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의 높낮이와 창의적 서정 / 박태일 (시인, 평론가) 1. 낱말 가운데는 소리 같고 뜻 다른 말이 있다. 이른바 동음이의어다. 뜻 같고 소리 다른 말도 있다. 동의이음어다. 둘 다 재미있는 말놀이 방식을 마련해 준다. 수사법으로 동음이의어법이나 동의이음어법이 가능한 까닭이다. 말무리는 앞뒤 맥락을 빌려 그들을 쓰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원론적으로만 보자면 생각이나 느낌의 부름켜를 키울 수 있음직한 동음이의어에 견주어 동의이음어는 오히려 사회적 낭비요소가 아닌가. 왼/ 오른과 좌/ 우를 보기로 들어 보자. 둘 다 배워야 할 시간과 노력을 다른 것을 배우는 데 쏟는다면 어떨까. 오늘날 왼/ 오른과 좌/ 우 사이 말힘 관계는 좌/ 우가 훨씬 커 보인다. 토박이말과 한자말 사이 동의이음어의 경우, 한자말이 이겨 토박이말을 아예 사라지게 하거나 말 사이 위계를 굳힌다. 토박이 말은 품위가 떨어지는, 거친 말로 내려앉는 순서가 그것이다. 서양 외래어와 토박이말 사이 동의이음어 관계에서는 이 점이 더 크게 작용한다. 1970년대부터 국문학계에 쓰이기 시작했던 갈래란 낱말이 있다. 서양말 장르와 겨루며 힘을 받아 제법 잘 자라는가 싶었다. 그런데 어느새 다시 사라질 단계에 이르렀다. 말의 위계와 순위는 늘 토박이말에 대한 외래어의 승리와 특권화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 입·눈·피·코·살·똥과 같은, 중요한 토박이말들은 살아 있다. 그나마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밥 또한 마찬가지다. 밥이라 웅얼거리면 마음에 한결같은 소름이 돋는다. ‘ㅏ’ 소리와 입술소리 ‘ㅂ’의 조합이 주는 따뜻함과 편안함, 그리고 낮고 긴 서글픔. 한 시인이 그런 느낌을 찬찬히 그려 주었다. 비록 밥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근대 기계적 시간을 힘들게 배우며 새기며 거듭했던 시계 밥 주기. 시계에 밥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래도 못 미더워 시계가 가는지 귀에다 갖다 대고 째깍째깍 소리를 들어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궤종시계 바늘이 9시 근처에서 못 올라가는 기색이 보일라치면 서글픔에 먼저 본 사람이 얼른 일어나 까치발을 하고 태엽을 끝까지 감아주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 이문재, 「밥」 가운데서 (『시와시학』 겨울호, 시와시학사, 2012) 동의이음어를 배우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이 기껏해야 외래어가 지닌 특권 감각만 키우는 쪽이라면, 그래서 토박이말과 우리에 대한 열패감만 더하게 이끄는 학습이고 앎이라면 불행하다. 삶이란 더 달라지거나 더 나아가는 일이 되어야 할 터. 예술문화가 필요한 까닭 가운데 큰 하나는 바로 그러한 역할을 떠맡고자 한 데 있다. 사회 또한 그 점에 뜻을 같이하고 여러 길로 격려까지 아끼지 않는다. 삶의 고착과 지평 폐쇄에 맞서며 그 위험을 살펴 헤아리게 해 주는 힘, 오늘 이 자리 삶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키워 주는 힘. 시 쪽에서 보자면 타자와 차별화하려는 노력과 창의적 서정이 그런 역할의 최소 요건이다. 2. 서정이란 여러 뜻을 품는 말이다. 뜻과 속살에는 편차가 크다. 그런데 서양 사람 람핑은 서정에 대한 잡다한 정의를 간명하게 묶었다. 유래 깊은 서양 갈래론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지만 서정의 본질은 단일한 한 인격의 목소리만 들리는 단독 발화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말하는 주체가 뒤바뀌는 이야기의 매개 발화나, 아예 다른 인격으로 바뀐 주체들이 말을 주고받는 극의 교환 발화나 다른 특성이다. 이렇게 보면 서정 갈래에 들어설 수 있는 유형이나 종류는 매우 넓어진다. 1인칭 시점이 아닌 주체의 목소리를 한결같이 들려주는 사상시· 사물시까지 모두 시정 갈래 속에 든다. 우리 당대 시론에서 너나없이 끌어다 대곤 하는 슈타이거류의 주관성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틀이다. ① 귀뚜라미 울면 귀뚜라미 보일러를 점검할 때다 들창에 꽉 껴 오도 가도 못하는 만월 해마다 우리 집 연통을 막는 것은 달빛에 글 읽는 쓸개 빠진 저놈이다 ― 김종철, 「가을이 왔다」 전문 (『시와시학』 겨울호, 시와시학사, 2012) ② 모하메드 알 카다피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 알 사디 카다피 카미스 알 카다피 카다피 카다피 카다피, 일곱 아들의 거룩한 아버지 무아마르 카다피, 마흔 명의 아름다운 금발 경호원을 곁에 두고 남달리 황금을 사랑한 세련된 독재자. ― 강인한,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가운데서 (위의 책) ①과 ② 둘 모두 서정의 본디 모습을 잘 갖추었다. ①에서는 “보일러를 점검할 때”라 깨닫고, 귀뚜라미를 일컬어 “쓸개 빠진 저 놈”이라 말하는 말할이 한 사람의 한결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른바 일인칭 ‘나’의 단독 발화다. ② 또한 마찬가지다. 카다피가 “남달리 황금을 사랑한 세련된 독재자”라 한 말할이의 목소리로 한결같다. 다만 ①과 ②는 말할이, 곧 주체의 됨됨이가 다르다. ①에서는 개인의 개별적인 목소리가 강하다. 곧 사적 주체다. 거기에 견주어 ②는 개인의 목소리라기보다 공공의, 또는 이미 공유하고 있는 타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곧 공적 주체인 셈이다. 사적 주체가 앞선 시는 경험적 서정이 중심으로 떠오른다. 거기에 견주어 공적 주체가 앞선 시는 관습적 서정을 드러낸다.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 시 종류가 공론시·증언시다. 신문 논설 또는 정보 기사의 주체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모든 시인이나 시 속에서 이러한 두 주체는 서로 포개지고 맞물린다. 어떤 데 더 멀고 가까운가 하는 비중·정도 문제가 남을 따름이다. 사적 주체임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①에서 “글 읽는 쓸개 빠진 저놈”은 공적 울림까지 싸안고 있다. 거꾸로 ②에서 ‘카다피는 독재자’라는 공적 울림 속에서도 “카다피 카다피, 일곱 아들의”로 되풀이하는 빠른 가락에는 사인이 지닌 사적 작시술의 특징이 담겼다. 그런데 주체가 공적 관습 자리로 나아가든, 시적 경험 자리로 나아가든 우리 서정시가 튼튼하게 발전하려면 동의이음어적인, 동어반복 상태에 머물지 말고 창조적·창의적 자질을 키우는 쪽으로 드높이 길을 잡아야 한다. 그를 위해 시문학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애쓸 일이다. 유사 창조와 진성 창조의 경계를 뚜렷이 하고, 진성 창조에 다가서기 위해 연구가·비평가 집단뿐 아니라 무엇보다 시인 스스로 힘든 각고를 피하지 말 일이다. 이런 점을 마음에 새기고 지난겨울 시들을 살피자니 두 젊은 시인의 작품이 눈에 든다. 한 편은 공적 주체에 가까운 말할이를 드러내고, 다른 한 편은 사적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① 이미 천 척의 배들이 떠나갔다 지천으로 널린 안개를 뚫고 포구에서는 누구나 떠나가야 한다 깊은 바다를 먼저 통과해 간 뱃사공들은 바람 부는 밤바다에서 그들의 언어로 등대를 세웠다 등대 불빛이 찢어진 고전처럼 허공에 나부낄 때. ― 김경엽, 「천의 바다」(『시와정신』 겨울호, 시와정신사, 2012) ② 방문 양옆으로 빨랫줄처럼 나일론 줄을 치고 꽃무늬가 있는 천으로 듬성듬성 주름을 잡아 매달고서 커텐이라고 좋아라 했던 아늑한 방, 자취방 창호지문짝의 고리 하나를 굳게 믿었던 그 밤 누가 방문 앞 신발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간 사람 있었지 철들기 전에 지는 꽃도 있지 ― 한소운, 「망초」(위의 책) 먼저 ①을 보자. ①을 끌어 잡고 있는 시인의 말씨와 표현은 개별 말할이의 경험적 서정이 아니다. “천 척의 배”, “언어 등대”, “고전처럼 찢어진 불빛”이라는 비유 자질로 버티는 작품 속살에서 엿볼 수 있는 사실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유행했던 이른바 막연한 내면주의 시 버릇 되풀이다. 말하자면 시문학사 속 관습 주체의 목소리와 표현에 갇힌 상태라는 뜻이다. 이 시의 공적 됨됨이가 그로부터 말미암는다. ‘배’와 ‘안개’, ‘뱃사공’과 ‘등대’라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표현 가치를 맛보기 어렵다. 막연한 멋스러움에 눌러앉은 태도만 두드러져 보인다. 버릇처럼 가져다 놓은 “천 척”이라는 앎에서부터 “지천으로 널린”, ‘깊은’, “바람 부는”에서 보는 바 밋밋한 장식적 수사에 담긴 속내가 그것이다. 개별 주체의 창의적인 상상과는 거리가 있다. 거기에 견주어 ②는 ①과 맞선 자리에 놓인다. 사적 주체의 경험 현실이 오롯하다. 과거 시제 채용과 “그 밤”에서 보이는 대명사 ‘그’가 그것을 받쳐 주는 지표다. 그런 가운데 망초에 대한 창의적인 연상을 살려 냈다. 다만 말 다루는 솜씨는 가다듬을 구석이 보인다. 보기를 들어 ㉠ “방문 양옆으로 빨랫줄처럼 나일론 줄을 치고”라 썼던 첫 토막 첫 줄과 “방문 양옆으로 나일론 빨랫줄을 치고” 사이, ㉡ “꽃무늬가 있는 천으로 듬성듬성 주름을 잡아 매달고서”라는 둘째 줄과 “꽃무늬 천으로 듬성듬성 주름을 잡아 매달고서” 사이, 그리고 ㉢ “커텐이라고 좋아라했던 아늑한 방 자취방”이라는 셋째 줄과 ‘아늑한’을 빼 버린 시줄 사이, ㉣ 넷째 줄 “창호지문짝의 고리 하나를 굳게 믿었던 그 밤”과 “창호지문짝 고리 하나를 믿었던 그 밤” 사이, ㉤ 다섯째 줄 “누가 방문 앞 신발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간 사람 있었지”와 “방문 앞 신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간 누가 있었지” 사이, 더 나아가 아예 ㉥ 둘째 토막 한 줄을 죄 없애 버리는 손질을 한 뒤 원텍스트와 수정텍스트 사이 차이를 견주어 본다면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창의적 서정이라는 쪽에서 볼 때 이 작품은 ①보다 한참 윗길이다. 3. 젊은 두 사람의 시를 빌려 공적 주제든 사적 주제든 창의적인 목소리가 더 살아 있는 작품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음을 살폈다. 이제 중견 시인의 작품을 빌려 그 점을 다시 한 번 짚어 보자. 이미 30~40년에 가까운 오랜 시작 활동을 꾸준히 일궈 온 시인의 작품이다. 앞뒤로 나란히 실려 있어 쉬 눈길이 간다. ① 나는 인적 드문 산간벽지에서 자랐다 바위솔이 기왓골에서 돋아나고 땅벌이 집을 짓는 우리 집 대청 앞엔 뽕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앞뒷문 활짝 열어 놓으면 산새들이 관통하는 우리 집은 유달리 누에를 많이 쳤다. 뽕잎을 주면 가뭄에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쏴아 소리를 내며 뽕잎을 먹는 누에들은 넉 잠을 자고 섶에 올라가 가슴으로 쓴 고운 서정시 같은 하얀 고치를 지었다 하품하며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호수문(晧首文)*을 외우던 나는 뽕나무에 기어올라가 입이 새까맣도록 오디를 먹고 고치 속 누에번데기처럼 꼬부라져 잠이 들었다. *천자문(千字文)의 이칭(異稱) ― 권달웅, 「누에의 꿈」(『문학·선』 겨울호, 문학선, 2012) ② 기러기 밑줄을 쳐 저에게 보내는 말 붉다, 저 저녁놀 긴 팔 괴 누웠나니 못 간다. 별 배기는 밤, 또, 너에게 보낸다. ― 문인수, 「황진이에게」(위의 책) 당대 시인 가운데서 이름이 곱기로 앞자리에 들 이가 권달웅이다. 밝은 ‘ㅏ’ 홀소리에다 입술소리 ‘ㄹ’과 ‘ㅇ’이 마련하는 울림이 아름답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도록 그는 간결하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은 사적 주체의 경험 성장을 그려 왔다. 옮긴 ① 또한 이미 정평을 얻은 그러한 특징을 보여 준다. 네 토막 줄글시로 이어진 작품은 으뜸성분을 중심으로 살피면 네 개의 바탕월(기저문)로 다시 나뉜다. ㉮ 나는 산간벽지에서 태어났다. ㉯ 우리집엔 뽕나무가 있었다. ㉰ 누에들은 고치를 지었다. ㉱ 나는 오디를 먹고 잠이 들었다. 이 바탕월 넷이 마련하는 밑그림은 개별성이 짙지 않다. 그러한 바탕월 위에 이은말(구)과 마디(절) 같은 여러 딸림성분이 얹혀 있다. ㉮ “인적 드문”, ㉯ “바위솔이 기왓골에서 돋아나고 땅벌이 집을 짓는”, ㉰ “앞뒷문 활짝 열어 놓으면 산새들이 관통하는”, “가뭄에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쏴아 소리를 내며 뽕잎을 먹은”, “가슴으로 쓴 고운 서정시 같은”, ㉱ “하품하며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호수문을 외우던”, “입이 새까맣도록”, “고치 속 누에 번데기처럼”이 그들이다. 거의 관형형으로 한 겹(㉮, ㉯) 또는 두 겹(㉰, ㉱)으로 얹힌 딸림성분 또한 새로운 표현 가치를 담는 데에는 힘이 부치는 듯싶다. 사적 주체의 경험 서정이라는 쪽에서 볼 때 으뜸성분이나 딸림성분, 또는 그 둘이 얽혀 마련하는 통합 맥락은 창의적인 울림 공감 마련에 못 미친다. 오히려 이 작품이 중점적으로 그려 담은 것은 시인이 거듭해온 바, 관습 표현에 가깝다. “가슴으로 쓰는 고운 서정시”라는 시줄이 되비추는 바 그 ‘고운’ 상태를 겨냥한 시인의 버릇이 더 돋보인다. 범상할 따름인 ‘고운’ 서정이 아니라 ‘권달웅’의 서정을 향한 고심이 필요했다. 시인은 오랜 세월 “한 줄 시를 위하여/ 나는 아주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이어도 좋으리라”(한라산)며 시에 대한 헌신을 한결같이 이어온 이다. 그런 각고에도 “고운 서정시”라는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셈이다. 창의적 서정에 이르는 길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사적 주체의 경험 현실을 그리려 했던 ①과 거꾸로 ②는 처음부터 공적 주체의 상상적 확산을 마음에 둔 작품이다. 첫째, 말할이 나와 만나는 객체는 제목에 미리 내세운 바와 같이 고려시대 명기 황진이다. 우리 문학이 남북한, 갈래에 걸림 없이 오래도록 투사·인유를 거듭하고 있는 공공 모티프다. 시인은 그러한 황진이를 빌린 역사 인물 짜깁기라는 전통을 되풀이한다. 다만 이 시에서 황진이가 지닌 무게를 감당하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옮겨 가는 틀을 지녔다. 경험 현실보다 황진이에 기댄 역사적 상상과 주체의 확대 현상을 아울러 즐긴 셈이다. 둘째, 바탕월과 그 위에 얹힌 딸림성분 사이 관계에서도 관습적 상상을 엿볼 수 있다. 바탕월은 모두 넷이다. ㉠ 나는 너(황진이)에게 말을 보낸다. ㉡ 저녁놀이 붉다. ㉢ 나는 못 간다. ㉣ 나는 (밤에 다시) 너에게 말을 보낸다. 같은 짜임새를 지닌 바탕월 ㉠과 ㉣ 사이는 저녁과 밤이라는 시간 관계만 다르다. ㉡과 ㉢은 황진이에게 건네는 말인 셈이다. 그런데 바탕월에서는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점이 엷다. 네 바탕월 위에 안긴 딸림성분은 다시 세월과 맞물려 있다. ㉠ 기러기가 밑줄을 쳤다. ㉡ 저녁놀과 팔 괴 누웠다. ㉢ 별이 배긴다. 상상적 자장을 겨냥한 시인의 뜻이 한껏 살아 있는 비유 월들이다. 거기다 말 순서를 바꾸거나(“붉다, 저 저녁놀 긴 팔 괴 누웠나니”), 말줄임(안갖춘 월 “못 간다”, “너에게 보낸다”). 잦은 쉼표가 마련하는 가쁜 시줄 변화는 울림을 더 키웠다. 곧 기표와 기의 둘 모두에서 표현 가치를 끌어올렸다. 따라서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참신한 비유적 연상을 마련하는 듯싶다. 그러나 묶어 보면 사정이 다르다. 딸림성분의 월들은 시인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거듭하는 버릇에 가깝다. 각별히 앞쪽 ㉠, ㉡ 두 월이 더 그렇다. 그들은 시인이 이미 십 년도 앞서 득의했던 뛰어난 작품 「동강의 높은 새」에서 얻은 바, “단 일획 깊이 여러 굽이 새파랗게/ 일자무식의 백 리 긴 편지를 쓴다”라는 시줄과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 ‘새가 동강 하늘 위로 밑줄 치듯 날아가며 백 리 긴 편지를 써 보낸다’라는 수평 연상의 자장 안에 놓인 셈이다. ㉢도 그 점을 깁는다. 시인에게 “눈썹 아래, 위, 자꾸 빨랫줄 걸리는”(「정선 산다」) 듯했던 영월·정선 기행 체험의 초점이 온통 그것이었다. 시인은 아직도 성공한 기억으로부터 간섭을 받고 있는 셈이다. ①과 ②는 오래도록 자기 몫의 서정을 꾸준하게 일궈 나온 시인의 것이다. 예사 시인과 달리 무거운 책무를 진다. 그런 까닭에 창의적 서정이라는 쪽에 눈길을 둘 때 아쉬움이 없지 않다. ①에서는 사적 주체의 경험 현실을 담으려 했으나 “고운 서정”이라는 틀에 갇혀 오히려 범상한 상상으로 나아갔다. 서정의 가능성을 스스로 좁혀 소박한 현실 대체시에 머문 게 아닌가라는 물음을 갖게 한다. ②는 역사 인물 짜깁기라는 전통을 빌려 저녁과 밤에 대한 상상적 연상을 한껏 펼쳐 보고자 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앞선 관습과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시인의 창조적 인격은 다소 손쉬운 길로 걸어갔다. 따라서 둘 다 소박과 단조라는 높고 위험한 벽에 맞닥뜨린 셈이다. 자기다운 창의적 서정을 오롯하게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을, 적지 않은 좋은 시인들이 겪고 있는 난제를 두 작품은 고스란히 암시한다. 우리시의 높낮이를 더 끌어올려야 한다고 믿는 시인들에게는 훌륭한 반면교사인 셈이다. 4. 사람은 모두 별이다. 크든 작든 스스로 빛나며 밝히며 산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잊은 채 살아가는 이가 더 많다. 별에는 종류도 많고 높낮이도 다르다. 무른 별, 딱딱한 별, 멀리 높이 오래 빛나는 별이 있고, 낮게 가까이서 빛나다 마는 별이 있다. 크기 또한 갖가지다. 거리에 따라 큰 별이 작은 별로 여겨진다. 가까운 것은 커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눈에 늘 드는 해나 달이 아니면 별이 없는 양, 깊은 밤 기껏 자기 마을 뒷산 높이 송전탑 불빛을 별빛인 양, 우기며 착각하며 등신처럼 살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저러니 해도 자기 깜냥껏 빛나고 밝히며 사는 일마저 너무 어렵고도 힘든 세상이다. 내가 토요일에 오는 봉천동 이 집 오늘은 지호와 범훈과 병선과 정효와 순영과 보혜와 호영과 은화가 안 보인다 몇은 수용시설로 가고 몇은 병원으로 갔다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별이라고 해서 좋아하였는데 그래서 이 집이 별밭이라고 하였는데 별상자라고 하였는데 흩어진 별들이 궁금하다. ― 공광규, 「토요일에 오는 집」(『시와정신』 겨울호, 시와정신사, 2012) 시인은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시민 상대 강좌 수강생을 별이라 한 듯싶다. 그들은 어느새 세월을 건너 “수용시설로 가고” ‘병원으로’ 오가는 늙은 몸이다. 한때는 생생하고도 젊은 별들이었을 이들이다. 지금이라도 자신이 세상에 오로지 한 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더 높은 데서 환하고 멀리 빛날 사람이 한둘일까. 시인도 마찬가지다. 예사 사람으로 살기에도 힘이 부쳐 고개 꺾은 이가 시문학사 뒤쪽에는 널렸다. 시인으로 나돌지만 좋게 말해 사기꾼·풍쟁이 됨됨이도 보인다. 그런 속에서 중요한 시인, 좋은 시인은 힘껏 살아 있다. 드높은 데서 오래 시의 별빛을 비추어 줄 이다. 그들이 세상의 번잡에 아랑곳없이 나아갈 수 있기 바란다. 일신우일신(一新又一新), 동어반복이나 이음동의어의 메아리에 갇히지 않기 위한 고심참담을 잃지 말기. 세상은 바뀌어야 하고, 삶은 더 나은 쪽으로 올라서야 한다. 그를 위해 시도 달라질 일이다. 그 일은 시인이 자신의 한계로부터 일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지고 갈 수밖에 없다. 손쉽고 등 따신 언덕이나 기웃거리다가는 이룰 수 없을 경지다. 자기 깜냥의 창의적 서정을 짊어지겠다는 결벽과 단련. 그리하여 시인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자기 시는 바꿀 수 있다. 나는 창의적인 시인인가? 세 삶을 제대로 지고 사는 이가 좋은 사람이라면, 제 시를 제대로 지고 사는 이가 좋은 시인이다. 좋은 사람에다 좋은 시인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나를 비롯한 예사 시인도 자문을 멈추지 말 일이다. 시인은 시 쓰는 이를 일컫는 까닭이다. 모름지기 나는 시인인가, 창의적인? - < ‘시의 조건 시인의 조건, 박태일 비평집(박태일, 케포이북스, 2015)’>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