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물마다 주인의 흔적이 남다 <호피장막도>
“엄청 센 놈이네!” 설치미술가 최정화 선생이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호피장막도>를 전시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길이 20m, 높이 10m의 벽면. 서울 시내에 이만큼 큰 전시공간도 드물다. 원래 이곳에 병풍 세 틀을 걸기로 했는데, <호피장막도>가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에 이것만 두고 주변을 비우기로 한 것. 민화 책거리 병풍 한 틀이 괘불을 걸만한 큰 공간을 장악한 것이다. 왜 그런지 들여다보았더니, 표범 8마리가 포효하고 있었다.
이 병풍은 원래 8마리 표범 가죽을 줄에 걸어놓은 그림이었다. 표범 가죽을 그렸으니 표피도가 맞지만, 통칭 호피도라 부른다. 어느 날 이 그림의 주인은 무슨 이유인지, 호피도에 자신의 서재를 그려 달라고 화가에게 주문했다. 무관이거나 중인으로 짐작되는 그림의 주인은 평소 자신이 학문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문인 주도의 사회에서 본인도 모르게 표출된 의식일 것이다. 그런데 호피도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새로 그려 넣은 서재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앉아 있다. 그래서 명품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그림 속 서재의 기물을 통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체취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다. 만일 무관의 서재라면 군대 내무반처럼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정연할 텐데, 평소 사용하는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그리게 했다. 가식을 싫어하는 것을 보니, 무척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다. 책 위에 안경이 놓여있고 그 아래 약 짜는 사발이 보인다. 그는 장년의 나이에 지병이 있는 것 같다. 위에 생황이 보이고 오른쪽에 차 탁자가 크게 표현되었는데, 그가 평소 음악과 차를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황 옆에는 경(磬: 옥이나 돌로 만든 악기의 한 가지)이 걸려있다. 만일 손님과 속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경을 쳐서 귀를 씻었던 것이다. 책상의 깊숙한 부분에 골패➊와 바둑통을 두어 틈틈이 즐기는 것까지 숨기지 않았다. 이 그림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은 정물화이지만, 마치 자화상처럼 주인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한 덩어리로서의 민화 책거리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소인을 연상케 하는 책거리가 있다. 청색 저고리를 입고 책을 읽는 어린아이가 책보다 작게 그려졌다. 왜 그럴까? 민화 책거리는 궁중 책거리에 비해 화면의 크기가 1/3내지 1/4로 줄어든다. 주거공간이 작아지니 병풍도 작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림의 크기가 작다고 작품의 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민화가들은 작은 공간에 많은 것들을 담으려 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한 덩어리로 뭉쳐놓는 것이다. 덩어리로 표현하다 보니, 어떤 그림은 2차원인지 3차원인지 경계가 모호한 작품도 있다. 일본의 민예연구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러한 책거리를 보고 ‘지혜를 무력하게 하는 그림’이라고 극찬하며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라는 명문을 남겼다.
민화 책거리의 덩어리를 살리기 위해 인물과 평상을 작게 표현했다. 전체를 위해 구성 요소를 적절한 크기로 조절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크게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작게 그려 그 틀을 유지하려 했다. 소인국의 사람들처럼 그린 동자는 조선시대 아동윤리교과서인 『소학』을 읽고 있다. 독서하는 모습을 통해 책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동화의 세계처럼 펼쳐진 이 그림은 ‘책거리라면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민화 책거리 표현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한 덩어리로 표현하는 기법을 통해,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기물과 동식물을 담는 방식은 보자기나 장롱을 연상케 한다. 보자기는 싸면 작은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풀어놓으면 한 방을 가득 채운다. 장롱은 작은 수납장으로 보이지만 그곳에 옷가지나 여러 생활용품을 차곡차곡 포개놓으면 신기할 정도로 많은 것을 넣을 수 있다. 이불까지 올려놓을 수 있으니 이만한 수납공간도 찾아보기 어렵다. 작은 공간에 살면서 너저분한 생활용품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민화 속에서 응용한 것이 바로 한 덩어리의 표현인 것이다.
경계를 넘어 총체적 융합을 꿈꾸는 민화
2016년 1월 21일 성수동의 어느 카페에서 필자는 세계적인 양자역학 학자인 미나스 카파토스(Menas Kafatos) 교수와 ‘민화와 양자역학의 대화’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 채프먼대학에 재직 중인 그는 내가 소개한 여러 이미지 가운데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책거리를 들어 자신의 양자역학 이론에 부합한다고 했다.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간단히 넘나들고, 구름과 용이 조화를 이루며, 책과 동물들이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영월포럼’ 자리에서 파리 국립기 메동양박물관 피에르 캄봉(Pierre Cambon) 수석 큐레이터 역시 이 작품을 극찬했던 기억이 난다.
용과 두꺼비로 감싸 안은 책이라 그 발상 자체가 신비롭고 환상적인 데다 용과 두꺼비는 더듬이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이는 다산의 상징이다. 예로부터 용과 두꺼비 꿈을 꾸면 아들을 낳는다 했다. 이 그림은 아들을 많이 낳고 공부를 열심히 시켜 출세하기를 바라는 입신양명의 염원을 담고 있다. 알고 보면 매우 현실적인 소망이지만, 그 표현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독자 여러분의 서재에 용이 날아다니고, 봉황이 깃들고, 기린이 오고 가며 사자가 포효한다고 생각해보자. 이것은 상상만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민화 책거리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우주만물을 끌어안은 서재인데도 무심하게 펼쳐져 있다. 민화는 현실을 소재로 삼았지만 꿈과 이상을 품고 있고, 꿈과 이상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민화 속에서는 현실과 이상의 구분이나 경계 없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논증해야 할 명제들을 조합하고, 기물들을 통합하고, 삶과 꿈을 융합하는 총체적인 인식이 민화의 세계인 것이다.
➊골패 : 납작하고 네모진 작은 나뭇조각 32개에 각각 흰 뼈를 붙이고, 여러 가지 수효의 구멍을 판 노름 기구. 또는 그것으로 하는 노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