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께 묻지 않는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이유는 순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계획표를 백지 사태로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을 주저한다.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작성한 계획표를 보시고 결재 해주시기를 바란다. 마치 사장실 문 앞에서 결재 서류를 들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직원들처럼…. 우리가 이렇게 인생의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려놓으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내려놓을 때 주어지는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강이다.
*우리시대에 행복이 주인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행복하기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한다. 이때 행복은 우리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 취급된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해지려는 열망과 행복해질 권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시 119:105)라고 시편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주의 말씀은 내가 가야할 곳을 인도하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그러나 저 멀리 있는 곳에 대해서는 방향만 제시할 뿐 그곳에서 실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가리시고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오직 순종으로 그 길을 택해 걸어가는 과정에서만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많은 경우 고난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세상과 분리되어 옛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일관되게 기술했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해서는 나그네이고 이방인이다.
*광야는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내일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절벽 사이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 왜냐하면 익숙한 곳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리고 그것에 의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맡긴다는 것은 앞날의 방향과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권한을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이러한 권리 양도 증서에 서명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좁은 길을 선택하는 자에게 준비해두신 하나님의 축복은 그 길을 선택하기 전에는 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희생 제물로 준비해 두신 양은 아브라함이 순종하기로 결단한 이후에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내려놓는 순종의 결단을 하기 전까지는 철저히 가려져 있다.
*하나님께 미래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거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함이 아니라면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지 않으신다. 그분은 선한 일을 시작할 때 먼저 우리 안에 기쁨의 소원을 일으키신다.
*우리가 실패와 좌절의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목표만 붙잡고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면 우리의 삶은 두려움과 절망에 구속되고 만다. 반면에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그 실패를 사용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면 평안함과 자유함 가운데 거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32)라는 말씀이 그것을 잘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실패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갖게 된다.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우리 삶을 평강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느끼는 경우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만 자유함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공급의 근원이시며, 고급의 통로로 사용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사람에 대한 서운함이나 의존함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나는 사역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나의 삶을 주께 내려놓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사역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비전을 이루어가면 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에는 위안과 쉼이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함이나 상황의 절박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건강이나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우리가 가족의 안전에 대한 걱정을 붙잡고 있다 한들, 우리에게는 그 생명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죽음이나 질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한국에서 온 단기 선교 팀을 맞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준비 노이로제’에 걸려있다는 생각을 한다. “준비가 안되서…”,“준비를 더 했어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의 ‘준비’는 많은 경우 프로그램을 말한다. 그때마다 나는, 선교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준비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 한다. 자신들이 무언가를 이곳에 퍼부어 주고 간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부족한 자신들을 사용해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는 것이 선교이다.
*인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행동의 영역만이 아닌 생각과 영의 영역에서도 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이 요구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의 예 자아를 못 박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죄의 문제 대문에 괴로워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19절에서 고백했듯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기 쉬운 우리의 죄인된 속성과 정면으로 맞닥드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 가운데 우리의 생각과 삶의 모습들이 비춰질 때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한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 된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의 나쁜 습관을 우상으로 가지고 있다. 죄가 주는 은밀한 달콤함이나 습관을 따라 사는 편리함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것들이 깨끗이 씻겨지기를 열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와 불의, 그리고 지혜와 무지를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분별과 판단은 다르다. 분별은 영적인 지혜에서 오는 반면, 판단은 분노의 영과 미움의 영을 불러온다. 분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보는 것이다. 판단은 나의 의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재는 것이다. 판단의 영에 지배를 받게 되면 잘못을 누군가에 전가하되 책임은 지려하지 않는다. 주위를 비난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판단의 영은 판단하는 사람의 영혼을 무디게 만들고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린다.
내가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다면 내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로, 내가 아직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나의 존재는 남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달려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깊이 묵상함으로써만 우리는 서로 찌르기 쉬운 판단의 관계에서 자유롭게 된다.
*나는 그동안 학교에서 좋은 선적을 얻기 위해 애썼던 것이 하나님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과 세상의 평판에 늘 휘둘리고 있었다. 공부를 잘하고자 하는 열망 뒤에 외부로부터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잠재해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학문을 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 속에는 내가 영광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 나의 나약하고 모난 부분, 내가 싫어하고 깊이 가려두었던 부분을 찾아 그것을 나의 진짜 모습으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모습이기에, 우리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 안에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인정받고 싶어 울고 있는 아이다. 이 아이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 속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힌다. 우리는 우리 속에 어린아이가 있는지 모른 채 그의 감정에 이끌려 살아간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통해서만 안정을 얻고 쉼을 누릴 수가 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우리가 없는 것에 집착하는 한, 우리가 받은 것을 기쁨으로 누릴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인정을 추구하는 만큼 우리는 세상에 붙들리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자유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네 모습에서 향유 옥합을 본다.”
바로 그 다음 말씀이 나를 놀라움 가운데로 몰아가며 내 마음을 깊숙이 찔렀다.
“그런데 그 옥합이 예수의 발 앞까지는 드려졌지만, 여전히 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려 하는구나.”
그 말씀에서 깨어지지 않은 내 자아를 보게 되었다. 예수의 발 앞까지는 갔지만 정작 깨어져야 할 때 깨어지지 않으려는 나의 자존심을 본 것이다. 존중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상처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의 발 앞에 엎드러졌어도 옥합이 깨어지지 않으면 향기를 발할 수 없다. 옥합이 깨어져 안에 있는 향유가 다 흘러나올 때에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역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경계하신다. 사역의 열매가 우리의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전하기를 원하신다. 사역의 동기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섞기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무엇이 섞여있는지를 정확히 보시고, 불순한 목적이 섞인 것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역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도록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욕구에 묶여 하나님 보다 사역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면, 오히려 사역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묶이는 그곳에서 항상 사탄이 우리에게 올무를 걸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란, 성령이 거룩함의 칼로 우리를 찔러 우리가 그 찔림 가운데 애통해 할 대 비로소 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위로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찌르심은 원하지 않고 위로만을 원한다. 성경말씀 가운데 그저 축복의 말씀을 담은 구절만을 따서 그것을 늘 곁에 두고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찔림과 상함과 더불어 임한다. 성령이 부어질 때, 그 거룩함의 임재 앞에 세상과 나의 욕구를 보며 변하지 않는 내 모습에 대해 좌절하고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갈등 가운데 심자가를 바라보고 걸어가려고 방향을 정하는 그때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는 위로와 평안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