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페이(Phonpei) 섬 마탈라님 항구에 입항..
미국의 영향 아래 놓인 통치령 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빈약한 환경과 주민들의 삶.
난마톨 유적지와 카피로히(Kapirohi) 폭포..그리고 돼지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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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은 밤새 계속되었다.
보포트(Beaufort) 풍력 분류의 12등급 중 6에 해당되는 평균 풍속 25노트 이상의 강풍이
지속된다. 강풍에 밀려서 만들어진 짧은 파장의 4-5미터 파도는 배에 실려있는 모든 것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흔들리고 밀리고 떨어지고, 계속 이어지는 폭풍의 바다다.
폰페이(Phonpei) 섬에 바싹 근접을 했는데도 시계불량으로 섬이 보이질 않는다.
10마일의 거리도 남지 않았는데 레이다에도 잡히질 않는다.
이윽고 어둠이 걷히면서 우리가 5마일의 거리로 다가가자 섬의 윤곽이 문득 나타난다.
섬의 동쪽 연안에 위치한 마탈라님으로 들어 가려면 우선 넓게 자리잡고 있는 산호초 지역을 조심스레 통과하여야 한다.
산호초로 둘러싸인 마탈라님 지역은 항구가 아니라 차라리 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항구 시설은 전혀 찾아 볼 수도 없었고 호리병의 좁은 입구를 지나 나타나는
호수와 같은 초호(焦湖)가 넓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위험을 감지한 대원들은 예정된 시각 보다 빠른 시간에 전자해도를 켜놓고 시시각각 위치와 지형 지물을 대조 확인을 한다.
불과 2-30미터의 폭 밖에 되지않는 좁은 초호의 입구를 중심선을 따라서 들어간다.
주변 산호초에 부딛혀 깨어지는 파도들은 백색의 띠를 이루며 그 경계를 보여준다.
입구를 들어선 후에도 조심스런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전자해도를 보면서 수심을 계속적으로 체크한다.
가장 깊은 수심 지역을 따라 항로를 바꾸면서 들어 갈 수 있는데 까지 진입한다.
마탈라님의 간만의 차이는 1.3미터.
물이 빠졌을 때의 수위를 미리 감안하여 앵커를 내려야 한다.
그런 분별 없이 아무 곳에나 앵커 정박을 하게되면 불시에 배 밑바닥이 산호초에 좌초가
되는 불상사를 당하게 될 수가 있다.
수심 5미터의 장소에 앵커링. 더 이상 들어 갈 수도 없다.
물가에 보이는 몇몇 채의 집들은 2마일이나 뚝 떨어져있는 호수의 한 가운데다.
무서운 기세로 우리를 밀어 부치던 황천의 상황은 이제 저 바깥의 일이다.
무서운 속도로 몰려가는 검은 구름들을 보면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폭풍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무사히 안착했다는 안도감과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육지와 같은 안온한 느낌을 주는 알리아에 대원들 모두가 만족해 하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
염려했던 것과 같은 입출항 수속은 없었다.
입항 한 시간 전부터 무전으로 열 번도 넘게 관계자를 불렀지만 종내 묵묵부답의 상태.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했기 때문에 나중에 혹시 문제가 되더라도 얼마든지 답변을
할 수 있는 편안한 상황으로 전개가 된다.
폭풍의 황천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세일링 요트는 어떤 조건에서도 피항을 할 수가 있고,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선체나 세일 쪽의 응급한 상황을 수리하기 위해서도 언제 어느 곳이라도 들어 갈 수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익히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접안용 보트를 내리고 선장님과 함께 두 명의 대원이 마을 어귀에 상륙한다.
곳곳에 수심이 50센티 이하의 낮은 곳이라 보트를 타고 들어 가는데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중간에 보트의 선미 엔진이 산호초 더미에 툭툭 닿는다.
물가 한적한 곳에 자리한 민가 옆으로 보트를 대고 일단 상륙.
문화 시설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반나의 폰페이 사람들이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쳐다들 본다.
외래인의 기습이다.
미국의 영향 아래 놓인 통치령 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빈약한 환경과 주민들의 삶이다.
라스코는 그의 별칭이고 본 이름은 프란시스코다. 25세의 폰페이 청년 라스코는 유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는 가장 영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근처에 위치한 난마톨(Nanmatol) 유적 답사와 카피로히(Kapirohi) 폭포에서의 천엽, 작은 돼지 한 마리, 그리고 접안용 보트에 쓰일 휘발유 등이다.
처음부터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일행은 근처에 어딘가 집촌 된 마을이 있을 것으로 생각들을 하고 있었으므로 난마톨이나 마탈라님이라는 이름의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마탈라님 이라는 마을이 있냐고 물어본 즉,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난마톨로 가보자는 성급한 판단으로 라스코 청년의 승용차(거의 폐차에 가까운)를 타고 난마톨로 향했다.
난마톨은 그냥 유적일 뿐 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식당이나 마켓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도 없는, 띄엄띄엄 밀림 속에
묻혀 살아가는 몇몇 채의 민가와 좁은 아스팔트 도로 변에 보이는 구멍가게들, 그것이
전부다. 포기는 빨리 하는 편이 낫다.
차로 30분이나 왔으니 유적이라도 둘러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난마톨 유적지의 풍경]
11세기에 갑자기 버려진 난마톨 유적.
화강암을 깍아서 만든 육각의 돌기둥 같은 것들과 2미터, 3미터도 넘는 육면체의 돌을
쌓아서 만든 성곽과 같은 50미터도 넘는 길이를 가진 정방형 형태의 중앙 구조물, 바깥에는 삼중으로 바다 물이 흘러드는 폭 10미터도 넘는 운하들과 석축 구조물로 세워진 돌담 같은 것들의 흔적이 즐비하다.
그 많은 돌들을 해안가 까지 운반하는 것은 어떻게 했으며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 돌을 깍아야만 했을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라스코에게 몇 가지를 물어 보았으나 아는 것이 없다.
그가 알고있는 것은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과 자라는 내내 보아 왔다는 사실 뿐이다.
추측컨데 10세기 경 부족국가 시절, 잦았던 부족간의 침공에 대비한 대피시설 같은 것으로 보인다. 밀림 속의 좁은 길을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쉽지않은 통로하며몇 겹의 방어시설로 보이는 석축과 운하, 운하는 죽창 같이 생긴 망그로브 나무들의 뾰족한 끝이 펼쳐져 있어서 쉽사리 건너지는 못할 것 같다. 제 1선이 무너지면 2선으로 옮기고 2선이
무너지면 3선으로 후퇴하고, 3선 마저 무너지면 중앙 구조물인 성곽 같은 곳으로 물러서고, 담을 기어 오르는 적들과 한 동안 대치하다가 그나마도 여의치 않으면 성곽의 한 쪽
바다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미리 준비해 둔 배를 타고 바다로 도주해서 최후까지 종족을 보존했을 것 같다.
갑자기 왜 버려졌는지도 의문이다. 필요가 없어졌던 것일까?
순식간에 역병이 돌아 부족 전체가 전멸을 한 것일까?
우리 일행은 내리는 비 속에서도 11세기 난마톨의 감상에 한참이나 젖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돼지를 사육하는 한 집에 들린다.
우거진 밀림 속에 보잘 것 없는 함석으로 얼기설기 지붕을 덮고 벽을 두른 컴컴한 집,
그야말로 원시를 갓 면한 것 같은 수준의 주거 시설이다.
돼지들은 밀림 속에서 그냥 방목이 되는 것 같다.
적당한 크기의 돼지를 찾으러 집 주인이 밀림으로 들어 간 사이에 집 주변의 마당을
돌아다니던 새끼 돼지들은 수시로 떨어지는 열대 과일을 줏어 먹는다.
복 받은 돼지들이다. 자주 비가 쏟아지니 자연적으로 샤워를 하게 되고 밀림 속을 돌아다니니 주변의 무성한 잡목들이 놈들의 몸통을 닦아주고 그래 그런지 돼지들이 냄새도
나지않고 일견해도 깨끗해 보인다.
밀림 속 저쪽에서 갑자기 들리는 돼지의 비명.
동물적인 감각으로 오늘이 최후의 날임을 직감한 것 같은 예사롭지 않은 비명 소리.
잠시 후 주인은 나무 덩굴로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들고 나타난다.
라스코의 승용차 뒷켠에 싣고 상륙 지점으로 돌아온다.
누가 돼지를 잡을 것인지를 라스코에게 물어보자 그의 아저씨되는 적당한 사람이 있단다.
두 세 시간 후에 돼지를 찾으러 오기로 하고 우리 일행 전부는 2.5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유명한 카피로히(Kapirohi) 폭포로 향했다.
오후에 돼지를 즐길 예정이라 점심은 생략하고 김치 등 반찬 종류와 양파, 고추며 소주와 맥주만 들고 간다. 목적은 시원한 폭포 물에 소금에 절은 몸들을 담군 채 빠라삐리뽀.
라스코의 승용차에 모든 대원들이 올라탄다.
도로에서 산 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 올라 가는데 지천에 이름 모를 꽃들이 시간을 잊은 채로 피어있다.
폭포의 쏴하는 물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눈에 폭포가 들어 온다. 장관이다.
불꽃 놀이 중 밤 하늘에 확 퍼지며 떨어지는 물줄기 같은 것이 생각이 난다.
그런 것들이 계속 이어지며 비말을 하늘에 휘날리는 장관.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규모
또한 우리나라에서 본 적이 없는 그런 크기다. 제주도 천제연의 폭포는 물살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규모가 작은 나이아가라 형태이지만 카피로히는 겹겹이 쌓여있는 수 십 층의
암반들에 물살이 깨어지면서 갈라져 흘러내리는 스프링클러 형태의 폭포다.
폭포의 아래는 선녀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알맞은 크기의 풀이 있다.
주섬주섬 옷을 갈아 걸친 채 무조건 물 속으로 돌진. 떨어지는 폭포의 세찬 물줄기들을
맞으며 이 곳이 천국인가 싶다. 이십 분 물 속에서 지내고 소주 한 두잔, 고추 한 개를 쌈장에 찍어먹고, 다시 물 속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무제한으로 마실 기세들이지만 술 가져 간 것이 한계가 있고 저녁 참에 돼지를 구워 먹을 때 또 마실 것이 아닌가.
약속된 시간이 되기 전에 라스코가 나타났다. 같이 둘러앉아 몇 순배의 소주를 즐기고는 젖은 옷 차림으로 하산. 알맞게 장만이 된 돼지를 찾아 호수 한 가운데의 알리아로 돌아
온 것은 오후 다섯 시 경.
TV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자주 본 것과 같이 원주민들이 즐겨하는 방식의 코코넛 잎을 두르고 구운 돌로 만든 전형적인 열대 바비큐를 원했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아 듣지를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우리 식의 생고기 소금구이가 제격이 되어 버렸다.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만족을 하자.
소주, 맥주, 와인들이 줄을 지어 등장하고 흔들리지 않는 조용한 초호는 온통 음악 소리가 가득하다. 대자연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인간 군상들의 즐거운 시간은 밤이 늦도록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