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목숨’을 붙들고
간밤부터 새벽까지 우리 지역은 비가 살짝 스쳐 지난 시월 셋째 금요일이다. 가을 들머리 비가 잦았고 추석을 쇤 이후 한동안 맑은 날이 지속되었는데 이번 강수량은 미미했다. 텃밭 푸성귀를 비롯해 농작물에는 단비였지 싶다. 날이 밝아오니 비는 금세 그치고 흐린 하늘은 연방 깨어나 맑은 하늘이 드러날 듯했다. 나는 강수 여부와 관계없이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낼 일정을 세웠다.
아침 식후 배낭엔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이웃 동의 꽃대감 꽃밭으로 가보니 시들어 가던 화초들은 간밤 내린 비를 맞고 생기를 되찾아 싱그러웠다. 꽃대감 친구는 보이질 않고 밀양댁 할머니와 통장 아주머니가 꽃밭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먼발치서 비를 맞은 꽃들이 한층 싱그러워 보인다는 인사말을 건네고 아파트단지를 벗어났다.
외동반림로 반송소하천 곁을 따라 걸어 원이대로를 건너 폴리텍대학 후문을 향했다. 창원 레포츠파크를 지나니 울타리를 감고 오르며 자란 배풍등꽃이 저문 자리에 열매를 맺어 빨갛게 익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봄이나 여름엔 잎줄기나 꽃이 보이지 않던 구기자도 열매가 붉게 익어갔다. 폴리텍대학 캠퍼스를 지날 때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하는 교직원들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고목 벚나무 가로수가 나목이 된 교육단지 차도를 지나니 등굣길 자녀들을 태운 학부모 차량과 등교하는 학생들을 다수 볼 수 있었다. 전문계 고등학교 교문 앞에는 생활지도 부서 교사들이 학생들의 안전을 살피고 교복을 갖춰 입지 않은 아이들을 지도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문 앞에는 형광 조끼를 입은 배움터 지킴이들이 학생들이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도록 도와주었다.
도서관의 업무 개시 시간이 일러 나는 올림픽공원 내 국화공원으로 가 봤다. 수년 전까지 이맘때면 국화꽃을 피우던 공원이었는데 근년에 와서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야생으로 방치해 놓았다. 새로운 소국 꽃모종은 심지 않아도 잡초를 이겨낸 여러해살이 구절초와 홍접초가 꽃을 피워 도심 속 공원을 장식했다. 국화공원을 둘러보고 다시 교육단지 보도를 따라 도서관으로 갔다.
지난번에 들린 이후 보름 만에 찾은 도서관이다. 사서들이 속속 출근하고 청소 아주머니들의 아침 손길이 바쁜 때였다. 나는 신간 코너에서 오늘 읽을 책을 미리 뽑아 반납 코너에서 집에서 읽었던 책을 넘겼다. 이번에 고른 책은 하기주의 ‘목숨’이라는 장편 소설 전 3권을 읽으려 했는데 3권은 대출인지 보이지 않고 1권과 2권이 꽂혀 있어 뽑아 전망이 트인 창가 열람석에 앉았다.
‘목숨’을 쓴 하기주는 여든 넘어 문단에 나온 특이한 작가였다. 내보다 스무 살이 더한 작가는 서울 명문대 경제과를 나와 유수 기업의 최고 경영자를 지낸 이였다. 전문 경영인이 젊은 날 품었던 문학도의 꿈을 현역에서 은퇴 후 인생 이모작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주목받는 행보였다. 어느 날 신문 신작 코너에 실린 작품과 작가 소개를 통해 읽고 싶어 벼르던 책이다.
‘목숨’의 첫 장을 펼치니 주인공 강세준 가계도와 1940년대 동북아와 마산 일대 지도가 나왔다. 이 작품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마산과 그 주변에서 주인공 일가를 비롯해 여러 인물 군상이 펼치는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되었다. 신문에서 봤던 박경리의 ‘토지’나 최명희의 ‘혼불’에 견줄 만하다는 서평 그대로였다. 내가 사는 마산과 주변 지명이나 지역 방언이 친근감이 더했다.
책을 펼쳐 읽은 교육단지 도서관은 열람실이 넓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좌석도 열람자 취향 따라 골라 앉을 수 있어 집에서 내가 쓰는 의자보다 더 편한 데서 장시간 머물렀다. 때로는 돋보기를 벗어 맨눈과 번갈아 책장을 넘겨야 해서 창밖의 정원과 푸른 숲은 눈 피로를 들어주었다. 구내식당이 없어 점심은 휴게실로 가서 집에서 챙겨간 삶은 고구마와 컵라면으로 때우고 하루를 보냈다. 23.10.20
첫댓글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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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기대만땅입니다
역사는 사실에 바탕 무미건조한 기록에 그친다만,
역사소설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내면세계와 진실이 담겨 있어 ~
주선생님 독서열에 감탄합니다.
요즘 책을 집어도 오래 붙들지 못하고 눈이 잠기고 허리 통증이 심합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었다./덜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