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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한국인의 다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한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한국의 사회적·정치적인 틀이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회에서는 먼저 신라인이 다수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매우 특별한 사실을 주목하겠다.
1985년(경제기획원 조사)에 있었던 인구 및 주택센서스 결과를 보자. 당시 274개 성(姓)이 조사됐는데, 전체 인구 4044만여 명 중 김씨(878만여 명, 그중 경주 김씨는 152만여 명, 김해 김씨는 376만여 명)·이씨(598만여 명, 그중 경주 이씨는 152만여 명, 전주 이씨는 237만여 명)·박씨(343만여 명, 그중 밀양 박씨는 270만여 명)·최씨(191만여 명, 그중 경주 최씨는 87만여 명)·정씨(178만여 명, 그중 경주 정씨는 30만여 명, 동래 정씨는 41만여 명)가 5대 성으로 나타났다. 2000년에도 286개 성 중 같은 성이 5대 성으로 나타났다. 5대 성은 전체 인구의 반이 넘었다. 김씨와 이씨의 비율은 어느 경우에도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었다. 그러니 위와 같은 문답이 생겨난 것이다.
5대 성은 여러 본관으로 나뉜다. 그중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본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의 출발을 보자. 내물왕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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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건국신화에 이씨·최씨·정씨를 포함한 육부성의 조상이 모두 나온다. 『삼국유사』 2,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이니 남쪽으로 지금(고려)의 담엄사로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오니 급량부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고허촌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오니 이가 사량부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 넷째는 자산진지촌이니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오니 이가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라 하여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의 성을 최씨, 본피부의 성을 정씨라 했으나, 『삼국유사』에는 사량부를 정씨, 본피부를 최씨라 하여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경주 이씨는 알평을 조상으로, 경주 정씨는 지백호를 조상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을 조상으로 삼고 있는 경주 최씨는 소벌도리의 자손이 된다.
다음은 박씨와 김씨의 종성(宗姓). 박씨는 『삼국사기』 1,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와 『삼국유사』 2,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나온다. 현재 박씨들 중에는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밀양 박씨를 본관으로 한 사람들이 많다. 김씨 중에는 김유신 장군을 중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가 많다. 그러나 신라인 김유신과 그 일족이 아니었다면 김해 김씨는 번성할 수 없었다.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도 적지 않다. 한편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석씨 세력은 16대 흘해왕(310~356)을 마지막으로 신라의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그 세력이 줄어 그 후손들이 5대 성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를 그대로 믿자는 것은 아니다. 5대 성의 각 성은 여러 본관으로 나뉜다. 많은 본관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 5대 성에 포함되지 않은 종성 석씨와 육부 성인 손씨·배씨·설씨를 포함하거나, 원래 신라 종성인 김씨를 가졌던 안동 권씨 같은 성을 포함하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사람의 비중은 더 커진다.
주목할 사실은 현재 한국인 중 고조선·부여·백제·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한국인이 다수라는 사실에 대해 무엇인가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과 같이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옛 백제와 고구려인들은 이후 신라에서 사회적·정치적으로 도태되었다.
대신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신라인들은 그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삼한통합으로 늘어난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조직을 편성했고, 그에 따라 보다 많은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직에는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이 진출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가 삼한통합을 한 후 옛 신라 땅에는 상주·양주·강주, 옛 고구려 땅에는 한주·삭수·명주, 옛 백제 땅에는 웅주·전주·무주의 9주를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삼한통합 후 신라의 통치 영역과 통치 인구가 3배 정도 늘어난 것을 뜻한다. 그리고 685년에는 영(令)-경(卿)-대사(大舍)-사(史)의 4단계 관직체계를 영-경-대사-사지(舍知)-사의 5단계 체계로 바꾸어 신료의 수를 늘렸다.(『삼국사기』 38, 직관 상) 요즘으로 보면 계장 단계를 하나 더 늘린 것이다. 그 밖에도 삼한통합을 전후하여 조부(調府)의 경(卿)을 한 명 더 늘리는 식으로 관부에 따라 복수의 관직을 설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무왕 18년(678)에 선부(船府)를 새로 설치한 것은 그 한 예다.(『삼국사기』 38, 직관 상) 이는 대신라 시대에 한국역사를 이끌어 가던 지배세력으로서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층을 두텁게 만들었다.
대신라 시대에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경에만 머물러 산 것이 아니라 지방으로 이주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원성왕계 후손들의 왕위계승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방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지방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원성왕과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 명주(현재 강릉)로 이주한 김주원(강릉 김씨의 시조가 됨)이 그 예다.(『삼국유사』 2, 『원성대왕』)
『삼국유사』 2, 『처용랑·망해사』조를 보면 헌강왕대(875~886)에는 왕이 포석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이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고, 금강령에 행차하니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고, 동례전의 잔치 때에는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법집(語法集)』에는 그때 산신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했으므로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말을 한 것이다”고 나온다. 헌강왕 대에 이르면 이미 신라 왕경의 지배세력들(현재 5대 성을 포함한)은 그들이 토지나 노비를 갖고 있던 지방으로 내려가 자리 잡고, 소위 후삼국 시대라고 하는 전국(戰國)의 상황을 헤쳐 나가, 후일 고려의 지배세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려는 역성혁명을 통해 건국된 나라로 건국 초부터 신라의 지배세력과 지방행정 조직 등 신라의 사회적·정치적 유산을 바탕으로 나라를 경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한통합을 이룬 신라인들이 옛 백제와 고구려인들을 사회적·정치적으로 도태시킨 것과 달리 고려에서는 옛 신라인들을 통하여 왕정을 펴나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것도 역성혁명으로 고려의 사회적·정치적 유산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다.
고려에서는 신라의 골품세력들이 향리층이 되고, 조선에서는 고려의 향리들이 양반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는 5대 성을 가진 사람의 수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늘어난 것이다.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을 가진 사람들이 고려와 조선의 각종 과거시험에 다수가 합격하는 등 정계 진출을 하며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5대 성을 가진 세력들이 번성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세종장헌대왕실록』 151, 『전주부』 조를 보면 토성(土姓)이 아홉인데 그중에 이씨가 있다. 여기 나오는 전주 이씨는 알평을 시조로 하는 경주 이씨에서 갈라진 본관으로 보인다. 전주 이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왕을 배출한 세력으로서 전주 이씨는 급격하게 번성해 나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5대 성은 아니나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양반의 사생활』(하영휘 저, 2008)의 주인공 조병덕(1800~1870)을 주목할 수 있다. 조병덕은 양주 조씨(趙氏) 20세손으로, 19세손인 영의정까지 지낸 조두순(1796~1870)과는 13촌 관계에 있었다. 조병덕은 족숙(族叔)인 조두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조병덕의 둘째아들 조장희의 진사 합격에 조두순의 영향력이 행사되었고, 1858년 4월 토색질을 한 범인을 잡으려고 교졸(校卒)들이 조병덕의 집에 난입하자 집에 있던 사람들이 교졸들을 결박하고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조두순에게 알려 사건을 해결하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는 지방에 머물던 조병덕이 영의정까지 지낸 조두순의 도움으로 그 세력을 유지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일은 다른 씨족이나 본관을 가진 가문에서도 마찬가지 일이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5대 성을 가진 사람들은 신라의 진골과 6두품을 거쳐 고려의 향리층, 조선의 양반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일족들이 서로 밀고 끌어주며 그 세력을 번성시킨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어떤 가문(종족, lineage)은 번성하고 어떤 가문은 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씨족, clan)은 번성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성씨나 따지고 족보나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대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을 은폐하지 말자는 것이다. 혹 5대 성에 속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경우 신라의 유산을 잇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도 윗대의 여러 조상, 어머니, 할아버지 대의 세 분, 증조할아버지 대의 일곱 분 중에는 확률적으로 반 정도가 5대 성을 가진 분들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에 거의 모든 한국인은 신라 오리진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다시 쓰는 고대사] 내물왕 이전 형성된 지방편제, 지금의 군·면·리로 발전
<11> 신라·신라인의 또다른 유산
신라가 정복했던 경상북도 지방의 진한(辰韓) 소국(小國) 중 이서국은 청도군으로, 골벌국은 임천현을 거쳐 현재 영천시로, 압독국은 장산군을 거쳐 현재 경산시(경산군)로, 조문국은 문소군을 거쳐 현재는 의성군으로, 사벌국은 상주(尙州)를 거쳐 현재 상주시(상주군)로, 감문국은 개령군을 거쳐 현재의 김천시가 되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피정복 소국 지역의 촌들은 면(面)에 해당하는 행정촌으로 편제되었고, 행정촌 안의 마을들은 이(里)와 비슷한 자연촌으로 편제됐다. 현재 한국의 사회적·정치적 틀은 신라 초기, 내물왕 이전 국가 형성 과정에 그 기원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사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 침묵을 강요받았다. 1945년 광복 후 한국사 교육과 연구를 주도한 한국인 연구자들은 일본인의 주장에 따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은폐·왜곡시켜 왔다. 그와 달리 필자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해 왔다.
신라는 내물왕 이전에 몇 단계의 초기 국가 형성 과정을 거쳤다. 아래에 그 정치 발전 과정을 제시하고, 그러한 단계가 현재 한국사에 어떤 역사적 유산을 남겼는지 보겠다.
서라벌소국 이전 단계는 추장사회
『삼국유사』 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 전한 시절 원년(기원전 69년) 임자 3월 1일 6부(六部, 당시는 6촌)의 조(祖)들이 각기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논을 하였다”고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가 있다. 그때 6촌의 촌장(村長)들은 군주(君主)를 모셔 나라를 세우자는 의논을 했다. 이 기록에서 서라벌소국 형성 이전에 서라벌 지역에 6촌이 있었고 각 촌에는 촌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라벌소국이라는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서라벌 지역에 등장했던 6촌이라는 정치체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였을까? 필자는 이를 인류학에서 말하는 국가(state) 이전 ‘추장사회(酋長社會, chiefdom)’에 해당한다고 보아 왔다(Conrad Phillip Kottak, 『Cultural Anthropology』, 2002).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촌의 촌장들이 조상으로 받들어졌고,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렸고, 후일 촌을 단위로 그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성(姓)을 준 사실 등으로 혁거세가 국가를 세우기 전에 현재 경주 지역에 있던 촌락사회(또는 촌장사회)는 인류학에서 말하는 추장사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서라벌 6촌, 촌락사회에 대해 다룬 바 있다(『신라국가형성사연구』, 1982). 서라벌 6촌의 각 촌은 동서와 남북이 각기 10㎞ 내외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이 정도는 교통수단의 보조 없이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하기에 쾌적한 공간이라고 한다. 각 촌은 농경 등의 이유로 직경 2~3㎞ 정도 되는 몇 개의 마을로 나뉘었다. 촌락사회에서는 촌장이 하나의 촌 전체를, 마을의 장이 마을을 다스리는 2단계 정치조직이 편성되어 있었다. 지석묘를 표지적 유적으로 하는 이러한 촌과 마을은 한반도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존재했다. 그중 촌들은 현재 면(面)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촌을 나눈 마을들은 현재 이(里)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지석묘를 축조하던 촌락사회(추장사회)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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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소국은 서라벌 6촌을 통합해 형성됐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에는 기원전 69년에 6촌장들이 모여 “우리는 위로 군주(君主)가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해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입방설도(立邦設都·나라와 도읍을 세우는 일)하지 않겠는가” 했다고 나온다. 그때 나정(蘿井) 근처에 나타난 알에서 혁거세가 태어났는데, 6촌장들이 기원전 57년에 혁거세를 군주로 삼아 입방(立邦)과 설도(設都)를 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혁거세 집단이 서라벌소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입방이다. 서라벌소국의 군주가 되었던 혁거세 세력은 남산 서쪽 산록에 왕실의 보호시설로 금성(金城·『삼국유사』에는 나정 근처에 위치한 창림사(昌林寺)로 나옴)이라는 왕성과 그 안에 왕궁(후일 사량궁)을 축조했다. 이 같은 왕성의 축조는 설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형성된 서라벌소국은 대체로 1000㎢ 정도의 토지와 1만 명 정도의 백성으로 형성됐다. 6촌을 모체로 해 편성된 6부가 서라벌소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되었다. 이때 촌락사회의 2단계 위에 소국 전체를 다스리는 3단계의 통치조직을 갖추었다.
시간이 지나며 왕성 주변에 주택과 관청들이 들어섰다. 『삼국사기』 1에는 제5대 파사왕(婆娑王, 80~112)이 월성을 축조하고 그 안에 또 하나의 왕궁(후일 대궁)을 지어 왕들의 거처로 삼았다. 이로써 왕성을 둘러싼 도시로서 왕도(王都)가 확대되었다. 후일 왕도로 발전한 서라벌소국의 도읍은 6촌(후일 6부로 개편됨) 중 일부 촌에 걸쳐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도읍의 주인공인 왕과 그 일족들은 소국을 세울 때부터 6촌의 세력집단인 촌장(후일 부장) 세력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530년대까지 신라의 왕들이 6부 중 한 부의 부장이었다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신라의 왕은 처음부터 6촌의 세력이 된 일이 없다. 마치 현재 대통령이 종로구청장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서라벌소국 형성 후 6촌장을 시조로 하는 육부성(六部姓)과 왕을 배출한 종성(宗姓)은 현재 한국인의 다수가 사용하는 성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서라벌소국이 형성될 무렵 한반도 남부에는 수십 개의 소국이 거의 동시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각 소국의 구조는 서라벌소국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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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세력들 원거리 교역 시작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기원전 108년 낙랑군이 설치된 후 내군(內郡·중국 본토의 군)에서 온 고인(賈人·상인)들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왕래하며 원거리 교역을 했다고 나온다. 그 과정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형성됐던 소국들이 크게 세 개의 교역권을 구성했다. 『후한서』나 『삼국지』에 나오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이 설치된 후였다. 그 하나가 현재 경상북도 일대의 소국들로 형성된 진한이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한반도 남부의 세력들은 중국의 상인들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입했고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수출했다. 그 과정에 삼한 소국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가지고 정치적 권위를 내세우게 되었다. 비록 신라의 경우보다 2세기 이상 늦기는 하지만 『삼국지』 ‘왜인’ 조에는 239년에 중국 측에서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에게 동경(銅鏡) 백매 등의 물품을 보내며 나라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한 사실이 나온다. 이는 중국제 물품으로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진한의 정치세력들은 스스로 낙랑군에 사람을 보내 원거리 교역을 했다. 이러한 원거리 교역체제를 위세품(威勢品) 교역체제라고 할 수도 있다. 낙랑군 지역에서 받아들인 중국제 위세품으로는 경주 조양동 유적, 영천 어은동 유적 등에서 출토한 것과 같은 동경·동탁·철제 무기·철제 농기구 등이 있다. 신라의 경우 위세품 교역은 소국 정복을 하기 시작한 1세기 중반 이후 점차 의미가 없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다른 현상이다. 신라는 그러한 위세품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성장한 변한의 북쪽 지역에 있던 소국들은 지리적인 이유로 서라벌소국을 원거리교역의 창구로 삼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으로 소국연맹의 각 소국에는 왕들이 있었다. 소국의 백성들은 각 소국 왕의 통치를 받았다. 당시 진한연맹의 공동 시민권은 없었다. 그리고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서라벌소국도 연맹 내의 다른 소국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단지 서라벌소국의 왕은 진한 연맹의 맹주로서 원거리 교역을 주관했고 외적 방어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소국 간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진한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경상북도로 그 역사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 서술도 바꿔야 할 때
1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진한 소국들이 서라벌소국에 정복됐다.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 24~57) 19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정벌해 멸했다고 나온다. 그후 신라는 제12대 첨해왕(247~261)대에 사벌국을 정복할 때까지 진한의 모든 소국들을 정복했다.
『삼국사기』 2에는 제11대 조분왕(助賁王, 230~247) 7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내항해 제택(第宅)과 전장(田莊)을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나온다. 신라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형성됐던 소국들을 단위로 군을 편성하는 정책을 폈다. 그때 군으로 편제된 과거 소국의 영역에 성주(城主)를 칭하는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2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몇 개의 군을 통합해 다스리던 지방관으로는 185년에 지방관으로 처음 파견됐다고 하는 좌군주(左軍主)와 우군주(右軍主)를 들 수 있다.
이웃한 소국들을 정복하며 서라벌소국 영역은 신라의 서울인 왕경으로 바뀌었다. 그 안의 6촌은 6부로, 촌 안의 마을들은 이(里)로 편제됐다.
이제 우리는 빼앗긴 역사를 찾아야 한다. 8회에서 본 것과 같이 내물왕 이전 역사를 폐멸시킴으로써 제국 일본은 일선동조론과 창씨개명 정책을 펴며 한국인 폐멸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을 밝혔다. 그리고 9회에서는 광복 후 한국인 연구자들은 식민사학 청산을 외쳐왔으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는 일제가 만든 한국사 폐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보았다. 우리는 일제의 한국사 폐멸의 고리를 끊고, 한국인의 오리진과 한국 사회체제의 구조적 틀이 신라의 내물왕 이전 역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도 바꾸어야 한다.
[다시 쓰는 고대사] 성골 남자 씨 마른 신라, 선덕 내세워 왕통 신성함 지켜
<12> 신라 여왕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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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차녀 선덕(덕만이라고도 함)공주가 첫 여왕이 되는 과정은 짐작이 가듯이 결코 간단치 않았다. 물론 진평왕과 마야(摩耶)왕후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출발점이 됐다. 진평왕의 남동생들인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과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이라도 아들을 낳았더라면 성골 남자의 왕위 계승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차녀 선덕공주는 처음부터 1순위가 될 수 없었다. 언니인 장녀 천명(天明)공주보다 서열이 뒤진 데다 이전에 공주가 여왕이 된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복잡한 방정식이 전개됐다. 603년 진평왕은 37살 때 결단을 내려야 했다. 폐위된 제25대 진지왕(眞智王·재위 576~579)의 아들인 용수(龍樹)전군(殿君·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을 장녀 천명공주와 결혼시켜 사위의 자격으로 일종의 태자를 삼는 방법이었다. 용수가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는 정당성은 성골 신분을 갖고 있던 천명공주에 기인한다. 모계제 사회에서도 여자는 그러한 정당성을 갖지만, 실제 왕위 등의 자리는 남자가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용수의 동생)』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 (진평)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인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 전군이 사양했으나 마야왕후가 들어주지 않았고, 마침내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용수와 천명공주 사이에는 김춘추(金春秋)가 태어났다. 하지만 용수는 결국 왕이 되지 못했다. 진평왕이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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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太陽)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했다. 그때는 마야왕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진평대왕은 용춘공에 관심을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했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했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했다.” 612년의 일이다.
천명공주의 출궁은 그가 성골을 버리고 진골로 족강(族降·신분 강등)됐음을 의미한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선덕공주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용춘은 선덕공주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선덕과의 혼인을)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됐다. 하지만 용춘은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했다. 진평왕은 용수에게도 선덕을 모시도록 했으나 또 자식이 없었다. 왕위계승자가 된 선덕공주는 612년부터 21년간 왕정을 익혔다. 선덕이 왕위에 오를 때인 632년엔 40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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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선덕여왕의 즉위는 성골 남자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성골이라는 점이다.
선덕공주를 왕위계승권자로 선택한 것은 성골종족(聖骨宗族)의 왕위 계승 원리에 어긋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류학에서 말하는 부계제사회(父系制社會)에서 여자도 한 대(代)에 한해 부계성원권을 가지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Ernest L. Schusky, 『Manual for Kinship Analysis』·1972). 다만 그 여자가 혼인을 하여 남편의 집으로 가면 부계(父系)성원권을 잃게 된다. 천명공주가 출궁한 것은 성골 신분을 가진 부계성원권을 잃고 용수의 부계혈족집단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그와 달리 선덕공주는 혼인을 한 후에도 성골 거주구역인 왕궁을 떠나지 않았기에 성골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성골로서 왕위계승권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선덕공주가 혼인했던 용춘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 사이에 출생한 아들은 용춘의 부계성원이 되어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여자는 한 대에 한해, 그것도 아버지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을 때 부계성원권을 가질 수 있었다.
진평왕은 진지왕의 폐위와 동시에 진골로 족강된 용수보다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인 성골 선덕공주를 선택했다. 당시 선덕공주는 용춘 외에도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지만 혼인을 하여 남편의 부계혈족으로 소속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선덕 즉위 뒤 중국선 측천무후 등장
선덕여왕이 즉위한 후인 690년 중국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중국에서 유일하게 여자로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 705년까지 15년간 재위했다. 측천무후의 즉위는 당 고종의 황후로서 황제가 된 것으로, 당 황실의 왕위계승원리와는 무관한 권력장악이었다. 그렇더라도 측천무후의 즉위는 신라의 선덕여왕·진덕여왕과 같은 여왕의 즉위에서 힘을 얻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선덕의 왕위계승 막바지 과정에도 반발이 있었다. 『삼국사기』 4, 『진평왕 53년(631)』조는 이찬 칠숙(柒淑)과 아찬 석품(石品)의 반란을 서술하고 있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어난 사건이었다. 진평왕은 그들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잡아 구족을 멸했다. 칠숙·석품이 난을 일으킨 이유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선덕공주라는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것일 수 있다.
첫 여왕의 위엄을 높이려는 시도도 있었다. 『삼국유사』 3, 『황룡사9층탑』조에 따르면 636년 당나라에 유학 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태화지 옆을 지나다 신인(神人)을 만나 대화했다. 자장은 신라에 말갈·왜국이 인접해 있고 고구려·백제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구적(寇賊)이 횡행하는 것이 백성들의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신인은 “지금 너의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기에 이웃 나라들이 침략을 도모하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황룡사(皇龍寺)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643년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9층탑 건축을 제안하여 탑을 건축하게 되었고 645년 완공했다. 황룡사9층탑은 선덕여왕의 위엄을 높이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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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은 어렵다는 뜻)’라고 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선덕여왕 16년(647) 1월 상대등으로 있던 비담(毗曇)의 무리였다(『삼국사기』 5). 비담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비담 일당은 춘추(春秋)를 왕으로 세우려 오래전부터 활동해온 결사인 칠성우(七星友)와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선덕여왕이 647년 1월 8일 세상을 떠나기 전 말년엔 칠성우들이 여러 부문에서 왕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1월 17일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들이 마지막 남은 성골인 승만(勝曼·진덕여왕)을 왕으로 세우고, 비담의 난을 진압하였다.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막내동생인 진안갈문왕의 딸로 혼인하지 않고 왕궁에 살며 성골 신분을 유지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골 여자도 모두 소멸되었다. 그러자 춘추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진골왕 시대가 열렸다.
신라인들은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비화에도 공을 들였다. 『삼국유사』 1 『지기삼사(知幾三事)』조에 나오는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조짐이 그것이다.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을 것이라 한 것, 경주 여근곡(女根谷)에 숨어든 백제 군사의 존재를 알아내고 잡아 죽이도록 한 일,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고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한 일이 그것이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의 그림이 자신이 배우자가 없음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근(女根)은 여자의 옥문(玉門·생식기)으로 그 빛이 흰색이며 흰색은 서방이므로 서방의 군사 즉 백제 병사가 왔음을 알았고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갔으므로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문무왕대에 낭산 밑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는데 불경에 도리천(忉利天)은 사천왕 위에 있어 선덕여왕이 한 말이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왕위에 오른 후, 세상을 떠난 후 선덕여왕의 특별함을 말하는 스토리텔링이었던 것이다.
여자이지만 성골인 선덕여왕의 즉위는 신라 골품체제의 운용원리를 따른 왕위 계승이었다. 성골과 성골의 왕위 계승 등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밝히기로 한다.
첫댓글 아니옵니다
고려중기때인가
일반백성들한테
사성하게할때
고려왕조 망칠 나무목씨 견제한다고
김씨성을 많이 사성하게 했단
기록있습니다
현재 성씨들이 전부 진짜라는 가정하에 가능한 일입니다.
조선시대때 제대로된성씨나 잇었으며
당시 2%에 불과햇던 양반계층과 왕족씨족들이
지금은 애지간한 성씨에서는 다 그렇다고 하는데.
그럼 98%는 모두 죽고 2%만 남아서 후손을 이어가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