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를 무척이나 믿고 사랑합니다. 아내도 나만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 후 아이도 낳고 꿈 같이 행복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지요.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내가 집안에서만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기에
우리는 소위 맞벌이라 불리는 생활을 했지요.
나의 직업은 시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일이었기에 아내가 일하는 낮 시간 동안 아이를 맡아서 키웠
습니다. 틈틈이 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았기에 아내가 아이를 돌보는 밤시간에도 휴일에도 쉴 틈이 별로
없었답니다.
어느 날부턴가 아내는 점점 더 바빠졌고 야근을 하는 날도 점점 더 늘어만 갔습니다. 덕분에 내가 아이를
돌보아야만 하는 시간도 늘어갔지요.
아내는 일이 바빠져서 사업파트너와 저녁 시간에 자리를 함께 해야 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조만간
큰 건들이 정리되면 이렇게 바쁜 일들도 끝이 날 거라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아이를 돌보며 일을 하는 시
간이 점점 더 힘겨워졌지만 아내의 말을 믿고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아내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늦은 밤시간에 귀가했지만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옷을 벗는데
보니 목과 가슴에 작은 상처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기도 했지요.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아내의 평소보다
훨씬 더 피곤하고 힘든 표정 때문에 캐묻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고 애썼습니다.
말 없이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지만 오랜 시간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습니다. 아내는 깊이 잠든 것인
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지요. 그러기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는 줄로만 알았던 아내는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꼼짝도 않고 누워있었던 것은 아마도 잠이 오지 않았지만 자는 척하고 있
었던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야?”
아내는 꽤나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죠. 째깍째깍 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
리가 몹시도 초조하고 지루하게 들려왔습니다. 내 평생 가장 고통스럽고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지요.
아내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나의 품으로 안겨와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문이 터져 나
오기 시작했지요.
“작년부터 발굴해서 알게 된, 사업상 아주 중요한 파트너가 한 명 있어. 일을 핑계 대고 은근히 나에게 접
근해 치근덕 거리기 시작했지. 그 사람이 소개해서 성사된 일들이 워낙 큰 건들이기 때문에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지. 그러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리고야 말았어.”
뭔가 단단한 것으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감정을 삭히는 듯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점점 거칠어졌어. 오늘 목에 생긴 상처도 사실은 그 사람 때문에…”
아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멍해졌던 머릿속이 갑자기 색색의 실타래
를 엮어놓은 듯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갔지요. 아내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일까? 아니, 그보다
도 그 죽일 놈이 아내를 범했다는 말인가? 영화에서 보았던 온갖 무서운 생각들이 치솟아 오르는 화와 함
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요. 낫이라도 들고 그 놈을 쫓아가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은 아마 경험
해본 분들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이 따로 있었지요. 아아. 아내
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고야 만 것일까요. 나를
무슨 성인군자처럼 보기라도 한 듯이. 어쩌면 아내는 너무나 복잡했던 심정 때문에 잠시 이성을 잃어버
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넘어선 안될 선을 넘자 그는 계속해서 무리한 요구들을 해왔어. 나도 처음에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었어. 그렇게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위로해왔지. 하지만 그와 그런
식으로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나 자신이 자꾸 싫어지기 시작했어. 왜냐면……”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는 그것이 어떻게든 현실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나도 모르게 점점 그와의 만남을 즐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두려움은 화로 바뀌었고, 화는 불 같은 욕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둘 다를 죽이고 싶다는 욕
망. 그 놈이 강제로 아내를 범한 것이라면 나는 아내를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아니 꼭 용서하겠다
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습니다. 나의 마음도 함께 그 강을 건너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품에 안겨있던 아내를 옆으로 내팽개치고 – 안겨있는 아내가 더욱 가증스럽게 느껴졌지요 –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이 집에서 당장 나가! 나가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면서 마음껏 살아봐!"
그러고는 오히려 집을 나선 것은 나 자신이었지요. 도저히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만 같아서 아내와 한
공간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집을 나선 나는 복잡한 생각의 바다 위에 부유하면서 하염없이 길을 걸었습니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
면…… 믿었던 아내가 나를 그렇게 배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30년이 넘도록 단란한 가정을 기다리며 살
다가 이룬 꿈이었습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도 가졌고 정성스럽게 키워오고
있었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많은 부분들을 희생하였고, 또 아내의 사회 경력을 돕기 위해 내
일에 들이는 시간마저도 줄여가면서 내 손으로 직접 아이를 키워왔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한 순
간에 물거품처럼 깨져버리는 순간이 느닷없이 닥쳐버린 것입니다.
나는 억울하고 또 분하였습니다. 나의 모든 인생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서 아내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어디로 향하는지 특정한 목적지도 없이 걸었습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순간의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희망 밖에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이 그저 꿈일 뿐이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제발…… 나는 신께 간구하는 심정으로 나의 몸 여기저기를 만
져보고 느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제발 현실이 아닌 꿈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를…… 그러나 손에 만
져지는 감촉은 이 현실이 단단하기가 그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었습니다.
만약 이 순간이 그저 꿈일 뿐이라면 나는 아내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신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꿈이라면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일 테니까요.
문득 옛날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하여 선잠에 들었다지요. 그는 꿈 속에서 어
느 사신의 초청으로 집 마당의 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그곳의 왕녀와 결혼하고 어느 지역의 태수가 되
어 호강을 누렸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왕녀는 죽고 고향으로 돌아와 깨어보니 자기 집이었다지요. 그
가 마당으로 내려가 나무를 조사해 보니 꿈 속에서의 나라와 같은 개미의 나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어쩐지 이 지극히 단단하게만 느껴지던 현실이 꿈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많이 걸었기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진 탓인지도 모르겠군요. 이 인생이 정말로 꿈처럼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나는 아내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그 죽일 놈조차 용서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이것이 한갓 꿈에 지나지 않는다면 내가 용서하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으며
내가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담아둘 수 밖에 없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는 정처 없이 걷던 발걸음을 다시 반대방향으로 돌렸습니다. 돌아가는 걸음 걸음마다 마음이 조금씩
더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이 걸음을 통해 한없는 자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크나큰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저 꿈 같은 인생
에 마음 가득히 집착하는 것 아닌,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는 자유를.
나는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아내가 밤새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피곤한 기색으로 나를 향해 달려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나의 마음은 고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와 아내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집을 나선 후 몇 시간을 걷는
동안 경험한, 나의 마음 속에 담겨있던 모든 일들이 아내의 마음에 그대로, 마치 마음으로 파일을 주고
받듯이 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또한 아무런 말을 듣지 않고도 아내의 진심을 느낄 수 있
었습니다. 알 수 없는 전율에 가슴이 떨려왔습니다. 아내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하다고, 그
리고 사랑한다고……
내가 빙긋이 웃으며 양팔을 벌리자 아내가 나의 품으로 안겨왔습니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좀 더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시 그녀와 함께하는 꿈 같은 현실 속으로 빠져듭니다. 다만 그 꿈의 모든 것들을 지
켜보면서, 꿈 속에서 일어나는 내 마음의 모든 움직임들을 지켜보면서, 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
음과 함께하면서.
갑자기 나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곁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모습을 봅니다.
‘꿈이었구나!’
나는 한편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다른 한편으론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꿈에서 깨어있는 이 현실이 또 다른 꿈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일장춘몽으로 느껴지기 시작했
습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크나큰 자유와 함께.
세상 모든 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꿈꾸며...
- 전용석(「아주 특별한 성공의 지혜」,「나를 사랑하며 산다는 것」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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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은유와 메세지가..... 감사를 보냅니다... ^.^
마지막 반전 까지...
이게 대체 몬말인가 깜짝 놀라버렸습니다.. 그런일은 없어야겠져^^ 알콩콩 가족이 행복하게 사세요 아마 그럴수 밖에 없을듯*^^*
너무도 생생한 이야기에 아침부터 놀라버렸지만, 생생한 간접 경험으로 제 일인듯 느껴지네요, 휴~ 다행입니다. 아무리 꿈일지라도 그런 일을 용서하시다니 대단하네요, 성불하세요~*^^*
전 언제쯤이면 마음이 자유로워지게 할수 있을지... 그날이 오기까지 열심히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하고싶습니다.^^ 넘 좋은글 감사합니다.
글의 전개가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을 떠올리게 하네요.
ㅋㅋ 꿈인줄 알면서 읽었어도 아내한테 마구 화가났다는!! 정말 대단한 경지이십니다^^;;; 배우자의 외도~~전 아무리 도의 경지에 이르러도 별로 용서하고픈 생각 없는뎅 ㅋㅋㅋ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일장춘몽이라고 하지만, 정말 꿈이였지요? 현실에서 배우자의 외도를 용서하고 살기엔 참 많은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겠지요...그래도 남편분의 진실한 사랑이 느껴지네요,..결국은 진실로 사랑하느냐가 문제겠지요..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놀랬습니다. 구운몽에 성진이 팔선녀와 인간으로써 세속적 행복을 마음껏 경험하고 꿈을깨고 나서 스승님에게 말했던 대목이 생각 나네요 "스승님, 꿈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니까 스승이 "니가 아직도 꿈과 현실을 모르는게냐 " 하면서 머라하던 그 대목이랑...ㅋㅋㅋ
가슴이 찡 ~ 모든것은 마음먹기에달렸는데-마음을 비우면 우주도 품에 안을수 있다던데 ! 좋은하루되소서
닫힌 문 앞에서 너무 오래 서 있지마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저는. 꿈 속에 부인이 그냥 돌아 섰다면? 또 그 가 집요하게 나온다면? 부인이 평생을 속이며 살아갔다면? 내 마음도 일장춘몽 ... 믿음도... . 사랑하는 영원한 순간 그것만 .
좋은글 담아 갑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모셔 갈 께요.
^^좋은 글이군요. 일장춘몽, 힘든 일은 모두 인생은 꿈과 같은 것, 하며 이겨낼 수 있는 지헤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아~~ 깜딱이야~~~~~ㅋㅋ 하지만 진한 감동이 밀려오네요^^~~~~~아~~ 소설을 쓰실 생각은 없으신지~ 생생한 묘사에 팬들이 많을 것 같아용~~~ㅋ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여? 갈 길이 멀어여...
저도 그런 감정이 마음 속에서 무한해 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그대로 순간이었지요. 그리고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느꼈는지 기억도 안나구요...???
개미이야기는 중국의 전해내려오는 민화입니다. 어렸을적 그 이야기를 읽었어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