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방문하는 외국인이라면 꼭 한 번 들르게 되는 곳이 있으니
이름하여 까닝(El Canning)이라.
금요일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계속되는 까닝의 별 다섯 개 짜리 밀롱가는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데,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춤꾼들과 부대끼며 놀다보면 가끔씩 특별한 인물을 만나기도 한다.
하루는 밀롱가에 앉아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막 입구를 들어서는 한 백인 여성이 눈에 띄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에 초록 원피스, 그 위에 깜장 반코트를 입고 들어서는 그녀를 보르헤스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사라 제시카 파커.
미국의 TV 시리즈물 <sex and the city>의 주연배우가 아닌가.
'캐리 브래드 쇼가 탱고를 춘다고?
당대의 패션 아이콘 캐리가 냄새나는 구닥다리 탱고를 춘다고? 하, 이거 해외토픽감인 걸.
흠...옆에 있는 삭발남은 매니저인가...
가만, 저 친구들 어디로 가는 거야? 너무 멀리 떨어져 앉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다행히 그들이 보르헤스의 가시권 안에 자리를 잡았다.
10분쯤 지났을까.
사라가 드디어 한 밀롱게로의 춤 신청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플로어로 나아갔다.
'과연 그녀의 춤은....'
성급히 마신 에스프레소 때문이었을까.
캐리의 춤을 바라보며 왜 그렇게 가슴이 뛰는지.
땅게로의 춤과 달리 땅게라의 그것은 눈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
한편 시간이 흘러가면서 까닝의 춤꾼들이 사라가 누구인지 서서히 알아보기 시작했고
집중 쇄도하는 춤신청에 불안해진 보르헤스도 화급히 까베세오(cabeceo)에 착수하니,
가까이 앉아 있었던 탓에 운좋게 그녀와 눈이 맞았다(=춤 신청을 받아주었다).
"Hola(안녕)." 하며 다가서는 그녀의 첫인상.
결 좋은 금빛 머리칼을 뒤로 살짝 묶은, 유난히 눈화장을 짙게 한, 티파니에서 구입했을 것 같은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악세사리로 치장한, 그리고 샤넬의 향으로 중무장한
사라 제시카 파커는 키가 작고 깡말랐으며 손이 차가왔다.
하지만 섬세한 아브라소에 걸음은 부드럽고 춤은 따뜻했다.
탱고를 오래 춘 것 같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꾸준히 단련해온 몸이랄까.
첫 곡 Biagi의 La Viruta가 끝나자 보르헤스가 입을 열었다.
"서반아어 하세요?"
캐리 특유의 미소, 어깨짓, 그리고 절묘한 톤의 목소리.
"No, 못해요."
이 때 보르헤스가 종종 사용하는 멘트.
"그럼 한국어는..?"
사라의 웃음이, 몸짓이 커진다.
"하하, 못해요. 일본어는 몇 개 알아요. 사요나라, 모시모시, 아리가또..."
"나도 몇 개 아는데. 스시, 와사비, 사케, 빠가야로...흠흠..영어로 합시다."
영어로 하자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잉글리쉬가 이구아수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서반아어에 늘 긴장하고 있던 보르헤스에게 영어가 제대로 들릴 리 만무.
허걱하는 표정을 숨기며 대충 알아듣는 척하고 난 후 춘 두 번째 곡은 30초만에 끝났다.
그리고 다시 대화가 시작되었다.
"옷이 넘 멋져요."
"땡큐."
"구두도 넘 이뻐요."
"땡큐."
"한국에서는 이런 옷을 땡큐복이라고 하죠."
"오, 리얼리? 와이?"
"방금 당신도 땡큐라고 했잖아요."
그녀의 입에서 funny라는 단어가 나오길래 용기를 얻었다.
"옷을 너무 잘 입으면 사람이 보이질 않죠."
"그럼 투명인간과 춤춘다고 생각해요."
"사실 내가 오래 전부터 춤추고 싶었던 사람은 원더우먼인데?"
"원더우먼과 춤추는 상대방도 팬티만 입고 춰야 하는데?"
극 중의 캐리 못지 않게 현실 속 사라의 입심도 대단하다.
긴장이 풀렸는지 세 번째 곡은 좀 오바를 했다.
Biagi는 땅게로를 차분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라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물었다.
"뭘 마시죠? 커피, 샴페인, 와인...?"
"물이요."
"여긴 마떼도 코스모폴리탄도 없죠."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와서 셜리 템플을 마시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다 그만 말이 헛 나오고 말았다.
"혹시 빅은 함께 오지 않았나요?"
사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춤추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멀어져갔다.
문 밖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보르헤스는 딴다의 마지막 곡 pajaro ciego를 플로어에 홀로 서서 들어야만 했다.
"빨리 일어나요. 수업 시간 늦겠어."
까를로스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길몽인가 악몽인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꾸는 꿈은 달콤하지만 대개 파국으로 치닫는다.
전날 보다 잠든 TV가 화근이었나 보다.
애청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드라마는 밉지만,
보르헤스는 옷 잘 입는 그녀가 좋다.
담에 또 만나면 꼭 샬롯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해야쥐.
첫댓글 혹시... 저 낚인건가요?? ㅡ_ㅡ;;
에이~ 난 또...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yo, te gusta mucho.. jaja...
헛..진짜인줄 알고 막 흥분하며 읽어내려 가다가 막판에 역시나..-.-
역시나...구라대마왕,,,또 속았어.....
에궁.. 내가 좋아하는 사라와 정말로 땅고 추신 줄 알고, 긴장&흥분의 열기가 뇌를 감싸며 글을 읽었더만... <파리의 연인> 마지막 회를 보는 느낌.. 거 기분이 거시기 하네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어요. 오늘밤 빅이나 생각해야겠다.
장.주.지.몽?
히히히......보르헤스님이 돌아오신게 맞는가 봅니다.
왠일 왠일~ 푸하하하~
ㅎㅎㅎㅎ 긴장하는 보르헤스라
ㅎ,ㅎ~~~ 하하 재밌당~ 역시 허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