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영적현장르포(39)/ 강원도 오대산, 강릉 주변지역 " |
불교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오대산, 지역의 영적 세력 장악 1 국립공원 오대산 입구에 다다르면 오대성지(五臺聖地)라는 입석이 눈에 들어온다. 2 오대산 노인봉 코스 중간에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소금강 전경. 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홍수피해도 많았던 날들이었다. 그동안 백두대간을 두루 훑어보며 흑암의 실체를 파악하던 현장 르포 팀은 강원도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흑암 현장을 살피고자 새벽길을 떠났다. 오대산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의 오대산과 산의 형세가 흡사하여 이름을 지었다는 곳인데 영동 고속도로를 힘차게 내달아 오전 9시가 안되어 우리는 진부, 월정사의 표지판을 보고 진부 IC로 들어섰다. 인터체인지를 돌아나가자 수해의 피해가 눈에 확인되는데 잘려나간 길과 농토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고 지역주민의 고통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나마 주변의 도움으로 많이 정리된 것이 확인된다. 국립공원 입구에 다다르자 오대성지(五臺聖地)라고 길가에 세워둔 거대한 입석이 눈에 들어온다. 오대산은 우리의 생각 속에 설악산 아래의 경치 좋은 관광지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은 오대산이 불교계에서는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라는 사실이 입구에서부터 확인된 것이다. 아무래도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으며 오대산으로 향했다. 숲 사이로 난 진입로는 도시생활에 찌든 현대인의 일상을 풀어주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경치를 주고 맑은 공기는 가슴을 시원케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계곡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피안교, 반야교, 연화교, 상원교, 해탈교 등으로 지어진 것을 볼 때 이곳의 시설과 문화가 불교 문화권임을 알게 한다. 오대산은 강원도 평창군과 강릉시 그리고 홍천군 일부에 걸쳐 있고 태백산맥의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은 차령산맥과의 교차점에 있다. 평창군의 오대산지구, 방아다리지구, 병내리지구, 황병산지구, 홍천군 내면지구, 강릉시 소금강지구 등으로 구별되어 진다. ◆ 중대·북대·남대·서대·동대로 둘러쌓인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毘盧峰 : 1,563m)을 중심으로 동대산(東臺山 : 1,434m), 호령봉(虎嶺峰 : 1,042m), 상왕봉(象王峰 : 1,493m), 두로봉(頭老峰 : 1,422m) 등 5개의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사이사이로는 중대(中臺 : 지로산/사자암), 동대(東臺 : 만월산/관음암), 서대(西臺 : 장령산/염불암), 남대(南臺 : 기린산/지장암), 북대(北臺 : 상왕산/미륵암) 등 5개의 대로 둘러싸여 있어 오대산이라고 했다. 또한 중대, 동대, 서대, 남대, 북대는 각각 문수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아라한 등이 상주하면서 설법하던 곳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니 이제 우리는 그 의미를 되짚어 보며 영적사실을 확인하려고 한다. 드디어 오대산 국립공원에 이르렀다. 국립공원이기에 마땅히 입장료를 내야한다. 그러나 국립공원 안에는 거의 유명 사찰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은 정사와 권세를 잡은 사단의 고등전략이다. 유명 사찰과 종교 시설들이 이제는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보호 하고 관리해주는 시스템으로 이제 불교는 역사를 간직한 시설물로 인해 국가적인 보호막을 치고 자유하고 있는 것이다. 월정사는 나중에 돌아보기로 하고 일단 자동차로 상원사를 향했다. 상원사는 월정사에서 북쪽으로 8㎞ 되는 곳에 있으며, 6·25전쟁 때 오대산에서 불타지 않은 유일한 절이다. 이곳에는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보물 제140호) 등이 있다. 특히 상원사 동종은 경주의 봉덕사 종(에밀레종)과 더불어 2개밖에 남지 않은 신라의 범종이다. 우리의 현장르포는 건강을 위한 등산이나 쉼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흑암 실체를 파악하는 영적전쟁의 척후병과도 같기에 약간의 스릴과 함께 도전이 요구된다. 3 서대 염불암, 강원도 전통 가옥 양식인 너와집 형식으로 지어졌다. 4, 5 중대 바로 위에 위치한 적멸보궁은 오대 신앙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다. 6 북대 미륵암 전경 7 남대 지장암에는 늦은 시간에도 불자들이 극락왕생을 기도하고 있다. 8 동대 관음암 주지와 현장르포팀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9 오대산 비로봉 정상에서 현장르포팀이 기념촬영한 모습. ◆ 서대 염불암을 지나 비로봉 정상에서 불교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오대산의 실제모습을 확인하려면 오대(五臺)를 일일이 발로 밟고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르포 팀은 먼저 서대(수정암)를 가려고 하였으나 오대산 국립공원 지도에는 표시되었으나 길은 나와 있지 않았기에 국립공원 관리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관광객은 그곳에 갈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반드시 보아야 될 이유를 가진 우리의 걸음이 처음부터 위기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외의 인도자인 상원사 비구를 예비해 두셨다가 만나게 하셨는데 그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알려 주었다. 등산로를 따라가다 길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작은 샛길로 들어서야했다. 일반인들은 방문하지 않는 그들만의 현장으로 잡목 숲을 지나 수 백 년 된 자작나무를 돌고 돌아 드디어 서대(西臺, 염불암)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걸어도 인적이 없고 오고 가는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마침 서대에서 방을 도배하고 나오는 인부를 만나 가는 길이 맞는 것을 알았다. 오래된 낡은 너와집이 지척에 오롯이 서 있는 길 앞에 자그마하게 뚜껑이 달린 네모난 우물이 있는데 우통수 였다. 우통수(于筒水)는 한강의 발원지로 물빛과 맛이 특이하고 물이 무거워 우통수라 불리며 속리산의 삼파수, 충주의 달천과 함께 조선 3대 명수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강의 명칭도 우통수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침 서대에는 아무 걸사(乞士)도 없는 듯 했다. ‘서대염불암’이라는 현판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염불에 집중하도록 일반인의 접근을 금하는 의미가 있는 현장이었다. 조용히 염불하는 현장인 듯 했으나 설명을 들을 수 없어 발길을 돌려 우리는 이제 비로봉 정상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고속도로에서 아침을 먹은 후에 산행을 계속했기에 마땅히 먹을 것이 없었다. 생수와 육포와 땅콩 등으로 허기를 달래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변화가 없는 산세여서 오르는 길에 재미를 느끼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복음과 언약을 붙들고 흑암과의 영적싸움을 확인하며 무시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긴 여름 더위가 끝났으나 막바지 더위가 있을 것이라지만 오늘 내일 동해안은 구름 낀 날씨가 되리라는 기상예보는 현장르포의 날씨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이다. 구름이 안개로 덮여 멀리 산과 바다를 조망하는 데는 불편하였지만 우리는 폭염 중의 산행이 아니라서 덜 지치게 되었다. 오르는 길은 야생화가 만발해서 아름다움을 주었다. 드디어 비로봉 정상에 섰다. 벌써 많은 등산객들이 붐비는 가운데 우리는 정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합창했다. 복음가진 언약의 사람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올리는 찬양은 저 구름을 가르고 동해에 부딪치고 골짜기마다 채워 흐르면서 흑암 꺾는 찬양이 되기를 기도하였다. 마침 대구에서 일가족이 아들의 휴가를 맞추어 등산을 왔다가 하산하는 길에 르포 팀이 준비한 전도지를 받았다. 메시지를 따라 실천을 준비하며 스케줄을 따라 전도준비를 한 르포 팀은 현장메시지와 전도지를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정확한 복음과 언약을 현장에서 전달하므로 우리 자신들이 복음가진 전도자임을 확인하는 기회를 가졌다. 하산하는 길에서도 부천 순복음교회 조용구 집사를 만나 복음의 축복을 전하자 조 집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새로이 영접했다. 르포 팀은 조 집사가 영적 사실을 알고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중직자로 세워지도록 축복기도를 드렸다. 내려가는 길은 급격한 계단식 내리막길이었다. 우리가 이 길로 올라 왔다면 꽤나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중대 적별보궁은 불교 성지로 꼽히는 5대 보궁 우리는 중대(中臺, 사자암)를 보기 위해 내려가는 길에 먼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인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찾았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 사리와 정골을 나눠서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중대에 있는 상원사 보궁,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바로 불교 성지로 꼽히는 5대 보궁 이라고 한다. 보궁은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게 됐다. 그래서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는다. 대신 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금강계단을 받들어 기도하고 예불을 올리는 대웅전(보물 144호)에는 전면에 ‘적멸보궁’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주위에는 수 십 명의 불자들이 염주를 돌리거나 가부좌를 튼 채로 혹은 땀을 줄줄 흘리며 오체투지를 하며 석가모니불을 연호하는 것을 보았다. 복음의 답을 얻지 못한 인생의 어리석음을 또다시 현장에서 확인하였다.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은 4방 불 신앙의 중심인 비로자나 법신불로 상징되고 있다. 이 보궁의 불사리는 어디에 안치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보궁 뒤에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자장율사가 꿈에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지었다는데 보궁과 함께 수마노탑(보물 410)이 천의봉 중턱에 서 있다. 대승불교에서 최고의 지혜(智慧)를 인격화한 보살이 문수보살이다. 중국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문수보살 숭배가 널리 유행했으며, 산시 성[山西省]에 있는 우타이 산[五臺山]은 문수보살의 성지로서 그를 모신 사찰로 가득 차 있다. 한국에서는 문수보살 신앙이 삼국시대부터 유행했는데 신라의 고승 자장은 그 유포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오대산은 중국의 우타이 산과 마찬가지로 문수보살의 상주 처로서 중시되어 왔는데, 643년(선덕여왕 12)에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자장은 오대산 중대에 적멸보궁을 건립함으로써 오대산의 중요성을 널리 부각시켰다. 그 뒤 문수보살 신앙은 계속 유행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찰의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문수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중국의 불교문화를 이 나라에 그대로 심어놓아 종교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천재성을 가진 한 사람의 영향력이 세월을 두고 역사하는 현장을 보면서 ‘시대의 네피림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적멸보궁에서 조금 더 내려간 곳에 위치한 중대는 계단식 법당으로 지어졌고 오대신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듯 규모가 꽤 커 보였다. 10 오대산의 영적인 중심축을 이루는 월정사 전경. 11 비로봉 정상에서 하산하던 중 등산객 J씨가 영접하고 있는 모습. 12 강릉 경포대에서 문화관광 해설사인 김미숙 씨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있는 모습. 13 율곡 이이가 태어난 유서깊은 집인 오죽헌 전경. 14 월정사 입구에 한진그룹 전 회장 조중훈 씨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15 대관령 성황사에 모셔져 있는 산신. ◆ 북대 미륵암은 스님들의 동안거, 하안거로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는 곳 내려가는 길은 다리가 더 아프다. 산을 내려오니 처음 출발했던 상원사이기에 북대(北臺, 미륵암)를 가고자 하였다. 관광안내소에서는 또다시 북대에는 갈수 없다고 가지 말라고 하였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절마다 사람을 오지 말라고 하는데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거부되는 배경에 숨은 영적현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북대를 가는 길이 비포장도로로 자동차로 30여분을 두로봉을 향해 가야하는데 ‘비 피해로 길이 무너졌으니 갈수 없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알게 되었다. 북대로 가는 길은 있으나 관리인들이 퇴근시간이 되었으니 우리가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북대에서 스님들이 열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만약 번호를 안내받으면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북대의 전화번호를 받고 전화를 하니 하나님은 또 다른 인도자를 예비해 놓으셨다. 그가 알려준 비밀번호로 자물쇠를 열고 비 포장된 길을 터덜거리며 자동차는 두로봉을 향해 올랐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는 말씀처럼 필요는 하나님께서 필요를 따라 채우시는 응답의 조건이 되었다. 북대로 가는 것으로 인정되는 길이 나와서 르포 팀은 산길을 따라 30여분을 올라갔는데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돌아 나와 찻길을 따라 조금 더 진행하니 길옆에 암자가 하나 있어 보았더니 거기가 북대였다. 현장을 찾는 길이 쉽지 않은 수고로움을 주지만 우리의 걸음은 즐거웠다. 북대에 들어서자 주지인 듯한 중이 입구 쪽의 주거방 곁에서 아래는 승복을 입었으나 웃옷은 스포츠 티셔츠를 입은 특이한 모습으로 옆구리에는 비단 돈주머니를 찬 채로 ‘대승기신론’을 보고 있다가 우리 팀이 암자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다짜고짜로 막 화를 내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현장을 다니며 수많은 절을 다녀 보았지만 절에 온 손님을 나무라는 중은 보다보다 처음 보는 해괴한 일이었다. 우리가 태도를 정중히 하고 우리의 방문을 알렸더니 겸연쩍은 얼굴로 사실은 이 절이 스님들의 동안거와 하안거에 칩거하는 곳이기에 중들도 감히 들어오거나 불자들도 이런 곳이 있는 지도 모르는 절이라는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가끔 지나가던 알지 못하는 관광객이 와서 물을 구하다가 혼쭐이 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조심스러운 응대에 화를 풀고는 사진 찍기를 허락했다. 주지가 전하는 북대의 의미는 ‘고려 말의 공민왕이 나옹대사를 청하여 국사가 되어주기를 원했는데 그가 이곳에 피하여 있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외부인을 꺼리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듯 했다. 입구 팻말에 ‘외부인 출입금지 북대 선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그만 암자에 불과한데 기와대신 너와를 얹었고 좌우 조그만 계곡에서는 도랑물처럼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고 그 아래는 네 명 정도 앉을 만한 넓적한 돌이 놓였는데 마침 한 보살이 그 곳에서 내려오는 물을 보며 앉은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물의 기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대전에 산다는 이 여인은 복이 온다고 6개월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이 분이 마침 100여 미터 아래에 나옹화상의 기도터가 있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조그만 돌무더기에 판자를 얹어 놓은 것이었다. ◆ 남대 지장암과 동대 관음암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야 할 곳 보아야 할 곳이 많기에 남대(南臺, 지장암)로 향하였다. 어둑해 지고 있는 가운데 남대는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지장전 안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몇 명의 불자가 극락왕생을 기도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다. 불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일만 지장보살 봉안불사 권선문’에는 지옥 가는 중생이 한명이 없을 때까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이라고 하였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종교에서 인생의 고통을 해결해보려는 수고로움은 지옥의 두려움을 피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비쳐졌다. 이러한 현장을 보며 한 사람도 복음 듣지 못해 멸망하는 사람이 없도록 현장을 살려나갈 전도제자들의 마음을 새롭게 다잡았다. ‘강원 민박집’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 ‘경상도에 살다가 오대산으로 와서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알고 살고 있다’는 민박집 주인 사익홍 옹은 르포 팀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다. 자녀들도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한다는 사 노인은 처음에는 절 아래서 어떻게 예수를 믿느냐고 하다가 복음을 받고는 매우 기뻐하며 기꺼이 기념촬영에도 응했다. 우리는 어제 미처 둘러보지 못한 동대(東臺, 관음암)를 가기 위해 일찍 민박집을 나섰다. 월정사 근처에 있는 동대를 가는 길도 수해로 길이 막혔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길을 막는 표지판에 불과 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언덕으로 차를 몰았다. 날씬하고 청초해보이며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는 월면(月面) 스님이 주지로 있는 이곳은 그가 군대 가기 전에 왔던 곳인데 제대 후 이곳에 와서 40년간을 불사를 일으켰다는데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담화를 나누기에도 즐거움을 주는 절인데 일을 보던 보살이 우리가 당도하자 큰 수박을 내오더니 갈라먹게 하였다. 우리가 오대를 둘러보며 왜 이곳을 오대 성지라고 하는지의 해답을 발견하였다. 인간에게는 흙, 나무, 쇠, 불, 물의 5가지 물질이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다. 이 개념은 음양오행의 개념으로 발전하여 많은 이론이 나타났지만 이 개념으로 오대를 보면 분위기가 맞아 떨어진다. 먼저 중대는 진신사리를 모셨으니 흙(土)이요 믿음을 요구한다. 동대는 나무(木)와 같아 사랑을 나타낸다. 우연인 듯 우리는 여기서 수박을 얻어먹었고 서대는 쇠(金)와 같아 견고하기만 했다. 남대는 불(火)이니 지옥불이요, 북대는 물(水)이니 냉철하고 차가워 여기서 다툼이 있었다. 월정사로 들어갔다. 신라 시대의 절인데도 가람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로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하고 있다.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에 따르면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절 입구에는 한진그룹 전 회장인 조중훈씨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어 의미를 새기고 있었다. 절 안에는 우리의 RUTC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대륜법전이 한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를 찾아 가는 길’이라는 일반인 여름수련법회가 3차에 걸쳐 진행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하루속히 복음의 맛을 전달할 렘넌트 공동체 훈련장이 설립되어야 함을 확인하였다. 윤장대는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하므로 소원이 있는 자는 5천원과 함께 발원문을 작성하여 돌리게 되어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문화체험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있어 지역을 완전 장악하는 흑암조직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오대산은 월정사를 축으로 하고 상원사와 오대를 맥으로 구성한 거대한 영적 조직으로 집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역의 영적기류를 잡고 종교의 흑암으로 역사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러기에 정사와 권세와 재벌까지도 연결되는 것이다. 지금 정치권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앞 다투어 유명 사찰을 전전하며 매스컴을 타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이해 할 수 있다. 오직 복음의 언약 잡은 시대적 언약의 사람들만이 이런 사실을 붙들고 지역마다 복음의 빛을 비추는 지교회 전략과 전도캠프로 빛을 비출 때 흑암과의 싸움을 싸우며 승리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노인봉코스로 들어섰다. 해발 960m의 진고개 정상에서 노인봉으로 해서 소금강에 이르는 길이지만 시간상 노인봉으로 오르지 않고 바로 소금강 쪽으로 향했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청학산이었는데, 산의 모습과 경치가 금강산을 닮았다 하여 율곡 선생이 ‘청학산기’에서 소금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무릉계를 따라 십자소, 금강사, 연화담, 식당암, 삼선암, 구룡폭포, 만물상이 펼쳐져 있는데 굽이굽이마다 명승 절경이었다. 맑은 계곡이 눈 닿는 데마다 이르고 철다리로 보강해둔 길을 따라 연두 빛 계곡을 따라 걷고 돌아보는 재미는 정말 금강산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하나님은 자연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셨는데 이를 보고 찬양만하면 모든 축복이 다 오는데 하나님 떠난 인간은 자연을 보고 즐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연보고 절하며 섬기니 인간의 고통이 끝이 없이 오는 것이다. 흑암 가득한 오대와 유교적 풍류가 느껴지는 소금강의 모습은 약간 대조적이었다. ◆ 강릉 경포대와 오죽헌에서 율곡 이이의 영적 흐름 볼 수 있어 다음으로 율곡의 외가가 있었던 강릉의 경포대를 찾았다. 경포대는 맑은 거울과 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강원도 강릉시 저동의 경포호수 북안에 있는 조선시대 누대인데 관동 8경중 하나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신사임당 상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단순히 현장을 보러 올랐는데 느닷없이 안내를 해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어 보았더니 문화관광 해설사인 김미숙씨였다. 경포대 내부에는 청룡, 황룡의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선시대의 왕들이 다녀간 표시라고 했다. 이번 르포에는 이상하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안내자들이 나타나므로 언약 가진 자 가는 길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낭랑한 목소리로 경포대의 유래와 내용을 거침없이 시원하게 설명하는 것에 모든 사람은 감동을 받았고 우리는 이런 사람이 현장의 선교사로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에게도 복음메시지를 전했다. 관광지 설명자가 이제는 복음을 경청하는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되었는데 그는 천주교인으로 영적 싸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르포 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축복기도를 받고 기쁘게 헤어졌다. 인근 오죽헌 시립박물관에서 우리는 오대산의 영적 사실을 확인하기를 원했다. 오죽헌은 검은 대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짠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율곡은 평생을 두고 자신에게 선생은 오직 자기 어머니뿐이었다고 토로하였는데 한 여인이 한(恨)을 가지고 키운 렘넌트가 곧 율곡이라면 우리들이 어떻게 우리의 후대를 양육해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대목이다. 당대의 천재들이지만 이들이 복음이 아닌 천재성으로 결국은 종교의 바벨탑을 쌓아서 복음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사임당 신씨는 율곡을 몽룡실에서 용꿈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 결국 용 곧 사단의 궤계를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를 갖고 그들은 고생하며 학문은 이루었으나 결국 네피림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들의 그림자는 우리들의 지갑 속에도 있다. 새로 나온 5천원권의 앞면은 율곡의 초상화와 오죽헌, 몽룡실, 검은 대나무가 도안되었다. 뒷면은 신사임당의 초충도 8폭 가운데 수박과 여치, 맨드라미와 개구리가 디자인되었다. 수박은 씨를 통한 자손의 번성을 의미하고 맨드라미는 닭의 벼슬을 닮았으니 입신양명, 출세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강릉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길에 대관령 옛길을 따라 올라가면 휴게소 옆에 대관령 산신을 모셔둔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각이 있다. 여기를 찾아 가기위해 구불거리는 길을 돌고 또 돌아가는데 갑자기 안개가 길을 막아 10m 앞도 안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3m 앞도 보이지를 않으니 도저히 운전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휴게소에 왔으나 방향을 알 수 없어 성황사를 찾을 수 없었다. 르포 팀이 내려 표지판을 찾느라 대기하는 사이에 한 차가 슬그머니 다가와 무엇을 찾느냐고 하기에 성황사를 가고 싶다고 하니까 자기가 길을 아니 따라오라고 하였다. 흑암의 강한 세력이 우리의 접근을 막았지만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계속하여 돕는 천사의 도움으로 어떤 현장이든지 갈 수 있었고 봐야 될 현장을 보게 하셨다. 산신각에는 개인이 하는 재수굿이 진행되고 있었고 여기저기 굿판을 벌여놓거나 하려고 준비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사단의 권세에 묶여 해결되지 않는 고통의 문제를 귀신의 힘으로 풀려는 어리석음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현장에는 사단의 조직이 너무도 견고하게 짜여 있었다. 그것이 문화의 옷을 입고 있기에 일반인들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복음의 비밀을 가지고 누리는 자들이 이 땅과 세계에서 부지런히 일어나야 할 때이다. 사단은 회를 구성하여(계2:10) 할 수 있으면 택한 자라도 넘어뜨리려 하고 고통을 통해 속이며 문제 속에 빠지게 만든다. 복음의 비밀을 가진 우리의 후대들이 우리가 밟고 지난 곳을 확인하는 순례 행진이 일어나고 복음의 빛으로 온 땅을 밝혀 고통의 땅을 치유하며 새 은혜가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돌아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강원도 오대산, 강릉 지역 현장 정현국 목사 ===== 강원도 오대산, 강릉 주변지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