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산서원
안동 여행하면 떠오르는 건 안동찜닭, 하회마을, 봉정사, 그리고 도산서원이다. 안동에서 찜닭을 먹고 하회마을, 봉정사, 도산서원을 유람하는 것이 쉬운 여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안동이 전국에서 세 번째로 큰 면적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세 개의 유적이 안동 외곽에 위치해 있어 이동하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동 북쪽의 영주에 있는 부석사와 소수서원도 놓치기 아까운 곳이라 안동과 영주를 함께 보는 데 주말 이틀로 충분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영주 여행과 안동 여행을 각기 다른 시기에 떠났다. 안동은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축제로 인정받은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있기에 두 번을 방문했으며, 영주 또한 소백산 등산과 유교 유적 답사를 이유로 두 번 방문했다. 대한민국 유교 유적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안동과 영주이기에 두 번을 방문해도 모두 만족스러웠으며 다른 계절에 다시 방문하면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안동과 영주의 수많은 유교 유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은 도산서원이다. 도산서원은 일천원권 지폐에 그려진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으로, 다른 어떤 서원보다 가장 먼저 성역화되었다. 퇴계 이황이 조선 성리학에 끼친 영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다른 서원들보다 먼저 주목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이 문화재의 보호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도산서원 주변의 모습은 크게 훼손되었다. 문화적으로 아주 중요한 안동 같은 도시에 안동댐과 임하댐을 지어 유서깊은 수많은 마을들이 물에 잠기게 되었고, 도산서원 앞 유유히 흐르는 하천은 호수가 되어 도산서원의 일부였던 시사단은 섬이 되어버렸다. 비록 도산서원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지만 서원이 가지는 가치는 뛰어나기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50 - 도산서원 (陶山書院)
도산서원은 이황(李滉)이 별세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것이 시초이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陶山(도산)’이라는 편액(扁額)을 받았다. 도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 없어지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 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상덕사(尙德祠) · 전교당(典敎堂) · 전사청(典祠廳) · 한존재(閑存齋)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광명실(光明室) · 장판각(藏板閣) · 도산서당 · 역락서재(亦樂書齋) · 농운정사(隴雲精舍) ·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사에는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 제사 음식)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居室)로 사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 광명실로 되어 있는데, 1930년에 지은 동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遺墨)과 『주서절요(朱書節要)』 · 『이학통론(理學通論)』 ·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鄭士誠)이 처음 학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유물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를 할 때 지은 건물로서 이황의 유품인 자리 · 베개 등의 실내비품과, 매화연(梅花硯) · 옥서진(玉書鎭) 등의 문방구, 청려장(靑藜杖) · 매화등(梅花凳) · 투호(投壺) · 혼천의(渾天儀) 등이 소장되어 있다.
도산서원은 1969년 사적로 지정되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과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 과실 담는 제기) 7두(豆)이다. 서원의 재산으로는 전답 · 대지 · 임야 등이 있다.
안동의 도산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유학의 본산이자 서원 건축의 효시, 도산서원
도산서원을 방문한 시기는 늦가을로, 서원이 위치한 경북 안동 지방에 단풍이 물들 무렵이었다. 도산서원에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안동의 특징 중 하나는 각 관광지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연계관광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하회마을, 도산서원, 봉정사는 안동 시내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떨어져 있어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안동시에서 운영하는 시티 투어로 가면 훨씬 편할 수 있으므로 자차가 없다면 시티투어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
당시에 나는 욕심부리지 않고 안동을 여러번 방문해 도산서원, 하회마을, 봉정사를 각각 보기로 했다. 도산서원 또한 안동시내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으며, 도산서원과 가까운 안동군자마을까지 함께 보는 일정으로 여행을 짰다. 안동터미널에서 도산서원까지 이동하는 방법은 급행 3번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동안 이동하는 것이다. 급행 버스임에도 거리가 워낙 멀어 많은 시간이 걸리므로 일정을 잘 짜는 것이 중요하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도산서원까지 가는 길이 차도를 따라 내리막길로 나 있다. 도산서원은 조선 시대 기준으로 강을 끼고 있어 물을 구하기가 쉬워 학문을 연마하기 좋았다. 하지만 물을 쉽게 끌어올리는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강과 가까운 마을은 댐을 건설하며 잠기게 되었고, 도산서원이 위치한 곳 또한 엄청난 크기의 안동댐이 가두는 물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었다. 내리막길에서 보면 호수 위에 떠 있는 섬에 '시사단'이라는 건물이 세워져 있으며 선비들이 과거를 보는 곳이었다고 한다. 원래 위치에 있던 건물이 물에 잠겨 인공섬을 만들어 건물을 옮겨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도산서원은 영주의 소수서원과 달리 건물의 배치가 형식적이며 정교하다. 도산서원이 퇴계 이황이라는 대학자를 모시게 되면서, 이후에 지어졌던 서원들 또한 도산서원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서원 대부분이 '전학후묘' 양식을 따르는데 서당을 비롯해 유생들을 가르치는 강학 영역이 앞에 있고, 유학자들을 모시는 사당이 뒤에 있는 형식이다.
정문을 지나 오른쪽을 바라보면 도산서원의 기원이 된 도산서당이 보인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생전에 강학하던 곳이며, 1557년에 착공, 1561년에 완공되었다. 도산서당은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一자 형태의 단정한 3칸 건물로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다. 사색과 연구를 계속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단칸방을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뜻은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이고, 제자를 가르치며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하는데,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깃들어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라는 겸손의 뜻을 담고 있다.
정문을 지나 왼편에 보이는 건물은 '농운정사'다. 농운정사는 제자들의 기숙사이며 공(工)자형의 대칭적 건물로 2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2개의 반을 운영하는 이런 형태의 기숙사는 소수서원에서도 볼 수 있다.
도산서원에서 노비들이 기거하는 건물은 하고직사와 상고직사가 있다. 하고직사는 도산서당과 기숙사, 서재, 부속시설을 관리하고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상고직사는 서당 영역에서의 고직사와 구분하기 위해 지어졌다. 상고직사는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일반 살림집의 형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도산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전교당'이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학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며, 원장실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리학자들이 기피하는 짝수 칸의 구성이 특이하며, 서쪽 1칸만 온돌방이어서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온돌방은 원장의 거실로 명칭은 한존재(閑存齋)이다. 전교당 정면의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1575년 선조로부터 사액(賜額)받은 것이다. 강당 벽면에는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정조의 사제문(賜祭文), 국기안(國忌案), 사물잠(四勿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강학으로서의 핵심 건물은 전교당이며, 사당으로서 핵심 건물은 바로 '상덕사'다. 상덕사는 도산서원의 묘우(廟宇)로서 퇴계선생과 그의 제자인 월천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고 근엄한 맞배지붕으로 구성하는데 도산서원의 사당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월천은 선생 곁에서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고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서원에서 제자들을 훈육하였으며 특히 청렴 강직함이 돋보인 수재(秀才)이다. 주향위(主享位)는 정면 중앙에서 남향으로 '퇴계 이선생 (退陶 李先生)'을 모시고 종향위(從享位)는 동쪽벽에서 서향으로 '월천 조공 (月川 趙公)'을 모시고 있다.
도산서원은 소수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서원 탐방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소수서원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으로서 방문해야할 곳이라고 한다면, 도산서원은 조선 시대에 지어졌던 서원 건축 양식의 효시라는 점에서 반드시 가봐야 한다. 도산서원의 정교한 '전학후묘' 형식은 다른 서원에서도 만날 수 있는 서원의 기본 양식이라 볼 수 있으며, 이에 기초해 다른 서원들이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 바로 도산서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