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김장로 부부는 자기와 영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암만해도 신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번 자기가 영채와의 관계를 이야기한 끝에 김장로가 웃으며, "남자가 한두 번 그러기도 예사지." 하였다. 형식은 더 발명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자기의 인격을 신용하여 주지 않는 것을 얼마큼 불쾌하게 여겼다. 그 후부터 형식은 장로 부처를 대하면 한껏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장로 부처는 자기가 선형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자기를 지극히 품행이 방정하고 장래성이 많은 줄로 알았다가 기생과 가까이하며 기생을 따라 평양까지 갔단 말을 들으매 형식은 갑자기 신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 사건 하나로 자기의 가치를 정하려 하는 것이 불쾌하였다. 될 수만 있으면 형식과의 약혼을 파하겠으나 한번 약속한 것을 체면상 깨트릴 수가 없다. 만일 형식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선형의 팔자로다…… 형식의 보기에 (장로는)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였다. 더구나 미국으로서 돌아온 하이칼라 청년 하나가 선형에게 마음을 두어 백방으로 운동한 것과, 교회에 어떤 유력한 사람이 사이에 나서서, 일변 형식을 헐어 그 약혼을 깨트리게 하고, 일변 그 청년의 재산 있는 것과, 영어 잘하는 것과, 미국 유학한 것을 칭찬하여 선형과의 혼인을 이루게 하려고 운동하던 줄을 안다. 그때에 장로 부처가 열에 여섯이나 그편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과,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선형의 태도가 더욱 냉담하여지고 이따금 근심하는 빛까지도 있던 것을 안다. 그 중에도 장로의 부인은 웬일인지 형식에게 대하여 불쾌한 생각이 나서 가장 미국서 온 청년과 혼인하기를 주창한 것과, 그러나 장로의 양반인 것과 장로인 체면이 마침내 이 일을 반대한 것을 안다. 거의 십여 일 동안이나 형식은 김장로의 집에서 미움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을 안다. 그때에 형식도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연해 삼사 일간 일절 장로의 집에 가지를 아니하였다. 그러고 집에 꽉 들어박혀서 분노함과 부끄러움으로 혼자 괴로워하였다. 하루는 형식이가, "오늘은 내가 먼저 약혼을 거절하고 말리다." 하고 옷을 입고 나가려 할 적에 선형이가 처음 찾아와서 은근하게, "어디가 편치 아니하셔요?" 하고 그 뒤에는 순애가 과일 광주리를 들고 들어왔다. 아마 병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위문을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선형은, "어저께 여행권이 나왔어요." 하고 기뻐하는 빛조차 보였다. 형식은 그만 모든 분노가 다 풀리고, "아니올시다. 몸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때에 선형과 순애는 물끄러미 형식을 보았다. 선형도 무론 자기 집에 일어난 문제를 안다. 부모가 형식에게 대하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안다. 자기도 기실 형식에게 대하여 좋은 감정을 아니 가졌다. 그러나 부모간에 형식을 미워하는 빛이 보이고, 형식도 그 눈치를 아는지 삼사 일 동안이나 꿈적하지 않는 것을 보매, 형식에게 대하여 일종 동정이 생기고 정다운 듯한 생각이 났다. 그래서 순애를 데리고 형식을 찾아온 것이라. 그때에는 선형의 마음에는 형식이가 극히 사랑스러웠다. 형식도 선형의 눈에서 그러한 빛을 보고 더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뛰어들어 건져 주겠다는 생각이 나는 것과 같은 동정이라. 잠시 효력이 있으되 오래는 가지 못하는 동정이라. 부부간의 사랑은 이래서는 아니 된다. 저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산다. 저 사람이 행복되어야 나도 행복된다. 저 사람과 나와는 한몸이다…… 이러한 사랑이라야 한다. 선형의 형식에게 대한 사랑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대한 동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형식은 이렇게 분명하게는 알지 못하여도 어떤 정도까지는 선형의 마음속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선형은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의 전일생은 오직 선형의 위에 달린 듯하였다. 선형이가 설혹 자기더러 '보기 싫다, 가거라' 하더라도, 또는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로 차더라도 불가불 선형의 치맛자락에 매어달려야 하겠다. 김장로의 집에 가기가 불쾌하고 선형을 대하기가 불쾌하다 하더라도 그 불쾌한 것이 오히려 아주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나았다. 전신이 불구덩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이렇게 형식은 그 동안 괴로운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떠나기 한 이삼 일 전부터 장로 부처의 형식에게 대한 태도는 극히 친절하게 변하였고, 선형도 더욱 은근하고 가깝게 굴었다. 형식은 겉정(인심)의 반복의 믿을 수 없음을 의심하면서도 하늘에 오를 듯이 기뻤다. 더구나 떠나기 전날 장로 부처가 자기와 선형을 불러 놓고 자기네 두 사람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올린 뒤에 연해 '너희 둘이'라 하여 가며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할 때에는 형식은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는 기쁨을 깨달았다. '너희 둘이'라는 말이 자기와 사랑하는 선형과를 한몸을 만드는 듯하였다. 그때에는 선형도 형식을 슬쩍 보고 쌍끗 웃었다. 네 사람은 이 순간이 영원히 있기를 기도하였다.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