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소개]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행정구역으로는 용문면 신점리 625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행정상의 위치보다는 현재 용문산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대표되는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용문사의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오고 있다.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고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892)에 도선선사가 중창
하여다는 설과,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창건하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 창건설들을 뒷받침할 사료나 유물은 없다.
절의 창건을 전해주는 기록으로는 1458년(세조 4)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용문사기(龍門寺記)」와 1493년(성종 24)에 임사홍(任士洪, ?~1506)이 지은 「용문사중수기(龍門寺重修記)」가 현재로는 가장 앞서는 기록들이다.
안진호가 엮은 봉은사본말사지(1927년)나 권상로가 엮은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한편 고려 말 이색(李穡)이 지은 「지평현미지산용문사대장기(砥平縣彌智山龍門寺大藏記)」가 전하고 있는데, 이 글에 따르면, 우왕(禑王) 4년(1378)에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개풍 경천사에서 대장경 1질을 가져와 대장전 3칸을 짓고 그 안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왕실의 원찰로서 그 사세가 확장된다. 태조 4년(1395)에 조안(祖眼)이 용문사를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위하여 보전(寶殿)을 짓고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한 뒤 이듬해 경찬회(慶讚會)를 열었다. 수양대군은 이 법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던 중 불사리가 방광(放光)하는 이적을 목격하고 이 절을 원찰로 삼았고, 세조 3년(1457)에 퇴락한 법당과 승방을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에 처안스님이 중수하였다. 그 뒤로 고종 30년(1890)에 봉성(鳳城)스님이 조대비(趙大妃)의 외호를 받아 절을 중창하였고, 1893년에 뒷날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순조(純祖)의 아들의 비인 신정황후(神貞王后)의 지원으로 역시 봉성스님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07년 의병전투가 벌어지자 절이 모두 불타버렸다. 다시 취운(翠雲)스님 등이 큰방을 짓고, 1938년에는 태욱(泰旭) 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칠성각, 요사채 등을 복구하면서 절의 모습을 다시 일으켰으나 6ㆍ25 사변 때 용문산전투로 말미암아 대부분은두 불타버리고 대웅전과 큰방인 관음전만 남았다.
지금의 모습은 전쟁이 끝나고 1958년부터 다시 재건하면서 갖추어진 모습이다. 1983년에는 범종각, 지장전, 일주문을 중건하였고 관음전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1994년에는 지장전을 새로 짓었고, 이 해에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이며, 안의 상설(像設)을 보면 불단에는 석가삼존불을 모셨고 나머지 3면 벽에는 천불을 모셨다. 신중탱화, 천수관은탱화가 모셔졌으며 범종이 있다.
관음전은 ‘ㄴ’자 건물인데 반은 관음상과 후불탱을 모신 전각으로, 반은 요사로 나누어 쓰고 있다. 관음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목조상으로 화관을 쓰고 영락을 표현하였는데 화려하지는 않으나 기품과 조형성을 지닌 우수한 작품이나 최근에 개금하였다. 크기는 앉은높이 76cm이다.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지장삼존을 모셨고 그 뒤에는 지장탱화가 좌우벽에는 시왕탱와 사자탱을 모셨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이며, 안에는 칠성탱화,독성탱화, 산신탱화을 모셨다.
한편 절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정지국사부도가 있고 그곳에서 다시 약 80m 쯤 떨어진 곳에는 정지국사탑비가 서있다. 부도와 탑비는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용문사의 경내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은행나무의 수령은 1100년이 넘는다고 하며, 그 크기를 보면 나무 높이가 60여m에 이르고 줄기 또한 가슴높이 둘레가 14m가 넘는 거목이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장 큰 은행나무로 현재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 나무는 현재 우리 나라에 생존 하고 있는 은행나무들 중에서 가장크고 우람하며 오래 된것으로 용문사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1,100~1,500여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62여m,밑둥 둘레가14m로 동양에서는 가장 큰 은행나무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이 그의 스승인 대경 대사를 찾아와서 심은 것이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세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전란으로 사찰은 여러 번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의병의 본거지라 하여 사찰을 불태워 버렸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불타지 않고 살아 남았던 나무라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불렀고 조선 세종때에는 정3품의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 받기도 한 명목이다.
이 나무에는 또한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지하였다 하며 또한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 소리를 내었다고 하는데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커다란 가지가 1개 부러졌고, 8.15해방과 6.25사변 때에도 이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한편, 2005.10.29(토) 18:00~19:00. KBS-1. TV 신설프로그램인 『대한민국 가치 대발견』첫회 방영에서 용문사 은행나무의 가치를 각계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구하고 측정하여 은행나무의 수명이 앞으로 200년을 기준으로 약 1조 6,884억원의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용문산 등산로]
산책코스
(註) 등산을 하기 힘든분들은 매표소부터 용문사까지 산책하여도 좋다(왕복 약 3Km)
용문사 입구 너와집 찻집에서 토속차를 마시면서 은행나무 구경하는 것도 일품임.
식사는 매표소 주변부터 큰길(6번도로)까지 길 양편으로 좋다는 음식점은 다 모여 있으므로
골라서 먹을 수 있음.(각종 보양식,산채비빔밥, 청국장 主로 토속음식이 많음)
첫댓글 유명 사찰 앞에는 공통적으로 은행나무가 심겨져있는데.. 은행알을 많이 먹으면 정력이 감퇴되며 머리가 빠진다고 한방에서 얘기하는데..그래서 심은 건지? 울 친구들 은행이 기관지에 좋긴 하지만 하루 3알 이상 먹으면 간에 부담을 주며 머리가 빠진다고 하니.. 과유 불급이라.. 적당히 먹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