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수피로 만든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은 / 천마총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도록 내부를 공개하는 유일한 고분이다. 이곳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4단 입식수지형(立飾樹支形)의 금관이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만 자생하는 자작나무인 백화수피(白樺樹皮)에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는데 천마총이란 이름은 바로 이 '천마도가 출토된 큰 무덤'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최근 이 그림이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라는 설이 제기도 하였다. 옥충이라고 불리는 2만5천 마리의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말안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천마도(天馬圖)가 그려진 장니(障泥·말안장꾸미개)는 자작나무껍질(白樺樹皮)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두께 약 6mm로 하여 그 위에 다시 부드러운 나무껍질을 입혀 빗금이 되게 누비고 갓부분을 가죽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장니는 말의 배를 덮어 물방울이 튀기는 것을 방지하는 마구(馬具)이다.
화판(畵板)은 폭 10cm 정도이고 외곽을 만들어 무늬를 두르고, 내곽에 천마(天馬)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그렸는데, 선명한 색채와 하늘을 나는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한 회화솜씨가 놀랄 만하다. 말은 순백색이고 몸에는 반달형 무늬(半月形文樣)이 있고, 다리 부분에 날개를 나타내는 호형(弧形)을 그렸다. 공간에 그려진 비운(飛雲), 뒤로 휘날리는 말의 갈기며 치켜든 꼬리 등에서 구름을 헤치고 번개를 가르면서 하늘을 날고 잇는 천마의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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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
그런데 경주 김씨들이 천마총이란 무덤 이름을 바꿔달라는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을 조유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주 김씨의 입장에서 보면 신라 무덤은 신라 김씨 선대의 왕이나 어른들 무덤이 분명한데 하필이면 왜 '말무덤'이냐는 주장이었다. 청원내용을 보면 "총(塚)이란 말은 과거 일제시대에 왕릉을 발굴하면서 패총 등에서나 쓰이는 용어였는데 고의적으로 그대로 총이라고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또한 왕릉인데도 불구하고 천마도가 있다고 하여 마치 말의 무덤인 것처럼 천마총이라고 함은 부당하니 이를 천마도 왕릉(天馬圖王陵)으로 명칭을 변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청원에 대하여 재심의한 결과 155호 고분에서 피장자와 왕릉임을 확정할 수 있는 명문이 출토되지 않았으므로 천마총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조유전 『발굴이야기』>
천마총발굴야화
천마총(天馬塚) 금관(金冠)을 들어 내는 날은 1973년 7월 27일이었다. 한 여름이지만 12m를 파고 내려간 고분(古墳)속에서는 싸늘한 찬 기운이 솟고 천수백년(千數百年) 정결하게 부패된 유물층이지만 약간의 쾨쾨한 냄새가 나고 금빛 찬란한 치장으로 누워있는 시관속의 모습은 당대의 신라(新羅)를 통치하던 제왕(帝王) 위엄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머리칼이 일어서고 마음이 엄숙해졌었다.
막 금관(金冠)을 들어내는 순간 청명(淸明)하던 날씨가 갑자기 컴컴한 먹구름으로 덮이더니 뇌성(雷聲) 벽력이 치고 번개가 하늘을 가르면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발굴요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면서 기가 질려서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비는 8월 4일까지 일주일을 내려서 발굴작업을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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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출토 금관>
어떤 발굴요원은 꿈이 뒤숭숭해서 막걸리를 먹고 취하기도 했다. 천마총(天馬塚)의 유물(遺物)이 다 수습되고 주위 유구(遺構)의 조사(調査)가 끝났을 때 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글자라고는 칠기잔 표면(表面)에 주칠로 쓴「동(董)」자 하나가 나왔을뿐 저 시신의 일부도 남기지 아니한 것과 같이 아득한 고신라(古新羅)의 역사속에 숨어버려 누구의 무덤인지 확증할 길이 없었다.
신라(新羅)의 고분(古墳)중에 금관(金冠),금귀고리,금팔찌,금요대(金腰帶) 등 목관내(木棺內)의 장신구가 전부 금으로 출토(出土)된 것은 금관총(金冠塚),금영총(金鈴塚),서봉총(瑞鳳塚)과 이 천마총(天馬塚)인데 이는 분명히 제왕(帝王)의 무덤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어느 왕의 능(陵)일까? 학자(學者)들의 시대추정은 서기 500년경으로 내려졌다. 은제과대(銀製과帶)는 백제 무녕왕릉(百濟武寧王陵) 것과 상통하기도 하고, 또 칠기의 표면에 그려진 삼각형(三角形) 화염문(火炎文)은 고구려(高句麗) 무용총(舞踊塚), 각저총(角抵塚), 감신총(龕神塚) 벽화에서 보이기도 하며 북위불(北魏佛)의 화염광배(火炎光背)와도 연관성이 있으며,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 챙에 그린 서조(瑞鳥)는 날개가 반원형으로 치켜 올리고 있는데 이는 강서우현리대묘(江西遇賢里大墓)의 주작도(朱雀圖)와도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칠기에 그려진 연화문(蓮花紋)의 판맥(瓣脈)은 고식(古式)이며 백제 무녕왕릉유물(百濟武寧王陵遺物)보다는 대체로 고식(古式)의 것이 보였다.
원자력연구소(原子力硏究所)의 방사성탄소측정연대(放射性炭素測定年代)는 340±70 이 나와서 4세기 내지 5세기 것으로 되었는데 사실 역사시대 고분의 탄소측정연대는 오차가 심해서 신빙성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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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출토 관모>
서기 500년대 무덤이라면 당시 신라왕(新羅王)으로는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478~500)과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500~513)이 가장 가까운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소지왕(炤知王)때를 보면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南進政策)에 대항하여 신라(新羅)촵백제(百濟)촵가야(伽倻)가 연합전선으로 고구려군(高句麗軍)과 치열한 싸움이 끊이지 않고, 구벌성(仇伐城), 도나성(刀那城)을 축성하고, 삼년산성(三年山城), 굴산성(屈山城) 등을 개축하며 487년에는 사방(四方)에 우역(郵驛)을 설치(設置)하고 도로(道路)를 보수(補修)하며, 490년에는 신라(新羅)의 서울에 최초의 시장(市場)을 개설하고, 사방(四方)의 대물(貸物)을 유통하게 하였다.
500년 9월에는 소지왕(炤知王)이 내기군(영주(榮州))에 갔다가 군민파로(郡民波路)가 그의 딸 벽화(碧花)를 왕(王)에게 바쳤는데 벽화(碧花)는 당대 신라(新羅)의 국색(國色)으로 16세의 애띤 여인(女人)이었다.
왕(王)은 처음에 물리쳤다가 서울에 돌아와서 못견디게 그리워져서 남몰래 옷을 변장하고 벽화(碧花)를 만나기 위해 내기군(내己郡)에 왕래 하였다. 그러다가 고타군(古陀郡)(안동(安東))의 노파에게서 만승의 자리에 있는 왕(王)으로서 신중하지 못하다는 질책을 받고는 부끄럽게 여겨 벽화(碧花)를 남몰래 서울로 데리고 와서 궁(宮)의 별실(別室)에 두고 열열한 사랑을 속삭였다.
소지왕(炤知王)은 사랑에 지나쳐 몸을 돌보지 않았던 탓인지 그 해 11월에 돌아가고, 벽화(碧花)는 소지왕(炤知王)과의 2개월에 걸친 짧고 열렬한 사랑의 결과 유복자(遺腹子)의 왕자(王子)를 낳았다. 소지왕(炤知王)은 자식이 없었던 것인데 이 왕자(王子)가 유일한 후사(後嗣)였던 것이다. 그 다음 왕(王)인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은 64세에 왕이되었는데 체격이 크고 담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특히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보면 왕의 음장(陰長)이 1척(尺)5촌(寸)이나 되어 왕비(王妃)될 사람이 없어 사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서 왕비감을 구하다가 사자(使者)가 모심부동노수(牟深部冬老樹) 아래서 개 두마리가 북만한 똥 덩어리를 서로 몰고 다투는지라 이 똥을 눈 사람의 출처를 물어보니 상공(相公)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서 숨어서 눈 똥임을 알게 되었다. 그 여인(女人)의 집을 찾아가 보니 여자(女子)의 신장이 7척(尺)5촌(寸)이나 되어 이를 왕(王)에게 고하여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지증왕 시대는 나라의 국호(國號)를「신라(新羅)」라 정(定)하고 순장제도(殉葬制度)를 없애고 상복법(喪服法)을 만들고 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왕(王)으로 바꾸고 서울에 동시(東市)를 설치(設置)하고 우산국(于山國)[울릉도]을 정벌하며 12성(城)을 쌓았다.
이들 두 왕의 시대란 신라(新羅)의 국력(國力)이 강성해지고 중국(中國)의 제도가 신라에 들어오며 경제체제가 발전(發展)하고 왕권(王權)이 강화된 때이다.
그러면 이 두 왕(王)과 천마총(天馬塚)을 비교해 보면 누구의 능(陵)이라 단정하긴 어렵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은 부인이 7척(尺)5촌(寸)의 장신이 아니고는 결혼(結婚)할 수 없는 거인(巨人)이였음으로 천마총(天馬塚) 목관(木棺)의 길이가 215㎝, 너비가 80㎝정도 밖에 안되며 과대(과帶)의 크기 등으로 보아 보통사람 정도이기 때문에,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의 시체는 안장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6세기 극초의 왕릉(王陵)이라면 소지왕(炤知王)의 능(陵)일지도 모른다.
어쩐 일인지 이 발굴 조사에 참여한 남녀(男女) 고고학도(考古學徒)들이 서로 사랑이 싹터서 열열하고도 영원한 사랑의 결실들을 맺기도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 신문 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