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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논검(華山論劍)
6부 풍류여마 매초풍 (전3권)
지은이: 김용
- 차례 -
번역을 마치고
작가 소개
제1장 여씨네로 몰려드는 사람들
제2장 여인의 피맺힌 원한
제3장 추격당하는 흑풍쌍살
제4장 흑풍쌍살의 무공연마
제5장 소녀공을 얻은 매초풍
제6장 소녀공을 얻은 매초풍
제7장 소요관의 결투
번역을 마치고
이 작품은 홍콩의 문호 김용의 대하역사소설 《화산논검(華山論劍)》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
다. 원저자 김용은 본명이 사량용(査良鏞)으로 1924년 중국 절강성 해령에서 출생했다. 상해
에 있는 동오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현재는 홍콩 최대의 일간신문 《명보(明報)》
의 주필이자 사장이다.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 문단의 기인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왔다. 중국 역사에 정통하고 방대한 유가(儒家)의 경서를 섭렵하고 노장 철학과
불경에 심취하여 학문적 영역을 넓혀 온 그는 이와 같은 해박한 지식을 밑거름으로 빨려 들
어가는 문장과 비할 데 없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불후의 명작들을 저술하였다.
그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를 존경하는 애독자는 홍콩과 대만은 물론이고 한국과 구미 각국에
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고 그 수가 수억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근래 들어 중국 대륙에 휘몰
아친 김용의 열풍은 대단하여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중이며 등소평 역시 그의 작품을
즐겨 읽는다는 것이다.
김용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름대로 개성이 있다. 그의 붓끝에서 창조되는 수
많은 인물들은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그리하여 독자를 작품 속
의 분위기에 끌어들여 몰아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 김용의 작품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영원불멸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학문을 '김학(金學)'이라고
부르며 1980년 대만에서 발간된 '김학연구총서'만 해도 무려 18권이나 된다.
김용은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화산논검》은 《소설 영웅문》
의 전편(前篇)으로 최근에 발표되었으며 현재 김용이 집필하고 있는 중인 것을 발표되자마
자 긴급 입수하여 번역하였다.
이 작품 《화산논검》은 모두 6부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 제5부까지는 서독 구
양봉 전기에서 시작하여 동사 황약사, 홍칠공, 단지홍, 왕중양 등 다섯 기인의 일대기를 소
설로 그려 내었고, 제6부는 그 다섯 명의 절세 고수들이 화산에서 무예를 겨루는 장엄한 과
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였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다섯 사람은 《소설 영웅문》에 등장하
는 전대의 기인들이다. 《소설 영웅문》의 주인공인 대협 곽정이 등장하기 이전에 활약했던
다섯 선배 고수들끼리 얽히고설킨 은원관계를 흥미있게 소설로 꾸민 이 작품 《화산논검》
이 집필됨으로써 비로소 비로소 《소설 영웅문》은 시작과 끝이 어울려 수미일관(首尾一貫)
의 완결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산논검》의 제1부는 서독 구양봉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구양봉을 중심으로 황약사,
단지홍, 홍칠공, 왕중양의 활약이 그려진다. 제1부는 구양봉이 합마공을 익혀 천하의 고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구양봉의 내면심리를 추적하면서 선악·남
녀·정사·생사·애증의 대립을 지양시켜 구양봉을 진정한 대악인으로 잘 표현해 냈다는 점
이다. 장을 넘기고 권을 더할수록 김용의 필력이 용트림하는 《화산논검》은 가히 대하역사
소설의 압권이다. 신필 김용의 재능에 대해 더 말하는 것부터가 사족이라고 믿으며 감히 일
독을 권한다.
1993년 12월
옮긴이
♧ 작가 소개 : 김용(金庸)
수십 년 동안 신필의 칭호를 들어온 김용은 원명이 사량용(査良鏞)으로 중국 절강성 해령에
서 1924년 출생하여 동오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젊었을 때는 중국 대륙에서 발간
되는 대공보(大公報)의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홍콩 최대의 일간신문 명보(明報) 의 주필
겸 사장으로 있다. 방대한 유가의 경서에 심취하고 노자와 장자의 철학은 물론 불경을 두루
섭렵한 그는 해박한 지식과 신기한 상상력으로 스케일이 웅장하고 이야기 흐름이 양자강처
럼 힘찬 명작들을 발표하여 필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는 이미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어 애독자가 수억에 이른다는 사계의
통계이다.
그의 작품은 독자를 몰아의 경지로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을 뿐 아니라 영원불멸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그의 작품을 연구한 김학연구총서 가 이미 18권이나 발간되었다.
이 작품 화산논검 은 모두 10부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의 최대 걸작 가운데 하나이며,
구양봉, 황약사, 홍칠공, 단지홍, 왕중양, 양과(후반기), 곽양, 매초풍, 황상 등의 아홉기인들
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대하역사소설이다.
화산논검 으로 인하여 비로서 소설 영웅문 은 시작과 끝이 어우러진 수미일관의 미(美)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역자 박영창은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사고 현재 무협소설 작가, 번역가, 평론가로 활동중
이다.
역서에는 《동방불패》, 《녹정기》, 《천룡팔부》 등 다수가 있다.
군사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전두환 시절 《무림파천황(武林破天荒)》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군사정권을 비판했다하여 구속되는 등 커다란 필화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제 무협소설계에서 명실공히 제1인자적 대가(大家)로서 무협소설을 문학의 한 장르로 자
리잡게 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제1장 여씨네로 몰려드는 사람들
방원(方圓)에서 여(廬)씨 가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이곳의 산과 들
은 물론 날아다니는 새까지 여씨네 소유이며, 심지어는 강물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
마저 여씨네 것이라는 노래가 불려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백 리 이내에 집이라고는 오직 여씨네 하나뿐이라는 거였다. 전에는 여
써 성을 쓰는 집이 여러 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다른 성씨로 고쳐 버렸고 끝내
고집을 부리던 사람들도 결국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이 방원 백 리의 중심에는 그리 크지 않은 읍이 하나 있었다.
그 읍을 여가집(廬家集) 불렀다. 이 여가집의 한복판에는 황궁보다는 못하지만 굉장히 호화
로운 여부(廬府)가 있었다. 그 곳에는 여원외(廬員外) 비롯해 그의 세 아들과 딸 하나가 살
고있었다.
아들은 여승(廬勝), 여퉁(廬通), 여강(廬强)이었고 고명딸은 여소교(廬小嬌)였다. 여승, 여통
그리고 여소교는 본처의 소생으로 적자(嫡子)였고 셋째 여장은 서자(庶子)였다. 그래서인지
여강은 여러모로 형제들 사이에서 설움을 많이 당했다. 하지만 그는 생모가 근방에서는 알
아주는 미인이었던 덕으로 인물만큼은 그중 가장 나았다.
그는 두 형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영준한 외모 때문이었다. 두 형들의
냉대를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의 인물은 아주 뛰어났다.
여원외의 첫째 소실인 여이부인(廬二夫人)은 총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집에서 멸시
를 당하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조처를 취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백
리 밖에 신비스럽다고 소문난 방파(幇波)에게 보냈다. 배워서 성공만 하면 여씨네 새 주인으
로 앉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한몫 했다.
이 여씨네 가문에는 강자가 주인이 되는 법 아닌 법이 있었다. 자손들은 서열을 가리지 않
고 오직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여씨네 가문이 백여
년 동안 번 영을 유지해 온 가장 큰 밑거름이기도 했다.
그러자 여원외의 본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 또한 여씨 가문의 가업이 장차 소실의 자
식에게 넘어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사와 늙은 유생을 데려다가 여승
과 여통을 가르쳤다. 그들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자 여장
을 누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환경이 좋으면 좋을수록 인재가 나지 않
고 둔재만 만들어지는 법인지 두 아들은 그녀의 뜻과는 영 딴판으로 놀았다. 두 아들은 먹
고 마시고 도박하고 여색을 밝히는 데에만 신경을 쏟을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총명함과 슬기를 필요로 하는 게 도박인데 두 아들은 이것을 가장 못했
다. 그래서 도박꾼들은 심심치 않게 찾아와 두 아들에게서 넉넉한 돈을 얻어 가곤 하였다.
여씨네에는 늘 은자가 풍족하기 때문에 도박으로 흘러 나가는 은자쯤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
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여씨 가문의 위신이 깎이고 있다는 게 더 큰 골칫거리였다.
여원외는 자식들이 이렇게 나가다가는 큰일나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두 아들을 불러
도박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아버지에게 심한 지청구를 듣고 난 여승과 여통은 입이 퉁퉁 부어 밖으로 나왔다.
"이봐 아우, 아버지께서 후회할 일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일까?"
"아무렴, 아버지가 우릴 잡아먹기야 하겠소 염려 마시오. 괜히 해보는 소리일 것이니…….
아, 그 독한 범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도 모르슈."
형 여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기껏 잃어 봐야 은 몇천 장인데. 영감 모르게만 하면 되겠지."
이때 마침 두 아들이 주고받는 소리를 들은 여씨 부인이 호통을 쳤다.
"이것들아, 글을 못 배우고 무공 또한 익히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절대 아버지의 비위를 거
슬려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왜죠?"
여통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멍청하게 물었다.
여씨 부인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놈들아, 이제 여강이 무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오면 어쩔 셈이야? 그걸 보고 네 아버지가
그 녀석만 품에 안게 되는 날이면 이 집은 몽땅 그 놈에게 넘어간다구"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여전히 맹한 얼굴을 한 여통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늘 뭐라고 하였더냐? 아버지한테 효성을 보이며 좀 곰살궂게 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 아버지를 늘 즐겁게 해주는 것만이 너희들이 살아 남는 길
임을 명심해라!"
"어떻게 해야 아버지가 즐거워하실까요?"
이번엔 여승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 질문에 여씨 부인은 갑자기 화를 냈다.
"너희들은 이제껏 아버지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그것까지 이 어미가
일일이 설명해 줘야겠니?"
벌컥 화를 낸 여씨 부인은 핑하니 돌아서 가 버렸다.
두 형제는 머리를 맞대고 골똘히 궁리해 보았다. 도대체 아버지가 좋아하는 게 무엇일까?
아버지에게는 부족한 게 없었다.
그러다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래, 미인이다!"
두 형제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상에 미인을 마다하는 사내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자신들의 아버지처럼 부자인 사내는
더더욱 여색을 밝히기 마련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버지 여원외에게 두 가지만큼은 늘 부족할 거라고 이들은 믿었다.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
나는 바로 미인이었다. 이제 돈은 어느 정도 모았으니 아직도 부족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미인뿐일 거라고 여겼다.
여원외에게는 첩이 무려 열여섯이나 되었다. 사방에서 미인이란 미인은 모두 모아 놓은 셈
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미인 을 밝혔다.
속담에 싸리 끝에 싸리가 나고 대 끝에는 대가 난다는 말이 있다. 호색한의 아비를 둔 두
아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호색가였다. 때문에 두 형제는 아버지가 얼마나 여색을 탐하고 있
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들은 깊이 생각해 보다가 드디어 아버지의 요즘 심기가 별로 좋지 않은 이유를 알아냈다.
사흘 전의 일이었다.
여씨네 부자 셋은 한적하게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군방원(群芳圓)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예쁘장하게 생긴 아삼(阿三)이 문 밖에 나와 서 있었다. 아들 형제는 그녀에게 다가가 몇 마
디 수작을 건넸다.
군방원은 기생집 중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집이었다. 안에 있는 기생들은 모두 스무 살이
못 된 앳띤 여인들인데 한결같이 사내들의 간을 빼먹고도 남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그중에
서도 으 뜸가는 미인이 바로 아삼이었다.
호색한인 여원외가 이런 미인을 두고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다하는 여부의 주
인으로 기생집을 출입한다는 것이 어쩐지 체신을 깎는 일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날도 여 원외는 군침을 삼키며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산째로 삼킨다 해도 비린내
하나 안 날 계집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달을 할 뿐이었다.
두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슬쩍 비웃었다. 아삼이 기생만 아니었다면 벌써 영감의 열
일곱 번째 첩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처럼 자신들이 마음놓고 아
삼과 수작을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 형제는 바로 그 아삼을 영감에게 선물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머리가 둔한 그들도
이해타산에는 눈이 밝았다. 계집 하나를 주고 아버지 아니 영감의 환심을 살 수만 있다면
순전히 보리알로 잉어를 낚는 게 아닌가. 전재산을 차지하고 나면 아삼 보다 몇 배 고운 계
집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계산도 벌써 마음속으로 꿍쳐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군방원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머리에 화려한 장식을 한 기생어미가 쪼르르 달려나왔다.
"아이구 도련님들 아니세요? 어제는 왜 안 오셨소? 아삼이 목이 빠지게 기다렸답니다. 그
곱던 얼굴이 도련님들 때문에 영 말이 아니랍니다. 오늘도 오지 않았다면 아마 아삼인 침식
을 잃고 드러누웠을 거라구요."
그녀의 호들갑에 여통이 빙긋 웃어 보였다.
"우리 영감이 지키고 있어서 사경오서인지 나발인지를 읽느라고 꼼짝도 못했지."
"사경오서가 아니라 사서오경이야."
여승이 아우의 무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어떤 경이면 어떻소 난 오늘 아삼이 월경만 안하고 있으면 좋겠소."
"하하하……, 그러니 네가 아버지한테 늘 욕을 먹지. 아삼이 달거리를 하든말든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러자 기생어미도 킥킥 웃었다.
"호호호 아니 왜 상관이 없습니까요? 아삼은 지금 고것이 막 끝난 뒤라서 봄날 발정 난 고
양이 같다구요 둘의 힘으로도 그 애의 욕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테니 알아서 하시구려."
여승이 여통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아우, 하루나 참았는데 그 사타구니는 온전한가?"
"글쎄요, 오히려 아삼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흐흐흐……."
"그럼 춘아도 들여보낼까요?"
기생어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교활하게 웃었다.
"춘아만으로도 어렵지. 추월이하고 동련이까지 와야 겨우 해 결이 될걸."
"어머, 넷이나 데리고 노시겠다구요? 무슨 묘약이라도 잡숫고 오셨나 봐. 호호……, 하룻새
에 살방아 찧는 힘이 부쩍 느신 모양이네. 어떤 묘약이죠?"
"그건 비밀! 누설을 하고 싶어도 자네한테는 곤란하고 계집들에게만 할걸세."
여통의 말에 여승이 거들었다.
"누설을 한다고? 혹시 설 자가 샐 설(泄) 자가 아닌가? 그럼 곤란하지. 아무리 급해도 기생
어미에게 주기는 아깝지 않은가?"
두 사람은 한바탕 웃었다. 이들이 주고받은 '설'은 바로 사정(射精)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승은 아우 여통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반달문을 지나니 길 왼쪽에는 무성한 푸른 잎 위에 연꽃들이 곱게 핀 푸른 늪이 나왔다. 오
른쪽에는 용과 봉을 어우러지게 새기고 산뜻한 색을 입힌 아담한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안에
는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있어 더운 여름철에는 여기에 앉아 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
았다.
늪 위에는 반 자 정도 되는 금붕어가 한가롭게 놀고 있었고 그 아래는 녹모구(綠毛龜)라는
거북이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이 거북이는 달포 전에 여승과 여통이 아삼에게 준 선물이
었다.
두 형제는 자갈이 깔린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문득 정자 쪽에서 남녀가 소곤거리는 소
리가 들려 왔다. 두 형제는 소리나는 곳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정자 위에는 남녀 한 쌍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위에는 분홍색의 비단 저고리를 입고 아래는 노란 색의 긴 치마를 입은 여자가 손으로 얼굴
을 바치고는 사내의 말을 정신 놓고 듣고 있었다. 그 여인은 바로 아삼이었다. 흘러내린 팔
소매로 백설같이 회고 고운 팔이 드러나 보였다.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애틋
한 정과 불타오르는 색정으로 매우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사내는 서른 살쯤 되어 보였다. 옥관춘삼(玉冠春衫)에 복장은 말할 것도 없고 탁자 위에 올
려놓은 보검만 봐도 보통집 자제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느 부잣집 자제
가 틀림없었다. 검집은 상어 가죽으로 만든 것이요, 자루 끝에는 백금과 오색찬란한 구슬이
박혀 있었다.
여승과 여통의 눈에 차츰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망할 놈……, 네 놈의 목은 몇 개가 되길래 남의 계집을 넘보고 있는 게냐?'
군방원의 법대로 한다면 기생들이 허락해야 손님이 원하는 기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분명 타관 사람으로 보이는 사내는 이미 정식으로 아삼에게 허락을 받은 게 분명했다. 두
형제는 그 점이 더욱 억울해서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두 형제는 화가 나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들은 이성을 찾고 어쩌고 할 계제가 아니었
다.
"네 이 놈!"
다짜고짜 정자로 뛰어 들어간 두 형제는 그 사내의 양쪽 팔을 하나씩 잡고는 정자 밖으로
집어 던졌다.
워낙 타고난 힘이 좋은데다가 비록 무공에는 흥미를 못 느껴도 그동안 얼마간의 무공 지도
를 받아 흉내는 낼 수 있는 두 형제에게 이 정도는 식은죽 먹기였다.
"어머!"
아삼이 기겁을 하며 일어섰다. 사내는 정자 밖 연못가에 있는 태호괴석(太湖怪石)으로 날아
갔다. 거기에 부딪치면 영락없이 즉 사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내가 순간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그는 높이 치솟더니 다시 천
천히 그 괴석 위로 내려앉았다. 그 사내는 아주 여유만만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그제야 두 형제는 오늘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났다고 여겼다. 은근히 가슴이 옥죄어들며 조
마조마해졌다. 아무런 병장기도 가지고 오지 않아 그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그 순간 두 형제는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사내의 검을 발견했다. 동시에 그것을 덮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어……?"
형제가 검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 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하하……!"
사내의 차디찬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두 형제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보검은 어느새 사
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두 형제는 두렵기보다는 수치감과 분노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싸울 태세를 취하며 사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아, 감히 남의 계집을 희롱하다니 어서 무릎을 꿇고 빌지 못하겠느냐?"
아삼은 정자 난간에 기댄 채 말없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누가 이길지 구경만 하겠다는
표정이없다.
괴석 위에 서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가만히 보니 너희들은 막가권파(莫家拳派)의 제자들인 모양이구나. 하하하, 그까짓 막가권
을 갖고 그 야단들이냐? 막가권은 강호에선 알아주지도 않는다!"
여승이 흠칫 놀라며 눈빛을 굴렸다.
'저 놈이 어떻게 우리 형제가 쓰는 막가권을 눈치챘을까?'
그러나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막가권은 소림권과 다를 바 없이 알아준다!"
여통도 뒤질세라 고함을 질러댔다. 이것은 모두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두 형
제는 방원 백 리 이내에서 막가권을 알아주고 있으니 온 천하가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래
서 뛰어난 실력을 가지지는 못했어도 두 사람이 함께 대적한다면 그것에 상대가 무서워하리
라 여겼던 것이다.
사내는 두 형제의 실력을 알아보고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어서 쫓아버리고 싶은 마음뿐
이었다.
"너희들 말처럼 막가권을 알아 준다고 치자!"
여승이 사내의 말을 오해했다.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줄 착각했던 것이다. 그는 막가권의 자
세를 다시 취하며 왼발로 자갈 바닥을 탁 구르더니 외쳤다.
"잘 알면서 왜 그러고 있느냐? 어서 용서를 빌지 못할까?"
여통도 덩달아 목청을 높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피를 토하게 될 줄 알아라. 내가 셋을 세기전까지 어서 내려와 무릎을
꿇어라! 하나……."
그러나 셋을 다 셀 때까지도 사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도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하하하, 너희들이 날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오게 해놓으니 어디 겁이 나서 내려갈 수가
있어야지."
"저 놈은 주둥이만 살았구나!"
여통이 화를 내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리곤 주먹을 뻗어 사내를 치려고 했다. 막가권 중
횡공박응(橫空博應)이라는 초수였다. 하지만 생각처럼 높이 뛰어오르지는 못해 겨우 사내의
발목을 건드렸을 뿐이었다. 그런데다가 사내가 히죽 웃으며 발로 장난을 치는 바람에 여통
의 주먹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두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는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안 되겠다. 한꺼번에 공격하자. 놈의 두 다리를 함께 치면 놈도 별수 없을 거야."
두 형제는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동시에 뛰어올랐다. 역시 주먹으로 공격을 했다. 그러나 이
번에도 그들의 주먹은 사내의 발바닥을 때렸을 뿐이었다.
'거 참, 저 높고 위태로운 곳에서 발재간을 부리는 게 보통이 아닌걸…….'
여승이 두 눈을 꿈벅거리며 아우에게 물었다.
"너도 봤지?"
여통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엇을 봤냐는 게요?"
여승이 허리를 굽히더니 돌멩이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어서 썩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한차례 고함을 더 지른 여승이 사내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여통도 형을 따라 돌을 집어
힘껏 뿌렸다. 그러자 사내는 덩실덩실 춤을 추듯 하며 돌팔매질을 모두 피했다.
두 형제는 이번에는 여러 개의 돌멩이를 한꺼번에 던지기로 했다.
"얏!"
수많은 돌멩이가 괴석 위의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사내는 괴석 위에서 몸을 띄우며 아래로 날아드는 돌은 피하고 양손으로 가슴을 향해 날아
드는 돌멩이를 척척 잡아냈다.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돌멩이를 던졌지만 사내는 매번 힘들
이지 않고 받아내는 것이었다.
'저 놈의 손은 강철로 만들었단 말인가!'
두 형제는 맥이 빠지는 걸 느끼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림 이제 내 돌을 받아랏!"
사내가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들을 아래로 뿌리기 시작했다. 두 형제가 질겁하여 줄
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탁탁탁……!
돌멩이들은 정확하게 두 형제의 발부리 앞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크,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죽을 뻔했네!'
여승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러면서 사내가 자기를 맞추지 않는 것을 봐서는 적의를 갖고 있
지는 않다고 믿었다.
아직 기가 살아 있는 여승이 사내를 향해 떠벌렸다.
"어디 정식으로 한번 겨루어 보자!"
이윽고 사내가 괴석에서 뛰어내렸다. 두 형제 앞으로 사뿐히 내려선 사내가 빙긋 미소를 지
었다.
"그 잘난 재간으로 뭐 어쩌겠다고?"
여승은 이 사내의 무공이 대단할 거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삼이 지켜보고 있는데서 맥없이 물러선다는 컷은 치욕스런 밀이었다.
"나는 며씨 문중의 맏공자 여승이고 이 사람은 둘째 여통이오. 오늘 그대와 자웅을 겨루어
보고 싶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사내가 주눅이 들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틈을 주지 많고 곧바
로 사내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사내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슬쩍 피했다. 그러면서 두 손가락으로 여승의
손목을 잡았다. 여승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여승은 팔 전체가 저려서 도무지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어어……."
여통은 형 여승이 왜 그러는 줄 모르고 자기도 공격을 했다. 재빠르게 발로 사내의 사타구
니를 내지른 것이다. 순간 사내가 두 다리를 오므렸다. 여통의 발이 덫에 걸린 것처럼 다리
사이에 끼여 꼼짝도 못했다.
"형님, 나 좀 살려 줘요!"
울상이 된 여통이 소리쳤다.
'임마, 나 역시 지금 괴롭다.'
여승 역시 죽을 맛이었으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두 형제는 그제야 사내가 고수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저 질러진 일이 아닌가. 형제는
여전히 입을 놀렸다.
"네 놈이 감히 우리 가문에 도전을 할 셈이더냐?"
"하하하!"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먼저 여승의 손목을 놓아주고 나서 여통의 발도 풀어 주
었다.
"이 악(鄂)씨는 원래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소이다."
사내가 웃음기를 지우고 약간 정중하게 말했다.
여승과 여통은 열심히 수족을 움직여 보면서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만한 정도에서 놓여난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면서도 아삼에게 우스운 꼴만 보인 것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
다. 하지만 무공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으니 일단 이 자리를 서둘러 빠져 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다.
"흥, 그런데 우리가 데리고 노는 꽃기생을 가로채? 어디 두고 보자!"
두 사람은 한번 으름장을 놓고는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달아났다.
성이 악씨라는 사내가 정자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삼이 한들한들 걸어와 그 보드라운 손
을 사내의 어깨 위에 살포시 얹었다.
"호호호……, 나리께서 그런 대협객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사내가 덥석 아삼을 품에 끌어안았다.
"난 두 가지 재주를 갖고 있는데 무공이 그중 하나지."
"그럼 다른 하나는 무엇이지요?"
"그건 무공보다 더 훌륭한 것인데……."
사내가 아삼의 볼에 입을 맞추며 뜸을 들였다.
"호호호……, 어서 말씀해 보세요. 또 뭐죠?"
그러자 사내가 입을 아삼의 귀에 바짝 갖다 대고 소곤거렸다. 아삼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작은 주먹으로 사내의 가슴을 쳤다.
"아이, 나쁜 사람!"
"허허, 누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더냐?"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삼은 사내의 눈을 실눈으로 쳐다보며 손으로는 그의 넓은 가슴을 어루만졌다.
"무공이 그렇게 센 걸 보니 이불 속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겠어요. 정말 그래요?"
"내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보여주지. 그 맛을 직접 보면 알게 아니냐?"
사내의 손이 불쑥 아삼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삼은 일부러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허
리를 비틀었다. 그러나 눈빛은 욕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임자도 이 재간이 뛰어날 것 같은데?"
사내의 손이 점점 아삼의 허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럴수록 아삼의 몸은 물고기마
냥 파닥거렸고 그녀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교성이 흘러 나왔다.
이때 갑자기 밖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났다.
"그 악씨라는 놈을 놓치지 마라!"
그 뒤로 누군가 고함을 질러댔다.
악씨라는 사내와 아삼이 얼른 떨어지면서 옷매무새를 고쳤다.
어느새 살기등등한 사내들이 정자로 몰려들었다. 여승과 여통이 데려온 사내들이었다.
두 형제는 집으로 뛰어가 자기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무사 셋과 무공을 쓸 만한 하인 넷을
급히 데리고 온 것이었다. 악씨라는 타관붙이를 흠씬 두들겨 패놓지 않고서는 잠을 못 이룰
것만 같아서였다.
"바로 저 놈이오. 저 놈이 요술을 부려 우리를 괴롭혔소."
여통이 악씨라는 사내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세 명의 무사는 그가 들고 있는 보검을 보고는 보통 인물이 아님을 눈치챘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두른 무사가 귀두도(嵬頭刀)를 거꾸로 들고는 그에게 읍을 했다.
"악씨라는 성씨를 쓴다지요?"
"그렇소 난 악처후(鄂處侯)라고 하는 사람이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악처후라……?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검은 두건의 무사는 다소 높은 음성으로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 집 공자님을 욕보였소?"
그러자 몸집이 크고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무사가 그의 대답은 듣지 않고 끼여들었다.
"형님, 저런 놈하고 무슨 말을 나누시오. 어서 내려와 우리들 칼이나 받으라고 하시오."
나머지 다른 한 무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무부(武夫) 형님의 말이 백 번 옳소 나 나비(羅飛)는 요술쟁이를 가장 증오하오. 난 그런
놈들은 보이는 족족 죽여야 직성이 풀린다구요."
나비라는 무사는 얼굴빛이 시퍼렇고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얼핏 보면 도깨비와도
같았다. 도깨비같이 생긴 자가 요술을 증오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자 악처후는 웃음이 나왔
다. 그러나 웃음을 섣불리 밖으로 내비치진 않았다.
악처후가 뒷짐을 지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되었소."
무부라는 무사가 말했다.
"이분은 우리 형님으로 막여인(莫與人)이라고 부르지. 막가권 제9대 종사(宗師)인데 별호
는……."
"별호는 호한막견(好漢莫見)인데 그 뜻인즉 호한들은 막여인을 만나지 않는 게 좋다. 만나
싸우면 다시는 호한 짓을 못하게 된다. 이런 뜻이 아니오?"
악처후가 무부의 말을 가로채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알았으면 됐다!"
무부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한마디 내뱉었다.
"그런데 막 선생을 만나면 호한이 호한 노릇 못하게 된다는 게 무슨 뜻이지?"
여통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것도 모르나? 너희 막 선생의 무공이 대단하여 어떤 호한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
냐."
악처후가 대신 웃으면서 여통에게 설명해 주었다.
"훌륭하군. 우리 막 선생의 무공은 정말 천하무적이야!"
그러자 무부가 이번에는 얼굴빛이 시퍼런 자를 가리켰다.
"또 이분은 말이야……."
다시 악처후가 나섰다.
"이름은 나비, 별명은 살귀(殺鬼). 즉 살귀 나비라고 하지. 경공이 뛰어나며 무영표를 쓰는
재간도 좋아. 십이 년 전 살귀 나비는 혼자서 무영표 다섯 개로 오호방(五虎幇)을 아예 죽은
범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삼 년 전엔 대도(大盜) 동(疼)씨 형제가 살귀 나비의 의형제를 모
욕하였다고 해서 그는 칠백 리를 쫓아가 그들을 죽여 버렸지. 강호에서 동씨 형제의 이름을
아예 지워 버린 셈이지."
"그런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었군!"
무부의 눈이 또 한 번 휘둥그래졌다.
악처후가 여유 있게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자네 무부는 별호를 신권무적(神拳無敵)이라고 하던가? 무모한 용기만 있는 일개
무부라는 뜻이지. 그러면 그 주먹도 결코 무적일 수가 없겠지만…….'
이런 말을 덧붙이려다가 악처후는 그만두었다.
"나 무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무부가 물었다. 악처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양산(梁山) 호걸 무송(武松)은 알고 있지만 그 밖의 무씨 성을 쓰는 호걸은 들어 보지
못했네."
악처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무부가 눈을 부릅떴다.
"이 신권무적 무부의 이름도 아직 못 들어 봤단 말이냐? 그렇다면 넌 강호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애숭이로구나!"
여승이 곁에서 무부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더니 입을 실룩거려 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무 선생이 어떤 분인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게냐? 이분은 큰 황소도 한
주먹에 쓰러뜨리는 분이시다. 그리고 기왓장 열 장을 포개 놓고 손가란 하나로 가루로 만들
고 밥통같이 굵은 말뚝도 발길질 한 번에 뚝 끊어 버리시는 분이라구."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아삼이 끼여들었다. 그녀는 여승에게 밉게 보이고 싶지 않은
지 그의 말을 동조하고 나섰다.
"큰 공자성의 말씀이 사실이에요. 저도 보았는 걸요."
"하하하, 기생년까지 나서는 걸 보니 실로 영웅은 영웅인 모양이다!"
악처후는 허리를 뒤로 젖혀 한바탕 웃어대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화가 난 무부가 황소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정자 기둥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쳤다. 그리고도 성이 차지 않는지 정자 기둥을 향해 서너 번 발길질을 했다. 기
둥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지붕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앗!"
아삼의 비명 소리와 함께 정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미 악처후가 사색이 된 아삼을 안고 정자 밖으로 날아간 뒤였다. 그는 아삼을 가볍게 내
려놓았다. 겁에 질린 아삼은 아직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하하하, 가만히 있는 정자 하나를 무너뜨리는 데 죽을 힘까지 쓸 건 또 뭔가? 하인 몇을
불러 시키면 수월하게 처리할 수도 있을텐데……."
악처후가 계속 이기죽거렸다.
무부는 그의 동작이 생각보다 아주 민첩한 것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무부는 그가 아삼을
안고 날아간 것을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부는 더 이상 그를 가만 놔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간다!"
곧장 주먹을 휘두르며 악처후에게로 돌진해 갔다.
'흠, 대단한 주먹이야…….'
악처후는 얼른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왼팔로 무부의 공격을 막으면서 오른손으로는 재빨리
장으로 그의 주먹을 허공으로 쳐 올렸다. 동시에 손을 쭉 내뻗어 순수견양(順手牽羊) 초수로
무부의 오른팔을 잡아챘다. 무부가 고꾸라질 듯 비틀거렸다. 악처후의 이 초수는 그를 단번
에 죽일 수도 있을 정도로 위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무부는 더욱 악에 받쳐 이를 갈았다. 두 주먹을 불끈 모아 쥔 그는 다시 악처후를 향해 치
달렸다. 악처후의 가슴을 향해 무부의 주먹이 날아갔다. 악처후는 몸을 획 돌리며 역시 같은
초수로 무부의 손목을 잡아 옆으로 뿌렸다.
"아악!"
무부는 멀리 날아가 꽃밭 위로 떨어졌다. 무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악처후는 여유롭게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곤 사정없이 무부를
집어 던졌다.
"땀깨나 났을 텐데, 미역이나 감아라!"
무부의 몸은 늪 속으로 처박혔다.
흙탕물을 마신 무부는 캑캑거리며 정신없이 허우적거렸다. 그는 헤엄을 칠 줄 몰라 당황했
는데 다행히 늪이 깊지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물은 가슴밖에 차지 않았다. 그 바람
에 더욱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밖으로 기어 나온 무부가 분통을 터뜨리며 악처후에게
욕을 해댔다.
"한 가지 초수밖에는 모르는 놈이로구나!"
하지만 더는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아우!"
막여인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무부를 불렀다. 무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그는 악
처후에게 시선을 던졌다.
"악 공자는 '순수견양'이라는 한 가지 초수만으로도 무부를 이겼으니 정녕 무공이 대단하
오."
막여인이 비웃음 섞인 투로 말했다.
"무 선생은 힘은 좋으나 경공이 좀 모자라지요. 그래서 한 가지 초수만으로도 이길 수 있었
던 겁니다. 그러니 큰 재간이 있어 서는 아니겠지요."
이때 여통이 불쑥 나섰다.
"막 선생님, 저 놈이 요술을 부립니다."
그 말에 살귀 나비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어디 또 그 잘난 재간을 부려 봐라!"
나비가 악처후의 머리 위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천라금선요지부십삼퇴(天羅金仙僥地付十三
腿)' 초수로 악처후를 마구 공격했다. 그의 장기인 발길질이었다. 나비는 경공도 그런대로
좋을 뿐더러 특히 발길질이 뛰어났다.
휘잉―.
날카로운 그의 발길질은 바람 소리를 내며 빠르게 움직였다.
악처후는 나비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비의 발공격을 피하며 기회만을 엿
보았다.
"각오해랏!"
나비는 더욱 집요하게 악처후를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 악처후의 눈빛이 어느 순간 반짝 빛
을 냈다.
"어!"
그가 번개 같은 솜씨로 나비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힘껏 내던졌다. 나비가 허공으로 날
아가더니 갑자기 공중제비를 하며 태호 괴석을 껴안았다. 괴석 위에 우뚝 선 나비가 낄낄
웃었다.
"좋은 재주로군!"
악처후가 감탄을 했다.
"히히히, 별말씀을. 헌데 그대 역시 좋은 무공을 가졌군."
악처후의 인사를 여유 있게 받아넘기며 나비는 다시 그에게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아우, 이제 좀 쉬게나. 저 하인들은 놔두었다가 뭣에 쓰려나."
막여인이 소리쳤다. 나비는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네 명의 하인들을 시켜 악처
후를 공격하게 하면 그의 초수가 드러날 것이다. 그 다음에 자신이 나서도 나쁠 건 없었다.
나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괴석에서 내려왔다.
막여인이 손짓을 하자 하인 넷이 무리를 지어 악처후에게 달려들었다.
악처후의 입장에서는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하인들과 대적하게 하다니…….'
그러나 일단 저들의 공격을 막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자신의 문파의 절학(絶學)인 '장분팔
방(掌分八方)'을 쓰며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그의 손에서 장이 뿌려지면서 하인들이 맥없이
날아갔다.
"아악!"
겨우 일어서는 하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는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 놈들을 여지껏 밥 먹여 준 게 분하구나! 겨우 그 정도냐?" 여승이 하인들을 다그치며
마구 발로 찼다.
"그럼 어쩝니까요? 저희는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하는데……."
"이 놈들아, 머리를 좀 써야지. 주먹으로 안 되면 다른 걸 써야지. 그 칼은 뭣하려고 차고만
있냐?"
옆에서 막여인이 쌀쌀맞은 어조로 한마디했다.
그제야 칼을 뽑아 든 하인들이 다시 일시에 달려들었다. 이들은 늘 연습을 넷이 함께 해온
터라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들은 악처후의 급소 여기저기를 위협적으로 공격했다.
"옳지, 잘한다!"
여통이 박수를 치며 신나 했다.
이때 악처후가 양손으로 한 놈의 칼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발로 다른 놈의 칼을 차버렸다.
양손으로 쥐었던 칼을 힘주어 두 동강 내버렸다. 그 힘이 대단해서 하인은 자기 손목을 쥐
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반으로 잘려진 칼 조각 하나가 마침 거북이 등위로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거북이가 머리를 얼른 껍질 안으로 집어 넣었다.
여승과 여통도 거북이 꼴로 잔뜩 움츠러들었다. 하인들이 여지없이 당하자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막여인이 악처후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대는 전진교(全眞敎) 장문인 왕중양을 뭐라고 부르오?"
"아니 그럼 저자가 전진교의 제자라는 말씀이오?"
나비가 눈을 크게 뜨며 악처후를 응시했다.
화산의 무공시합에서 왕중양이 이겨 천하 제일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전진교의
이름도 크게 알려져 소림파와 개방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왕중양 밑에는 일곱 제자가 있는데 이들을 전진칠자(全眞七子)라 불렀다. 명문의 제자들인
그 일곱 명 역시 무공이 출중하여 전진교의 명망을 한층 드높였다.
막가권 제9대 종사로서 강호를 오랫동안 편렵한 막여인은 명문대파(名門大派)의 무공을 각
별히 살펴왔다. 그는 금방 악처후가 쓰는 장법이 전진교파의 수법이 분명했으나 그 몸동작
이 특이해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악처후에게 직접 물어
본 것이었다.
더욱이 전진교의 교도들은 모두 도사들로 규율이 엄하여 절대 기생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악처후는 기생집을 드나들고 있으니 대체 그의 신분이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악처후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려졌다.
"전진교 교주 왕중양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그럼 지금 악 공자가 쓰는 장법은 어떻게 된 것이오?"
"핫하하하……, '천하무공수도동귀(天下武功殊途同歸)'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소? 내 장법
이 전진교 장법과 비슷할 수도 있지 않소."
"그렇다면 정녕 그대는 전진교 제자가 아니란 말이오?"
"당신이 보기엔 내가 출가한 도인 같소?"
막여인은 적이 안심하는 눈치였다. 전진교 세력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전
진교 제자들을 건드리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보아도 전진교 무공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전진교와의 관련
을 부인하는 악처후의 태도 또한 의심스러웠다.
막여인이 웃음기를 섞어 가며 물었다.
"그럼 공자는 어디 출신이오?"
"강호에 두 공자가 있다는 말은 들었겠지요?"
"두 공자? 그럼 그대가 그 절정공자(絶情公子)란 말이오?"
악처후의 속이 순간 꿈틀거렸다.
"왜 나를 절정공자라 하는 게요?"
악처후의 미간이 파도를 타듯 꿈틀거렸다.
"강호에는 절정공자와 소요공자(逍遙公子)가 있는데 소요공자는 세상을 소요하고 절정공자
는 속세의 모든 정을 단절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소. 듣건대 이 두 공자의 무공은
모두 뛰어 나지만 절정공자가 조금 위라고 하오. 그대의 무공이 매우 출중하기에 혹 절정공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소."
그 말에 악처후는 기분이 약간 언짢아졌다.
"그런 허튼소리를 믿는단 말이냐? 막가권의 장문이 그런 소릴 믿는다고? 아무래도 내 솜씨
를 보여줘야겠구나!"
갑자기 악처후의 말투가 돌변했다. 그러더니 그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막여인의 왼쪽 어깨를
겨냥해 순식간에 한 장을 내리쳤다. 막여인이 겨우 피하자 이번에는 그의 배를 공격했다. 그
동작은 매우 빠르고 정확했다.
순식간에 장법을 바꾸며 공격해 오는 악처후 때문에 막여인은 당황했다. 그가 두 손으로 급
히 몸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간다!"
악처후는 다시 소리를 내지르며 번개같이 돌진해 왔다. 악처후의 장이 막여인의 배를 때렸
다.
"헉!"
막여인은 뱃속에 불덩어리가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뒤로 밀려난 그가 다시 몸을 추스렸다.
방어 자세에서 공격 자세로 바꾸려는데 악처후가 무섭게 달려왔다. 악처후는 계속 막여인의
배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막여인은 기공을 끌어모을 여유가 없었다. 한 대 얻어맞은 충격으로 그는 아직 몸을 가누지
를 못했다.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때였다. 순간 바람을 가르는 무영표 하나가 악처후의 뒤통수 옥침혈(玉枕穴)을 향해 날아
들었다. 악처후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약간 틀었다. 무영표는 그가 등뒤에 메고 있는
보검 자루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하하, 그 정도로 나를 잡으려 들다니!"
비웃음이 터지면서 다시 막여인을 향해 장을 뿌렸다. 그런데 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이
어졌다. 뒤를 이어 살귀 나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각오해라!"
나비의 손에서 벗어난 무영표는 세 개였다. 무영표는 길이가 두 치밖에 되지 않았는데 반짝
이는 점으로 보였다. 눈에 잘 띄지 않아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다. 무영표는 강호에서
유명한 표창 중 하나였다.
악처후가 갑자기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는 반듯이 누운 자세를 취하더니 두 발로 그것들
을 멀리 차버렸다. 악처후가 다시 자세를 바로하자 나비와 무부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무부
는 여전히 두 주먹을 마구 휘둘러댔다. 나비 역시 한 주먹으로 악처후를 공격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세 자 가량 되는 검을 슬쩍 뽑아 들었다.
악처후가 다시 순수견양 초수로 무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무부는 늪 속으로 곤두
박질쳤다. 흙탕물을 실컷 먹고 일어서는 무부의 머리 위에는 푸른 연인이 삿갓처럼 잔뜩 덮
여져 있었다.
그 사이에 나비가 검으로 악처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크!"
악처후가 훌쩍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러면서 나비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가볍게 장을
날렸다.
퍽!
'대금나(大擒拿手)'란 초수였다. 나비는 오른쪽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통증에 신음을 내
뱉었다.
"으으……."
나비가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악처후가 그를 뒤쫓으려는데 막여인이 막아섰다.
"기다려라!"
그는 벽산개석(劈山開石), 평야축록(平野逐鹿), 오악압정(五岳壓頂) 등 막가권에서 가장 뛰어
나다는 초수들을 연거푸 내보였다. 늪에서 나온 무부도 악에 받쳐 아우성을 치며 합세했다.
악처후가 두 사람을 상대로 싸우려고 할 때였다.
"너희들은 뭘 하느냐? 어서 함께 싸워라!"
여통이 소리쳤다. 구경만 하고 있던 하인들이 다시 칼을 들고 미친 듯이 달라붙었다.
"정말 죽기 위해 환장한 놈들이구나!"
높이 날아오르며 악처후가 두 발로 번갈아 네 명의 하인들을 걷어찼다.
"학!"
"어억!"
하인들은 그의 발에 얻어맞고는 저 멀리 날아갔다.
바닥으로 내려선 악처후가 무부의 어깨를 붙잡아 막여인에게로 밀어 버렸다.
자신에게로 중심을 잃은 채 날아오는 무부를 막여인은 받을 수가 없었다. 고를 받다가는 자
신이 넘어질 판국이었다. 그렇다고 피해 버릴 추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부는 속도 때문에 충
돌하여 죽지 않으면 심한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막며인은 하는 수 없이 한쪽으로 피하면서 무부의 옆구리에 장을 내밀었다. 막여민의 장물
맞은 무부가 옆으로 뒤집히면서 떨어졌다.
"으으……."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부부가 천천히 밀어섰다.
"아니, 이젠 형님까지 날 치기요?"
그는 억울하다는 눈초리로 막여민을 쏘아보았다. 나비가 곁에 있다가 설명을 해주었다.
"오해하지 말게나. 형님이 그러지 않았다면 자넨 벌써 저 세상으로 가거나 크게 다쳤을 거
라구."
"그랬었군요. 아무튼 고맙습니다요, 형님!"
무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막여인은 악처후에게 몰리는 판이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렀다. 이젠 별수없이 악
처후에게 혼줄이 나는가 싶었다. 그가 절망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악처후가 손을 거두고는
한쪽으로 뛰어가더니 우뚝 섰다.
악처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보통의 무사는 아니군요 감탄했소이다."
막여인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역시 예를 갖추어 달했다.
"저야말로 공자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군요. 공자께서 이렇게 내 체면을 세워 주시니 오히려
영광이오."
악처후가 품에서 약 두 봉지를 꺼내 무부와 나비에게 던져 주었다.
"그건 내가 직접 만든 질타산(跌打散)이오 반은 먹고 나머지 반은 바르시오. 그 정도면 효험
을 볼 수 있을 것이요."
"누가 이따위 것을 받겠다고 했느냐?"
아직도 울분이 가시지 않은 무부는 약 봉지를 도로 악처후에게 던지려고 했다. 막여인이 무
부의 행동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지 말게. 악 공자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하면 쓰겠나?"
그는 악처후가 내민 약이 보통의 약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막여인이 정중히 읍을 했다.
"참, 아까 악 공자에게 절정공자 운운했던 것은 제 실수인 것 같소. 잘못 알고 물었으니 너
그럽게 이해하시오."
마음이 좀 풀린 듯 악처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요공자가 아무리 무공이 뒤떨어진다 해도 절대 절정공자로 행세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때서야 막여인은 이 사내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다.
소요공자. 악처후는 바로 소요공자였던 것이다. 막여인은 지금까지 그가 화를 냈던 것은 절
정공자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요공자와 절정공자는 모두 무공이 뛰어나 강호에서 이름난 자들이었다. 세인들은 한결같
이 두 사람 중 절정공자의 무공이 더 뛰어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여인이 소용공자
악처후를 절정공자가 아닌가 하고 물었으니 그의 심기를 건드린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막여인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는 후회했다. 절정공자는 세속의 모든 정과 단절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는 어버이의 정조차 모를 뿐더러 여색은 아예 증오하는 사내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을 처음부터 생각했다면 막여인은 결코 이같은 실언은 하지 않았을 것
이었다.
막여인과 나비 그리고 무부는 큰 봉변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악처후가 그들의 사정
을 봐준 덕분이었다. 싸움은 더 이상 이어질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장 무안해진 것은 여승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빠져
나가려 했다.
소요공자가 그들의 앞을 막으며 웃음을 베어 물었다.
"왜 그러시오!"
여승이 불안한 기색으로 주춤 물러섰다. 막여인과 두 무사도 잔뜩 긴장했다. 그런데 악처후
가 여승에게 정중히 읍을 하는 게 아닌가.
"사실 나는 여씨 가문이 인재를 배출하고 인걸이 모이는 곳이란 소문을 듣고 이렇게 귀하와
친교를 맺고자 찾아온 길이었소"
"그런데 오자마자 왜 꽃기생은 가로채서……?"
볼멘소리로 여승이 따져 물었다.
"그 기생은 내 거란 말이오!"
여통도 한마디 쏘아댔다.
여통의 말에 악처후가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실은 그것도 내 계획이었소."
"계획이라니?"
"재간이 없고 덕이 없는 내가 어떻게 공자님들을 만날 수 있겠소. 무모하게 찾아갔다가 문
전박대라도 받게 되면 그 얼마나 수치스런 일이었겠소?"
여승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서 난 그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 그 출구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
오."
"그게 누구요?"
악처후가 아삼을 가리켰다.
"바로 저 소저요."
"아니, 그게 저 아삼이라고?"
여승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왜, 전 안 되나요?"
아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이 소저와 얘기를 한창 하는데 두 공자께서 뛰어든 것이오."
"우린 그대가 아삼과 그 짓을 하려는 줄로만 알고……."
여통이 멀뚱히 두 눈을 위로 뜨며 중얼거렸다.
"그 짓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악처후가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거, 뭐냐? 거 있잖소. 아무튼 난 그러는 줄 알았다니까."
여통이 히죽 웃었다.
아삼이 쪼르르 달려와 여통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누가 당신 같은 줄 아나 봐. 저분은 예의도 있고 인정도 많은 공자님이시라구요."
악처후가 무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아주 겸손한 태도를 보이자 여승은 갑자기 다른 마음이
들었다. 그를 자기에게 끌어오고 싶었다.
'악처후까지 날 돕는다면 여장이 어떤 무공을 연마해 와도 겁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 여승은 악처후의 손을 잡으며 더욱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사내들은 한번 싸워야 그 친분이 두터워진다는 말도 있지 않소 악 형께서 달리 생각지 않
는다면 우리 벗으로 지냅시다. 이 경사로운 날을 술을 마시며 축하하는 게 어떻겠소?"
그러나 나비는 아직도 그에게 당한 모욕감에 배알이 뒤틀려서 눈을 흘겼다.
"공자님, 벗도 골라 가면서 사귀셔야 합니다. 이름이 하늘 같은 소요공자가 무슨 이득이 있
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거들떠보겠습니까?"
여승의 귀에는 나비의 말이 들리지가 않았다.
"자, 어서 주루로 가서 술을 드십시다."
그는 곧 일행을 데리고 여가주루(麗家酒樓)로 갔다.
귀빈석을 차지하고 앉은 그들은 진수성찬을 한 상 주문했다.
아삼을 시켜 기생들을 불러다가 옆에 끼고는 흥겨운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검은 쌍지장이를 짚은 웬 사람이 머리를 숙인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말없
이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술을 청한 그는 혼자서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무부가 술잔을 들고 떠들었다.
"악 공자님의 무공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와 같이 여씨 가문에서 무사일을 보지 않겠소?"
무부는 약간 둔한 면이 있지만 성미가 호방했다. 그는 술이 거나해지자 이렇게 취중진담의
말을 내뱉었다.
여승도 그 말에 흐뭇해졌는지 술잔을 높이 들었다.
"글쎄 작은 절간에 고승을 모시는 기분이 좀 들긴 하지만……. 악 공자 의견은 어떠시오?"
여승의 말에 나비가 걸고 넘어졌다.
"남부러울 게 없는 소요공자가 이 산간 벽지에서 구차스럽게 무사 노릇을 하려고 하겠소?
절정공자가 들으면 앙천대소를 하겠소이다."
악처후의 낯빛이 돌연 상기되었다.
"그대는 왜 남의 비위를 거슬리는 소리만 하는 게요?"
"비위에 거슬린다고? 그래 날 어쩔 셈이오?"
"이 놈이!"
악처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접시 위에 있던 닭고기 살점들이 튀어
나비에게로 날아갔다. 나비가 머리를 숙여 피하는 바람에 그 살점은 낯선 사내의 탁자 위로
떨어졌다. 살점들은 그가 먹고 있는 술잔과 안주 접시에 골고루 떨어졌다.
사내가 머리를 들더니 날카로운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금세 눈빛이 어두워졌
다. 그는 서른 살 정도로 보였으나 풍기는 것은 보다 더 들어 보였다. 회색의 무명 장삼을
입은 그의 두 다리는 무릎 아래가 모두 잘려 나간 상태였다.
악처후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나비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의 주먹이 쏜살같이 악처
후의 면상을 향해 뻗었다. 악처후가 잽싸게 나비의 손목을 비틀어 잡더니 한쪽으로 던졌다.
나비는 공교롭게도 또 절름발이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어쿠!"
순간 절름발이가 지팡이 하나를 들어 날아오는 나비의 등을 살짝 쳤다. 나비는 바람에 휩쓸
린 낙엽처럼 맥없이 공중으로 약간 떴다가 떨어졌다.
겨우 일어난 나비가 악처후에게는 대들지 못하고 절름발이 사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리 병신 주제에 눈깔까지 삐었나?"
순간 사내의 안주 접시 위에 떨어졌던 닭고기 살점이 나비의 입 속에 틀어박혔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살점을 삼킨 나비가 컥컥대며 양손을 버둥거렸다.
다시 나비가 악을 쓰며 소리치려고 하자 이번엔 술잔 속에 있던 살점이 날아왔다. 역시 나
비의 입 속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살점을 내뱉으며 나비가 두 주먹을 휘둘러 댔다. 사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젓가락 한
쌍으로 나비의 손목을 집었다. 마치 고깃점을 집어 탁자 위에 내려놓듯 나비의 손목을 슬쩍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비는 주먹을 빼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사내가 젓가락을 벌리자
나비는 자기 주먹에 면상을 얻어맞고 말았다. 그 바람에 앞니 두 개가 부러져 버렸다.
"아이고!"
나비는 죽을 맛이었다. 나비가 단검을 뽑아 든 채로 사내에게 다시 돌진해 갔다. 사내가 다
시 젓가락으로 단검을 막았다.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이라 검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젓가락은
곧 두 동강으로 잘려졌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나비가 단검으로 그의 가슴을 찔렸다. 사내는 여유 있게 지팡이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요란한 소리가 나며 나비의 단검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나비가 뒷걸음질치며 소리쳤다.
"저건, 쇠지팡이!"
그러자 여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내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이 병신 같은 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사내가 매섭게 여승을 쏘아보았다. 그 눈길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여승은 자기도 모르게 몸
을 한차례 후득 하고 떨어댔다. 그러나 기는 죽지 않아 여전히 입을 놀렸다.
"어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못할까? 그렇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흐흐……."
사내가 조소를 보내왔다.
"저런 놈에게 강호의 도리 같은 것을 말해 봐야 소용없어요. 어서 잡아다가 주리를 틉시다!"
여통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어쩌지는 못하고 막여인을 바라보았다. 막여인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저 절름발이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다. 오늘은 정말 기이한 날이로군. 뛰어난 고수를 두 명
씩이나 만나게 되다니…….'
막여인은 속으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악처후에게 느닷없이 읍을 했다.
"저자의 무공이 대단하군요. 나는 적수가 못 될 것 같으니 악처후 공자께서 좀 수고를 해주
실 수 없겠습니까?"
명석한 악처후가 막여인의 내심을 모를 리 없었다.
'흥, 괜히 다치긴 싫다 이거렷다. 내가 이것들을 진정으로 탄복하게 만들어 훗날 시끄러운
일을 없애야겠다!'
악처후가 돌연 반색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과는 벌써 인연을 맺은 처지인데 마다할 수야 없지요."
그는 일어서서 절름발이 사내에게로 성큼 걸어갔다. 읍을 한 악처후가 물었다.
"존함을 어떻게 쓰시는지요?"
그러자 뒤에 있던 여통이 고함을 질렀다.
"형님, 그런 놈은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요. 단번에 날려 버리라니까요!"
절름발이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눈길에 악처후는 순간 가슴이 섬
뜩했다.
"나 말씀이오?"
그 목소리에는 마치 지옥 불길을 타고 들려 오는 듯한 싸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악처후
의 등줄기로 오싹하니 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흐흐, 또 누가 있는가?"
악처후는 자신을 강하게 다지면서 냉소를 보냈다. 사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난 악처후란 사람이오."
"그대는 지금 나를 죽이고 싶겠지요?"
악처후가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왜 생면부지의 그대를 죽인다는 게요?"
그러면서 악처후는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는 사내의 목을 겨냥해 힘껏 내리쳤다.
잠 끝이 사내의 목에 막 박힐 찰나였다. 순간 그의 검은 동작을 멈추었다. 악처후는 검으로
사내의 얼굴을 중심으로 해서 마음껏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번개 같아 보는 사람으
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막여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오호, 놀라운 솜씨다. 저런 솜씨로 우릴 상대했다면 우린 벌써…….'
막여인의 심기는 이상하게도 절름발이 사내를 동정하는 쪽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내를 위해 땀이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바람을 가르며 악처후의 검은 사내의 얼굴 앞에서 춤을 추어 댔다.
그러나 사내는 요지부동으로 꼼짝을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젊은 나이의 객기로 보기에는
너무 지나칠 정도의 의연함이었다. 반면에 악처후는 조급함으로 서서히 눈꼬리가 위로 올라
가고 있었다. 자신의 검에 이토록 태연함을 보이는 사내에게서 그는 알 수 없는 위축감을
느꼈던 것이다.
"얏!"
막 악처후의 검이 사내의 목젖을 향해 파고들 때였다. 갑자기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악처후의 보검이 옆으로 튕겨 나가 기둥으로 날아가 꽂혔다.
사내는 시커먼 지팡이를 쳐든 채 악처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조소가 매
달려 있었다.
조소를 참을 수 없는 악처후가 기둥에 박힌 검을 재빨리 뽑아 들었다. 동시에 연환삼검(蓮
環三劍)의 초수로 사내를 공격했다. 사내는 쇠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며 악처후의 공격을
쉽게 막아냈다.
"전진교 검법을 제법 쓸 줄 아는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사내의 말에 막여인의 양미간이 요동을 쳤다. 악처후의 초수가 확실히 전진교 검법의 하나
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악처후는 끝까지 전진교 제자가 아니라고 했을까? 막여
인은 아리 송했다. 전진교는 지금 불붙은 태양 같아서 추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런데 왜 악처후는……?
악처후가 소리쳤다.
"자, 간다!"
"잠깐!"
사내가 손을 들어 악처후를 막았다.
"왜, 두려운가?"
"우리 도화도 제자들은 두려움이란 모르고 있다. 난 오직 우리 사부와 왕중양 사이의 교분
을 생각해서 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도화도 황약사의 제자란 말인가?"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우리 사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왕중양과의 교분이 아니었다면 넌 벌써 죽었다!"
그러자 악처후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왕중양? 그하고 내가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내가 왕중양의 이
름을 빌려 강호를 떠도는 멍청인 줄 아느냐?"
"그럼 전진교 제자가 아니란 말이냐?"
"이 소요공자가 강호를 소요하는데 누가 감히 내 사부임을 자청한단 말이더냐?"
"아니다. 무공으로 봐서는 넌 필시 전진교 제자가 분명해. 그리고 전진교의 무공을 완벽하게
익힌 것을 봐서는 넌 분명 버려진 제자야. 원래 전진교에선 무공을 완벽하게 전수해 주지
않거든."
"흥, 버림받은 제자가 있기는 하지. 그건 바로 자네일세."
"뭣이!"
"황약사 문하에 제자 여섯이 있는데 그중 하나인 육승풍(陸乘風)이 분명하렷다!"
"내 이름을 알았으니 그대는 영광으로 여겨야 할 걸세."
"그런데 내 듣기로는 도화도에 큰 변고가 났었다고 하더군. 황약사의 제자 중 남녀 제자 하
나씩이 무공은 게을리 하면서 이불 속의 일만을 파고들었다던데?"
나비가 그 말에 히히 웃으며 끼여들었다.
"황약사의 별명이 바로 황노사(黃老邪)가 아니겠어. 요귀스럽고 괴상하게 논다는 사(邪)거든.
그러니 그 제자들이 이불 속에서 익히고 있는 것도 그가 직접 가르쳤을 거라구……."
이 말에 다른 사람들도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육승풍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낯색이 확 변했다. 그는 왼손으로 탁자
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술잔 하나가 치솟더니 웃고 있는 나비의 입을 때렸다. 술잔이 박살
이 나면서 나비의 입술이 터져 버렸다. 피를 내뱉으며 나비가 펄펄 뛰었다. 그러나 감히 대
들지는 못했다.
육승풍이 나비를 외면하며 다시 악처후를 바라볼 때였다. 나비가 슬쩍 무영표 세 개를 꺼내
날렸다.
피잉―.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언가를 느낀 육승풍이 쇠지팡이를 가슴 높이로 올렸다.
탁탁탁!
무영표는 쇠지팡이에 막혀 모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머지 이빨마저 모두 부러지고 싶은 게로구나!"
그가 나비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나비는 찍소리 못하고 막 여인의 등뒤로 얼른 숨어 버
렸다.
악처후가 육승풍의 시선을 돌렸다.
"이봐, 그대는 도화도의 제자가 아니오. 이런 무명 무사와 실랑이를 해서는 체면이 아니지."
무부가 나비의 옆구리를 죽 찔렀다.
"너를 욕하고 있는데……?"
나비도 그 말을 들었다.
"넌 상관 마!"
악처후가 다시 육승풍에게 빈정거렸다
"도화도의 그 남녀 제자는 규율을 어겼을 뿐 아니라 황약사가 보배처럼 간직하고 있던 <구
음진경(丸陰眞經)>까지 훔쳤다면서? 히히히……."
"뭐라구?"
"황약사라고 하면 천하 오대 고수 중 하나로 그의 가장 뛰어난 재간은 기문수술(奇門數術)
이지."
악처후의 말에 육승풍은 사부인 황약사를 잠시 떠올렸다.
"그렇다. 우리 사부님은 기문수술을 신선같이 쓰고 계신다. 제갈무후가 살아 있어도 우리 사
부님과는 상대가 못 될 것이다!"
무부가 나비에게 물었다.
"기문수술이 뭐지? 권법인가. 내 신권(神擧)보다 센 건가?"
"그게 아니라 소가죽 석 장을 한 번의 입김으로 찢어 버리는 초수야."
"그렇다면 내공이군. 내공이 그렇게 세다구?"
두 사람이 지껄이는 말이 육승풍의 귀를 거슬렸다. 그가 다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안주
접시가 솟았다. 그 위에 담겨져 있던 은행알이 무부에게 우박이 되어 날아가고 접시는 나비
를 향했다. 은행알이었지만 내공이 실린 탓인지 마치 쇠구슬처럼 강하게 날아들었다.
무부와 나비가 얼른 탁자 밑으로 숨었다. 뒤에 있던 막여인이 날아오는 접시를 가볍게 받아
자기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육승풍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흠, 이백 년을 이어 온 막가권이 다르긴 다르군!"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문파가 도화도 황약사의 제자의 칭송을 들으니 영광이오."
막여인의 말에 악처후가 코방귀를 뀌었다.
"듣건대 황약사가 도화도를 철통처럼 방비를 하게 하였다며?"
육승풍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사부님은 천인(天人)을 따라 배워 도화도의 돌과 나무들로 적을 막을 수 있는 진
을 만들었다. 또한 도처에 방어 장치들과 미혼진(迷昏陳)을 만들어 놓았지. 개미 한 마리 얼
씬 못하게 말이다."
"정말 기문수술이 그토록 신비한 것이냐?"
"왕중양도 우리 사부님의 진법은 따라올 수 없을걸."
악처후가 눈을 꿈벅이며 입꼬리를 찢었다.
"흐흐 그런데 철옹성같이 방어를 한 도화도를 그 정분 난 두 제자들은 어떻게 빠져 나갔을
까? 정말 모를 일이야."
악처후가 비꼬자 육승풍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놈이 그 말을 하려고 슬슬 말을 돌렸구나!'
육승풍이 언성을 높였다.
"왕중양의 이름을 봐서 참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하하, 나 역시 절름발이 병신이 가엾어서 가만있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육승풍이 지팡이를 양손에 나눠 들었다. 하나는 바닥을 짚고 다른 하나는 검처럼 악처후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이 놈!"
육승풍이 지팡이를 뻗으며 악처후를 몰았다. 악처후가 옆으로 얼른 피하면서 검으로 그의
허리를 쳤다. 나머지 지팡이가 검을 막아냈다.
두 사람은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겨 가며 동작을 부릴 때
마다 탁자가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육승풍이 지팡이 두 개로 몸을 의지하며 다
리를 철퇴처럼 휘둘렀다. 악처후도 날쌔게 몸을 날리며 검을 그어댔다.
몇 합을 싸우는 동안 악처후는 그의 초수에 감탄하긴 했지만 절름발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그를 얕잡아 보았다.
과연 육승풍은 이십여 합이 지나자 기진맥진해졌다. 쇠지팡이를 쓰는 것도 민첩하지가 못했
다. 보법 역시 굼뜨게 보여 그가 지쳐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자꾸만 헛손질을
해대던 육승풍은 식은땀을 흘렸다.
악처후는 이때라고 생각하고는 검을 가슴으로 당겼다가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검으로 육승
풍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찔렀다.
위기를 느낀 육승풍이 쌍지팡이를 바닥에 대고는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섰거라!"
악처후가 쫓아갔다. 창가까지 달려간 육승풍이 갑자기 지팡이를 바닥에 구르더니 몇 장 밖
으로 날아가 버렸다.
놀라운 경공이었다.
이때 여승과 여통이 달려왔다. 여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놔두시오 다시는 오지 않을 겁니다."
여통은 육승풍의 무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리 잘린 병신이 그토록 날쌔다니……. 쇠지팡이 쓰는 솜씨는 또 어떻고."
이때까지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삼이 한들한들 엉 덩이를 흔들며 다가왔다.
"흥, 그게 어디 사람이에요?"
"그럼 뭐야?"
여통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눈을 못 봤어요? 꼭 짐승처럼 무서운 게……."
그러더니 아삼은 공연히 한숨을 휴 하고 내쉬었다.
"그엔 야성적인 사내를 좋아하지 않나? 혹 마음속으로 아까 그 놈을 찍어 둔 거 아냐?"
여승이 야비한 이빨을 내보이며 물었다. 아삼이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이고, 그 쇠지팡이에 맞아 뼘은 개구리꼴이 되라고?"
술판은 이미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모두들 흥에 깨져 그만 주루를 나왔다.
모두를 이끌고 접으로 돌아온 두 형제는 악처후를 귀빈으로 모셨다.
두 형제는 아삼을 아버지 방에 들어보내기 위해 잠시 숨겨 두었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들
을 데리고 후원으로 나왔다.
반달문까지 와서 두 형제와 악처후는 서로 앞서 걸으라는 예의를 보였다. 몇 번 사양하던
악처후가 앞서 걸어가는데 문 안에서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곧 한 사람이 뛰어나
오다 악처후와 부딪쳐 그의 가슴에 안긴 꼴이 되었다.
향내가 물씬 하는 바람에 놀라 내려다보니 웬 소녀였다. 소녀도 머리를 들다가 생면부지의
사내임을 알고는 얼굴을 붉혔다.
"어머나!"
소녀가 얼른 악처후를 밀치며 어디론가 달아났다.
악처후는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얼핏 본 소녀의 얼굴이 매우 어여쁘다
고 느꼈다. 그가 소녀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노란 색 저고리에 푸른 색의
치마, 그리고 매혹적으로 흐느적거리는 가느다란 허리였다.
악처후가 아쉬운 듯 눈길을 계속 소녀가 사라진 쪽으로 던졌다. 그의 그런 몸짓을 눈치가
빠른 여승이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저 소저는 누구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지 악처후가 넌지시 물었다.
"내 누이동생이랍니다. 소교라고 하는데 매일 저렇게 너펄거리며 사내아이처럼 뛰어다니지
요."
여승의 대꾸에 악처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이쁘군……!"
"뭐라고 했소?"
여통이 대뜸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소저가 아주 귀엽게 생겼다고 했소. 활달하기도 하고.……."
"활달하긴 하지만 귀엽지는 않소이다."
여통이 한숨처럼 내뱉자 여승도 거들었다.
"아주 골칫거리지요."
악처후는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사랑스런 소녀가 왜 골칫거리가 되었는지를. 그러나 더 자세
하게 캐물을 수가 없었다.
여승은 악처후를 처소에 데려다 주고는 막여인과 다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곤 여초교
의 방으로 갔다.
여소교는 혼자 방안에 앉아 있었다.
"너 오늘 아주 큰일을 치를 뻔했다."
"왜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까 너와 부딪친 사람이 누군지나 알아?"
"내가 알게 뭐예요. 헌데 그 사람 참 미남이던데요."
"그래서 네 마음에 들더란 말이더냐?"
"오라버니는 그저 그런 소리밖에 모르더라. 내가 뭐 잘난 사내만 보면 미치는 계정인 줄 아
시나 봐."
여소교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 사람이 매분가 된다면 나쁠 것도 없지."
"정말 나를 놀릴 셈이에요?"
"놀리다니? 감히 너를 놀려? 아무튼 그 사람은 무공이 대단해."
"흥,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죠? 난 그 사람이 목석처럼 보이던데."
"그래? 정말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참,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니?"
"그 대신 무엇을 줄 건데요?"
잠시 궁리를 하던 여승이 은 구슬 하나를 품에서 꺼냈다.
"나를 도와만 준다면 이 구슬을 주지."
잽싸게 구슬을 가로챈 여소교가 희색이 만연하여 물었다.
"그런데 그토록 아끼던 이 구슬까지 날 주며 부탁하려는 게 뭐죠? 또 어느 집 처녀를 꾀어
오라는 건 아니겠죠?"
"그런 짓은 이젠 안한다. 전번에 처녀를 데리고 오랬더니 그 집 늙은 어멈을 데려다 줘서
얼마나 혼이 났는 줄 아느냐?"
"호호호, 발정 난 암퇘지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요."
"글쎄, 이번에는 그런 일이 아니야. 매우 중요한 일이지."
"대체 무슨 부탁이에요?"
"네가 아까 만난 그 악처후만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거야. 그게 날 돕는 길이란다."
"흥, 내게 사과도 하지 않는 그런 사내를 내가 왜 관심을 두겠어요."
"그럼 좋다. 히히히……!"
기분이 좋아진 여승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여승이 한번 그런 말을 비치자 여소교는 은근
히 악처후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몸종을 시켜 그의 숙소를 알아 오게 했다. 그리곤 살그머니 방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어딜 가느냐?"
돌아보니 어머니가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왜요?"
어머니가 그녀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
"왜 한번 보자는데 그렇게 퉁명스럽니? 이젠 다 컸다고 어미를 무시하는 거냐?"
"아이, 어머니도 어머니는 밖에 잘 나오시지 않는데 갑자기 나를 부르니 그러죠?"
"네가 보고 싶어 이렇게 나왔단다."
"알아요 어머니는 날 늘 귀여워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얼마나 외웠지?"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어요."
여소교의 입이 뾰로통해졌다.
"난 벌써 반년이나 그걸 너에게 읽게 하였는데……. 앞으로는 네가 게으름을 피울까 봐 사
흘에 한 번씩 일깨워 주기로 했다."
"그 잘난 건 외워서 어디에 쓴다고 그러세요?"
"얘야, 그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거야. 벌써 일곱 대째 내려오는 건데 딸자식한테만 물려주
고 다른 사람에게는 물려줄 수가 없단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언젠가는 유용하게
쓸 데가 있을 게다."
"정말 미치겠어요. 밤마다 그 소녀공(素女功)을 외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여소교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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