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쯤에서 약간의 복습이 필요하겠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에 관한 말씀이므로 마태복음의 해석 또한 왕국(천국)과 관련하여 풀어야 한다.
1장은 왕의 족보, 2장은 왕의 탄생, 3장은 “왕의 선두주자” 침례인 요한의 등장, 4장은 왕국의 설정, 5-7장은 왕국의 법령선포, 8,9장은 왕으로서의 표적들, 10장은 왕국복음의 위임, 11-12장은 왕이 거부되는 모습, 13장은 거부되는 왕국이 숨어들어가는 신비의 상태로 교회시대가 제시되는 모습, 14장은 환란시대의 모습, 16장은 교회와 관련한 말씀과 왕의 재림, 17장은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모습의 모형으로 변형산 사건, 18장부터는 왕국의 법령과 같은 산상설교와 같은 내용과 재림후의 천년왕국에 대한 가르침, 19장에서는 교회시대와 다른 행위구원의 제시, 21-24장은 왕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이어지는 대환란의 모습을 우리는 읽어왔다.
이제 25장은 왕의 재림과 관련하여 있게 될 심판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12개의 천국비유 중 11번째의 비유인 그 유명한 열 처녀 비유를 보고 있다.
『“그 때에 천국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명의 처녀와 같으니라. 그들 가운데 다섯은 현명하고 다섯은 어리석더라.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졌으나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현명한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통에 기름을 가지고 있더라.』(1-4절)
『천국은 ....같으니라』(1절)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러했다.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다시오실 주님을 말하는 것이며 열 처녀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분의 오심을 고대하는 가운데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의 기름은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로운 처녀와 같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면서 신랑의 오심을 고대하고 살라는 뜻으로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했다.
물론 영적인 적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면서 살라는 적용으로야 잘못된 것이 없다고 하겠지만 교리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 뜻이 달라도 한참 달라지며 그리스도인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구절이 나올 때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는다는 칼빈주의자들은 영적인 적용만 하고 교리적인 해답을 유보한다. 그리고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둘러댄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런 구절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끝까지 믿음을 견지하지 못해서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성경은 언제나 순결한 “한 처녀”라고 말씀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열 처녀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의 구절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신랑은 결혼을 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신부와 결혼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36절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열 처녀들이 가지고 있는 기름이 성령의 모형이라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한데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본 절의 비유대로하면 성령을 행위로 얻게 되는 것이며 여기의 현명한 처녀들은 행위로 구원얻는 무리들을 말하는 것으로 딱 부러지게 말하면 그들은 환란성도들인 것이다.
은혜시대인 지금과 달라서 환란시대의 성도들은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의 처녀들은 요한계시록이 말씀하는 “동정들”로서 동정들이나 처녀들은 영어에서는 “virgins"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어린양의 혼인식을 묘사하는 시편 45편의 ”신부를 따르는 자들“임도 알 수 있다.
“처녀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실재로 그들 중 일부는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절)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환란성도들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한 번 드려지셨고, 두 번째는 자신을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 없이 나타나시리라』(히9:28). 하시는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휴거를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 “환란성도”들과 관련되는 구절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뒤늦은 애원이 “주여, 주여”라는 부르짖음이지만 주님의 대답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깨어 있으라. 너희는 인자가 오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라』(13절)
주님은 분명히 “인자”가 오실 그 날고 그 시간을 사람들이 모른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이단들은 자신들이 주님이 오실 날을 안다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세상적인 학문과 지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속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깨어 있으라”하시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으니라. 그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곧 여행을 떠났더라.』(14-15절)
이것은 “달란트 비유”로 마태복음의 12개 천국비유의 마지막 비유이다.
이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청지기들에게 적용되어서 “달란트”라는 말은 재능, 은사로 사용되며 맡은 바 은사대로 청지기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말하는 구절로 사용되어 왔다.
이 부분 역시,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큰 무리가 없겠지만 교리적으로는 교회시대에 적용되는 것도 있으나 직접적인 것은 아니며 항상 왕국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왕국과의 연계선상에서 제시된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시대와 관련이 있을 경우에는 언제나 본문 안에서 “천국의 신비”라는 말과 함께 언급이 되며 “옛 선지자들이 보기 원했던 것을 너희는 볼 수 있다는 언급과 함께 제시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 역시 “환란시대”의 성도들로 그들은 믿음과 함께 자기가 맡은 재산의 이문을 남기는 행위가 따라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구절들은 환란성도의 믿음과 실행에 관한 것으로써 주님이 오시기 전 적그리스도의 통치 후반 세 때 반의 참혹한 이스라엘의 고난의 기간에 그들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하는 민족적인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왕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신약시대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죄와 동격으로서 우상숭배와 행음보다 더 큰 죄인 것이므로 그 죄는 투로와 시돈, 소돔보다 더 중한 심판을 받는다고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깥 어두운 곳은 지옥의 모습인데 지옥은 지금의 교회에서 사라진 단어가 되었다.
모든 사람의 혼은 사람의 모양이나(영이 아니라 혼이다) 지옥은 사람의 혼을 벌레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 말은 필자의 말이 아이라 성경이 말씀하는 바이다.
『그 곳에는 그들의 발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모든 사람이 불로 소금치듯함을 받을 것이며, 모든 제물이 소금으로 소금치듯함을 받으리라』(막9:48-49).
주님은 그들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적어도 2천년 동안 거부되어 왔고 그들이 민족적으로 회심하기 위해서는 환란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은혜의 복음과 환란시대의 복음은 명백히 다르다. 성경은 이렇게 나누고 있다.
은혜의 복음.
『이 복음 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으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절)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롬10:9-10절)
환란시대의 복음.
『그러자 그 용이 여인에게 분노하여 여인의 씨 가운데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고 나가더라.』(계12:17절)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누구라도 뒤로 물러나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절)
『그 앞에 모든 민족들을 모아 놓고 마치 목자가 양들을 염소들에서 갈라놓듯이 그들을 따로 갈라놓으리라. 그리하여 양들은 그의 오른편에, 염소들은 그의 왼편에 세워 두고』(32-33절).
자, 이 구절을 두고 우리는 자신의 양심 앞에서 솔직해져야 한다.
당신이 초신자라면 이 구절을 어떻게 배웠고, 당신이 교사나 목회자라면 어떻게 가르쳤는가?
우리가 배우고 가르친 것을 말하자면 양 무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산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며, 염소 무리는 그 반대로 배우고 가르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성경스스로 풀게 두고 우리는 기록된 사실들을 믿기만 한다면 성경은 다른 뜻을 제시한다.
여기서 양 무리는 환란기간에 하나님을 백성인 유대인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하는 개인이나 나라들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물론 개인 보다는 나라의 개념이 더 농후한 것은 32절의 기록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양의 무리든 염소의 무리든 그들에게 속할 생각은 전혀 없고 하늘나라에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있을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부디 이스라엘의 편에 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