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운은 함평 사람이며 무과로 벼슬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거쳐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에 이르고 함춘군(咸春君)으로 봉해졌다.
앞일을 추수(推數)하는데 밝았으며 늠름한 장수의 기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에 김재찬(金載瓚)이 문과에 급제하게 되자 이창운은 김재찬을 종사관(從事官 : 조선 때 각 군영이나 포도청에 딸린 종 6품직)으로 지명 소집하였다.
김재찬은 일찍이 재상의 자제이며 문벌이 혁혁한 집안사람이므로 자못 교만한 오기가 있어 내가 왜 무장 밑에서 종사관을 하겠냐하고 몇 번을 불러도 가지 않았다.
하루는 이창운이 휘하 군법집행관에게
“오늘은 종사관 김재찬의 목을 참할 것이니 급속히 체포해 오도록 하라.”
고 엄명을 내렸다.
김재찬은 그제서야 비로소 크게 두려워하며 울면서 자기 아버지 김역(金熤)에게 구해줄 것을 애걸하였다.
그의 아버지 김역은
“네가 체통과 예법을 알지 못하고 교만 방자하여 군령 법규를 어겼으니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있느냐.”하고 나무라고 한참 있다가 편지 한 통을 주었다.
김재찬은 그 편지를 품속에 깊이 품고 어영청 군영에 들어서니 이미 형장을 설치해놓고 창검을 든 군사들이 삼엄하게 도열하고 있어 그 위의(威儀 :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가 찬 서릿발과 같아서 등골이 오싹하였다.
곧 군법을 시행하려 하니 김재찬은 혼비백산하고 두려워서 납작 엎드려서 자기 아버지가 준 편지를 꺼내어 이창운에게 올렸다.
이창운이 그 편지를 뜯어보니 글자 한 자 없는 빈 백지였다.
이것은 아무 할 말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무언의 구명운동이기도 한지라 이창운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명령을 내렸다.
“내가 너희 아버지의 안면을 봐서 너의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하고 이내 영창에 가두었다.
이 날부터 이창운은 밤에 영창으로 가서 김재찬에게 평안도내의 각 군읍의 형편과 산천의 험하고 막힌 곳, 도로의 좁고 험한 곳, 환곡(還穀)의 출입 총량, 대포 등 병기⋅군량의 비축량, 인구의 분포상태, 군(軍)에서 쓰는 비용 상황 등을 일일이 상세히 강의하고 그 이튿날 다시 와서 전날 밤 강의한 것을 외도록 하며 비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을 피하지 않고 하루같이 매일 한 군(郡)씩 모든 형편과 상황을 강의하였다.
김재찬은 구류 40여 일 동안에 평안도 40여 군의 상황을 능히 통달해서 손금을 짚듯이 환하였다.
이창운은 강의가 끝나자 이에 김재찬의 손을 잡고
“이 늙은이가 국가의 중대사로써 군에게 의탁하노니 군은 충성하는데 노력하여 국가로 하여금 위태로움을 당하였을 때 그 위태로움을 바꾸어 평안함이 되도록 하라.
내가 죽은 뒤 20년에 반드시 관서지방에서 변란이 일어날 것이니 국가가 병력을 움직여 전쟁을 해보지 않은 것이 이미 200년이 되었으니 평화가 오래 지속되는 시기에 만약 뜻밖의 변란을 당하면 반드시 종사(宗社)와 사회가 토붕와해[土崩瓦解 : 토담과 기와가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뜻에서, 단체가 무너지고 헤어짐을 가리키는 말.]의 형편이 될 위험이 있어서, 내가 한편으로 조정의 형편을 관찰해 보니 세상을 다스리고 변란을 평정할 만한 인재가 군(君)만한 이가 없으니 군은 신중히 해서 이 노부(老夫)의 말을 잊지 않도록 하라.”
하고 또 반적을 막는 책략을 설명하였다.
김재찬은 원래 머리가 영특하고 학문이 깊어서 그 말을 가슴속 깊이 새겼다.
얼마 뒤에 이창운은 죽고 김재찬은 또 몇 년 후에 정승을 배하였다.
순조 11년(1811년)에 이르러 관서의 적 홍경래(洪景來)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정은 놀라고 술렁거렸으며 서울 장안이 물 끓듯 하였다.
왕은 대신들을 불러 반적의 토벌 계획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로대신들을 급거 입궐토록 소집령을 내렸다.
김재찬의 집은 신문 밖에 있었는데 급보를 내리는 파발마가 날듯이 달려와 대궐에서 소집령을 내린 것을 알렸다.
김재찬은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조그만 반적은 자멸할 것인데 왜 놀라 요동을 하는고?”라고 말하였다.
집에 있는 하인들이 준비한 견여[肩輿 : 두 사람이 메는 지붕이 있는 가마의 일종.]를 타고 빨리 대궐을 향하여 떠났다.
그러나 김재찬은 중간에서 수레로 바꿔 타고 일부러 남대문을 지나 종로에 이르러서는 어자로 하여금 천천히 가도록 해서 도심을 지나니 시민들이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정승이 이와 같이 태평하고 조용하니 우리들은 반드시 근심할 것이 없도다.” 하였다.
이리하여 장안의 민심이 차차 평온해졌다.
그는 드디어 입궐해서 모든 원로대신들에게 이르되
“상감의 병환이 오래 되었으니 명령이 상감의 뜻에서 나오면 백성들이 반드시 불신할 것이니 왕대비(효의왕후(孝懿王后) : 정조(正祖)의 왕비)의 전지[傳旨 : 승정원의 담당 승지를 통하여 전달되는 왕명서(王命書)]로 장안 백성들을 효유하고 급히 진무대장(鎭撫大將)을 정해서 장안 안에 본영을 개설 운영할 것이며 선봉장을 먼저 보내어 관서대장과 더불어 힘을 합해서 적을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하고 곧 담당관을 불러서 그 방략을 일일이 구두 지시하였다.
이와 같이 복잡다단한 상황도 손수 판단 처결함이 물 흐르듯 하였다.
도로, 산천, 인물, 풍토, 봉화대, 성보(城堡), 군과 민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함을 촛불을 밝혀 비추어보듯 하고 점치듯이 해서 손을 휘두르면 바람이 일듯하여 반나절이 못되어서 벌써 계획하고 조처함을 마치니 모든 원로대신들이 가만히 보고 말이 없다가 일이 끝나자
“대감은 이 난리를 미리 알고 모든 자료를 깊숙이 익혀둠이 있었음인가.
어떻게 이같이 신속하게 각각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졌습니까?”하고 경탄해 마지아니하였다.
김재찬이 대답하기를
“제가 30년 전부터 익혀온 바입니다.”하니 좌우가 놀라 그 연고를 물으니 김재찬은 드디어 이창운 대감의 일을 말하였다.
“이것은 다 우리 사또(使道 : 부하인 장졸(將卒)이 그 주장(主將)을 존대하여 부르던 말)께서 가르쳐 주신 은덕이지 저에게 어찌 실 끝만큼의 공이 있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리하여 얼마가지 않아서 홍경래의 반란은 평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