戶]항으로 실려 갔는데, 1930년대 초에 목포에 목면공장이 20여 곳이나 있었다는 사실이 그 규모를 잘 보여준다. 목화는 재래면과 육지면(陸地綿)이 있는데, 미국이 원산지인 육지면은 섬유가 길고 가늘어서 솜이나 옷감을 만드는 데 쓰였다. 그 육지면을 일본인이 목포의 고하도에서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수확기에는 재래면과 함께 목포항을 뒤덮었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그 “목화”를 의인화하여 “네가 있어” “목원동 골목길이 환해지는구나/행복동 옛 노래도 다시 뜨는구나”라고 나타내고 있다. 목원동은 목포 서남권 금융의 거점지역이고 주변에는 목포역이 위치하고 있다. “행복동”은 목포항 부근의 개펄을 간척해 조성된 지역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거류지였다.
또한 화자는 “목화”가 있어 “목포 바다 거친 파도도 잔잔해지는구나/아리랑고개 고개 쉬엄쉬엄 잘도 넘어가는구나/유달산도 고하도도 목포대교도 손을 맞잡았구나”라고 노래하고 있다. 결국 “흰옷 입은 사람들 꼬투리 열고 무럭무럭 피어나는” 모습을 품는 것이다. “목화”는 일제의 목포 수탈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화자는 그것을 이겨낸 목포 사람들로 상징하는 것이다.
4.
유달산 언덕배기
하루해가 길게 놀다 가는 곳
센바람도 산을 넘다 보면 잔잔해지는 곳
낮이면 푸른 바다가 출렁거리고
밤이면 깜박깜박 등불이 켜지는 곳
거기 다순구미라고
아픔도 슬픔도 꼬들꼬들해지는 곳
집집이 조기 깡다리 널어 말리고
오나가나 눈이 가고 나며 들며 훈김이 돌고
할아범도 할멈도 해바라기하는 곳
그렇고 그런 집들이 정겹고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보리밥 먹고
방귀 뿡뿡 뀌며 쉬이 친해지는 곳
골목골목 아이들의 웃음소리 묻어나고
그물 깁는 아재, 아짐들도 둥글어지는 곳
아리랑고개 고개 넘고 넘어
삐걱삐걱 물지게 소리
어기여차 노 젓는 소리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들끼리
추위도 가난도 서러움도
볕이 들게 허는 곳
―「온금동」 전문
“온금동”(溫錦洞)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살아가던 마을 중 한 곳으로 일본인들의 훼방을 이겨내고 동민들이 조력해서 여울을 매립해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정(町)의 명칭을 가진 마을에 비해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화자는 “온금동”은 “유달산 언덕배기/하루해가 길게 놀다 가는 곳”이고, “센바람도 산을 넘다 보면 잔잔해지는 곳”이고, 그리고 “낮이면 푸른 바다가 출렁거리고/밤이면 깜박깜박 등불이 켜지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해방되기 전까지 “다순구미”로 불린 지명의 뜻을, 다시 말해 ‘다순(따뜻하고) 구미(후미진)’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픔도 슬픔도 꼬들꼬들해지는 곳”이고, “집집이 조기 깡다리 널어 말리고/오나가나 눈이 가고 나며 들며 훈김이 돌고/할아범도 할멈도 해바라기하는 곳”으로 노래한다.
화자가 “온금동”을 “다순구미”라고 부르는 것은 지명의 의미에 더해 가난과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의 인정을 민족의식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렇고 그런 집들이 정겹고/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보리밥 먹고/방귀 뿡뿡 뀌며 쉬이 친해지는 곳”이고, “골목골목 아이들의 웃음소리 묻어나고/그물 깁는 아재, 아짐들도 둥글어지는 곳”이라고 한 것도 그러하다. “아리랑고개 고개 넘고 넘어/삐걱삐걱 물지게 소리/어기여차 노 젓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품는 것이다.
“아리랑고개”는 “다순구미”에 있는 지명이면서 우리나라의 곳곳에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구불구불한 구비를 돌아 넘어야 했던 고갯길을 부르는 것으로 목포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띠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랑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온금동”에서 살아가는 목포 사람들이 힘든 삶을 시대인들과 함께 극복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목포 사투리로 '에말이요∼'란 말이 있지. 그 뜻이 뭔고 허니 내 말 좀 들어보라는 것이야. 처음에는 그 말뜻을 몰라서 어리둥절혔어. 왜 말을 싸가지 없게 그따위로 허느냐고 시비 거는 줄 알았어.
목포 말이 워낙 건조혀서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고는 '에말이요∼' 이러면 가슴이 철렁혔어. 혹여 내가 뭘 잘못헌 건 아닌지 머리를 핑핑 굴려야 혔어. 누군가 등 뒤에서 '에말이요∼' 이러면 흠칫 뒤가 시렸지.
그런디 목포살이 오래 허다 봉게 이제는 '에말이요∼'란 말이 얼매나 살가운지 몰라. 혹여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에말이요∼' 이리 부르면 솔깃 여흥이 생기는 거야. 나도 이제 목포사람 다 되어서 '에말이요∼' 아무나 붙잡고 수작을 부리기도 허는디
―「에말이요∼」 전문
위의 작품에 나오는 “목포 사투리로 ‘에말이요∼’란 말”의 뜻은 “내 말 좀 들어보라”는 것이다. “여보세요”에 해당하는 방언이다. 작품의 화자는 “처음에는 그 말뜻을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왜 말을 싸가지 없게 그따위로 허느냐고 시비 거는 줄 알았”다. 그리하여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고는 '에말이요∼' 이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혹여 내가 뭘 잘못헌 건 아닌지 머리를 핑핑 굴려야” 했다.
그런데 “목포살이 오래 허다 봉게 이제는 '에말이요∼'란 말이 얼매나 살가운지” 모를 지경이다. “혹여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에말이요∼' 이리 부르면 솔깃 여흥이 생”길 정도이다. 심지어 “이제 목포사람 다 되어서 '에말이요∼' 아무나 붙잡고 수작을 부리기도” 한다.
위의 작품은 “에말이요”의 언어적 가치는 물론 사회적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목포라는 지역에서 사용하는 방언인 만큼 국어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친밀감도 볼 수 있다. 표준어를 뛰어넘는 민중들의 정서와 전통과 풍습 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화자는 “에말이요”란 방언을 연결고리로 삼고 목포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목포 출신이거나 목포를 제2의 고향으로 삼은 문인들로는 김우진 극작가, 박화성 소설가, 차범석 극작가, 김현 문학평론가, 천승세 소설가, 최인훈 소설가, 김은국 소설가, 최하림 시인, 김지하 시인, 권일송 시인, 김진섭 수필가 등 대단하다. 근래에 목포를 제재로 삼은 시집으로는 김재석의 『목포』 『목포근대역사관 : 3․1운동 100주년 기념시집』 『목포문학관』, 김성호의 『목포는 항구다』, 명기환의 『목포에 오면 섬에 가고 싶다』 『목포 그리고 바다』, 김경애의 『목포역 블루스』, 고규석의 『새 목포의 눈물』, 서재복의 『목포항 비가』 등도 들 수 있다.
여기에 목포의 역사를 민중의식으로 계승한 최기종 시인의 작품들이 더해지게 되었다. 유구한 목포 문학의 지형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역사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전망은 진보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역사가 부단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진리로 인식하고 단편적인 개량을 넘어서는 움직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孟文在 |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