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여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https://youtu.be/kj71jzO5U8k
아이유(본명 이지은, 李知恩)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A4BUvd46F0E&t=18s
적우(赤雨, 본명 박노희)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UJSnNkYrfH0&t=12s
https://www.youtube.com/watch?v=6Pbpkc_dUxY&t=43s
정미조(鄭美朝) 박사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yKAQtB0hx6s
심수봉(본명 심민경, 沈玟卿)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P1zhuGliPmQ&t=6s
김정희 노래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제 입가를 끊임없이 맴도는 노래 한 곡이 있습니다. 바로 김소월 님의 시에 곡을 붙인 '개여울'이란 곡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적우가 부른 '개여울'을 통해 이 노래를 처음 접했습니다. 적우는 아주 독특한 목소리를 지닌 가수지요. 그녀의 허스키하고 중성적인 목소리는 거칠고 탁하지만 한없이 서글픈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이유가 부른 '개여울'도 적우의 노래 못지않게 가슴을 적십니다. 아이유는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목소리를 지녔지요. 아이유와 적우는 상반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수이지만, 둘 다 '개여울'의 시적 정서를 탁월하게 표현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개여울’은 ‘개천의 여울’을 말합니다. 물이 흐르는 지형에 경사가 생겨 흐름이 빨라지는 곳이지요. 나는 날마다 이 개여울에 나와 앉아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개여울과 그 앞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이 시의 정경을 이루지요. 당신은 가도 아주 가지는 않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슨 일로 그리 떠나는지 알지 못 한 채, 나는 그 약속만을 되새기며 개여울에 앉아 떠난 님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나는 압니다. 당신이 내게 한 약속은 돌아오겠다는 다짐이 아니라는 것을요. 헤어지더라도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말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홀로 개여울에 주저앉아 있습니다. 봄바람에 잔물결이 일고 파릇파릇 풀이 돋아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염없이 개여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출처 무아
이 시와 노래에서 가장 애절한 대목은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이란 부분일 것입니다. 제 입가를 무한히 맴돌던 구절이기도 하고요. '가는데 아주 가는 건 아니다.' 이런 역설적인 표현은 남겨진 이의 고통을 배가합니다. 속된 말로 희망 고문인 것이죠. 육신은 헤어져도 너와 나의 사랑은 잊지 말자는 말은 나를 사랑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말일 뿐입니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처럼 무책임하고 비겁한 말로만 들립니다. 적어도 떠나가는 이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여울에 나와 주저앉아 있는 시 속 화자의 뒷모습에 화가 납니다. 못 만날 줄 알면서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가련하고 처량해 죽겠습니다.
저 역시 어느새 사랑을 주고받는 거래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나 봅니다. 이 시의 화자가 답답하다 처량하다 말하는 것을 보면요. 사랑하는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도 떠나가는 이가 애틋한 사랑의 맹세를 남기는 일도 지금 시대엔 불가능하게만 보입니다. 사랑을 쉽게 시작하고 쉽게 끝내버리는 요즘 이런 사랑은 흔치 않습니다. 전화도 있고 메일도 있고 카톡도 있는 시대에 그와 함께했던 장소에서 홀로 하염없이 님을 그리며 기다리는 일이 과연 가당키나 할까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다들 바보라고 비웃겠지요. 김소월 님이 이 시를 짓던 시대에는 전화도 메일도 없었기에 어쩌면 이렇게 느리고 답답한 사랑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바보는 망부석이 되어 평생을 한자리에서 한 사람만 기다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개여울을 들여다보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날카롭게 가슴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사랑은 하염없는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이치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이 꿈꾸었던 지고지순한 사랑은 이런 것이었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라고 말할 수 있는, 평생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랑이었지요. 어느새 그러한 순수를 잃어버리고 '갈 테면 가고 올 테면 오라지' 하는 마음으로 셈놀이 하듯 사랑을 말하는 요즘 세태가 씁쓸해집니다.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왜 이렇게 제 가슴은 아프고 아린 것일까요. 숭고한 사랑의 본능이 아직은 죽지 않고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까닭일까요. 그렇다면 참 다행입니다. 제게 아직까지 사랑을 노래할 자격은 있는 걸 테니까요.
출처 Pixabay
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대사
잊지 말라는 부탁, 정미조 '개여울'
21세기 한국대중가요계는 크로스오버(cross over) 가객들이 몰려드는 고속도로가 되었다. 유행가 리메이크 바람결에 나부끼는 깃발 아래로 전통국악·성악·팝·오페라·뮤지컬·연극 등을 전공한 가수들이 몰려든다. 그들 스스로의 인생 지향을 앞 다투어 바꾸려는 경향(思潮, trend)이 가마솥에서 끓는 물 같다. 이런 시류의 한 복판에서 되짚어볼 노래가 있다. 그림을 그리기를 전공한 전문가가 생경스럽게 대중가수의 문으로 들어선 예다.
1972년 정미조는 물감이 질펀하게 묻은 붓을 놓고, 김소월의 시 '개여울'을 대중가요로 절창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전공(專攻, major)과는 들어서는 대문이 다른 길이었다. 이런 예는 크로스메이저(cross major)로 통칭하면 좋으리라. 이 노래는 당시 23세 그녀의 데뷔곡인데, 메시지는 나를 잊지 말라는 부탁과 약속, 이를 뇌까리는 독백과 방백이다.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하는 혼잣말.
시인의 고향(故鄕) 구성(북한)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시(詩語)와 가요(노랫말 가사)의 한계를 분간하기는 쉽지 않다. 노랫말로 환생한 이 시가 더욱 그렇다. 시는 가슴속에 녹아들고, 노랫말은 귓속을 맴돌아야 대중들의 인기 온도계를 상승시키는데, '개여울'은 둘 다에 다다랐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가. 소월 형님의 속내가 복잡하다. 이런 혼잡한 마음그림이 화자(話者)와 독자(讀者)와 청자(聽者)를 하나의 창자(唱者)로 아울렀다. 유행가의 매력이요 마력이다.
'개여울'은 김소월이 21세에 『개벽』지에 발표한 시다. 이 시에 이희목이 가락을 얽었는데, 이 노래를 부른 원곡 가수는 김정희(1945년 평북 운산 출생)다. 1966년에 처음 불리고, 1972년에 정미조가 리메이크를 했다. 정미조는 이 노래를 부를 당시 원곡 가수가 있었음을 알았을까. 당시 김정희는 4주 동안 KBS 라디오 인기가요 정상을 지켰지만 음반으로 발표된 사실을 몰랐었단다. 의도적으로 숨긴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은 물속에 잠긴 빙산(氷山)처럼 많다. 특히나 대중가요·유행가·트로트는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고 아우르면서 진화·퇴화·승화된다. 그래서 노래는 세상과 통한다고 하며, 유행가를 역사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개여울' 속의 이별은 영별(永別)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이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는 원망이다.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던 그대는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한다. 그 무엇이란 그대가 말한,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던 말이다. 돌아오겠다는 재회의 약속이 아니라, 잊지 말고 살자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영원히 헤어져 살자는, 이별의 약속은 아니었을까 라고 혼자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 속의 그대는 김소월의 이루지 못한 연인, 3세 연상의 오순이라는 여인이리라. 그녀는 19세에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갔다가 3년 뒤에 남편의 폭행으로 이승을 등졌단다. 이 상가(喪家)에 문상을 다녀 온 후 소월이 남긴 시가
'초혼'(招魂, 죽은 사람 혼령을 부르는)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75세 정미조의 뒤돌아보는 인생길은 가수인가 화가인가? 대중들 대다수는 가수로 기억하지만, 세월자락에 길게 걸린 그녀의 삶 대부분은 화가(미술전공·그림유학·그림선생·작품활동)였다. 가수 7년에 그림쟁이 40여 년인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축복의 두 갈래 길을 걸었다. 문화예술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쟁이(환쟁이·옹기쟁이·풍각쟁이·춤쟁이)라고 하는데, 노래쟁이 유행가수가 대중들과의 직간접적인 소통을 가장 많이 한다. 대중성·통속성이 예술성·심미성보다 현실 삶에 더욱 밀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대중가요 유행가락은 허공중에 맴돌아야 생명이 길다.
정미조는 1949년 김포에서 출생하여 1972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파리 제7대학을 졸업했다. 그 해
'개여울', '그리운 생각'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여, 이 두 곡을 데뷔곡으로 기록한 자료들도 있다. 이후 수원대 서양화교수를 퇴임하고 가수로 회귀 했다. 그녀의 회기 노래가 '귀로'(2016년)다. 2021년 KBS 아침마당에 3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정미조가 출연했다. 이날 정미조는 ‘대학 2학년 봄, 스타를 초대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패티김이었다. 저도 당시 학교에서 스타였는데, 노래를 먼저 부르고 왔더니 패티김 선생이 너 진짜 노래 잘한다고 하며, '패티김쇼'에 게스트로 출연시켜주겠다고 하시더라.’라며 패티김과의 인연을 이야기 했다.
당시 이화여대는 학생외부활동을 금지했던 시절이다. 가수 정미조는 1979년 프랑스로 화가를 지향하며 유학을 떠났다. 이후 정미조는 ‘그림만 그렸다. 노래 부를 새도 없었다. 유학시절에는 공부하느라, 돌아와서는 강의하느라, 매년 전시를 하느라 주말에도 그리고 방학도 없었다. 그렇게 20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며 근황을 이야기 했다. 이런 정미조가 가수로 복귀한 것은 2013년 최백호가 정미조를 찾아가서 노래인생을 의논한 인연 덕분이다. 낭만가객 최백호의 어린 시절 꿈은 화가, 그는 가수의 길 끝자락에서 다시 붓을 든 매니아 화가이다.
본명 김정식, 소월은 1902년 평북 구성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그의 아버지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그런 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이후 서울로 와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스승 김억을 만났다. 1920년 동인지 『창조』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열네 살, 오산학교 재학시절 고향 처자 홍단실과 결혼했다. 3.1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으며, 1923년에는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문학 동아리 '영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왔으나, 실패하자 처가가 있던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여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고, 1934년 12월 평북 곽산에서 아편 과다복용으로 서른셋의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개여울' 노래는 심수봉이 2005년, 적우가 2006년 리메이크로 불렀다. 2008년 영화 '모던보이' 중에서 김혜수가 불러내기도 했었다. 소월의 시는 우리 서정시의 꽃이다. 그의 영혼을 울리는 시어가 오선지 악보 위에 드러눕혀진 곡은 '개여울'·'진달래꽃'·'산유화'·'길'·'님의 노래'·'님에게'·'맘속의 사람'·'눈물이 쉬루르 흘러납니다'·'하얀 달의 노래'·'그 사람에게'·'초혼'·'풀따기'·'자전차'·'님의 말씀'·'기억', '깊고 깊은 언약'·'부모 등 대중가요와 가곡이 있다.
2023년 여름 75세 정미조가 드라마 주제곡이던 '어른'을 리메이크했다. 원곡 가수 손디아(Sondia)는 실용음악학원 보컬트레이너 강사였다. 이 노래는 2018년 3월~5월에 방영된 16부작 드라마. '나의 아저씨' OST.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웃는 사람들 틈에 이방인처럼
혼자만 모든 걸 잃은 표정.’
노래는 드라마 속 주인공 지안이(21세)를 위로하는 곡이었다. 정미조는 드라마 속 할머니의 심정으로 이 노래를 불렀단다. 어른은 살아낸 지난 날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MZ세대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노래.
한국근현대사 100년의 세월에 딴따라 라는 말의 통속적 가치가 트로트 열풍이 가라앉지 않는 오늘날만큼 빛난 적이 있었나. 이 노래를 2021년 트롯 전국체전에서 권민정이 열창하면서, 정미조에게 묵시(默示)의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크로스메이저(cross major)의 길을 걷는 행복한, 축복을 받은 예술가여, 아름다운 아침, 미조(美朝)여.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
옮겨온 글 편집
청산 노승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