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안씨의 최초 시조 기록은 1500년대 초에 처음 나타난다. 이는 시조의 시대인 고려 태조(재위 918-943) 때로부터 6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의 기록이라 얼마나 신빙성이 있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이 점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최초의 시조 기록
광주안씨 시조 기록으로 현재 확인된 가장 오래된 것은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호당공(湖堂公 휘 潤孫, 1450~1520) 비문이다.
蘇世讓(1486-1562), 同知中樞府事安公[潤孫]神道碑銘 幷序 : 1540년
公姓安。諱潤孫。弘祖字。廣州人。前朝大將軍邦傑之後。曾祖諱省。 ...........
공의 성은 안씨, 휘는 윤손, 자는 홍조이며, 본관은 광주로. 고려 대장군 방걸의 후손이다....
[陽谷先生集卷之十一 碑○碣, 한국문집총간 권 23, p.464d]
여기서 "광주인(廣州人)"은 조선시대의 관례대로 호당공(湖堂公)의 본관이 광주인 것을 뜻하며, 뒤에 나오는 시조가 광주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출생지나 거주지와는 관계없이 본관에 따라 광주인, 순흥인, 죽산인 이라고 했다. 전조(前朝)는 고려를 뜻한다.
시조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위 기록은 시조의 시대인 고려 태조 때로부터 600 여년이 지난 시점의 것이라 신빙성에 대해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위 비문 내용의 출처는, 현재는 전하지 않고 서문만 남아 있는 사간공 족보일 가능성이 크다. 사간공이 만든 족보가 그 증손자 대까지는 전해졌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省, 1344-1421) -- 철산(鐵山) -- 극변(克辨) -- 윤손(潤孫, 1450-1520)
현존하는
사간공의 족보 서문 (思簡公 譜序)에 족보가 3권이라고 했으므로 시조부터 전중시어사공까지 계보를 모두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대로부터 전해 온 상당량의 기록이 있지 않았다면 3권 분량의 족보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간공이 5대조인 전중시어사공까지 밖에 몰랐다면 종이 한장에 계보가 다 들어갈 정도이므로 족보가 될 수 없고, 보첩으로도 함량 미달이므로, 거창하게 서문까지 쓸 정도는 더욱 못 된다. 더구나 당시는 부친인 판전농시사공(휘 器, 1324-1408)도 생존해 계셨을 때이므로 시조부터 시어사공 이전의 선대 기록이 거의 모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간공 유사에 나오는 조선개국 당시에 사간공이 한 말
"遠祖以下十八代 世仕前朝 侍中七人 學士八人 吾乃喬木世臣 今出仕宦則入地之 先靈皆爲王氏鬼 何獨畏沒身之誅 忍作他姓臣耶"
[安鍾和 편, 광릉세고(廣陵世稿) 설천집(雪泉集) 사간공 유사(思簡公 遺事)]"
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족보를 잃어버린 시기는 사간공 이후 임진왜란까지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사간공이 만든 족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호당공 비문의 광주안씨의 시조 기록은 충분히 믿을만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 사간공 당시에는 현재 광주안씨 계보에는 들어있지 않는 광주안씨로 "안생(安生) -
안길상(安吉祥, ? ~1380) - 안수(安綏)" 가계가 있었다. 이 분들은 전중시어사공 후손은 아니나, 고려말 당시에는 서로 연결되는 계보가 있었을 것이니, 전중시어사공보다 선대의 계보가 당시에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가계는 안수공이 딸만 둔채 아들이 없어 후대의 계보가 끊어졌기 때문에 지금 자세한 내력을 알기는 어렵다.
태만공전기(苔巒公傳記) 선세사적 등서초(先世事跡 謄書草)
위 기록과 비슷한 시기의 시조 기록으로 볼만한 것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역통) "순암종택(順菴宗宅) 문서 2번"의 "
안서우 가장(安瑞羽 家狀)"에 있는 "
태만공전기(苔巒公傳記) 선세사적등서초(先世事跡謄書草)"에 나오는 시조 기록으로, 태만공[苔巒公, 諱 구(覯, 1458-1522)]이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시조(始祖) 휘(諱) 안방걸(安邦傑)은 평양국(平壤國)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어 원수(元帥)의 직을 받고,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3세를 연이어 4명의 군(君)이 세록(世祿)을 이어 받았으며, 은총(恩寵)이 특히 두터웠다. 모든 육경(六卿)의 지위에 있었으나 난중(亂中)에 족보(族譜)가 없어져 상세한 것은 알수 없다.
[
始祖 諱安邦傑 奏捷于平壤國 有再造之功 授元帥印 封廣陵君 墓在廣州 連三世四君 襲封世祿 恩寵特深 置諸六卿之位 而亂中族譜殘缺 其詳未知]
라고 나와 있는데, 1866년 병인보에도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다. 여기는 시조의 시대가 언급되어 있지 않고, 관직도 대장군(大將軍) 아닌 원수(元帥)로 나오며, 광릉군(廣陵君)이라는 군호(君號)도 처음 보인다.
태만공의 증손 옥천공(玉川公, 휘 餘慶, 1538-1592)이 지은 조부 부사맹공 묘표에는 시조의 군호는 없이 고려(高麗) 대장군(大將軍)이라 하여, 위의 호당공 비문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같은 점을 감안할 때 시조 기록은 호당공이나 부사맹공 비문을 표준으로 하고, 태만공의 기록은 참고 기록으로 하는는 것이 좋을 듯 하다.
國柱 -- 崗 -- 叔良 -- 普文 -- 覯(1458-1522) -- 峋(부사맹) -- 應雲 -- 餘慶(1538-1592)
안씨 득성 유래
위의 시조 기록들은 광주로 득관한 유래로는 볼 수 있지만, 안씨 득성을 하게 된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신라 시대에는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이 성씨가 없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 후 지방 유력자들이 성을 갖도록 하는 토성분정 정책을 시행했으므로 이에따라 안씨 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일단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토성분정 이전인 신라말의 금석문에 안씨들이 나타나므로, 시조 이전 신라 때 부터 안씨 성을 가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