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순왕후
천주교 탄압과 정권장악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서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邪學=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夷狄(이적)과 禽獸(금수)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五家作統法(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統帥(통수)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진 명함으로써 遺種이 없도록하라 ......]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사학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개혁군주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信西派라한다. 그리고 정조 사후 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邪學(사학)을 뿌리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벽파 중심의 정치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원릉(영조와 계비 정순왕후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소재 ,동구릉)
정순왕후 김씨는 그 공서파의 가장 강력한 배후 세력이었다. 정순왕후는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세력을 행사하였다.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 본인 스스로도 女主:女君임을 자처할 정도였다.
정권을 둘러싼 외척간에 싸움〓김씨 가문 대 홍씨 가문
영조는 정실 왕비 두 명과 후궁 넷을 두었다. 첫 왕비는 정성왕후 달성 서씨이며, 서씨가 죽은 후 들어온 두 번째 왕후가 정순왕후 경주 김씨이다. 정성왕후 서씨는 1692年12月7日 아버지 서종제와 어머니 우봉 이씨와의 사이에 오늘날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사저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이 되던 1704年 서씨는 연잉군 금(英祖)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는데, 그때 영조의 나이 열한 살이었다.
서씨의 아버지 서석제는 조선초기 뛰어난 학자인 자손으로 사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거동락한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덕수가 노론인 영인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 이도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7여를 낳았는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정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다섯째 딸 화협옹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57년 2월 15일 서씨는 예순여섯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늘날 경기도 고양군 신 도읍 용두리에 있는 서오릉의 홍릉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정순 왕후 김씨는 1745년 11월 10일 서산 골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이 되던 1759년 6월에 영조와 혼인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때 영조의 나이 예순 여섯이었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이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김씨가 영조에게 시집왔을 때 조정은 소론에 동정적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잔뜩 긴장한 노론 측은 영조의 계비로 들어온 정순 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아사하게 만들었다.
정순왕후 생가
그런데 사도세자가 죽은 후 홍봉한이 영조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받자 정순 왕후 김씨 집안에서 긴장하였다. 풍산 홍씨 집안과 경주 김씨 집안은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는 같은 노론의 입장에서 함께 일을 추진했으나, 막상 이권 다툼이 발생하자 정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론 대 소론으로 벌어지던 당쟁이 홍씨 집안 대 김씨 집안 즉 외척간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정순 왕후 김씨와 그의 동생 김귀주는 세손 정조가 즉위하면 김씨 집안 몰락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여 김씨 집안의 정권을 강화하고 홍봉한을 정계에서 실각시켜려 하였다. 그리하여 김귀주는 1790년 한 유를 사주해 “홍봉한이 세손 정조를 제거하고 대신 은언군 인을 추대하려 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홍봉한은 청주로 귀양갔고, 그 후 홍봉한을 회유하려던 세손이 영조에게 이를 모함이라고 아뢰어 귀양에서 풀려났던 일도 있었다.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다 .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후겸, 홍인한, 숙의 문씨, 문씨의 동생 문성국 등 사건의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귀양 보낸 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제외하고 모두 사사시켰다. 정순 왕후 김씨의 동생 김귀주도 예외 없이 귀양에 처해졌다. 정순 왕후는 비록 대비였으나 정조가 이미 성인이었으므로 대리 청정할 수도 없어 혜경궁 홍씨처럼 단식 등의 방법으로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준 홍국영을 도승지겸 금위대장에 임명하여 개혁 정치를전개해나갔다. 그리고 당색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문신을 양성하는 규장각과무신을 양성하는 장용영을 설치했다. 정조는 이 두 기관을 이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정권에서 소외당한 영남 남인들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정조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정비인 효의 왕후 김씨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1753년 12월 13일 서울 가회방에서 태어난 김씨는 열 살 때인 1762년 세자빈에 간택되었고, 14년후 정조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아버지 김시묵은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청풍부원군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홍상언의 딸이다. 영조는 현종 대에 김씨 집안에서 왕통을 이어준 연유로 김씨를 간택했다고 한다. 영조는 손부 김씨를 맞아들이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친히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오세(대) 후에 옛날을 이으니 이제야 종사가 튼튼해지는구려(五世繼石시寔爲宗國)”
손부에 대한 영조의 기대는 자못 컸다. 그러나 김씨는 정조와 금실은 좋았지만 몇 년이 가도 태기가 없었다. 14년이 넘도록 정조가 후사를 보지 못하자 조정과 왕실에서는 후궁을 들일 것을 요구했다. 영조의 3年喪이 끝나고 부묘도 끝난 1778년 5월, 대왕대비 김씨는 후궁을 들이라는 한글교지를 내린 것이다.
정순왕후의 6대조 단구자 김 적 묘소 : 조선의 국풍 박상희 소점.
전방의 娥眉沙(아미사 : 눈섭)로 인하여 정순왕후가 배출 된것으로 풍수가들은 말한다
단구자 김적 - 학주 김홍욱 - 김 세진 - 김 두관 - 김 선경 - 김 한구 - 정순왕후
이때 정무를 도맡아 처리하던 홍국영이 누이 홍씨를 왕실에 넣었으니, 바로 원빈 홍씨였다. 그러나 홍씨는 1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다음으로 들어온 후궁이 판관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였다. 정조는 아들을 보기 위해 회빈 윤씨의 처소를 자주 드나들었으나 역시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정조는 공교롭게도 윤씨의 시중을 드는 나인에게 마음이 끌렸다. 곧 창녕 성씨였다. 정조6년(서기1782년)9월7일 드디어 성씨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했다.정조는 이를 기념하는 別試를 실시하기도 했는데, 이때 무과에 2천6백 명이나 합격시켰다고 한다. 그 정도로 기다리던 왕자였다. 그리하여 성씨에게는 소용의 내명부 직첩을 내려주고 얼마 후 의빈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세살 때 세자로 책봉된 문효 세자는 다섯 살 때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성씨는 상심한 탓에 몸져누웠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후사가 없는 왕실의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고 또다시 후사를 위해 주부 박주원의 딸 박씨를 후궁으로 맞아 수빈으로 봉했다. 상황이었으나 왕비 김씨는 앉은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시조부 영조가 친히 글까지 써서 하사하였는데 아들은커녕 딸조차도 낳지 못하는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헛구역질을 하는 등 임신한 것 같은 생리현상 들이 나타났다.
왕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하여 떠들썩하였고 배가 점점 불러오자 조정에서는 산실 청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열 달이 지나도 아기가 나오기는커녕 출산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한 해가 지났건만 그대로였다. 아기를 낳아야 갰다는 일념이 너무 과하여 상상임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프닝이 벌어진 지 얼마 후 수빈 박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 왕자가 정조의 뒤를 잇는 순조다.
정조는 뒤를 이을 후사를 보자 온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었다. 이제 국정에만 전념하면 되었다. 집권여당인 노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영남 남인과도 손을 잡았고, 규장각을 통해 신선한 인재들도 속속 배출되었다.그 인재들은 사대 관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부국강병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이었다.
이제 조정 안팎은 서서히 당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치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정조는 순조를 왕세자로, 노론 시파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한 해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사상을 펼치려던 실학자들의 이상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천주교 탄압과 정권 장악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정순 왕후 김씨에게 때가 왔다. 열한 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조정 대신들이 왕실의 최고 어른인 김씨에게 수렴청정을 청한 것이다, 김씨는 이 요청을 일곱 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김씨는 마지못한 듯 허락하고 熙政堂(희정당)에서 수렴청정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전에는 수렴청정 의식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때부터 송나라 선인 태후와 정희왕후 윤씨의 고사를 토대로 절 목을 갖추기까지 했다. 이 절 목을 보면 임금과 똑같이 경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청 대, 그리고 진상 물건도 임금의 예와 똑같이 시행한다고 되어 있다.
수렴청정은 임금의 직접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김씨는 自派 세력인 노론 벽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그리고 노론 벽파는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개혁의지를 함께 하며 등용된 시파. 신서파, 남인 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첫 신호탄이 천주교, 즉 서학을 수용했기에 이를 이용하여 정계에서 제거하려 한 것이다.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선조 집권기였으나 숙종 때 갑술환국 이후 출사의 길이 막인 남인들이 서학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 조직의 개혁, 개조를 요구하며 성리학을 지배 질서로 하는 현실에 비판을 가하고 혁신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러한 혁신 사상에 양반 계층이 아닌 다른 소외 계층도 호응하게 되어 그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갔다.
초기에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 점차 신앙 운동으로 바뀌게 되어, 정조7년(1783) 중국에 사신 일행으로 간 이승훈이 북경 천주교회당에서 최초의 영세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남부 명례동에 최초의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천주교는 그러나 정조 12년 효 사상과 군신 관계를 어지럽히고, 나라 전체의 기강을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엄금해야 한다는 이경명의 상소를 기회로 사학(邪學)으로 규정받게 되었다.그 후 조정 대신들의 입장은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신 서파와 철저하게 반대하는 공서 파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천주교를 박해하지는 않고 탄력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교세는 비교적 확대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 모가 입국하여 활동할 무렵에는 전국의 신도 수가 4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했으며, 정조 말년(1800년)에는 1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교세가 나날이 확대되어가던 천주교는 정순 왕후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박해받기 시작했다. 1801년 1월 김씨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를 엄금, 근철 하라는 강경한 명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은 民家 다섯 집을 한 통으로 평성하고, 그 중에서 統帥를 뽑아 사학 하는 무리를 고발하도록 한 것이다. 다섯 집 중 한 집이라도 천주교를 믿으면 모두 연대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법이었다. 정순 왕후 김씨의 하교로 시작된 천주교 탄압에 벽파의 영의정 심환지 와 공서 파 대사간 목만중이 앞장섰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인 이가한, 권철신 등이 고문 받던 도중 옥사했으며,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등과 중국 신부 주문모도 참형 당했다. 뿐만 아니라 주문모에게 세례 받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인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등도 사사되었으며, 정약종 형제는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주문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제천군 봉양 면에 배론(舟論)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도의 마을에 숨어 지내면서 黃沈과 함께 이 일을 중국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 한 이 백서는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년 동안 학살당한 교인 수가 300명에 달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는 노론 벽파를 비난하던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순 왕후 김씨는 이렇게 천주교도를 박해함으로서 1년 만에 조정을 노론 벽파로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순조가 즉위한 후 각처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조3년에 평양 부와 함흥 부에서 큰불이 나더니 그 해 12월 창덕궁 선정전도 크게 불탔다. 또 그 닷새 후에는 장안의 종로 거리에서 다시 큰불이 솟아 인심이 흉흉해지기까지 했다. 정순 왕후 김씨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으로 돌아올 것 같아 선수를 쳐 28일 수렴청정을 거둔다는 하교를 내렸다.
김씨는 내심 조정대신들이 그 명을 철회하라고 간청하기를 원했다. 즉 조정 안팎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조정대신들에게 검증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조정에서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순 왕후 김씨의 바람은 김조순의 물밑작전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섭정을 거두고 난 지 1년 후인 1805년 1월12일 정순 왕후 김씨는, 노론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우고 예순한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원릉에 영조와 함께 합장되었다.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환갑이 훨씬 넘은 노인에게 시집간 김씨는 친정 집안을 위해 정계의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휘둘렀다. 영조가 살아 있을 때는 아버지 김한구의 당파와 뜻을 같이 하여 자신보다 열 살이나 연상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순조가 즉위한 후에는 친정 집안의 당파인 노론벽파를 위해 300명에 이르는 천주교도를 학살하였다.
김씨의 전횡은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며 개혁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던 조선의 역사를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의 정치가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는 데 발판이 되었다.
정순왕후 가계
조부 : 김선경
부 : 오흥부원군 김한구
모 : 원풍부부인 원씨
오빠 : 김귀주
남편 : 영조대왕
일족 : 김관주
일족 : 김흥경 : 秋史 김정희의 고조부
추사 .완당 김 정희 묘
추사 김정희 가계도
화순옹주 열녀문
영조의 제 2후궁 양빈이씨 소생 : 사도세자,화평옹주,화협옹주,화순옹주( 夫 김한신)
운현궁 현판 추사가 대원군에게 써준 노안당 현판
[자료 출처 열기블러그 발췌]
|
첫댓글 계비 간택시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목화 꽃이고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가 보리고개이고 깔고 앉을 방석에 아버지 이름인 김한구라고 적혀 있어 깔고 앉지 않았다는 총명이 넘쳤던 정순왕후...정치적인 이유로 종교박해 까지 ...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도 하였지요.
대단한 여걸입니다^^
어린 나이에 환갑 노인에게 시집 가다니~~
혹시 계수일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ㅎㅎ
요즘 여기서 역사공부와
해박하신 선생님들의
고견을 잘 공부합니다.
역시 박학다문 하신 운문샘
그대가 있어 참 좋아요.
과찬의 말씀올씨다요 ㅎㅎ
훌륭하신 여러선생님들이 많이 계시니
역시 참으로 좋슴니다.
아 ! 뭐 우리 같은 잡초인생이야
뽕나무 밭의 바래기 풀처름
뽕나무 덕에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커는 은덕을 누리는게
아니겠소이까? ㅎㅎ 그러니
이것도 다 운문의 복인가 하오이다 그려 ~~
한심 자고 났더니 시간이 이래 된네요
부산에 딸래미 보고 잡아 지금 부산간다요 ~~
@운문 딸래미 만나고 나니 세상 살맛이 확 생기지요?
힘든 일을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 자식"인것 같아요 , 부산 바닷바람과 따님을 만나고 확실하게 재충전하고 돌아오셨겠어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文柾 변성예 선생님 염려 덕분에 잘 다녀 왔습니다. 딸래미는 도서관에 공부한다꼬 캐서 니 보고싶다 카도 몬하고
에어컨 청소하기. 듀오백 예쁜 의자 구입하기. 기타 구석구석 전기,방범문제 점검하기. 요래만 해주고 퍼뜩 왔심더. 선생님 말씀대로 힘든세상 살아가는 용기백배의 존재가 딸래미인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 고맙습니다^^**
운문선생님 덕분에 역사공부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덕분에 공부 잘하고갑니다...^^
위로 올라가면 큰집이 되는데 종친회 가면 만나는 분들이십니다. 추사가문,정순왕후 가문 대단하지요.? 그 이면엔 단구자 김 적이란 분이 엄청난 부자였는데 또한 임진왜란을 당하여 엄청난 적선 적덕을 쌓아 후대에 이러한 인물들이 태어난다는 풍수하시는 분들의 한결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역사를 잘 알지못하지만 공부의 촛점은 늘 인과관계에 두고 있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불적선지가 필유여앙 ! 훗날 추사선생이 평생을 귀양다녀야만 했던 사실이 천주교인들을 무고하게 박해한 업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운문 추사의 가문이 영조대왕과 혼맥을 맺었으니 대단한 가문이 맞습니다.
@운문 뿌린만큼 거둔다는 것이지요, 그 냥반이 그렇게 되서 그렇게 귀양을 ,,,
@단사표음 단구자 김적公과 연안 이씨 월사가문의 월사 이정구는 동문수학한 사이로 외외종숙이였고 이때 이미 김적가문은 부산수 이저와 혼인을하여 혼맥이 왕실과 닿아 있었습니다. 연안이씨 월사 가문. 반남박씨.청풍김씨 모두 대단한 가문이지요.
@운문 월사 이정구 집안은 대제학을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사계 김장생의 가문과 쌍벽을 이루어 이른바 "연리광김"이라는 말이 나왔지요.
@단사표음 연안이씨 월사 이정구가문. 반남박씨.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가문.달성서씨 약봉 서성 조선시대 大 문벌가문이라는 세평이지요 ?
@운문 반남박씨는 세종의 장인 심온을 죽이는데 앞장 선 박은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으며 문묘에 배향된 박세채와 박지원, 박규수, 박영효도 이 가문 출신입니다. 반남은 나주에 있는 지명입니다. 심온이 죽으면서 청송심씨는 반남박씨와 혼인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지요.
@단사표음 ㅎㅎㅎㅎ 절묘합니다.
근데 이렇게 깊은 내용'까지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알고 계시는지 늘 감탄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들어와서 천천히 읽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