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1화
OMG는 뛰어난 무대를 선보였다.
그곳에 왔던 이들 중, OMG의 공연을 보고 열광하지 않는 이들은 없었다.
스머프를 보려고 온 팬들까지도 자기들도 모르는 새에 OMG의 공연에 환호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실 공연장의 열기라는 것은 일단 브라운관으로 전해지게 되면 많이 걸러져서 직접 보는 것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이미 스머프에게 길들여진 시청자들이 TV를 통해 봤을 때, OMG의 무대는 다른 가수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 OMG멤버들은 이번에 TV 출연만 한 번 하면, 엄청난 반향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다.
스머프에게 돌아섰던 팬들이나, 자기들을 잡기에만 능한 가수라고 비난하던 사람들까지도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돌아왔다며 놀라워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잠잠해도 너무 잠잠한 현실에 OMG는 축 처지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물론 TV 활동을 굳이 하고 싶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의 실력에 대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OMG는 더 큰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건우는 더욱 화가 났다.
분명 원진과 민혜는 진성 몰래 사귀는 사이인데, 힘들게 꼬리를 잡아 터뜨린 열애설이 쉽게 무마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진과 진성의 사이가 예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맹목적으로 스머프에게 빠져든 사람들에게 스머프의 치부를 보여줘야만 했고,
그러려면 스머프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려야만 했다.
다들 건우의 [스머프 열애설] 건에는 크게 기대를 하지도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잘 무마가 되었어도 별로 아쉽거나 하지 않은 듯 했지만, 건우만은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잡고 말겠다고
속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
"라면 광고 CF가 들어왔는데, 거절했어."
TV활동을 시작하고 2주정도 지났을 때, 건우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다들 미간을 좁히며 건우를 쳐다봤다.
물론 소우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대체 왜?! 우리 요새 열라 돈 없는 거 모르냐?!"
건이 버럭 소리쳤지만 건우의 귀찮다는 듯한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알지."
"그런데 대체 왜?! 우린 어떤 CF라도 할 수 있다고! 게다가 그건 먹는 광고였잖아!"
"소우 말 못 들었냐? 4집 발표 후, 6개월은 오로지 음악 프로그램에만 나가는 거다.
지금 고작 한 달 반밖에 안 지났다. 너희들의 스케줄에 음악 프로 이외의 것이 끼어들 곳은 없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성민 사장님도 좀 곤란해지는 거 아냐?"
현욱이 입을 삐죽 내밀고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자는 망해도 3년을 먹고산다지만,
J프로덕션이 끼고 있는 연예인들이 워낙 많았던 데다가, 그 연예인들의 진출이 앞뒤로 꽉꽉 막힌 지금,
성민이 마냥 OMG에만 전력을 쏟아 부을 수는 없기 때문에, 자연히 OMG에게 투자하는 돈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OMG는 소우가 잘 이끌어줄 거라는 생각에 성민은 거의 OMG에겐 신경을 안 쓰고
다른 연예인들의 방송 진출을 꾀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덕분에 OMG는 4집 준비를 거의 자비로 했다.
그러니 아무리 그 전에 돈을 많이 벌었어도, 관리비 내랴, 세금 내랴...
자금 부족 현상이 오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성민이 형은 걱정하지 마. 우리가 지금 남 걱정할 때야? CF나 토크쇼로 스머프를 누를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노래로 그 녀석들을 눌러버리라고..."
그렇게 들어오는 CF나 토크쇼도 거절을 하고 오직 노래로만 시간을 보낸지 두 달 가량이 지났다.
그래도 시청자들 중엔 상당히 깨인 사람들도 많이 있어서, 오직 본업에만 충실하고,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며 노래만을 부르는, 게다가 실력도 몹시 좋아진 OMG의 인기는
조금씩, 조금씩 높아져만 갔다.
이대로라면 한 번에 스머프를 눌러버릴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멋진 가수로
OMG에 대한 인식을 굳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건이나 현욱도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꽤나 만족을 하고 있는 듯 했고,
점점 더 자기들의 노래에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OMG는 발전했다.
멤버 한 명, 한 명에게 노래에 대한 강한 애착이 생겼고, 더 잘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기 때문에
남들이 보면 정말 잘 한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더욱 열심히 연습을 했다.
모처럼의 쉬는 날에도 그들은 버릇처럼 자기의 악기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우는 그런 OMG를 보는 것이 즐거웠고, 건우는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좋았다.
웬만큼 인지도가 있는 가수들이라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성탄절이나 새해에도
OMG는 숙소에 틀어박혀 자기들끼리 축배를 들고, 노래를 하고, 즐거워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1년 전의 그들은 인기가 없어서 성탄절이나 새해를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연예인들을 불쌍하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노래도, 멤버들 간의 사이도 점점 좋게 흘러가는 듯 했다.
소우와 건 사이엔 여전히 대화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기에,
이 상태만 유지된다면, 1년쯤 지났을 때는 정말 승승장구하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폭풍전야와도 같은 고요함이었다.
그 일은 그들이 편안하게 둘러앉아, 후속곡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시끄럽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건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누구야, 대체?"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더니 뛰어들어오는 것은 성민이었다.
자기 회사가 파산 직전이 되었어도 느긋하고 동요하지 않던 성민이 사색이 되어 뛰어들어왔다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기에 다들 바짝 긴장해서 성민을 쳐다봤다.
씩씩거리며 소파에 앉아있는 OMG 멤버를 한 번 쭉 돌아본 성민이 곧 자기만의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하지만 처음 성민이 들어올 때의 긴급함이 몰고온 여파가 쉬이 사라지진 않았다.
"왜 그래?"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앉아있던 소우가 물었다.
성민이 한숨을 내쉬며 소우의 옆으로 와 앉았다.
건은 속으로
'왜 하필이면 소우 옆인 건데?!'
라고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성민을 노려봤지만, 성민은 여유로운 표정과는 달리,
손가락으로 초조하게 무릎을 두드리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건을 노려봤다.
의외로 강한 성민의 눈빛에 건이 흠칫 했다.
"선.우.건."
"에? 왜, 왜요?"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네?"
"너... 후... 선우건, 너..."
성민이 차마 말을 잊지 못하고 몇 번이나 말을 시작했다가 멈추었다.
현욱이 재촉했다.
"사장님. 왜 그래요?"
물은 것은 현욱이지만, 성민은 건을 보며 말했다.
"선우건. 네가 모델 정여진을 임신시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전국 신문에 쫙 깔리겠지.
대체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건의 머리엔 성민의 말이 전부 들어오지 않았다.
단 하나,
"네가 정여진을 임신시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라는 말이 고장난 CD 돌아가는 것처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건만이 아니었다.
다들 뒤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성민을 한 번 쳐다봤다가, 건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성민을 쳐다봤다가,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건을, 그리고 다시 성민을 쳐다봤다.
다들 "농담이죠?"라는 눈빛을 성민에게 보냈지만, 성민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여기저기 심어놓은 애들이 정보를 물어다 주기는 했지만, 현재로선 이걸 어떻게 무마시킬 수가 없어.
내일 신문에 기사로 뜰 거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델을 임신시켰다니... 게다가 정여진이 임신했을 때, 그 애는 고작 고등학생이었어."
"임신...."
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여진과 헤어진지는 벌써 1년 가량 지났다.
그 때, 이후로 만나지 않았으니 임신을 했더라면 애를 낳고도 남을 시간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여진과는 그럴 만한 관계를 갖지도 않았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은가!
건은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리다가 반사적으로 소우를 쳐다봤다.
이게 사실이던, 거짓이던 간에 소우에게만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진과 그럴 만한 일을 한 적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이런 유언비어가 퍼졌다는 것은 자기가
행동을 조심치 않고 다닌 예전의 행적 때문이니, 소우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소우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멀거니 성민을 쳐다보고 앉아있어서, 더 가슴이 아팠다.
적어도 소우가 이런 말엔 반응을 해주길 바랬는데...
"거, 건아. 그게 정말이야?!"
현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건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냐, 건아? 정여진이 임신이라니..."
민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번에도 건은 대답없이 고개만 저었다.
"야, 야. 갑자기 이게 왠 소동이냐? 너 정말 그런 거냐?"
건우도 물었다.
"어쩔 거냐, 건아."
성민도 물었다.
'왜 다들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데? 난 그런 짓 한 적 없다고! 임신은 무슨 놈의 임신!
분명 나의 애가 아닐 거란 말이야!'
건은 화가 치밀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말했다.
"아니야. 난 그런 짓 한 적 없어. 그런데 애가 생길 리가 없잖아. 내가 한 거 아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현욱이 중얼거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정말 왜 그런 기사들을 쓰고 난리인 거야?"
현욱은 기분이 나쁜지 발로 탁자를 툭툭 치며 궁시렁거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탁자 유리에 반사되는 형광등 불빛을 노려보던 건이 소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 때의 사건 이후, 건으로선 처음으로 소우에게 말을 붙이는 것이지만,
건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지금은 소우에 대한 섭섭함이 우선이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 소우에 대한 섭섭함.
"넌 왜 아무 것도 안 묻냐?"
건의 말에 성민을 응시하고 있던 소우가 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늘한 눈빛이 건의 얼굴에 와서 꽂혔지만, 건은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담담할 자신이 있었다.
소우가 무슨 말을 하던, 어떤 잔인한 말을 하던 담담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이제 너무 많이 상처를 받아 가슴이 헤지고, 헤져서 더 이상 다칠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건을 응시하던 소우가 드디어 입을 벌렸다.
"네가 한 거 아니라면서?"
"...........?!"
"내가 보기에도 네가 여자 임신 시켜놓고 모르는 척 할, 간 큰 녀석으론 보이지 않고...
그걸로 된 거 아니야? 나도 너에게 묻고 확인해주길 바라는 거야?"
울컥.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배에서 솟구쳤다.
감동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었다.
소우를 사랑한다.
저 시니컬한 목소리도, 서늘한 눈빛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는 신뢰도 사랑한다.
정말 소우를 사랑한다.
"쳇. 난 간 크다고..."
"자랑이시군."
이제 막 입지를 굳히기 시작한 OMG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커다란 타격이 될 것이 분명한 일인데,
어쩌면 다시는 활동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의 사건일 수도 있는데, 건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을 기회로 소우와 짧은 대화나마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것은 현욱이나 민하도 마찬가지인지,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둘의 모습을 지켜봤고,
성민은 그런 그들에게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어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건은 여진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음 날, 기사는 크게 터져 OMG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고, 건에 대한 욕설은 정도가 심할 정도로 번져나갔다.
건은 거의 죽일 놈 수준이 되었고, 여진은 건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불쌍한 여인이 되어버렸다.
기사를 읽고, 여진의 기자 회견을 들은 사람들은 멋대로 상황을 상상하며, 건을 점점 더 나쁜 놈으로 몰아갔고,
급기야 건의 집 앞에 찾아와 오물을 던지는 극성 안티들까지 생겨났다.
OMG는 잠시나마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국에서도 원하지 않았고,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OMG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건뿐만이 아니라, 민하, 소우, 현욱까지 함께 따라나섰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기자들이 모인 회견장에서 건은 죄를 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단상에 서 있었고,
남은 OMG 멤버들은 건의 경호원이라도 되는 양, 건의 뒤에 나란히 버티고 섰다.
회견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건이 한 사람을 지목했다.
"선우건씨는 많은 여성분들과 교제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런 경우, 대부분 어떻게 무마를 시키셨나요?"
마치 건이 지금까지 늘상 여자들을 임신시켜왔다는 듯한 질문이다.
건은 움찔했고, 민하와 현욱은 울컥하여 도끼눈을 하며 질문한 기자를 노려봤고,
소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기자의 앙칼진 질문에 비해, 건의 목소리가 너무 초라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예계엔 선우건씨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선우건씨께선 그 모든 스캔들을
본인이 직접 인정하셨고, 그 동영상도 남아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적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네. 사귀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없었습니다."
"신빙성 없는 말인 것 같은데요. 선우건씨가 어린애도 아닌데, 아무 일도 없이 끝날 수 있었을까요?"
"........."
평소에 날리던 말빨이 어디로 갔는지, 건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고, 보다 못한 건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시면 퇴장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제 질문에 인격 모독적 발언이 있었던가요? 그저 전 일반적인 질문을 한 것뿐입니다."
건우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세상 사는 사람들이 모두 당신 같을 거란 편견은 버리십시오.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건우의 반격에 질문을 하던 기자가 얼굴을 붉히며 뭐라고 말했지만,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드는 기자들의 소리에 묻혀버렸다.
"이번 모델 정여진양의 임신이 선우건씨 책임이 아니라고 하시던데, 그건 책임을 회피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정여진양 측에선 이번 임신이 선우건씨 때문이라는 많은 증거 자료들을 준비했다고 하던데요.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선우건씨도 남자이고, 한 때의 호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하셨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작정 책임을 회피하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인정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정여진씨 측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방적으로 건을 몰아붙이는 질문들이 계속 쏟아졌다.
결국 참다 못한 현욱이 나서서 건을 옆으로 밀어내고 발악하듯 외쳤다.
"건이가 한 일이 아니라잖아요! 대체 왜들 그러는 거예요? 사람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부르지를 말던가요!
지금까지 건이가 한 말 못 들으셨어요?! 귀가 먹었어요?! 아니라는데, 다들 왜 그래요?!
그렇게 사람 상처 주는 게 좋아요? 즐거워요? 재미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현욱아, 진정해."
민하가 현욱을 달랬지만, 현욱은 계속해서 외쳤다.
현욱의 동그란 눈에서 친구의 안쓰러운 모습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려,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당신들, 정말 나쁜 사람인 거 알아요? 정말 못된 사람들인 거 아냐구요?!
조금쯤은 건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몰아붙이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현욱아."
민하와 건우가 다가와 현욱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낸 후에야, 현욱은 절규를 그쳤다.
하지만 서러운지 엉엉 우는 모습에 건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때, 이제껏 차가운 눈으로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소우가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고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건이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거 알면, 당신들 참 미안해지겠네요.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인간도 아닌 거겠죠?
설마 자기 일 때문에, 인간성을 아예 버리려는 건 아닐 테니까요. 쓸모 없는 기자회견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준비하고 있으세요. 곧 미안해할 상황이 생길 테니까..."
말을 마친 소우는 휙 돌아서 회견장을 나가버렸고, 건우를 비롯한 경호원들이 OMG, 특히 건을 보호하여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침묵 속에서 집에 도착한 그들은 서로에게 뭐라 말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건은 괴로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런 적이 있었다.
현욱이 왜 그렇게 절규한 건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 건지, 건은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아직 그들이 힘도, 무엇도 없을 때, 학교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TV나 영화, 소설에서 늘 그렇듯,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현욱과 건을 향한 눈빛은 곱지 않았고,
그들은 곧 도둑놈이라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 때, 현욱과 건은 우리들이 범인이 아니라며 목이 쉬어라 외쳐댔지만,
부모님도 안 계신 그들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 아이들이 그들을 믿어주지 않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그 괴로운 일을 털어놓을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 사건은 다른 아이의 소행으로 밝혀졌지만, 건과 현욱에게 도둑으로 몰아붙인 일에 대해
사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 건과 현욱은 절실히 느꼈다.
부모가 없이 이 세상을 부당하지 않게 살아가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고, 다른 녀석들이 무시하지 못할
그런 힘을 길러야 한다고...
"빌어먹을..."
건은 베개를 들어 얼굴 위에 얹어놓았다.
베개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웠지만, 그런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육체적 답답함 때문에 정신적 갑갑증이 조금은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세상. 더러운 새끼들."
밝게 살자. 부모님 안 계시다는 티 내지 말고 밝게 살자.
어차피 주어진 삶인데, 굳이 우울하게 살 필요가 뭐가 있냐?
어차피 내 삶인데, 부모님 없는 게 무슨 상관이냐, 나만 즐거우면 되지.
즐겁게 살자. 세상 욕하지 말고 즐겁게 살자.
그런 생각으로 십 수 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세상에 대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현실은 건에게 있어 정말로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빌어먹을 세상.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파란만장 이중생활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2화
건은 여진의 임신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빴다.
불려 가는 곳은 대부분 혼자 가야하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멤버들은 집에 남아서 초조하게 건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다들 새벽 1시고, 2시까지 건을 기다리고, 결과를 들었지만,
그런 생활이 2주 이상 계속 되자, 지쳐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제대로 된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괜히 몸만 혹사시키고 있었다.
"나, 오늘은 많이 늦을 거다. 다들 그냥 가서 자. 니들이 기다려주면 빨리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에
일이 제대로 안 되니까... 그냥들 자라, 자."
2월 초.
건은 드디어 여진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고, 나가기 전 친구들에게 퉁명스레 말을 해놓고 집을 나섰다.
임신 사건이 터진지도 2주가 지났다.
빠르게 변화하는 연예계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도 금방 식어버리는 것이 정상인데,
이번 사건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이상할 정도로 높았다.
그것이 더 건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건은 비난을 담아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심적으로 상당히 커다란 타격과 상처를 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부 내색하면 친구들이 걱정할 것이 뻔하기에 되도록 괜찮은 척 하려 노력해왔다.
일단 여진을 만나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관계를 했다면 이런 오해가 생겨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아무런 신체적 접촉이 없던
상황에서 여진의 이런 행동은 거짓말이었다.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수 십, 수 백 번, 여진과의 접촉을 꾀했지만, 여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기획사 측에서도
여진이 지금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라는 둥, 건강이 좋지 않다는 둥 말을 얼버무리며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해왔다.
이제 거의 포기하고 있는데, 여진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만나자고...
건은 이것저것 재볼 것도 없이 당연히 OK를 했고, 바로 날짜를 잡아 여진을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곳에 있는 카페를 통째로 빌리기로 했다.
이목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여 늦은 시간을 택했다.
건이 먼저 도착했다.
아무 자리에나 대충 앉아 물어볼 것들을 정리한지 20분쯤 지나 여진과 매니저가 들어왔다.
건은 적어도 여진이 미안하다는 표정이나, 창피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줄 알았는데,
건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 맞은편에 앉는 여진의 표정은 뻔뻔 그 자체였다.
건은 여진의 그 뻔뻔스러움이 놀랍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거짓말로 사람 인생을 망치려 들면서 이렇게까지 뻔뻔하다니...
건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날 만나려고 한 거야?"
여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진의 질문에 건은 지금까지 정리해놓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싸악 지워지고 말았다.
여진의 질문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왜라니? 그걸 몰라서 물어?'
이런 질문이라도 하고 싶은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거짓말을 한 주제에 너무 고자세 아닌가.
"나 요새, 몸도 무겁고, 많이 힘들어."
그러고 보니, 여진의 배가 많이 불러 있었다.
임신한지 8개월은 지난 것 같은 모양이었다.
건은 미간을 좁히고 여진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체 왜 여진이 이런 거짓말을 하고 나서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거짓말로 건을 당황스럽게 한다고는 하지만, 나중엔 결국 건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게 뻔하지 않은가.
문득 여진과 헤어질 때, 여진이
"후회할 거야!"
라고 외친 것이 떠오르긴 했지만, 이건 정말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건은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알겠는데... 너 배 부른 거 보니까 몸 많이 무겁고 힘들다는 거 알겠는데... 왜 이런 구라를 치는 거냐?"
"구라라니? 오빠야말로 왜 그래? 왜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야?"
"뭐?!"
건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대면을 하게 되면, 여진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건이 하는 말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건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우는 여진의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날 한 번 가지고 놀고 버린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이렇게 애까지 생겼는데...
우리 애기, 이제 지워버릴 수도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 이건 정말 아니잖아.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얘... 우리 애기..."
여진이 더없이 모성애를 가득 품은 표정으로 부푼 배 위에 손을 얹으며 슬프게 말했다.
"막 움직여. 얼마나 안쓰러운지 몰라. 난 이 애가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나는 건 싫어.
그렇다고 낙태는 더더욱 싫어. 그거 정말, 인간이 할 짓이 못 되잖아. 오빠. 정말 이러지 마.
내가 지겨워지고, 내가 싫은 건 이해해. 하지만 아이까지 버릴 순 없는 거잖아."
순간 건마저도
'나도 모르는 틈에 여진이를 임신 시켰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연기였다.
건은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야, 야. 이제 이런 짓 관두자. 네가 어떤 악감정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정말로 그 애를 아낀다면 정말 아버지를 찾아줘야 하는 게 정상 아니냐? 내가 그 애의
아빠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인데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대체 나한테서 뭘 얻어내고 싶은 건데?"
"얻어내고 싶은 거라니?! 대체... 오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내가 그런 것 때문에 오빠한테 이러는 거 같아?
나 그런 거 아냐!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난 우리 애만 잘 자라줬으면 좋겠다구! 그런데... 그런데... 으윽...
오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매정해? 응?"
여진이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건은 무척 당황했다.
이건 정말 건이 원했던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래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계속 이런 자세로 나가야 하는 건지 몰라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매니저가 여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여진아. 흥분하지 마. 좋은 생각만 해야지. 이러면 아이한테 안 좋아."
"응, 오빠. 그럴게요."
아이에게 안 좋다는 말에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 애쓰는 여진의 모습은,
여진에게 당하고 있는 건마저도 안쓰럽게 생각이 될 정도였다.
피해자인 건까지도 이런 상황이니, 이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떨까 싶을 정도다.
그들은 분명 여진의 이런 모습을 보며 점점 더 건이란 인물을 비난하고, 죽일 놈으로 모는 것이 당연했다.
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하다. 너도, 네 뱃속에 있는 그 애도... 네가 지금 재미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 애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것이든 간에, 넌 네 뱃속에 있는 그 애를 더 불쌍하게 만들고 있는 거야.
정말 그 애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이런 거짓말은 그만 둬라."
"어떠........"
"아니."
여진이 다시 한 번 연기를 하려 했지만, 건이 단호하게 끊으며 말했다.
"더 이상 네 연기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까 제대로 봤으니까...
끝까지 이러고 싶다면 연기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나 해라. 난 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내 앞에서 하는 건 아무 소용없을 거야.
너랑 보냈던 시간, 그래도 꽤 즐거웠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유감이다. 그만 일어날게."
여진은 입을 꼭 다물고 건을 쳐다봤다.
여진의 눈빛을 받으며 나가던 건이 커피숍을 나서기 전에 잠깐 뒤돌아서 말했다.
"만약 애 낳고 몸매 관리 못해서 모델 못하게 되면, 너 연기자 해라. 연기 끝내준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무척 피곤했다.
여기저기 시달린 것도 있었고, 오늘 여진과의 만남이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생각 없던 시절에 바보 같이 행동한 결과라는 사실에 짜증이 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문득문득 치솟았다.
집에 들어가면 휑뎅그렁한 거실이 맞아줄 거란 생각은 건을 더욱 우울하게 했다.
휑뎅그렁한 거실을 보면, 어린 시절 우울했던 그 거실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싫었다.
'그냥 애들보고 기다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건은 괜히 일찍 자라며 퉁퉁거리고 나왔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소, 소우야..."
현관문에서 바로 보이는 거실의 소파.
늘 소우가 앉아서 이제 소우의 지정석이 되어버린 소파 가장자리.
그곳엔 소우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눈으로 천천히 건을 돌아본 소우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건을 맞이했다.
"왔어?"
"아, 으응."
"........."
건은 소우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올 거라 생각했지만, 소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우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라든지, 소우에게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소우만의 독특한 향기 같은 것이 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소우가 건을 기다리느라 소파에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책을 읽을 생각에 그곳에 앉아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그래서 건은 지금 무척 행복했다.
소우의 자그마한 몸을 끌어안고 얄팍한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고, 작은 귀에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너무나 가식적이었던 여진을 만나고 온 후라 그런지, 어떤 일에도 솔직한 소우에게 더욱 그런 감정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뭐해? 들어오지 않고..."
신발도 벗지 않고 멍하니 서서 소우의 모습을 응시하던 건은 소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어설프게 웃었다.
"아아. 그래."
건은 소우가 자기 방으로 올라갈 줄 알았는데, 소우는 건의 앞으로 다가왔다.
소우의 향기가 짜릿하게 건의 코를 자극했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러다 터져 버리는 거 아냐?'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건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소우가 물었다.
"너, 저녁은 먹고 다니는 거냐?"
"아?"
'이런 질문 받아본 게 언제였더라. 아하하. 그래, 그래. 한 번도 없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
"아, 아니."
"그래. 저녁 차려줄게."
소우는 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부엌으로 향했다.
건은 아까부터 이상할 정도로 답답한 기분이 들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소우의 뒤를 따랐다.
식탁에 앉아 소우의 음식을 차리는 소우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미리 준비를 해놓았는지 전자레인지와 가스레인지로 데우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살짝 덮은 미끈한 목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선이 고운 몸매, 부드러운 움직임.
늘상 보아오던 것인데, 오늘은 참 기분이 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힘들어서 그런 모양이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하나, 하나 앞에 놓이는 따뜻한 밥과 국, 소우의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깔끔하게 담긴 밑반찬들...
건은 울컥하는 것을 느끼며 수저를 들었다.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지금 소우와 눈이 마주치면 분명 감정이 터져 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소우가 맞은편에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은 수저를 움직여 밥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고, 국을 떠먹고, 반찬을 먹었다.
우물우물우물.
익숙해져버린 소우의 음식들. 그 따뜻하고도 향이 좋은 맛이 혀에 있는 미뢰를 자극했다.
원래 음식은 혀를 자극하는 건데, 어째서 콧등이 시큰한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맛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2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누군가가 늦게까지 기다리며 차려준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음식이라 너무 맛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더럽게... 맛없네...."
한 입을 꿀꺽 삼킨 건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묵묵히 앉아 건이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우가 답했다.
"그거 참, 더러워서 미안하구나."
"제길... 넌 정말 젠장 맞을 놈이다."
"그것도 미안하구나."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너무 뜨거워서 시릴 정도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상하게 가슴이 매이고, 목이 매였지만 건은 밥을 입에 더 넣고 씹었다.
눈물이 흘러 들어가 짠맛이 느껴졌지만 밥은 여전히 맛있었다.
입안에서 녹아 내릴 정도로 맛있었다.
한 번도 바란 적이 없었다.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가 거실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저녁 식사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그 앞에 앉아 먹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지켜봐 주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늘상 있는 일이지만, 건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행복을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고, 바란 적도 없었다.
바라지도 않았던 때에 나타난 이 행복은 건의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려댔고, 덕분에 건은 소우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소우가 차려준 따뜻한 음식을 다 먹었다.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는 건을 지켜보던 소우는 마음이 착잡했다.
부모님이 안 계신 건이 너무 밝게 자라 대견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버라고 생각될 만큼 건의 밝은 행동들은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행복한 삶을 동경하는,
그리고 자기의 외로움을 덮어두려는 건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소우는 미처 그런 점들을 깨닫지 못하고 건에게 상처될 말들을 내뱉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이 들었다.
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밥을 깨끗하게 먹었고, 수저를 내려놓은 후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우는 그 앞에 앉아 가만히 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상당히 창피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은 건의 눈물을 못 본 척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소우는 건의 앞에 버티고 앉아 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저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가만히 있던 건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였다.
"우리 엄마는 술집 여자였어."
".........."
"아버지는 엄마의 예쁜 외모에 빠져서 엄마와 결혼을 했지. 그런데 날 낳은 후, 아버지의 마음엔 의심이 생긴 거야.
혹시 이 애가 내 아이가 아니지 않을까,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병들게 했고, 아버지는 있지도 않은 일로 엄마를 추궁하고, 엄마를 때렸어.
엄마는 원래 정신적으로 강한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그런 구타가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버지에게 맞은 날이면 술을 마시고, 날 때렸어. 술에서 깨어나면 미안하다고 날 어루만져 주는 그런 날의 연속이었지.
그렇게 아버지도, 엄마도 조금씩 조금씩 미쳐갔던 거야."
"........"
"난 혼자인 게 좋았어. 누군가가 있으면 그건 아주 소란스럽고, 괴로운 일이니까 차라리 혼자인 게 좋았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외롭고 무료한 시간이 빨리 흘러갔거든.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시지 않게 되고, 아버지를 잃었다는 생각에 괴로운 엄마가 자살을 해서
혼자 남게 되자, 외로워지더라. 그런 아버지라도, 그런 엄마라도 곁에 있었던 시간이 그리워지더라."
"........."
"그리고 시간이 흘러, 조금씩 생각을 갖게 되면서 나한텐 또 다른 의문이 생겼어.
나란 존재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있어 어떤 것이었을까. 엄마를 못 믿던 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엄마는 자기 배 아파서 날 낳았고,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텐데,
왜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날 버리고 그렇게 자살을 해버린 걸까. 그런 의문이 날 괴롭게 했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어. 아니, 결론이 나긴 났지. 난 결국 그들에게
아무런 존재가 아니었던 거라고, 쥐뿔만도 못한 새끼였던 거라고... 그런 결론이 났지.
빌어먹을. 그래, 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던 거다. 날 낳은 부모에게조차 말이야."
"........."
"빌어먹을..."
주먹을 꽉 쥐고 욕설을 내뱉은 건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건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였던 부분을 되지도 않는 말 몇 마디로 넘겨버릴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건의 슬픈 얼굴을 응시하던 소우는 말없이 일어나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소우가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니기에, 건은 그냥 앉아서 소우가 식탁을 치우는 걸 지켜봤다.
달그락, 달그락.
소우가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설거지를 마친 소우가 행주로 식탁을 닦아내는 것도 보였다.
"어쨌든..."
소우가 식탁을 다 정리하고,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킬 때, 소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소우를 돌아봤다.
"난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기쁘니까..."
"......"
"네 부모님한테는 감사하고 있어."
"......."
"그럼... 잘 자라, 건아."
건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툭 두드려준 소우가 나간 후에도, 건은 그렇게 그곳에 하염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파란만장 이중생활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3화
"그랬단 말이지..."
어제 건과 여진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민하가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현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진이, 그런 앤 줄 몰랐는데..."
"원래 사람은 그냥 봐선 모르는 법이지."
건우가 툴툴거리듯 대꾸했다.
"그럼 이제 어쩌지? 여진이 쪽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 곤란하잖아."
"거짓말이라는 증거만 잡아내면 되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다들 소우를 돌아봤다.
소우는 왜 그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건지 몰라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말했다.
"친자 확인을 위해서라면 DNA검사를 해야하지만, 그러려면 산모의 양수가 필요해. 쉽지 않은 일이지.
그렇다고 납치를 하는 건, 범죄행위니까... 이제 거의 산달이 다 된 것 같다면 애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거야.
그 때, 병원 측에 부탁해서 양수를 받아다가 DNA 검사를 하던가, 아니면......."
소우가 말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소우의 핸드폰이었다.
소우는 늘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놓는데, 이번만큼은 진동이 아닌 벨소리로 되어있어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래. 응....... 그래. 지금 와라. 이따 보자."
통화는 무척 짧았다.
다들 눈으로 누구냐고 물었고, 그들의 눈빛을 알아챈 소우가 답했다.
"가인이야."
건이 미간을 좁혔지만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소우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에 건이 일 때문에 가인이한테 이것저것 부탁을 해뒀었어. 어쩌면 이번 일이 조용히 끝날지도 모르겠어."
소우의 말에 모두 기대에 부풀어 앉아있는데, 건만 뭐라고 투덜거렸다.
건이 왜 투덜거리는 건지 아는 건우가 피식 웃었다.
'이 와중에도 누나랑 가인이가 잘 될까봐 걱정인 모양이지? 하하. 귀여운 놈.'
가인은 근처에 있었는지 금방 도착했다.
건은 적의에 찬 눈으로 가인을 노려봤지만, 가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건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소우의 맞은편,
건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건우가 물었다.
"어떻게 됐냐?"
"아, 드디어 잡아왔어요."
"헤에. 그래? 잘 됐네. 대체 배후가 누구야?"
"그게..."
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스머프요."
"그럴 줄 알았지."
건우가 중얼거렸다. 건우와 가인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듣던
현욱이 말했다.
"대체 무슨 말들이야?"
"아아. 그게 말이지..."
건우가 한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번에 여진인가, 뭔가 하는 애가 건이의 아이를 가졌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얼마 안 돼서,
소우가 가인이한테 부탁을 해뒀어. 여진이에게 접근을 해보라고...
일단 여진이는 가인이가 우리랑 친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둘 다 모델이니까 의심 없이 친해질 수 있잖아.
가인이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여진이에게 접근을 했지. 그리고 임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진이를
돌봐준다는 명목 하에 여진이의 곁에 머물면서 이번 임신 사건에 대한 것을 도청한 거야.
도청기가 별로 좋지 않아서 바로 옆에 있어야만 들을 수가 있거든.
건이 넌, 가인이한테 무지 고마워해야 할거다. 가인이 녀석, 요새 엄청 바쁜데도 너 때문에
여진이 옆에 한참동안 머물러 있었던 거니까..."
건은 생각지도 못했던 가인의 친절에 당황하여 가인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가인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고, 민망할 정도로 짜증을 낸 적도 있었는데,
이제 막 뜨고 있는 가인이 자기의 스케줄을 버려가며 자기를 위해 여진의 옆에 붙어있었단 사실에
고마움보다는 놀라움이 앞섰다.
"고맙다."
지금까지 한 짓도 있고 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마음에 어설프게 인사를 했더니,
가인이 걱정스레 건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 괜찮을 거예요. 얼마 전부터 이런 식의 대화들은 많았지만, 오늘처럼 확실한 증거는 처음이거든요.
이걸 내보내면 분명 전부 없었던 일이 될 거예요. 힘내세요."
"그, 그래."
가인이 온 후로 한마디도 안 하고 앉아있던 소우가 입을 열었다.
"테이프 줘봐."
"아, 네. 오빠. 여기요."
가인이 핸드백을 뒤져 작은 테이프를 꺼내 소우에게 건넸다.
소우는 테이프를 들고 말없이 방으로 올라갔고, 소우가 올라가자 다들 뻘쭘히 앉아서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 소우가 거실로 내려왔다.
가인이 자기의 성과가 괜찮은지 확인하려 소우를 쳐다봤고, OMG 멤버들도 이 일을 종결시킬 수 있을까 싶어서
다들 기대에 찬 눈으로 소우를 올려다봤다.
소우가 먼저 가인을 보며 말했다.
"수고했다, 가인아."
가인이 웃었다.
가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소우는 이번에 건을 향했다.
"이번 일은 우리가 점점 입지를 굳혀 가는 것을 걱정한 스머프 측에서 여진이를 매수해서 벌인 일이야.
테이프엔 진짜 여진이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나오지만, 그건 여진이의 개인적인 일이니까 굳이 밝히지 않을게.
중요한 건, 이번 사건에 대한 대응이야. 맞고소를 해서 스머프와 여진이를 둘 다 깔아뭉개려면
여진이의 치부까지 전부 드러내야돼. 하지만 조용히 끝내려면 여진이에게 이 테이프의 복사본을 보내고,
조용히 끝내자고, 공개적으로 사과나 하라고 하면 돼. 물론 그런 식으로 끝내게 되면 일부에선 여전히
건이 너를 의심하겠지. 돈으로 여진이를 입막음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런 오점은 네 앞으로의 행동에 따라
지워지기도 하고, 더 진해지기도 하는 거야. 자. 어떻게 할래? 난 네 선택에 따르겠어."
"난...."
건은 가만히 생각해봤다.
스머프와 여진의 손에 놀아난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서 몇 대 씩 쥐어박고 싶지만,
그래도 한 때 사귀었던 여진의 치부가 드러날 정도로 밟아주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몇 몇 사람들에게 좀 의심을 받더라도 그냥 조용히 끝내는 것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끝냈으면 좋겠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건의 바램대로 여진의 임신 사건은 조용히 해결되었다.
테이프를 받아본 여진은 두 말 할 것 없이 기자회견을 열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거짓이었다고 밝혔고,
밝히는 중에 거론된 스머프의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것으로 스머프의 인기가 뚝 떨어지진 않았다.
그만큼 스머프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신뢰와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일로 상처를 받은 것은 여진뿐이었다.
여진이 여론의 심한 공격을 받고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디디지 못한 것에 반해,
TV에서 멀쩡하게 활동을 하는 스머프를 보며, 현욱이 얄밉다는 듯 말했다.
"역시 그 때, 확 터뜨렸어야 했어. 저 뻔뻔스러운 얼굴 좀 보라구. 저번엔 대기실에서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라고, 선우건. 물론 네가 날 너무 좋아해서, 내가 다른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싫은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라."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지긋지긋하다는 듯 외치는 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건우가 소우보다 한 발 앞서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오는 거야?"
민하가 물었다.
소우가 당연하다는 듯 민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KMC..."
"응?"
"Korea Musical Contest.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시도하는 콘테스트야. 심사위원들은 한국에서 인정받은
교수나 음악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모셔와 노래를 심사하게 되지.
한마디로 이 콘테스트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해외 진출의 기회를 노릴 수도 있다는 얘기야."
"그럼 가수들이 많이 나오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금 가요계는 실력보다는 다른 것들로 뜨는 가수들이 많이 있으니까,
정말 자기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가수들이라면 모두 참여를 하겠지. 그리고 KMC에서 인정을 받은 가수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우를 받게 될 거야."
"하지만 혹시 아냐. 심사위원들이 뇌물 먹었을지..."
건의 말에 소우가 답했다.
"아니야. 오히려 새로 시작되는 콘테스트는 좋은 점이 많아. 오래된 콘테스트는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그 의도가 변질되고, 부정이 많이 일어나게 되지만, 처음 생겼을 땐, 심사위원들도, 가수들도 순수한 목적으로
임하게 되지. 물론, 부정을 시도해보는 사람들도, 그것을 봐주려는 심사위원도 있을 수 있지만,
처음이니 만큼 콘테스트 측의 감시도 심할 거야. 쉽게 부정을 저지를 수 없지."
"헤에... 그럼 해볼만 하겠는데? 잘난 척 하는 스머프 새끼들이 입도 벙긋 못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고..."
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구의 실력이 더 좋은지, 이번 콘테스트로 판가름이 나겠지.
콘테스트에선 무작정 노래 실력만 보는 것이 아니야. 작곡, 작사 능력과 관중들의 환호,
무대를 이끌어 가는 가수의 태도 등, 많은 것을 보고 있어. 그러니까 많은 준비가 필요할 거야."
"콘테스트가 언젠데?"
"세 달 후."
"그럼... 7월쯤인가? 소우 너, 더위 많이 타잖아."
민하의 말에 건이 미간을 좁혔다.
'쳇!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소우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노래를 하는데, 더운 게 문제가 아니지. 좋은 기회니까, 꼭 붙잡아보자."
새로운 노래로 승부를 해야했기 때문에 OMG는 각자 자기의 실력을 한껏 발휘하여 작곡과 작사에 힘을 썼다.
며칠 간,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작곡, 작사를 한 결과 만족할 만한 곡을 얻은 그들은,
그 곡이 제대로 다듬어질 때까지 일단 연습에 들어가자고 했다.
연습을 통해 어색한 부분을 알아내서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아아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자고! 알겠지?"
건이 악보를 팔랑이며 당부했다.
"절대로, 절대로 우리만 알고 있는 거야. 지금 이 곡 너무 좋다고! 다른 녀석들의 귀에 들어가게 할 순 없어.
그러니까 반.드.시. 우리만 알고 있는 거다! 알겠지?"
"알겠어, 알겠어. 그만 좀 해. 으휴! 귀에 못이 박히겠다고!!"
현욱이 귀엽게 인상을 찌푸렸다.
민하가 웃었다.
민하 역시 이번 곡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발표를 할 때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조금씩 가수가 되어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이제 좀 쉬자, 쉬어."
건이 몸을 쭉 펴며 말했다.
절대 엄살이 아니었다.
그들은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악기 연주를 했던 것이다.
소우가 말했다.
"익숙해질 때까지는 쉴 시간 없어.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으니까... 점심 준비할 동안만 쉬어."
"에에. 알겠으. 맛있게 하라고... 대충하지 말고..."
"대충한 적 없어."
소우가 차게 대꾸하고 연습실에서 나가자, 건은 연습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느낌이 그대로 등에 전해졌지만, 연습으로 인해 땀을 많이 흘린 후라,
춥다기보다는 시원했다.
"으아아아. 힘들다, 힘들어."
"건아. 바닥 더러워."
현욱의 말에 건우가 대꾸했다.
"냅둬. 저 놈은 원래 저런데서 굴러먹는 걸 좋아하는 놈이니까..."
"뭐야?!!"
건이 발끈하자 건우가 씩 웃었다.
"헤에. 발끈하는 모습이 아주 도발적인데..."
"아아. 네놈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다. 확 밟아버리고 싶어!!"
"이런, 이런... 그렇게까지 감정을 숨겨야할 필요가 있나 싶네."
"감정을 숨기긴 누가 숨긴다는 거냣!!"
티격태격, 툭탁툭탁.
원래 편안한 시간은 길지 않은 법.
편하게 엎어져 툭탁거린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소우가 들어와 말했다.
"준비 다 됐다. 밥 먹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준비에 다들 조금 더 쉬고 싶다는 표정으로 밍기적거리며 일어나는데,
건이 벌떡 일어나 소우를 향해 외쳤다.
"아주 초고속이구나. 네놈은 메가패스냐?!"
"..........."
"........."
".........."
순간 이어진 정적.
벙찐 표정으로 다들 건을 쳐다보는데도 건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자기의 언어 선택이 무척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건을 가만히 쳐다보던 소우가 미간을 좁히며 휙 돌아섰다.
"미쳤군."
"미치다니! 무슨 밥을 이렇게 빨리 준비하는 건데? 앙?"
"........."
소우는 건의 발광을 무시한 채 나가버렸고, 건은 메가패스가 싫다는 둥, 인터넷은 즐이라는 둥 하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소우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건의 발언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세 사람은 눈만 데굴데굴 굴려가며 서로의 얼굴을 살피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했다.
"하마터면 건이를 후려칠 뻔했어."
그들은 건의 그런 발언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소우가 신기하기만 했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파란만장 이중생활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4화
전혀 예기치 못했던 그를 만난 것은 한 시간에 걸친 가요 프로그램 촬영을 마치고,
이번에도 스머프가 1위를 한 것에 기분 나빠하며 방송국을 나갈 때였다.
그의 등장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건만큼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며,
반가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는 그를 향해 "제기랄."이라는 욕설을 내뱉은 것도 건이었다.
- 대체 여긴 어쩐 일이야, 앤드류.
예상치 못한 순간 나타난 앤드류는 차갑게 묻는 소우를 향해 넉살 좋은 웃음을 보여주며 말했다.
"한국에선 한국말을 써야지. 뭐더라. 음... 아아, 그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안 그래?"
앤드류는 그동안 한국어 연습을 많이 했는지 한국인이나 다름없이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영어만 써오던 앤드류가 그만큼 한국어를 하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거라는 걸 아는 민하는
소우를 향한 앤드류의 애정이 보통의 친구를 향한 애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져 그 표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앤드류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소우를 좋아하고, 아껴주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민하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본 앤드류가 씁쓸하니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선 날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네."
사실 표정이 안 좋은 것은 건과 민하뿐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든 반가운 표정을 짓고, 호의적인 현욱조차도 굳은 표정이었던 것이다.
현욱이야 말로, 왜 자기가 앤드류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 섬에서 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기도 하고, 섬에서 봤을 땐 꽤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다지 반갑지도, 그 때의 일이 고맙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건우가 앤드류의 어깨를 턱턱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반가워 해주잖아. 그런데 정말 여긴 웬일이야? 미국의 유명한 기업 사장님께서 이런 작은 방송국에
볼일이 있는 건 아닐 테고..."
"그야, 소우를 만나러 왔지."
앤드류가 소우를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우가 무심히 물었다.
"왜?"
"에스텔이랑 이반이 한국 문화를 체험하고 싶다고 해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어. 덕분에 나도 끌려오게 되었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살게될 집이 OMG의 숙소 옆집이지, 뭐야."
"뭐라고?!"
큰소리로 반응한 것은 건이었다.
앤드류가 씩 웃었다.
"반가워, 이웃사촌."
"이웃사촌은 누가 이웃사촌이라는 거냐?! 얼굴이 희고, 눈이 파란 놈이랑 이웃사촌이 되고 싶은 생각 없다고!!"
건이 툴툴거리며 한껏 인상을 구겼지만, 앤드류는 개의치 않았다.
소우가 말했다.
"그럼, 가자."
"이런, 이런. 소우야. 반갑지 않은 거냐?"
소우가 별 말 없이 몸을 돌리자, 앤드류가 소우의 팔을 잡으며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마침 소우의 옆에 서 있던 건이 앤드류의 손을 탁 쳐냈다.
"이봐. 마음대로 우리 팀 멤버한테 손 대지 말라고!"
"흐음."
앤드류의 눈에 담긴 의미심장한 표정을 본 건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쳐다보지 마. 개토 나와!"
"개토? 개토가 뭐지?"
"헹!"
앤드류의 질문에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건. 소우가 걸음을 옮기며 심드렁하니 말했다.
"건이가 하는 말은 배우지 않는 게 좋아. 알려고 하지도 말고... 어쨌든 앤드류. 우리는 이만 가야겠어."
"소우야."
"..........."
소우가 말없이 앤드류를 응시했다.
소우의 옅은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며 앤드류가 말했다.
"다음 스케줄이 없다면, 나랑 같이 돌아가면 안 될까? 얘기 좀 하고 싶거든."
"뭐..."
"미안하지만 안 돼!"
소우는 상관없다 말하려 했는데, 건이 소우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앤드류보다도 소우가 더 이상하단 표정으로 건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건은 소우가 아닌 앤드류를 똑바로 쳐다, 아니, 노려보고 있었다.
"개소우는 안타깝게도 좀 바쁘거든. 아무튼 바이바이다, 앤.드.류."
충분히 도전적으로 들릴 말투로 앤드류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끊어 말한 건은, 소우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소우의 팔을 끌고는 차가 주차된 곳으로 후다다닥 걸어갔다.
소우를 잡으려 올라갔던 앤드류의 손은 너무 빨리 사라지는 건과 소우의 모습에 하릴없이 허공만 한 번
휘젓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건우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어버렸고, 현욱과 민하는 건이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다가,
친구의 무례에 대해 앤드류에게 사과를 했다.
앤드류가 보기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너희들이 미안할 것은 없지. 오늘 얘기하기는 그른 것 같네. 그럼 다음에 보자."
앤드류가 휘적휘적 걸어가 버린 후, 차로 돌아가던 현욱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좀 이상해. 건이... 왠지 좀 이상해."
"그러게."
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아무튼 좀 이상해."
"응. 맞아."
"대체 뭐가 이상한 걸까?"
"그러게."
"흐음..."
"흠..."
자기 친구들이 자기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는 건은,
일단 앤드류의 손에서 소우를 구출했다는 기쁨에 벙실벙실 웃으며 차 안에 앉아있었다.
건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소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왜 그러는 건데?"
"뭐가?"
"난 별로 바쁘지 않은데, 왜 마음대로 여기까지 끌고 온 건데?"
"넌 바빠, 개소우! 잊은 거냐?"
"뭘?"
"나와의 약속."
"너와?"
"그래!"
"내가 너와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던가?"
"당연하지! 좀 너무하네. 약속한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다니..."
"........"
"쳇! 너한테 실망이다."
"대체 무슨 약속을 했던 거지?"
"몰라서 묻냐?"
"그래."
"흥!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알 때까지 안 가르쳐 줄 거다!!"
"........"
"네가 알아내도록 해!"
"미쳤군."
"그래, 그래. 나 미쳤다, 나 미쳤어!"
"후..."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건의 땡강에 소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다른 멤버들이 차에 탔다.
차가 출발한 후에도 건은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리곤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소우는 미간을 좁힌 채로 그런 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민하는 앤드류가 싫지 않았다.
앤드류는 소우가 미국에 있을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준 좋은 사람이었고,
돈이 많다고 그것을 자랑삼거나 하지 않는 겸손한 성격이었다.
언제나 표정이 밝은 표정이었고, 꾸미지 않은 미소라던가,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는 오히려 닮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아까 느꼈던 그 감정, 앤드류를 향한 불쾌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달그락, 달그락.
소우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민하는 식탁에 앉아 소우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우의 몸을 본 적은 없다.
소우의 진짜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다.
소우가 여자일 때의 모습이 어떤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몇 번이고 침대에 누워 소우의 원래 모습을 상상하려 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여자 같은 목소리의 소우는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런데 난 왜 굳이 소우의 남장하지 않은 모습을 떠올리려는 거지?'
왜 앤드류에게 불쾌한 감정을 품었던 건지 고민을 하다, 자연스레 왜 소우의 진짜 모습을
떠올리려는 건지에 대한 의문으로 넘어갔다.
여자의 모습이던, 남자의 모습이던, 소우가 소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굳이 그 모습을 떠올리려는 자신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
리듬을 타듯 움직이는 소우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는데, 소우가 나직한 목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왜 그래?"
일어서서 소우의 옆으로 가보니, 칼에 찔렸는지 소우의 손가락에서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민하는 저도 모르게 소우의 손을 잡아 피가 나는 손가락 끝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손가락을 입에 넣어 살짝 빨았더니, 비릿한 혈향이 입안에 가득 번졌다.
그 아찔한 향에 취해 민하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잊고 말았다.
계속 찬물로 요리 재료를 씻어 촉촉하고도 차가운 손을 잡아 그 끝을 혀로 감싸 핥아내고,
베어 나온 피를 전부 빨아낸 민하는 손가락을 입에서 뺀 후에 그냥 소우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소우의 손을 펼쳐 그 손가락 하나하나에, 손바닥에, 손등에, 그리고 손목에 입을 맞추고,
그 위로 올라가려던 민하는 문득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깨닫고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어째서 그 순간 미칠 듯한 나른함과 고혹적인 향기가 몸을 감싼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
그 소리가 소우에게 들릴까 걱정스런 마음에 숨을 죽이고 허리를 편 민하의 눈에 소우의 얼굴이 들어왔다.
약간 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 얄팍한 입술, 그리고... 큼지막한 눈에 담겨 있는 의문과 놀라움.
민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알 수 없었다.
소우가 "왜 이런 건데?"라고 물어라도 줬으면 좋겠는데, 소우는 아무런 말없이 민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쑥스럽고, 더 민망하고, 더 심장이 뛰었다.
이상한 것은, 정말 이상한 것은 그 순간에도 소우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민하는 소우의 자그마한 얼굴을 감싸고 그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얇고 매력적인 입술에 자기 입술을 부벼대고 싶었다.
소우가 부서질 정도로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입술에, 눈에, 볼에, 목에, 그리고 온몸에...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역시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물어도, 물어도 무슨 짓을 한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소우 역시 민하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어 가만히 민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얹어놓은 냄비 속의 물이 끓어 넘치는데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민하만 쳐다봤다.
민하는 소우가 가스레인지에 신경을 써주길 바랬지만, 소우는 그러지 않았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어 멈추고 있었더니 죽을 것만 같았다.
천천히 숨을 내쉬는데, 다행스럽게도 거실에서 현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우야! 아직 멀었어?"
현욱의 목소리는 잔잔한 연못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잘못하면 깨어질 것 같은 둘 사이의 침묵에
파동을 가져다 주었고, 의문에 가득 차 있던 소우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은 공백으로 돌아왔다.
"아아. 조금 더 기다려."
"조..."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민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조심해. 다치지 않게..."
소우가 뭐라 대답을 한 것 같기는 한데, 무슨 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민하는 제정신이 아닌 기분으로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돌아왔고, 발작적으로 소우 아버지의 노래를 찾아 틀었다.
아름다운 선율과 나직한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 후에야,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고,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민하는 침대에 누웠다.
귀에 익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아직도 울컥울컥 올라오는 이상한 기분을 잠재우려 애썼다.
눈을 감고 사랑해마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민하는 알 수 있었다.
왜 앤드류를 보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건지, 소우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던 건지,
그 몸을 부둥켜안고 싶었던 건지, 소우의 원래 모습을 그려보려 했던 건지, 전부 알 수 있었다.
왜 심장이 안정되려 하면 다시 불규칙하게 뛰는지, 소우의 앞에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Tape가 멈추고 방안을 채우던 멜로디도 사라졌다.
민하도 흥얼거림을 멈췄다.
조용한 방.
문 밖의 세상과 전혀 동떨어진 듯한 고요한 방에 눈을 감고 있던 민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 저... 아저씨의 딸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특별히 소우에 대한 감정을 숨겨야 한다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 당장이라도 소우에게 "널 특별한 의미로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OMG가 중요한 이 때에 그런 말로 소우를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나중으로 미뤄둬야 했다.
'하지만... 아까 그 일은 뭐라고 변명해야 하는 거지?'
민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소우는 민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더 이상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해서 기분이 착잡하기까지 했다.
"이번......"
소우가 입을 열자, 민하는 흠칫 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이유를 알고 마음을 달랬으니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KMC에서 연주할 곡의 몇 마디를 내가 조금 바꿔봤어. 이따가 연주해보자."
"그래."
건과 현욱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지만 민하는 긴장한 상태로 입안에 들어있는 밥을 꾹꾹 씹었다.
소우가 입만 열면 긴장이 되는 현상은 연습할 때에도, 다음 날 스케줄을 실행할 때에도,
돌아와서 저녁을 먹을 때에도 계속 되었다.
민하가 자기에게 말을 걸던, 말던 소우는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민하는 자기의 감정을 소우에게 걸릴까 노심초사였다.
소우보다도 의외로 예리한 건우에게 걸리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차라리 건우에게는 전부 털어놔버릴까도 했지만, 자기 누나라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건우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에스텔과 이반이 찾아와 인사를 하고, 앤드류가 찾아오고, 연습을 하고...
여차저차 소우에 대한 감정을 숨겨가며 며칠을 보내던 민하가 건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은 가인이 집으로 찾아온 후였다.
앤드류에 대한 건의 반응은 단순히 건이 자기보다 잘생긴 것 같은 남자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넘어갔다.
건은 원래 외국인이나 잘생긴 남자, 잘난 남자, 똑똑한 남자를 싫어하는데,
앤드류는 그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가인이 왔을 때는 아니었다.
건은 기본적으로 여자라면 아무리 못 생겨도, 또는 아무리 성격이 안 좋아도 친절하게 대하곤 했다.
그건 건의 몸에 배인 습성이었고, 어지간해선 바꿀 수 없는 오랜 버릇이었다.
그런 건이 가인에겐 친절하지 않았다.
가인은 예쁘고, 게다가 착하기까지 하다.
너무 맹랑해서 보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하지도 않고, 진한 화장이나 심한 스킨쉽으로
거부감이 들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건은 가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눈에 보일 정도로 싫어하는 것을 티냈다.
몇 일 전까지만 해도 민하는 그런 건의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인이 왔을 때 민하는 건과 똑같이 행동을 할 뻔했다.
가인이 소우의 옆에 앉는 것도, 소우에게 말을 거는 것도, 나아가 소우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싫었다.
가인에게 다정하게(사실 전혀 다정하지 않지만, 민하와 건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대하는 소우의 태도를 보면,
소우가 여자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하고, 기분이 나빴다.
민하는 소우도 여자, 가인도 여자인데 가인에게 질투를 하며, 속으로 오지 말라고 주문을 외우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웃다가 문득 가인을 대하는 건의 행동이 떠올랐다.
건과 현욱은 놀고 오겠다며 나가버려서 그 자리에 없었지만, 건이 지금까지 가인에게 했던 그 모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전부 떠올라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건이 녀석... 가인이를 질투했던 거구나. 내가 지금 가인이를 질투하는 것처럼...'
그렇다는 것은...
'건이가 소우를 좋아하는 건가? 설마 건이도 소우가 여자라는 걸 알고 있나?'
만약 건이 소우가 여자라는 걸 알고 있다면, 소우를 좋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니. 건이가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지는 않아. 알게 된다면 분명 다른 사람에게 말을 했을 거야.
그렇다면 건이 녀석. 남자인데도 소우를 좋아한다는 건가? 저 녀석, 고백은 했나?'
민하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건은 한 여자를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겨서 한 여자에게 정착을 하지 못했고, 자기를 좋아한다는 여자들도
전부 한 순간만 재미있게 놀다가 헤어질 여자들로만 생각해 버렸다.
여자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서슴없이 현욱과 민하에게 말했고,
때로는 여자들의 무척 아픈 부분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떠벌리고 다닌 건이다.
건이라면 설령 남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여기저기에 말하고 다녔을 것이 뻔하다.
그런 건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감정을 조심스레 숨기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주위에 다가오는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5화
함께 심야 영화를 보기로 한 현욱이 졸리다며 먼저 숙소로 돌아가 버리고,
혼자 심야 영화를 본 건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은 깜깜했다.
어두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린 건은 눈부신 빛 속에서 소우를 발견했다.
소우는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흐트러진 소우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신발을 벗었다.
"늦었네. 현욱이랑 같이 나가더니..."
소우의 중얼거림에 건은 화들짝 놀랐다.
소우가 소파에 기대어 자고 있는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얼어붙은 건은 고개를 푸르르 털고는 약간은 소란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현욱이 새끼가 졸리다고 먼저 들어가더라고..."
"그래."
"넌 왜 여기 나와있냐? 안 자냐?"
"이번에 연습하는 곡을 좀 정리해보고 있었어."
"그 정도면 완벽한 거 아냐?"
"조금 더 생각하면 더 어울리는 연주를 찾을 수 있을 거야."
"헤에..."
건은 소우가 옆에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소우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 바람에 소파가 흔들려 소우가 잠깐 눈을 떴다.
문득 보인 소우의 눈동자가 무척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뭐 했냐?"
"가인이가 찾아왔었어."
건이 미간을 좁혔다.
가인, 가인, 가인...
아무튼 가인이 문제다.
물론 가인은 건을 위해 바쁜 시간을 죽여가며 여진의 뒤를 캐서 오명을 벗겨주었고, 좋은 여자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가인이 소우와 가까워지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저번에 가인 때문에 소우와 싸우고 말하지 않은 기억 때문에, 건은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며 입을 꾹 다물었다.
건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소우는 대답 없는 건에게 뭐라 하지 않고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흘끗 소우를 쳐다보니 입술이 예쁘다.
원래 입술이 도톰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소우는 무척 입술이 얇은데도 예쁘다.
'뭐 어때. 얜 여자가 아니라 남자잖아.'
왜 얇은데도 좋아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는데 변명처럼 말해본다.
입술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심코 손을 올려 소우의 입가로 가져가다가 입술에 닿기 전 정신을 차리고 얼른 손을 내렸다.
소우가 눈을 감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 모습을 봤더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하지만...'
건은 다시 한 번 흘끗 소우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소우의 얼굴선은 무척 예뻤다.
이마에서 코끝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는 선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 그린 듯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역시... 한 번 만져보고 싶다.'
사실 만져보는 것보단 입술을 맞대어보고 싶지만 그건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생각을 하다보면, 아까처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실행에 옮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 달콤하겠지?'
건은 자기가 이런 닭살 돋는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어쨌든 소우의 입술은 달콤해 보였다.
달착지근한 사탕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그 입술에 혀를 댄다면...
'무슨 맛일까?'
이젠 아주 본격적으로 무슨 맛일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상큼한 딸기 맛, 부드러운 바나나 맛, 향긋한 복숭아 맛, 톡 쏘는 레몬 맛...
별의 별 과일을 다 떠올리다가 군침만 꿀꺽 삼키곤 입을 열었다.
"야."
"......"
소우는 대답을 하지 않는 대신에 크고 서늘한 눈을 뜨고 건을 돌아보았다.
건은 소우가 눈을 뜰 줄 몰랐기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는 주춤했다.
덩치 큰 건이 자기보다 작은 소우의 눈빛만으로 놀라는 모습은 충분히 웃기는 모습인데도 소우는 무표정했다.
"넌 안 졸리냐?"
"응."
"눈은 졸려 보이는데?"
"아아. 눈이 좀 피곤하긴 하네."
"너 놀이공원 가본 적은 있냐?"
"놀이공원이라..."
소우는 건의 말에 잠깐 기억을 되돌려야 했다.
놀이공원이라면 대부분 가족들과 즐거운 분위기로 가서 놀이기구들을 타고, 생기발랄한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오는 그런 장소를 말하지만
소우에게 있어서 놀이공원은 색다른 공연 장소였다.
어릴 적, 소우의 아버지는 놀이 공원에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몇 번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땐, 어머니, 강우, 건우까지 함께였지만, 가족들과 놀이기구를 타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무대 뒤에서 아버지를 챙겨주고, 아버지의 공연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바빴기 때문이다.
그 후, 사고를 당한 아버지가 자살을 하고,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실 때까지
소우는 놀이공원이라는 곳에 가서 즐길 만한 기분이 아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생활이 좀 안정된 뒤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문화 탐방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놀이공원에 갈 새가 없었다.
앤드류나 에스텔이 몇 번 디즈니랜드에 가자고 하긴 했지만 소우는 늘 고개를 저었다.
놀이 공원엘 가면 아버지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지만, 그 때의 모습을 되새기는 것은 가슴이 아파서 싫었다.
"없어."
"왜 안 가봤는데?"
"아버지가 생각나서..."
"음..."
소우의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것을 아는 건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잠깐 입술을 씹다가 말했다.
"내일 갈까?"
"스케줄이 밤 9시까지란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
"끝나고 가면 되지. 야간개장은 괜히 있는 줄 아냐?"
"됐어. 별로 가고 싶지 않아."
"가자, 가자."
"싫어."
"가자!"
"싫어."
"가자!"
"싫어."
무의미한 말다툼이 계속 되고, 결국 건이 두 손을 들었다.
건은 소우가 놀이공원을 싫어하는 이유를 자세히 듣고 싶었다.
왜 아버지가 떠오르는 건지, 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이 왜 나쁜 건지 전부 알고 싶었지만,
아버지란 말을 입에 올릴 때, 잠시나마 평소보다 더 차갑게 변한 소우의 표정을 보고는 묻는 것을 관뒀다.
소우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을 괴로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실에서 자기엔 쌀쌀한 날씨지만 굳이 올라가기 싫어서 몸을 웅크리고 새근새근 자는 건의 몸에
살며시 두터운 담요가 덮어졌다.
혹시라도 건이 소파에서 잠들었을까 싶어 담요를 들고 내려온 소우는 '역시...'라는 생각을 하며
건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밤이 지났다.
촬영을 하는 내내, 건은 벙실벙실이었다.
현욱이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거냐며 물어봐도 건은 그저
"븅신."
이라 중얼거릴 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치이. 묻는 것도 븅신이냐?"
건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자, 팩 토라진 현욱이 툴툴대며 민하에게 쪼르르 달려가,
건을 자극하기 위해 괜히 건을 손가락질하며 소근거렸지만, 건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벙실벙실 웃으며 이따금씩 애정이 가득 찬 눈으로 소우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건의 모습에 민하는 씁쓸히 웃었다.
'소우와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이번에 KMC에 나가신다면서요? 자신 있으신가 보죠?"
한 쪽 귀로 현욱의 말을 들으며 멀거니 소우와 건을 번갈아 쳐다보던 민하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스머프 멤버 중에 한 명일 것이다.
민하는 그냥 무시하려 애쓰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관두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1년 쉬다가 돌아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 선배님들 생각해서 하는 얘기입니다. 전부 실력이 좋은 가수들만 나올 텐데, 원로 가수 OMG가 나갔다가
입상도 못하면 그게 웬 망신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관두실 수 있을 때, 얼른 관두세요.
어차피 OMG는 이소우 선배 없으면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그룹이잖아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그만해, 한태인!!"
민하는 자기는 아무 말 안 했는데도 누군가가 적절한 말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다가, 현욱이 옆에 앉아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현욱은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태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현욱이 귀염성 있고, 누구에게나 웃어주는 얼굴이긴 하지만, 어렸을 적 고아원에서 살며 거친 사람들 사이에서
굴러먹기도 참 많이 굴러먹었기 때문에, 태인 정도는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는 강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태인은 건이 좀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안심을 하고는
빙글빙글 웃으며 현욱에게 말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요? 노래 작곡도 전부 소우 선배가 하고, 이런저런 지도도 소우 선배가 하는 거 아니었어요?
솔직히 전 선배들이 작곡이나 제대로 한 건지 의심스럽습니다. 소우 선배가 다 해준 거 가지고, 괜히 선배들 이름
갖다 붙인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셨는데, 이번이라고 다르라는 법은 없잖아요."
"너..."
현욱이 입술을 깨물며 태인에게 한 방 먹이려는데, 민하가 먼저 그 앞을 막았다.
민하는 현욱이 태인의 도발에 넘어가서 일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태인은 현욱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네가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 라는 표정이었다.
"그만 해라, 한태인."
민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태인은 조롱하듯 민하와 현욱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기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씩씩대며 스머프를 노려보던 현욱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말려줘서 고마워, 민하야."
"고맙긴... 주먹 쓰지 마. 저런 놈들한테는 네 주먹이 아깝다."
"응."
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머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스머프가 의도했던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방송이 끝났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려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건이 말했다.
"야, 이소우. 어제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래."
소우가 간단하게 답하곤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난 건이와 약속이 있어서 여기서 헤어져야겠어. 다들 먼저 들어가서 기다려."
"약속? 어디 가는데? 재미있는데 가는 거면 나도 데리고 가!"
현욱이 끼어 들자 건이 미간을 좁혔다.
"저리 가, 최현욱. 오늘은 개소우가 나에게만 특별 저녁을 사주기로 했다고!"
"뭐어?! 정말이야, 소우야?"
"그런 약속 한 기억..."
"있지. 으흐흐흐흐."
건이 소우의 말을 끊고 대신 답하며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냈다.
소우는 뭐라 말하려다가 관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흐응."
현욱이 섭섭하단 표정을 지었지만 소우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고,
건은 벙실벙실 웃으며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주차장 구석에 세워둔 오토바이로 향했다.
"오토바이는 언제 세워둔 거야?"
소우가 건의 뒤에 타며 물었다.
"예전에 세워두고 깜빡했었지. 빨리 달릴 거니까 안 떨어지려면 꽉 잡아라. 혹시 빨리 달리는 거 무섭냐?"
"시끄러."
소우는 건이 건네준 헬멧을 쓰고 뒤로 체중을 실었다.
저번처럼 소우가 자기의 허리를 꽈악 안아주길 바랬던 건은 소우의 몸이 전혀 닿지 않자 투덜거리며 시동을 걸었다.
역시 건우와 소우는 특별한 사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에 건을 건우로 알았던 소우는 다정하게 말하며 건우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었기 때문이다.
마치 연인 같은 행동이었고, 그 후의 건우의 행동들도 전부 소우에 대한 애정 때문으로 인한 행동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요새 건우의 태도다.
건우는 요새 건이 소우를 건드려도 별 말 하지 않고, 오늘도 소우와 둘이 다른 곳엘 간다는데 특별히 시동을 걸지도 않았다.
'헤어졌나?'
하지만 헤어졌다고 생각하기엔 두 사람의 태도가 너무 담담했다.
소우야, 원래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더라도, 소우에게 막대한 애정을 품은 듯 보였던 건우는
조금이라도 어색해하거나 슬픈 모습을 보였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하긴... 건우 새끼가 여전히 소우에게 잘하는 걸 보면 헤어진 건 아닌 것 같고... 대체 둘은 무슨 사이인 거야?'
건우와 소우의 사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한강에 도착했다.
아직은 꽤 찬바람이 부는 밤인데도 한강 둔치엔 많은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앉아있거나 주위를 걷고 있었다.
어스름한 가로등의 불빛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우와 건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지 않아,
그들은 둘이 OMG의 멤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지나쳤다.
소우가 먼저 내리고, 건이 내렸다.
건이 헬멧을 벗자, 소우가 손을 올려 눌린 건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소우로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인데, 건은 바짝 긴장을 해서는 숨을 죽이고 소우의 손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
다 정돈을 하고 손을 제자리로 돌려보낸 소우가 주위를 한 번 휘이 둘러보더니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볼 일이 뭐야?"
"저기 가자."
건이 가리킨 곳은 놀이터였다.
연인들은 어쩐 일인지 으슥한 곳을 찾기 때문에, 불빛이 밝은 놀이터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밝은 대낮에 아이들이 가득 찬 놀이터는 꿈과 희망이 가득한 발랄한 장소겠지만,
아무리 가로등 불빛이 밝히고 있어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놀이터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고, 시소가 삐걱대며 오르내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소우는 어째서 건이 놀이터 따위엘 가자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건이 씩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건들거리며 소우의 뒤를 따랐다.
놀이터는 잘 꾸며져 있진 않았다.
결코 넓지 않은 모래밭, 별로 튼튼해 보이지 않는 그네, 요 몇 년 간 관리가 전혀 없었던 듯한 시소와 철봉,
위험해 보이는 정글짐과 녹이 잔뜩 쓸어버린 구름다리...
"대체 여긴 왜...."
"놀이공원."
소우의 말을 끊으며 건이 답했다.
소우는 건의 뜬금없는 대답보다도 묘하게 즐거운 듯한 건의 목소리가 더 의아했다.
'건이가 놀이터를 좋아하는 그런 성격이었나? 미처 몰랐군.'
그러고 보니, 건의 표정이 무척 밝다.
하늘에 뜬 달보다도 밝고, 주위의 가로등 불빛보다 밝다.
"너 바이킹 타봤냐?"
".......아니."
"그래? 그럼 태워주지."
"이봐, 선우건. 난 도무지..."
이번에도 건은 소우의 말을 들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소우의 팔을 질질 끌어 그네로 데려갔을 뿐이다.
소우는 정말이지, 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떨결에 건에게 끌려와 그네에 털썩 앉혀진 소우는 곧 그네가 움직이는 것을 알고는 얼른 줄을 잡았다.
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꽉 잡아라. 잡지 않으면 날아가 버릴걸. 넌 쬐그매서 더 멀리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구."
"선우....... 으앗!"
건을 부르려던 소우는 건이 갑자기 세게 미는 통에 원치 않았던 비명을 질렀다.
건은 그네를 타는 소우보다 훨씬 즐거운 표정으로 그네를 밀었다.
건의 힘이 보통이 아니기에, 소우가 특별히 발을 구르지 않아도 그네는 높이 올라갔다.
그래봐야 애들 타는 놀이기구가 얼마나 무섭겠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무서워서 소우는 줄을 꽉 잡았다.
대체 건이 왜 저러는 건지, 놀이터엔 왜 데리고 온 건지...
고민을 하던 소우의 눈에 하늘이 보였고, 불이 밝혀진 건물이 보였고, 강이 보였고,
땅이 보였고, 아름답게 빛나는 다리가 보였고, 다시 하늘이 보였다.
서울의 밤하늘은 달빛만 겨우 보일 정도로 지저분하지만, 그래도 회청빛의 공기를 보는 느낌이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게다가 강물에 비치는 한강 다리의 불빛은 무척 아름다웠고, 강물이 아름다워서인지 연인들의 모습도 무척 보기 좋았다.
소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생각했다.
'뭐, 이것도 괜찮은데?'
건은 힘들지도 않은지 한참동안 그네를 밀어줬고, 소우는 줄을 꽉 붙잡고 눈에 들어오는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곧 그네가 점점 힘을 잃고 아래로 내려갔다.
건이 말했다.
"이게 바이킹이다."
"너..."
"회전그네는?"
"건아."
"태워주지."
건이 소우를 그네에 앉힌 채, 갑자기 그네를 뱅글뱅글 돌리기 시작했다.
줄이 꼬이고 꼬여서 소우의 몸이 굽혀질 정도로 꼬였을 때, 건이 그네를 쓰윽 밀고 잡고 있던 줄을 놓아줬다.
그네가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어지럼증이 느껴질 정도로 빙글빙글 돌았다.
겨우 그네가 멈췄을 때, 소우는 잠시 가만히 앉아있었다. 건이 물었다.
"한 번 더?"
"사양한다."
"그럼 이번엔..."
"그만해도 돼!"
"원래 놀이공원 오면 뽕을 뺄 때까지 노는 거다."
"그래. 충분해."
"아니. 넌 아직 놀이공원의 최대 묘미인 88열차를 못 탔잖냐."
"너 정........."
건은 이번에도 소우의 말을 듣지 않고, 그네에 앉아있는 소우를 번쩍 안아들었다.
소우는 새삼 건의 힘이 보통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소우가 작은 키도 아닐뿐더러, 인공 피부를 몸에 붙여서 무게가 꽤 나갈 텐 데도 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우를 번쩍 안아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소우는 건이 힘이 다해 떨어뜨리게 되면 얼른 낙법을 써서 착지할 준비를 하며 긴장하고 있었지만
건은 소우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3분 이상 그렇게 소우를 위로 들고 왔다갔다하다가 조심스레 소우를 아래에 내려놓고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는 것이 아닌가.
건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좁히고, 쉽게 볼 수 없는 건의 머리 꼭대기만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데,
건이 자기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타."
"왜?"
"놀이공원의 마지막 관람차다. 지금까지 탔으니까 마지막은 멋지게 장식해야 하지 않겠냐?"
"이봐, 선우건. 난 도대체..."
"이해하라고 하는 짓 아니다. 그냥 놀이공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너... 후우."
소우는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되어 건의 목위로 올라가 목마를 탔다.
소우가 잘 앉는지 확인한 건은 소우의 다리를 단단히 잡고는 벌떡 일어났다.
쑤욱 시야가 높아짐과 함께 땅이 멀어졌고, 보이지 않던 먼 곳이 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높아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소우는 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위로 들고 있다가 가만히 건의 회색빛 머리 위에 얹어놓았다.
건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처음엔 너무 높아서 불안하던 소우는 꽤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던 근육을 풀었다.
건이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이 좋았고, 차갑지만 강의 냄새가 섞여있는 바람이 좋았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엔돌핀이 솟아나다 못해 넘쳐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소우는 소리를 치고 싶었다.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이 왜 소리를 질러대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무서워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에서 느끼는 쾌감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건의 키가 30미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네가 몇 십 미터 위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소우는 무척 즐거웠고, 그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감는데, 건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낮게 깔렸다.
"네가 놀이공원에 가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놀이공원 갈 때는 오늘을 생각해라.
내가 태워준 놀이기구들 말이야. 좀 허접해 보여도 꽤 재미있지 않았냐?"
"그래. 꽤 재미있었다."
"멀리까지 보이지?"
"그럭저럭... 고만고만한 키에 얼마나 더 멀리 보이겠어."
"쳇! 네놈보다는 훨씬 크다고!"
"그래, 그래."
"열라 뿌옇지만, 그래도 하늘 예쁘지?"
"의외로 감상적이군."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지."
"아까 내가 하던 말을 다 무시하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로는 생각되지 않는군, 그래."
"잘나셨네, 쳇!"
"그래."
"그래는 무슨 놈의 그래냐? 아무튼... 으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군."
"흥! 너 그건 아냐?"
"뭘?"
"그래. 모르셨겠지."
"무슨 말인지나 말해보고 결정을 짓는 게 어때?"
"가가멜이 스머프를 끓여먹는다고 했지?"
"그래."
"사실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는 건, 끓여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흠..."
"정말이라고!!"
"그랬던가?"
"그래! 바보 같은 녀석. 그런 것도 모르기는..."
"그럼 잡아다 금으로 만들어 볼까?"
"진심이냐?"
"그래."
"가끔 넌 정말 이상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열라 썰렁한 말을 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뻔뻔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는 건 아냐?"
"어쨌든... 고맙다, 선우건."
"너를 뻔뻔하다고 말해준 게 그렇게 고맙냐?"
"오늘의 놀이공원."
"헤헷. 이거? 공짜는 아니라구!"
"그러시겠지."
"비싸게 받아먹을 거니까 각오해둬!"
"그래."
건은 기분이 좋았다.
사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소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소우를 태우고 걷는 느낌은 하늘을 걷는 것처럼 둥실둥실 뜨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리 위에 얹어진 소우의 손도 좋았다.
계속 이렇게 소우를 태운 채로 걸어다니고 싶었지만, 자제해야겠단 생각에 가만히 몸을 굽혀 소우를 내려놓았다.
땅에 내려선 소우가 건에게 돌아서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치러야할 대가는 뭐지?"
사실 비싼 밥을 사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엄청 고급 요리를 사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밤하늘이 가득 담긴 소우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입이 저절로 움직여 경악할 만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한 번만... 안아주라. 아주 꽈악..."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파란만장 이중생활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6화
찌푸려지는 소우의 얼굴을 보며, 건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숨을 멈췄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안아달라니...
아무리 잘 봐줘도 소우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말이 아닌가.
건은 이런 일로 소우가 자기를 피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꾹 다물고 단단히 얼어붙은 채 소우를 쳐다보는데,
소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별로 비싼 대가인 것 같지는 않은데?"
소우는 건의 요구가 이상했다.
외국에 오랜 기간 나가있던 소우에게 포옹 정도의 스킨쉽은 어려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기에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한 건이 그저 포옹 정도로 넘어가려 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건은 비싼 레스토랑 가서 가장 비싼 요리를 사달라고 할,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소우는 정말 사람이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건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소우가 다가오자마자 아찔한 기분이 들어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소우가 말했다.
"안아달라면서?"
"아아. 그, 그게..."
소우는 다시 한 걸음 건에게 다가갔고, 건은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건은 소우를 무척 안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떨리고, 흥분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소우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가만히 건을 응시하다가 다시 한 걸음 다가가서 건이 뒤로 물러날 새도 없이
건의 몸에 팔을 둘렀다.
소우의 머리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샴푸 냄새와 부드러운 로션 향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따뜻함이 전해져 오고, 감싸안은 소우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건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다가 조심스레 손을 올려 소우의 허리를 감쌌다.
남자치고는 잘록한 허리가 한 팔에 들어오자, 건은 그대로 소우를 눕혀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입술에 키스하고, 목에 키스를 하고, 그리고 또....
'제기랄! 관둬, 선우건. 관두라고!!'
고개를 저으며 그냥 그 순간에 만족하려 애썼다.
늘 꿈꿔오던 이 순간.
소우가 먼저 자기를 안아주는 것을 얼마나 소원했던가.
그런데 바보처럼 또 다른 것을 바라고 있는 자신을 질책하며 소우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밤을 새고 싶었다.
이 상태라면 밤이 문제가 아니라 며칠이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건이 자꾸 거칠어지려는 숨을 참으며 소우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동안,
건을 안은 소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장난이라고만 생각했다.
건이 놀이공원이라며 이것저것 태워준 것은 소우를 위한 행동일지 몰라도,
그 대가로 한 번 안아달라고 한 것은 뭔가 장난을 치기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오랜만에 즐겁게 놀았으니 장난에 한 번 넘어가 주자는 심정으로 건을 안아주었다.
건의 몸이 생각보다 커서 좀 버겁긴 했지만 그렇게 안고 있는 것이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기에 건을 안았다.
건이 장난을 시도하거나 그만 안자고 할 때까지 안아줄 생각이었기에 그렇게 가만히 안고 있었다.
건이 사용하는 스킨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고, 쿵쿵거리는 건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심장이 다른 사람보다 빨리 뛰는 것 같아,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건의 손이 올라가 허리를 감싸 안았고, 건이 장난을 치려 한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장난은커녕, 연인에게 그러하듯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는 것이 아닌가.
소우는 미간을 좁히며 건에게 안겨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느껴지는 건의 숨결, 쿵쿵거리며 들려오는 건의 불규칙한 심장 소리,
점점 힘이 들어가는 허리를 감은 팔, 후각을 자극하는 은은한 스킨 향기.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고, 간간이 들려오던 사람들의 목소리라던가, 자동차 엔진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러지?'
이제 슬슬 건이 놓아줄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소우의 허리를 안은 건의 팔에선 힘이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안겨있는 동안 소우는 자기의 심장도 건의 심장만큼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소우는 대가도 대가지만 정말 떨어져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심스레 건을 밀어내려는데, 건이 먼저 팔에서 힘을 뺐다.
아니,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건도, 소우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란 듯, 그러면서도 열에 들뜬 표정.
소우는 금방 평소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건은 여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 있었다.
몸에 아직도 소우의 온기가, 코에 아직도 소우의 향기가 남아있어서, 그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만족해?"
소우가 물었다.
안은 적 없다는 듯 차가운 태도였지만, 건은 그걸로 가슴이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소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리지도 않을 만큼 머릿속이 어지러웠던 것이다.
"아, 으응."
의외로 순순히 넘어가는 건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소우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돌아가자."
"KMC 일정이 나왔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KMC에서 부를 곡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주 후면 KMC가 시작이다.
건우가 종이 한 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KMC는 일주일간 하는데, 스머프는 이틀째에 하고, 우리는 닷새 후에 해."
"왜 그렇게 늦게 하는 건데?"
"뺑뺑이 돌린 거니까 나한테 물어도 뭐라 해줄 말이 없네."
건우가 넉살 좋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건이 팔짱을 끼며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턱을 치켜들고 앞에 앉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말했다.
"댁들에 왜 여기에 있는 건데?"
"KMC 시작하기 전에 대상을 기원하는 디너 파티라도 해야하지 않겠어?"
앤드류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디너 파티는, 무슨 놈의 디너 파티냐."
"그래서 호텔 뷔페를 예약해뒀어. 우리들만 들어갈 수 있도록..."
"좋았어, 친구."
뷔페라는 말에 건이 활짝 웃으며 앤드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앤드류가 씩 웃으며 건의 손에 악수를 했다.
"진작 먹을 걸로 낚을 걸 그랬나 보지? 괜히 몇 달 동안 친해지기 위해 애썼잖아."
"훗. 내가 원래 이해하기 힘든 성격이지."
"웃기고 있네. 먹을 거만 던져주면 덥석 무는 주제에..."
건우가 중얼거리며 펼쳐놓았던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뷔페에 맛있는 건 많아?"
현욱이 벌써부터 침이라도 질질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한국에선 유명한 뷔페라고 하더군.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응, 응. 좋아!"
현욱은 처음 앤드류가 한국에 왔을 때 보였던 적의는 어디로 간 건지,
꼬리를 살랑살랑 치며 앤드류의 뒤를 따랐고, 그 뒤를 역시나 꼬리를 살랑살랑치는 건이 따라나섰다.
그런 두 사람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민하도, 앞의 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따라 나섰다.
건우가 피식 웃었다.
"저 세 사람은 정말 다르거든? 아무리 봐도 절대로 다른 성격인데 말이야. 먹을 것에 약하다는 건 놀라울 정도로 똑같단 말이야."
"그러게."
소우가 중얼거리며 일어서자, 에스텔이 얼른 옆으로 다가가 소우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건우가 물었다.
"가인이 불러도 돼?"
"마음대로..."
요사이 건우는 가인과 자주 연락을 했다.
건우는 소우를 정말 좋아하는 듯한 가인이 안타깝게 여겨졌고, 나중에 소우가 여자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어느 정도 그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가인과 조금씩 친분을 트고 있었다.
그래도 친한 사이인 것이 위로를 해주는데 더 편하기 때문이다.
건우를 무서워하던 가인은 건우가 겉보기와는 달리 순수하고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스스럼없이 건우를 대하기 시작했고, 건우와 가인은 남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친해졌다.
소우는 건우가 누구랑 친하게 지내던 별로 상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건우와 가인이 연락을 자주 하고, 자주 만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밖에 나가 차를 탔을 때, 현욱이 말했다.
"나 예진이 불렀는데... 괜찮은 거지?"
"어차피 앤드류가 쏘는 건데, 당연히 괜찮은 거 아니냐?"
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앤드류는 "쏜다"라는 말의 뜻을 묻기 위해 소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방해하지 마!"라는 에스텔의 눈빛 신호를 받고는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앞을 보았다.
뒷좌석에 앉은 에스텔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새 어때?
-뭐가?
-OMG와의 사이.
-예전과 다름없어.
-헤에. 그래?
-응.
-뭐랄까. 음... 심장이 문득 불규칙하게 두근거린다던가 하는 일도 없고?
소우는 잠시 건과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지만, 그 때 이후론 그런 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없어.
-이상하네.
-뭐가?
-아아. 아무 것도 아니야. 후후. 그런데 가인이라는 애는 누구야? 건우 애인?
-아니야. 소우 좋아하는 애야.
대화를 듣던 건우가 끼어들었다.
-헤에. 여자?
-응. 소우가 남자인 줄 알고 무지 좋아하는 앤데, 굉장히 착하고 여린 애야.
나중에 소우가 여자였다는 거 알게 되면 상처 받을까봐 요새 내가 놀아주는 중이지.
내가 원래 인간성 하나는 죽이잖아.
-바보.
-갑자기 왜 바보란 말이 튀어나오는 건데?
-그거 알아?
-뭐가?
-두 달 남았어.
-뭐....
뭐가 두 달이냐고 물으려던 건우는, 전에 에스텔이 소우가 건을 좋아하는 데까지 1년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소우는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는데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는 화젯거리로 얘기를 하면 무슨 얘기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아예 무시하는 태도는 놀라운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소우의 성격을 아는 그들은 소우가 듣고 있는데도
스스럼없이 계속해서 대화를 했다.
-흥!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고... 이번엔 그 여자의 예감이라는 게 틀릴 것 같은데?
-그럴까?
-그래, 에스텔. 세상이 언제나 네가 원하는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라고!
의기양양한 건우의 표정을 보며 에스텔은 입을 삐죽거렸다.
차는 가는 길에 가인의 집 근처에 들러 가인을 태웠다.
즐거운 얼굴로 차에 들어서던 가인은 소우의 팔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앉아있는 에스텔의 모습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고, 그런 가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에스텔은 더욱 소우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인의 질투심을 유발시켰다.
"저... 안녕하세요."
가인이 소우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인사했지만, 소우는 무심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옆에서 자꾸 말을 거는 에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스텔은 몹시 예뻤고, 늘씬하게 잘 빠진데다가 옷도 명품으로만 쫘악 차려입었기 때문에,
아무리 모델인 가인이더라도 주눅이 드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환하게 웃는 에스텔의 미소는 무척 매력적이어서, 저 정도의 여자라면 주위에 관심을 갖지 않는 소우더라도
한 번쯤 돌아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텔은 가인을 놀리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지만 옆에 앉아있던 건우가 에스텔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아무튼 장난은...
이라고 뭐라 하자, 더 이상 심한 스킨쉽은 하지 않았다.
사실 에스텔은 가인이 보는 앞에서 소우에게 입이라도 맞출 생각이었던 것이다.
호텔 앞엔 예진이 나와있었다.
"헤헤. 예진아!"
현욱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예진에게 다가가 얼른 예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건이 중얼거렸다.
"저 둘을 보면, 누가 여자인지 모르겠다니까..."
뷔페는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차려진 듯 했다.
앤드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안내한 종업원에게 팁을 잔뜩 주고 돌아섰다.
"자아. 다들 맛있게 먹어."
사실 앤드류가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소우와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우는 내꺼야! 건드리지 마!"라고 말하는 듯한 에스텔의 눈빛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혼자 남겨진 이반에게로 갔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접시에 음식을 옮겨 담던 이반이 "여어."하고 말하며 아는 척을 했다.
-소우랑은 잘 돼가?
-그래 보여?
-너무 어려운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네. 소우만한 여자라면 너무 힘들지.
-네 부인이 아니라면 좀 쉬웠을 거다. 부인 간수 좀 잘 하지?
-그 전에 네 동생 아니었던가? 대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기에 남편인 나는 팽개쳐두고,
소우에게 딱 달라붙어서 시시덕대는 거냐.
-하하. 남편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모양이지.
-됐네. 그건 그렇고, 너 회사 일은 어떻게 할거야? 마냥 이곳에 있을 수만은 없잖아.
최근 좀 한가해서 한국에 왔다고는 해도... 아무런 진전 없이 돌아가게 생겼네.
-한국에 지점을 하나 만들까 생각 중이다.
-미쳤군. 여자 때문에 사업 하나 말아먹으려는 거냐?
-글쎄... 소우만 얻을 수 있다면 사업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굉장하네. 생긴 것 답게 로맨티스트야.
-칭찬으로 듣지.
-칭찬이다.
두 사람이 영어로 한참 떠드는 동안, 건은 먹을 것을 집어먹느라, 소우의 옆에 에스텔이 딱 달라붙어 있는 것도,
그 옆에 가인이 서서 질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비단 건우뿐이 아니었다.
예진을 부른 현욱까지도 예진에게 신경도 못 쓰고 죽자고 접시에 음식을 덜었고, 민하 역시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예진은 현욱이 자기를 내팽개쳤지만 그런 현욱의 성격을 이해하는지라 옆에서 함께 마구 음식을 덜었다.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우의 옆에 앉아있는 에스텔은 가인이 귀여웠다.
가인이 꽤 키가 큰 편이기는 하지만, 미국인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게 생긴 외모가 귀여웠고,
새까만 눈동자도 귀여웠다.
게다가 에스텔이 소우에게 조금 진한 스킨쉽을 하면 싸악 굳어지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서 자구 소우에게 달라붙게 됐다.
-소우야. 저 애, 정말 귀엽다.
-너무 놀리지 마.
-후후. 하지만 정말 너무너무 귀여운 걸? 내가 남자였더라면 분명 저런 여자 애랑 사귀었을 거야. 소우도 그랬을 거지? 응? 후후.
-...........
-뚱한 표정 짓기는...
가인은 에스텔이 자기 칭찬을 하는 줄도 모르고, 거의 소우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귓속말을 하는 모습에
무척 불쾌해져서 입술을 꾹 다물고 에스텔을 노려봤다.
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들을 지켜봤다.
"저... 소우 오빠!!"
계속 지켜보기만 하던 가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에스텔은 눈을 빛내며 가인을 쳐다봤고, 소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인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쏠리자 가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일단 에스텔과 소우가 떨어지게 하기 위해 소우를 부른 것이긴 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을 붉히고 머뭇거리는 가인의 귀에 소우의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
뭔가 말할 거리가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가인은 건우가 접시를 들어 가리키는 걸 보고는
얼른 소우에게 말했다.
"저녁... 안 드세요?"
"먹어야지."
"그럼... 같이 뜨러 가요."
"그럴까?"
소우가 무심히 대꾸하며 일어서려는데, 에스텔이 소우의 팔을 잡아 당겼다.
덕분에 소우는 반쯤 허리를 굽힌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그런 소우의 목에 매달리듯 포즈를 취한 에스텔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해. 난 미국에서 와서 이곳 문화를 잘 모르는데, 나만 놔두고...
-그럼 너도 같이 가.
-아직 먹고 싶지 않아. 너랑 더 얘기하고 싶단 말이야.
에스텔과 하던 얘기라고는 가인에 대한 얘기밖에 없었고, 한국 문화가 어쩌고 해도 어디에서나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는 에스텔이 그런 것 때문에 힘들어할 리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한 번 생떼를 부리기 시작하면 자기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놔주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더 잘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가인에게 말했다.
"가인아. 난 에스텔이랑 좀 더 있어야겠다. 건우랑 함께 가서 저녁 먹어라."
"아..."
소우의 말에 가인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소우와 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차갑게 말하는 소우를 보면 그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소우는 에스텔에게만은 따뜻했고, 특별했다.
하지만 소우의 앞에서 흉하게 우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 꾹 참고 있는데, 건우가 어깨를 꾸욱 누르며 말했다.
"저녁 먹자, 가인아."
건우의 말에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가인에게 건우는 커다란 손을 내밀었고, 건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잠시 손을 쳐다보던 가인은
그것이 손을 잡으라는 표시라는 걸 깨닫고는 얼른 건우의 손을 잡았다.
건우의 손은 무척 단단하고, 거칠었지만, 그 이상으로 따뜻해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가인은 건우를 따라 음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건우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파란만장 이중생활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7화
그 날의 저녁에서 성공적이었던 것은 건, 민하, 현욱과 예진, 그리고 에스텔뿐이었다.
소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앤드류는 뒤로 밀려나서 이반과 재미없는 사업에 대한 대화나 나누었고,
건우는 가인을 챙겨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에스텔은 가인의 귀여운 모습을 보는데서 커다란 재미를 얻었기에,
가인과 헤어지기 전,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는 깔깔깔 웃었다.
가인에게는 그 모습이 자기를 놀리는 것만 같아(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기분이 나빴지만,
천성이 착한지라 "네."라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와 부른 배를 움켜쥐고 침대로 기어 들어간 건은
샤워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동안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안 하는 쪽으로 선택했다.
배가 불러서 잠이 솔솔 오는데, 샤워를 해버리면 이런 나른한 기분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대에 편하게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벽을 타고 소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아."
건은 깜!짝! 놀랐다.
소우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늘 건이 먼저 말을 걸어야 귀찮다는 듯 대꾸를 해주는 대화만 했던 소우이기에 건은 바짝 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긴장해서 "왜?"라고 대답했더니, 잠깐 뜸을 들이곤 소우가 말했다.
"나에게 있어서 너의 의미를 생각해봤다."
"의, 의미?"
"그래."
건은 이전보다 더 긴장을 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서 견딜 수 없었다.
'소우에게 있어서 나의 의미라고?'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소우가 일부러 자기의 의미를 생각해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소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 잠시 공백을 둔 소우가 말했다.
"나에게 있어서 넌 놀이공원이다."
"뭐, 뭐?!"
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했던 건으로서는 기대감이 단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뜬금없는 말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소우의 말에 나쁘지만도 않다는, 아니,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공원에 가면 늘 아버지가 떠올랐지. 그래서 놀이공원에 가는 것이 꺼려졌다. 그런데 이젠 아냐.
놀이공원에 가면 분명 네가 생각날 거고, 네가 태워준 놀이기구들이 떠오를 거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기구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평생 널 떠올리게 되겠지.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넌 놀이공원이다."
"아...하하."
건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모습이던 소우에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 기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너에게 나의 의미는 어떤 거냐?"
이어지는 질문을 예상치 못했던 건은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소우를 좋아한다고만 생각했지, 소우의 의미를 떠올려 본 적은 없었다.
'내게 있어 소우의 의미라...'
소우를 보면 즐겁다. 하지만 가슴이 아플 때도 있기에 소우를 [즐거움]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다.
소우를 사랑한다. 하지만 때로 원망스러울 때도 있기에 [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좀 그렇다.
게다가 그 말은 아직 소우에게 전할 수도 없다.
건이 한참을 고민하는 동안, 소우는 건을 재촉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아서 소우가 잠든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건은 눈을 감은 채로 소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느 곳에 있어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흰 피부, 황금색처럼 보이는 옅은 눈동자와 얄팍한 입술,
무척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듣기 좋은 목소리.
'그래.'
건은 입을 열었다.
"넌 내게 있어 노래다."
"노래라...."
소우는 자고 있지 않았는지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너 때문에 노래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노래를 부르면 네가 생각난다. 네 목소리가 떠오르고...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넌 노래다."
건의 대답을 들으며 소우가 미소를 지었다.
'노래라... 괜찮은데?'
건에게 그렇게 의미 지어진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소우는 건에게 답했다.
"뭐... 나쁘지 않네."
KMC가 오래 남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금방 돌아왔다.
차의 온도를 가장 낮게 낮췄는데도 소우는 더운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공연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KMC가 열린다는 것을 안 이후로 3달 동안, 그들은 열심히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스머프 공연은 어땠대?"
현욱이 물었다.
건우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좋았어."
"어? 건우 너, 가봤던 거야?"
"그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잖냐. 어렵게 표를 구해서 가봤지. 굉장한 무대더군.
엄청난 연습을 한 것 같아. 곡도 무지 좋았고, 무대 역시 굉장히 좋았어.
그 새끼들이 소우에게 한 짓만 아니었더라면 그 놈들 팬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치이..."
현욱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건이 말했다.
"스머프 새끼들은 즐이다. 넌 곧 더 굉장한 무대를 보게 될 걸!"
"그렇게라도 해서 날 너에게 반하게 만들고 싶은 거냐?"
"좀 닥치라고!!"
"크크큭."
건이 정말 지겹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르자, 건우가 웃으며 몸을 뒤로 기댔다.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거야, 나는... 물론 너희들의 노래도 무척 좋지만,
스머프의 노래 또한 아주 좋았어. 한국 가요계가 가지고 있는 틀에서 벗어난 색다른 음악을 창출해냈더군.
꽤 어려운 곡이었음에도 능숙하게 이끌고 가는 실력도 굉장했고 말이야.
아마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을 거야.
그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훨씬 뛰어난 무대를 선보이는 수밖에 없어.
그동안은 스머프를 넘을 만한 이렇다할 무대는 없었거든."
"흥!"
건은 스머프를 칭찬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팩 토라져버렸고, 현욱 역시 건과 같은 표정으로
팩 토라져서는 어서 무대 위에 서기만을 기다렸다.
무대에 선다면 스머프보다 훨씬 멋진 무대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는 곧 KMC 행사장에 도착했고, 참가자들을 위해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들은 자기들이 다루던 악기를 들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건은 그 때 터졌다.
그들이 낑낑대며 짐을 들고 걸어가고 있을 때, 검은 형체 하나가 쓰윽 나타나더니 갑자기 소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거운 것을 든 그들이 "앗!"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칼은 소우의 목을 향해 빛났고, 소우의 것이 분명한 새빨간 선혈이 튀었다.
그리고 검은 형체는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검은 형체를 잡기보다는 무서울 정도로 많이 튀긴 소우의 피에 더 놀라 악기들을 내려놓고 소우에게 다가왔다.
"소우야!!"
건우와 건이 동시에 소우의 이름을 외치며 소우에게 달려들었다.
미간을 좁히고 팔로 목을 감싸듯 서 있는 소우의 모습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이게!!"
건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쩔 줄을 몰라하며 소우의 상처를 살펴보려 소우의 팔에 손을 대었는데...
"건우야. 진정해."
소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건우를 말렸다.
하지만 건우는 진정할 상황이 아니었던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디야, 어디!!"
라고 외치며 다친 곳을 찾고 있었다.
"목을 다치진 않은 모양이네."
민하가 말했다.
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목을 향해 달려들길래 얼른 몸을 틀었지."
날카로운 칼이 박힌 곳은 팔뚝이었다.
팔뚝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름이라 반소매를 입은 소우의 하얀 팔에 대조적인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은
마치 드라큐라 백작의 입가에 묻은 붉은 피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질 급한 건이 얼른 소우의 팔에서 칼을 빼려 달려들자, 건우가 건의 팔을 잡아 당겨 그것을 제지했다.
"왜 그래?! 어서 저걸 빼야지! 독이라도 묻어있으면 어쩌려고!!"
"지금 빼면 피가 분수처럼 쏟아질 거야. 병원에 가서 빼야 돼."
"하지만..."
"선우건! 정신차려! 마구잡이로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빌어먹을!! 저걸 어떻게 그냥 놔두냐고?! 너 같으면 정신 차릴 수 있겠냐?! 피 좀 봐!"
"이 정도면 많이 흐르는 건 아니야. 버틸만 해."
소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팔에 칼이 꽂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였다.
소우의 말에 건우가 눈을 크게 뜨며 잡아먹을 듯 물었다.
"소우 너, 설마... 병원에 안 가려는 건 아니겠지?"
"응. 그거야."
"미쳤어?!"
이번에 소리 지른 것은 건우만이 아니었다.
건, 민하, 현욱이 동시에 입을 맞춘 듯 외쳤지만 소우는 여전히 서늘한 눈으로 자기 팔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다치지 않은 쪽 손으로 흐르는 피를 쓱 닦아냈다.
"어차피 두 번째잖아. 노래 부르고 가도 늦지 않아."
"지금 노래가 문제냐?! 네놈이 죽게 생겼다고!!"
건이 버럭 소리를 치자 소우가 시끄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말했잖아. 노래를 부르고 가도 늦지 않다고..."
"늦어!"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그래. 네놈 잘난 거 알겠는데 말이지!! 병원으로 가! 이딴 KMC인지 뭔지, 상 안 타도 되니까,
병원 가서 치료 받으라고! 열라 핏기도 없게 생긴 새끼가 왜 고집이야!"
"그래, 소우야. 우린 정말 KMC 안 나가도 돼! 이건 내년에도 하는 거잖아. 이대로 노래하면 피가 몇 바가지는 넘게 나오겠어."
현욱이 걱정스러운 듯 소우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이번에 입상하면 우리는 KMC의 1대 수상자가 되는 거야."
"병신아! 네가 이렇게 병신인지 몰랐다. 열라 사리판단 잘 하고, 이기적인 새끼 아니었냐?"
"그래. 이기적이지. 그래서 1대 수상자가 되고 싶은 거야."
소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 몸이니까,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 다들 준비해. 곧 우리 차례일 거야."
"소우야."
민하가 소우를 쳐다봤다. 꽉 쥔 민하의 손에 땀이 맺혔다.
건우도 소우를 말렸지만 소우의 태도는 단호했다. 어떤 말을 해도 소우의 뜻을 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건은 걱정 때문에 안달이 나 소우의 팔을 붙잡았다.
"병원 가, 개소우."
"선우건."
"왜?"
"내 팔 아플 것 같냐?"
"그래! 안 아플 것 같을 리가 없잖냐!"
"그래. 무지 아프다."
"그러니까 병원 가라고..."
"무지 아픈데도 이번 공연만큼은 잘 해내고 싶다."
"........."
"왜 이렇게 이 공연에 집착하느냐고?"
"........."
"그거 아냐?"
"......."
"이번 공연을 위한 준비에 내가 끼지 않았다는 거..."
".......!"
"너희들이 처음으로 힘을 합쳐, OMG의 노래를 만들어 선보이려는 공연이다.
이번에 KMC의 1대 수장자가 되면, 너희는 너희들의 노래로, OMG만의 색을 가진 노래로 1대 수상자가 되는 거야.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은 없겠지."
"........"
"네 말대로 난 이기적이지. 그래서 내 욕심 차리고 싶어. 난 OMG이기에 우리 OMG가 처음으로 KMC의 역사를 장식했으면 좋겠어."
"......."
"나 이렇게 아픈데도 참으면서 공연하는 거니까, 멋진 무대 만들어줘. 그럼 되는 거잖아.
내 아픔까지 잊혀질 정도로 멋진 무대라면 고통 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테니까..."
"으...."
"그럴 수 있지?"
소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건이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의 눈이 형형이 타오르고 있었다.
"당연하지! 대신에... 죽을 것 같이 힘들면 말해라. 알겠지?"
"그래. 그럼 가자!"
일단 피가 흐르지 않도록 대충 응급처치를 한 소우는 칼을 팔에 꽂은 채로 OMG와 함께 나아갔다.
그들의 음악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소리의 울림이 잘 되도록 돔형으로 만들어진 행사장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관객들의 좌석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빽빽이 차있었다.
무대는 서로 맞은편에 두 개가 있었는데, 한쪽에서 앞 팀이 노래를 부르는 중에, 다음 팀은 맞은 편 무대에서
준비를 하게 되어있었다.
OMG는 악기들을 설치하면서도 소우가 걱정스러워 몇 번이나 소우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소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앉아 한쪽 구석에 설치된 드럼만 응시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민하가 키보드 설치를 마치고 소우의 곁으로 다가와 다치지 않은 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 괜찮겠냐? 노래를 부르고 활동을 많이 하면 피가 더 날 수도 있을 텐데..."
"괜찮아."
"걱정이다, 소우야."
"걱정하지 마. 너희들은 잘 할거야."
"노래 말고, 너 말이야."
"노래를 다 부른 후에 걱정을 해도 돼. 지금은 노래만 생각해. 우리가 이 자리에 선 건, 피가 흐르는
내 팔을 걱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저들을 열광시키기 위함이야."
"그래도... 정말 견디기 힘들면 말해야 돼."
민하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말했다.
소우가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소우의 단호한 태도를 꺾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소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마이크를 점검했다.
마이크도 앰프도 전부 정상으로 작동되었다.
전 팀의 노래가 거의 끝나 가는 것 같았다.
"다들 준비 됐지?"
건이 소우의 팔을 한 번 쳐다봤다가, 계속 보면 걱정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지 얼른 눈을 돌리며 물었다.
"오케이..."
건의 물음처럼 OMG의 대답 역시 신통치 않았다.
그들은 소우의 부상 때문에 기운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소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생각해 본 적 있냐?"
"뭘?"
"난 가끔 생각하지.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피를 흘리면서도 열정적으로 노래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
"지금 내 팔에 칼이 꽂힌 건, 그런 나의 궁금증을 풀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래서 난 이 무대를 열정에 가득 찬 무대로 만들고 싶다. 너희들... 동조 안 해줄 거야?"
"당연히... 해줘야지."
"그럼 다들 기운 차리고 나가자. 이 정도로는 죽지 않으니까..."
"그래."
건이 씩 웃었다.
"네가 그런 경험을 한 번 해보고 싶다면, 우리가 도와줘야지, 뭐..."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자, 다들 준비 됐지?"
건이 조금 전보다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오케이!"
나머지 멤버도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았어! 이제 우리의 시간이야! 잘 해보자고, 친구들!!"
공연을 시작하기 전, 언제나 들려오는 자신에 찬 건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에 대한 믿음의 대답.
막이 올라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이 시작되었다.
OMG의 공연이...
OMG의 공연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 팀의 공연 때보다 훨씬 더 큰 환호가 있었다.
OMG의 노래에 담긴 열정 때문에 관객들은 자기들마저도 OMG가 된 기분으로 그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그저 앉아서만 보던 관객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들의 환호가 리듬에 맞춰 또 하나의 음을 만들었다.
드럼, 베이스, 일렉, 키보드,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
다섯 가지의 음이 어우러진 공연장은 열기로 가득 차, 에어컨을 잔뜩 틀어놨는데도 그들은 땀 범벅이 되었다.
심사위원들까지도 자기들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이유를 잊고 OMG의 음악에 취해 몸을 흔들고 있었다.
소우는 욱신거리는 팔의 고통을 잊고 노래를 부르는 것에 빠져들었고, 다른 멤버들도 잡생각은 모두 떨쳐버리고,
노래에 푹 빠져있었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그들의 공연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공연장 안이 어둠에 휩싸이자, 열광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공연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정전에 OMG는 당황했고, 사람들 역시 웅성거리며 어떻게 된 일인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사위원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책임자를 불렀지만, 책임자들은 정전의 이유를 찾기 위해 벌써 뛰어나간 후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어둠.
그 어둠을 비집고 빛이 들어왔다.
그것은 여전히 이어지는 소우의 노래였다.
소우는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전기가 있을 때와 다름없이 힘있고, 열정적이며, 신이 나는 노래.
비록 마이크가 작동되지 않아 큰소리는 아니었지만, 소우의 노래는 아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소우의 소우의 노래가 계속되자, OMG도 잠깐 멈췄던 연주를 시작했다.
소리가 작은 베이스와 일렉을 위해 드럼 소리는 더 작게, 칠 것이 없어진 민하는 키보드를 버리고 일어나 소우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무대를 계속 이어나갔다.
민하와 소우의 환상적인 목소리가 그 어떤 때보다 조화롭게 울려 퍼졌고,
건과 현욱의 연주는 여느 때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정전 때문에 당황하여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다들 움직임을 멈추고 OMG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크지 않지만,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멋있었다.
OMG의 노래를 듣기 위해 다들 숨을 죽이고 있어, 사람들의 환호는 전혀 없었지만,
OMG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자기들을 쳐다봐 주고 있다는 것을 믿었고,
사람들은 OMG가 아까와 다름없이 끝내주는 무대로 끝을 내리라는 것을 믿었다.
뜨거운 열정만 있던 KMC 행사장에 어둠이 찾아오자, 그들 사이엔 신뢰가 생겨났다.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던 소우는 처음보다 훨씬 더 힘을 주며 노래를 하자, 혈압이 높아져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노래를 멈출 수는 없었다.
아래엔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옆에는 친구들이 연주를 해주고 있었다.
때문에 노래를 그만 둘 수 없었다.
'어쨌든 해보자.'
소우는 계속해서 노래를 했다.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열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이런 순간이 좋았다.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 무대에 설 때도, 이렇게 마음으로 전해지는 열정과 신뢰, 그것이 좋아서 무대에 서는 것이 좋았다.
그 신뢰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아버지를 향한 그 열정이 식지 않을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를 떠났고, 그들을 믿던 아버지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
이들의 신뢰는 영원하지 않다.
소우는 갑자기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다행히도 소우가 노래를 멈췄을 때는, 노래가 전부 끝난 후였다.
소우의 노래가 멈추고, 악기 연주까지 멈추자, 공연장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 OMG의 공연에 감동한 사람들의 환호가 장내에 메아리쳤고,
그 환호 소리가 무척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소우는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아까부터 소우의 근처에 흥건히 고여있던 붉은 피 위에 그대로 쓰러진 소우의 회색 옷은
금세 피로 젖어 들어가 새빨갛게 되어버렸지만,
어둠 속이기에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환호 때문에 소우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마저 묻혀버려, OMG는 그들의 환호를 받으며 서 있었다.
몇 분 후, 전기가 들어오고, 앞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주위가 환해지자, 그들은 노래 부르던 그 자리에
마이크를 움켜쥔 채로 쓰러진 소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온통 붉은 선혈로 물들어 버린, 평소보다 더 새하얀 소우를...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파란만장 이중생활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8화
'머리... 아파.'
언제나 그랬듯, 아버지의 노래가 소우의 몸을 묶어 아래로, 아래로 잡아 끌었다.
소우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두통이 생겨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마치 무언가가 머리 속에 들어와 뇌를 휘젓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다.
괴로워서 이를 악물고 이상하게 끈적이는 노래로부터 빠져나오려 애쓰지만, 몸은 점점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아래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다.
이대로 어둠에 삼켜진다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
'상관없겠지.'
문득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머리를 점령한 이 깨질 듯한 두통만 진정시킬 수 있다면 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상관없어. 아무래도 상관없어.'
소우는 눈을 감았다.
노랫소리가 점점 커지고, 점점 소우의 몸을 옥죄여 왔다.
숨이 막힐 듯한 고통 속에서 문득 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 대신에... 죽을 것 같이 힘들면 말해라. 알겠지?"
'언제... 들었던 말이더라...?'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 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아픈 머리로 고민을 했다.
'아아. 공연을 하기 전이었지. 그래, 분명...'
"당연하지! 대신에... 죽을 것 같이 힘들면 말해라. 알겠지?"
다시 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 대신에... 죽을 것 같이 힘들면 말해라. 알겠지?"
또 들려온다.
"당연하지! 대신에... 죽을 것 같이 힘들면 말해라. 알겠지?"
"당연하지! 대신에... 죽을 것 같이 힘들면 말해라. 알겠지?"
"당연하지! 대신에... 죽을 것 같이 힘들면 말해라. 알겠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반복해서 들려와서, 그 소리 때문에 더 이상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몸을 억세게 죄여오던 노랫소리가 사라지자, 조금씩 몸이 자유로워졌다.
숨통이 트인다.
크게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죽을 것 같이 힘들다, 건아..."
.
.
.
.
.
파앗!!
눈을 뜨자, 환한 빛이 시각을 자극했다.
소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빛에 익숙해지지가 않아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희미한 화학 약품 냄새.
병원 특유의 냄새 가운데에 익숙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뭐지?'
소우는 이 익숙한 향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쉽게 눈을 뜰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눈을 감은 채로
숨만 색색 몰아쉬었다.
어째서 아까의 꿈에 건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건의 목소리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죽을 뻔했던 거겠지.'
꿈을 생각하다가 두통에 대한 것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소우는 언젠가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래. 확실히... 전에도 건이의 노랫소리가 꿈에 들려왔고, 그래서 두통 없이 일어날 수 있었어.
왜 꿈에 건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머리가 아프지 않을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지금으로선 어떤 생각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누워 있었다.
무척 조용했다.
화학 약품 냄새가 나긴 했지만, 강우의 실험실이 집에 있어서 이런 냄새에는 익숙해졌다.
오히려 강우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편안하기까지 하다.
강우와 함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인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곁에 누군가가 있다.
소우의 것이 아닌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소우는 미간을 좁혔다.
'정말 집인가?'
이제 빛에 익숙해졌을 것 같아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약간 자극적이긴 하지만, 아까처럼 눈이 따갑지는 않았다.
소우는 몇 번 눈을 깜빡거린 후, 주위를 둘러보다가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위태롭게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이 든 건을 발견했다.
워낙 불편한 의자이고, 건의 덩치에 맞지 않게 작아서 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병원이 분명한데, 병실에 소우만 있는 것 보니 특실에 입원한 모양이다.
소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건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공연 중에 쓰러졌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려다가 그것도 관두고 몸을 일으켰다.
손등에 놓여진 링게르 주사가 당겨져 압박이 생겨, 소우가 잠시 주춤하는데...
"일어난 거냐?"
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진짜 건의 목소리다.
"아..."
고개를 돌렸더니, 건의 옷에 그려진 마크가 보였다.
어느새 침대 가까이에 다가온 건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들지 않고도 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건의 얼굴은 무척 초췌해 보였다.
며칠 잠을 못 잔 건지, 매끄럽던 피부가 푸석푸석해진 것을 보며 생각했다.
'이 녀석. 나 없다고 밤새서 게임을 해댄 건가?'
"하아. 일어난 거구나."
"........"
"너... 일주일도 넘게 혼수 상태였던 거 아냐?"
'일주일?'
건의 말에 소우는 좀 놀라웠다.
고작해야, 하루 정도 자고 일어난 건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라니...
'생각보다 피를 많이 흘렸던 모양이군. 강우 오빠가 만들어준 인공 피부 때문에 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기 몸인데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기려는데, 갑자기 건이 고개를 숙여 이마를 침대에 대었다.
그 바람에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회색 머리카락이 힘없이 침대 위에 흐트러졌다.
소우는 건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어, 인상을 찌푸리며 건의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건의 나직하고도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부터는 제발... 네 몸이니, 네가 알아서 한다는 말 따윈 하지 마라."
"........"
"정말... 빌어먹게 걱정했단 말이다. 정말..."
"왜?"
소우가 입을 열었다.
"왜 걱정을 해?"
소우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
물론 한 팀이다.
하지만 건이 이렇게까지 걱정을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우의 질문에 건이 고개를 번쩍 들어, 타는 듯한 눈으로 소우를 응시했다.
그 뜨거운 눈빛에 소우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런 눈빛을 가진 건은, 왠지 소우가 알고 있는 건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 앞에 앉아있는 게, 건이가 맞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건이 두 손으로 자기 앞에 있는 이불을 꽉 쥐며 말했다.
"넌... 내 노래니까..."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널 사랑하니까, 걱정한 거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속에서 몇 번이나 갈등했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삼키며 적당한 말을 찾아 내뱉었다.
정말 걱정했다.
소우가 쓰러졌을 때, 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건우와 민하, 현욱도 무척 걱정하긴 했지만, 소우를 들쳐 엎고 뛴 것은 건이었다.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피에 흥건히 젖은 소우를 보며 꺅꺅거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무작정 차로 향했다.
조심스레 소우를 눕히고, 다른 멤버들이 타지도 않았는데 바로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차는 앞을 막아선 건우에 의해 제지되었고, 건우는 막무가내로 건을 끌어내린 후, 소우만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걱정했다.
연락이 되지 않아, 어디에 앉지도 못하고 왔다갔다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건우에게 전화가 왔다.
XX병원에 있으니 오라고...
소우는 핏기 없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깨어나질 않았다.
초조하게 깨물고 있던 건우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나고, 현욱의 눈이 퉁퉁 부어 쌍꺼풀이 없어지고,
슬픔을 삭히는 민하의 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소우의 손을 잡고 엉엉 울고 있는 에스텔과
소우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제발 깨어나라고 기도를 하는 앤드류,
평소의 여유 있는 이미지는 전부 어디로 간 건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우를 지켜보는 성민과
그런 성민의 어깨를 감싸고, 주먹을 꽉 쥔 무서운 표정으로 한참동안 소우를 노려보는 강우가
계속 병실을 지킬 수만도 없어 잠깐 밥을 먹으려 내려가거나, 짬을 내어 자러 간 틈에도,
건은 미동도 않고 소우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소우를 지키고 있었다.
건이 자리를 뜨는 것은 화장실에 갈 때뿐이었다.
몸이 상하니 빵이라도 먹으라는 말에, 친구들이 사온 빵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으며 소우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원래 소우의 얼굴이 하얗다는 것은 알지만, 꼭 죽을 것만 같아 보여 끊임없이 걱정을 하고 기도를 한 건이다.
건이 자기가 혼수상태였던 1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길 없는 소우는 건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손으로 건의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소우의 손길에 건은 숨을 멈추었지만, 소우는 무심히 대꾸했다.
"고맙네."
"쳇..."
건은 툴툴거렸지만, 고개를 숙이고 소우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자세에서 툴툴거려봤자 전혀 효과가 없었다.
소우는 왠지 그런 건이 귀엽게 느껴져 피식 웃었다.
건은 기분이 좋아, 소우에게 머리를 맡긴 채 가만히 있고, 그런 건의 머리를 고양이 쓰다듬는 기분으로 쓰다듬던 소우가 중얼거렸다.
"이제... 퇴원해야지."
깨어나서 바로 퇴원하려 했지만, 건우의 성화 때문에 며칠 더 쉬고 퇴원을 했다.
건우는 소우가 무사히 깨어난 것이 기쁜지, 쌍거풀 없는 매서운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어가며 소우를 끌어안았다.
둘의 모습에 건은 기분이 나빴지만, 소우도 아픈데 괜히 문제 일으킬 필요 없다고 생각해,
그저 건우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는 걸로 끝냈다.
소우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신문을 찾았다.
그동안 병원에서 쉬며 생각해 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KMC 다음 날부터의 신문엔 온통 OMG 기사였다.
[정전에도 굴하지 않고 뛰어난 무대를 보여준 OMG]
[OMG의 아름다운 무대]
[OMG의 멤버 이소우, 칼에 찔린 채로 공연 강행?!]
[OMG의 공연, 네티즌이 뽑은 최고의 무대 선정!]
[죽어가던 스타 OMG. 이제 그들이 새로운 신화를 쓴다!]
그런 기사들을 대충 넘기고 여기저기 훑어보던 소우가 물었다.
"분명 스머프야."
"응."
뜬금없는 말인데도 다들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로 찌른 거, 분명 스머프가 시킨 일이겠지."
"맞아. 안 그래도 저번에 스머프 놈 중에 한 명이 나한테,
"선배네 그룹은 소우 선배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지껄였었다구!"
현욱이 그 때의 일이 생각나는지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물증이 없어."
"응. 그리고 정전도 스머프 때문인 것 같아."
건우가 말했다.
소우가 건우를 쳐다봤다.
"응?"
"갑자기 정전된 이유가, 누군가가 선을 끊어놔서였어. 일부러 말이야. 뻔하잖아?"
"흠... 몹쓸 녀석들이군."
"그러게."
소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는 가식적인 행동들, 조금 떴다고 선배를 무시하는 버릇없는 행동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불쾌하기는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그냥 애교로 봐 넘기기엔 너무 위험한 장난이었다.
실력으로 승부하지 않고, 상대 팀에게 해를 입히는 짓을 하다니...
일이 이 정도까지 된다면 아무리 냉정한 소우라도 스머프를 확실하게 깔아 뭉개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읽지도 않으면서 신문에 시선을 보내고 있던 소우가 고개를 들어 건우에게 말했다.
"건우야. 나랑 잠깐 나갔다가 오자."
"오케이!"
"어디 가는데?"
건이 막아섰다.
소우가 서늘한 눈으로 건을 올려다봤지만, 건은 답하지 않으면 안 보내겠다는 태도였다.
소우가 말했다.
"건우와 나의 일이야. 상관하지 마."
'이런...'
소우의 대답에 건우가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소우의 말이 건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는 건우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건은 입술을 깨물며 옆으로 비켜섰고, 건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소우는 건우와 함께 집을 나섰다.
행선지를 묻는 건우에게 소우가 말한 곳은 강우의 집이었다.
건우는 두 말 않고 차를 몰았고, 거칠게 운전하는 건우의 옆에서 소우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 조직에 파파라치 일을 하던 사람이 있다고 했지?"
"응. 파파라치 뿐이겠어? 사기꾼 일 하던 애들도 만만찮게 있어."
"그래? 좋아. 좀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경찰서를 들락날락할 수도 있는 일인데, 해줄까?"
"당연하지. 시켜만 달라고..."
"저번에 장원진이랑 현진성 사이에 있던 일 확실한 거지?"
건우는 전에 진성의 여자친구가 원진을 몰래 만나고 다녔던 것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도 사람을 붙여놓긴 했는데, 그 일 이후로 두 사람 다 워낙 조심하고 있어.
연락도 거의 안 하고 있거든."
"흐음... 그래."
"........"
"........."
원진과 진성의 여자친구 민혜가 머지 않아 만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스머프를 깔아뭉개기에 충분치 않았다.
소우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소우가 고민하는 틈에 차는 강우의 집에 도착했고,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던 두 사람을 맞아준 것은
강우가 아니라 에스텔과 이반이었다.
둘은 마치 자기네 집이라는 듯, 음료수와 과일을 꺼내다 주는 등의 법석을 떨었고,
둘의 성격을 알고 있는 건우와 소우는 별 말 않고 소파에 앉았다.
-흐응. 스머프라... 그럼 내가 가가멜이 되어볼까?
건우의 설명을 들은 에스텔이 매력적인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반이 툴툴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후후. 나 정도면 투덜이 스머프던, 똘똘이 스머프던 넘어오지 않겠어?
-그래서? 남편이 눈 동그랗게 뜨고 옆에 있는데도, 딴 녀석들에게 꼬리를 치시겠다?
-소우를 위한 일이라고오~
-과연 그럴까?
이반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재미 있으려고 하는 일이잖아.
-물론 나도 재미있어야지. 이반, 너도 재미있는 거 좋아하잖아.
-이왕 할거면 확실하게 해, 확실하게. 어정쩡하게 하지 말고...
-후후. 주먹다짐까지 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난... 한 팀의 멤버들이 한 여자에게 빠져서 주먹다짐. 어때, 소우야?
에스텔와 이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소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 이반?
-어쩌겠냐. 에스텔이 좋다는데...
이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이반도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소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고 싶었고, 자기가 하는 일은 아니지만 에스텔이라도 소우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좋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 그럼 부탁해, 에스텔. 알아서 잘 해줄 수 있지?
-응. 걱정하지 마. 1~2주 정도만 지나면 확실한 기사가 뜨게 해줄 테니까... 그리고... 후후.
에스텔이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기사 터진 후에, 김민혜인가? 그 애의 심경 고백이 있으면 스머프는 더더욱 아래로 떨어지겠지?
-사악하긴...
건우가 중얼거렸다.
그런 건우에게 에스텔이 찡긋 윙크를 해주고 있을 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연구실의 문이 열리고 강우와.............
"형은 왜 윗옷을 벗고 나오는 건데?"
바지만 걸친 성민이 걸어나왔다.
의외의 손님들의 모습에 성민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얼굴을 붉히며 주먹으로 강우의 가슴팍을 세게 때렸다.
"이 녀석이 날 가지고 생체 실험을 했어. 내가 정말... 으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성민을 보며 건우가 씩 웃었다.
"그으래애?"
의미심장한 건우의 말투에 성민이 미간을 좁혔다.
"말투가 왜 그래?"
"뭐, 별로... 으흐흐."
"그래, 소우야. 몸은 좀 괜찮은 게냐?"
강우가 실험복을 벗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응."
언제나 그렇듯 간단명료한 소우의 대답에 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몸 좀 사리거라."
"응."
"난 이제 성민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갈 생각이란다. 그럼 다들..."
"이봐, 오빠."
"그래, 소우야."
"여기 오빠네 집이라고 알고 있는데..."
"허허. 네가 있지 않느냐."
"에스텔이랑 이반이 온 줄도 몰랐던 거야?"
"집엔 가져갈 것도 없단다."
"왜 왔는지 정도는 물어보라고!"
건우의 말에 강우가 빙긋 웃었다.
"이미 만들어 두었단다."
"뭘?"
"스머프의 지문이 필요한 것 아니었던 게냐?"
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 책상 위에 올려두었으니 그걸로 사용하면 될게다. 그럼 난 성민이와 나갔다 오마."
동생들이 더 붙잡을까봐 강우는 성민의 팔을 잡고 서둘러 나가버렸다.
미간을 좁히며
"형은 나보다 성민이 형이 더 좋은가 봐."
라고 중얼거린 건우가 소우에게 물었다.
"스머프의 지문이 왜 필요한대?"
"내 팔을 찌른 칼에 묻어있던 스머프의 지문."
"에..."
"그쪽에서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역시 누나는..."
"이왕 깔아뭉개기로 한 거, 확실하게 뭉개주겠어."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파란만장 이중생활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59화
에스텔은 스머프에게 접근했고, 스머프의 지문이 묻은 칼을 경찰서에 보냈다.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어 갔고, 소우는 이제 기사가 하나, 둘씩 터지기만을 기다리며,
스머프가 KMC에서 불렀던 음악을 들었다.
KMC의 대상은 스머프가 거머쥐었고, OMG는 안타깝게도 금상 수상에 머물렀다.
언론에선 정전으로 엉망이 된 콘테스트라며 떠들어댔고, OMG의 팬들과 일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은
콘테스트를 새로 열거나, OMG에게도 대상을 줘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KMC측에선 공연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각 그룹에 있는 운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이라며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OMG는 그것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소우가 무사하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두었다.
스머프가 KMC에서 불렀던 노래는 큰 인기를 누렸다.
다리를 꼬고 앉아 스머프의 노래를 듣던 소우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재생을 했다.
두 번, 세 번... 몇 번을 들어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좁히고 고민을 하던 소우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흐음... 스머프..."
만약 소우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맞았다면, 스머프는 해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일지도 몰랐다.
소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몇 년 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언더 밴드의 곡을 떠올렸다.
스머프는 그들의 곡을 표절한 것이 틀림없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언더 밴드이기에 걸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표절한 모양이지만,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고,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고 온 소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표절, 에스텔과 김미혜의 염문설, 그리고 이기기 위해 라이벌 가수의 팔에 칼침이라... 완벽하게 무너지겠군, 스머프."
그들에겐 한치의 동정심도 생겨나지 않았다.
스머프가 표절한 언더 밴드 리더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 컴퓨터를 키려던 소우는
아무래도 그것은 앤드류에게 맡기는 것이 더 쉬울 거란 생각이 들어 앤드류에게 전화를 했다.
그들의 연락처를 알아달라는 소우의 부탁에, 앤드류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제 기다리는 것만이 남았다.
"게임 한 거 아냐."
현욱과 슈퍼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오는 길.
건이 게임 하는 시간을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소우에게
찰떡 아이스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현욱이 답했다.
"응?"
"네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말하는 거 아냐? 그 때, 건이 모습이 무지 초췌했었잖아."
"그래."
"게임을 한 게 아니라... 계속 네 옆에 있었어."
"........"
소우가 현욱을 돌아봤다.
서늘한 눈동자에 뭐가 담겼는지 알 수 없지만, 현욱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들은 그래도,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그랬거든. 근데 건이는 정말 네 옆에서 잠도 안 자고,
밥 먹으러 가지도 않고, 계속 널 지켜봤어. 그래서 그렇게 졸려 보였던 걸 거야."
"흐음..."
"우리들도 다 놀랐었어. 건이가 그럴 애가 절대로 아닌데 말이야. 그치?"
"그러네."
"아무튼 굉장히 정성이었어. 네가 쓰러진 것을 보고 가장 먼저 업고 뛴 것도 건이었으니까..."
현욱은 소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소우 역시,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명치 아래에서 뭔가가 치고 올라오는 듯한 이상한 기분.
대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어 인상을 찌푸리고 터벅터벅 걷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건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건의 모습에 현욱은
"워얼~"
하고 야유를 보냈지만, 소우는 서늘한 눈으로 건을 올려다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건이 말했다.
"어디 갔다가 오는 길이냐?"
"아이스크림 사러... 네가 아까부터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칭얼거렸잖아!!"
현욱이 내민 봉지를 받아 뒤적거리다 구구콘을 꺼내 입에 문 건이 나머지 아이스크림을 현욱에게 떠넘기며 말했다.
"야. 들어가라."
"엥? 넌?"
"난 소우랑 할 얘기가 좀 있거든."
"흐음."
"들어가."
"그러지, 뭐."
건의 손에 떠밀려 두 말 않고 돌아오던 현욱.
'이상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이상한 기분.
별로 유쾌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소우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꾸욱 누르며 어디론가 가버리는 건의 뒷모습을 보며 현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이상하네.'
어쩐지 두 사람을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웃기는 짓인 것 같아, 관두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에 들어가서 민하와 건우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고, 빌려다놨던 만화책을 읽으면서도
불쾌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꾸 건의 손이 소우의 머리를 꾹 누르고 있던 그 장면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어째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왜 이러는 거얏!'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며 고민하던 현욱은 침대 위에 아이스크림을 널리 펼쳐둔 채로 잠이 들어버렸다.
가장 먼저 터뜨린 사건은 스머프의 표절 사건이었다.
앤드류는 빠른 시일 내에 언더 밴드의 연락처를 알아다줬고, 소우는 그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소우의 말을 들은 그들은 무척 불쾌해 하며, 그 사실을 인터넷의 여기저기에 띄웠다.
원래 그들의 곡과 표절하여 부분적으로 바꾼 스머프의 곡.
그 일은 미국에 사는 한국 동포들을 통해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까지 돌게 되었고,
처음엔 쉬쉬하던 사람들도 그냥 넘겨버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일은 크게 기사화 되었고, KMC는 표절 건에 대해서 확실한 조사 후에 발표를 하겠다며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결과는 스머프의 표절이 확실하다고 나왔다.
그 언더 밴드는 고작해야 미국의 작은 클럽에서 연주를 하는 알려지지 않은 밴드였기에,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줄 몰랐던 스머프 측에선 밴드에게 큰돈을 보내고, 좋은 말로 합의를 보려 했지만,
밴드 쪽에선 조금도 스머프의 편의를 봐주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작은 밴드라도 그 곡은 그들의 것이었고, 그것을 말하지 않고 가져다 사용했다는 것은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소우와 여러 모로 대화를 해, 입을 맞춘 후였다.
스머프의 기자 회견에서 스머프는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유명해지지 않을 곡이었습니다. 그런 곡, 저희들이 가져다가 유명하게 만들어준 건데, 뭐가 문제죠?
그 곡을 오랫동안 사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유명하게 되면, 그 곡을 다시 그분들에게 돌려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곡을 만드신 분들이 자기들의 곡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저희들도 가수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저희들이 설마 나쁜 의도로 그분들의 곡을 가져다가 썼겠습니까? 그분들에게 피해를 줄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들은 그분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했던 것 뿐입니다."
스머프의 말은 궤변이었지만, 스머프의 '빠순이'들은 맞는 말이라며, 왜 우리 오빠들을 괴롭히는 거냐며,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했고, KMC의 홈페이지를 테러하기도 했다.
게중에 유난스러운 몇몇은 OMG의 집 앞까지 찾아와 그들에게 쓰레기를 던지는 몹쓸 모습도 보여주었다.
건은 그들에게 버럭 화를 내며 어서 돌아가서 공부나 하라고 했지만, 간덩어리가 부은 건지, 겁을 상실한 건지,
그들은 낄낄 웃으며 건을 손가락질하기만 했다.
"참아야 되는 거냐? 앙?"
건우에게 목덜미를 잡혀서 안에 들어온 건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현욱도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건우가 건에게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참아야지. 안 참으면, 저 어린 것들을 때리려고?"
"아호! 열 받잖냐!"
"참아, 참아."
"제기랄."
건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파에 가 앉았다.
"조금만 있으면 끝날 거야."
"뭐가?"
"내가 조치를 다 취해뒀거든."
"조치?"
건과 민하, 현욱은 소우와 건우 남매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소우는 별로 말할 생각이 없는 듯 해서, 건우가 말하기 시작했다.
"응. 소우의 팔까지 찔렀는데 그냥 넘어가 줄 수는 없잖아. 사실 이번에 표절이 걸린 것도 전부 소우가 주도한 거야."
"뭐어?!"
"소우가 그 곡을 들어본 것 같아서 여기저기 뒤지다가 결국 알아낸 거거든.
그리고 지금 에스텔이 작업 들어갔어."
"작업이라니?"
"스머프의 멤버들에게 말이야. 에스텔은 무지 매력적이잖아. 게다가 어설픈 한국어. 딱 좋아하는 스타일 아니냐?
약간은 어리버리한 것 같은 예쁜 여자 말이야. 에스텔은 스머프의 멤버들에게 꼬리를 칠 거고,
그러면 적어도 두, 세 명은 에스텔에게 넘어오겠지. 에스텔이 어떤 계략을 사용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 분명
에스텔을 사이에 두고 주먹다짐을 할거야. 그럼 그건 크게 기사화가 될 거고,
그 후에 현진성과 사귄다고 유명한 김민혜의 눈물의 심경 고백."
"심경 고백?"
"응. 심경 고백. 에스텔은 분명 현진성을 중심으로 꼬실 게 분명하거든. 그리고 아마 김민혜한테도 접근할 거야.
그래서 김민혜의 편인 척, 자기도 피해자인 척 해서, 결국 김민혜까지 끌어내는 거지."
"헤에... 용의주도하네."
"용의주도한 건, 여기서 끝이 아니야."
"그럼?"
"소우의 팔에 꽂혀 있던 칼에서 지문을 발견했거든. 그걸 경찰서에 넘겼어."
"하지만... 소우를 찌른 거, 스머프가 아니었잖아."
"그래도 모를 일이잖아. 스머프가 변장을 하고 찌른 걸지도..."
"지문을 남길 만큼 멍청하단 말이냐?"
건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건우는 의외로 깊이 파고드는 건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여유 있게 웃으며 답했다.
"모를 일이지. 의외로 멍청할지..."
"쳇! 네놈만 하겠냐."
"그건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소린데?"
"내가 뭘?!"
"멍청하기로 따진다면야, 널 따라올 사람이 없지. 넌 언제나 그러그러한 짓만 하면서 살잖냐."
"죽고 싶냐, 이건우?"
"네가 날?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멍청한 거다."
툭탁툭탁, 티격태격.
건은 어느새, 밖에서 왕왕대는 스머프 빠순이들을 잊고는 건우와 한바탕 다투었고,
현욱은 소우의 옆에 붙어 앉아, 찔렸던 팔은 괜찮은지 물었다.
"뭐... 응. 괜찮아."
소우의 말에 현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 정말 걱정했었다구. 피가 얼마나 많이 났었는줄 알아?"
"......"
"다음부터는 너 다치면 공연 같은 거 안 할거야. 네가 아무리 감동적인 말을 해도 말이야."
"그래."
소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충 날짜를 가늠해봤다.
'내일쯤이겠군. 에스텔의 본격적인 활동은...'
소우의 생각대로 에스텔의 활동의 결과는 곧 드러났다.
가장 먼저 스포츠 신문의 1면에 장식된 기사는 스머프의 멤버 세 명이 주먹다짐을 했다는 기사였다.
기사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 사소한 의견의 대립이 있어서 감정이 격해지다 보니
주먹다짐까지 가게 됐다고 했지만, 에스텔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의견 다툼으로 인한 주먹다짐은 원하던 기사가 아니었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
OMG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틀쯤 지나자, 다시 한 번 스머프 멤버들의 주먹다짐 기사가 떴다.
아무래도 여자 문제 때문인 것 같다며 은근슬쩍 운을 띄운 기사에, 역시나 스머프의 빠순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우리의 사이 좋기로 소문난 오빠들이 한낱 여자 때문에 주먹질을 할 리가 없다면서,
기자들의 거짓 기사도 지긋지긋하다고 인터넷 여기저기에 스머프를 두둔하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자들은 최근 잦아진 스머프의 싸움 이유를 파고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 끝에 있는 인물인 에스텔을 발견했다.
에스텔은 꽤 오래 한국어를 공부해서 어느 정도 능숙하게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눌한 말투와 어리버리한 태도를 기자들에게 보여,
어쩐지 스머프가 아무 것도 모르는 에스텔을 가지고 놀았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기자들은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 비운의 여주인공을 그리듯 에스텔을 표현했고,
에스텔은 그들의 상상을 한껏 부풀리기 위해 더더욱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우연히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에스텔을 본 건우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가 따로 없구만..."
이라고 중얼거릴 정도였다.
에스텔의 부탁으로 얼굴과 본명을 실리지 않았지만, 기자들의 손에 의해 스머프는 가해자가 되었고, 에스텔은 피해자가 되었다.
게다가 기자들의 흥미를 돋군 것은, 다툼을 한 세 명 중에, 탤런트 김민혜의 남자친구라고 소문이 난 현진성과
얼마 전, 김민혜와 열애설이 나돌았던 장원진이 끼어있었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완전히 물 만난 물고기였다.
하염없이 거대하게 부풀어 가는 기사들의 홍수에서, 스머프측은 기자를 고소하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그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OMG는 느긋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해명을 하는 스머프를 지켜보았다.
건과 현욱은 무척 즐겁다는 표정이었고, 민하 역시 유쾌한 표정으로 앉아서 TV를 봤다.
운동을 해야한다며 나갔다가 들어온 건우가 소우의 옆에 털썩 앉았다.
"조심해."
건우가 소우를 끌어안듯 감싸고 귓속말을 하는 모습에, 건과 현욱의 표정이 잠깐 찌푸려졌다.
"뭐가?"
"누가 자꾸 이쪽을 쳐다봐."
"........."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넌 감은 좋았으니까..."
소우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날 쳐다보는 거라곤 할 수 없지. 다른 녀석들에게도 말해주는 게 어때?"
"널 향한 거야. 워낙 뻘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녔잖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너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조심해. 난 너 없이 못 사는 거 알잖아. 팔 찔렸던 것도 그렇고... 아주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고..."
"그래, 알겠어."
건우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했지만, 소우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집어주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건우가 가자마자 건이 소우의 옆에 붙어앉으며 물었다.
"건우가 뭐래?"
"널 조심하래."
"뭐?!"
".........."
"야, 야!"
"왜?"
"건우가 뭐래냐고?"
"너랑 가까운데 있으면 바보가 옮으니까 조심하라고 하더군. 그럼 난 이만..."
차갑게 말한 소우는 벙쪄 있는 건을 놔두고 방으로 올라가 버렸고,
예기치 못한 한 방에 얼떨떨해진 건의 모습에 민하와 현욱은 피식피식 웃고만 있었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파란만장 이중생활
===========================================================================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
60화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아도 스머프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 같은 팬들이 하나, 둘씩 스머프를 떠나기 시작하고,
스머프에 대한 악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며, 스머프가 출연하기로 한 프로그램에서 일정이 바뀌었다며
스머프를 밀어내기 시작한 것은, 김민혜의 눈물의 심경 고백 이후였다.
마치 자기도 피해자라는 듯 민혜에게 접근한 에스텔은, 어눌한 한국말과 순진한 눈으로
스머프의 멤버들이 자기에게 한 짓을 10배도 부풀려서 전했고,
그 말을 들은 민혜는 에스텔에 대한 동정심과 지금껏 속았다는 분한 마음에
취재를 하고 싶어하는 기자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기자들은 김민혜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몸도 마음도 다 빼앗아간 스머프의 현진성을
사상 최악의 남자인 듯 써내려 갔고, 같은 팀의 멤버인 현진성의 여자를 빼앗으려 접근한,
하지만 결국 가지고 놀다가 인기에 지장이 생길 것 같으니 민혜를 버린 장원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기사를 써댔다.
전부 수식어를 붙여 좋게좋게 쓴 듯 했지만, 다 읽어보면 결국 [스머프는 죽일 놈들!]이란 소리였다.
처음엔 에스텔이 꼬리를 쳤을 거라며 스머프를 두둔하던 스머프의 팬들 중 상당수는,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던 김민혜조차도 그런 식으로 울며 심경고백을 하자,
조금씩 스머프에게서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때, 스머프는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죄송하다, 다 자기 잘못이다라고 사과를 했더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자기들을 두둔하는 말만 내뱉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게다가 원진과 진성은 기자 회견장에서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방송에 나온 원진의 얼굴에 있는 상처들이 전부 진성에게 맞아서 생긴 거라는 말들이 돌면서,
스머프의 인기는 급속도로 하락했다.
그들은 죽어 가는 가수였다.
"이제 마지막이다, 스머프."
힘든 표정의 스머프의 모습에 OMG 멤버들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소우만은 차가운 표정으로 감정 없이 중얼거렸다.
소우의 목소리엔 분노도, 승리감도 담겨있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공백이었다.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공백.
평소엔 이런 공백의 목소리, 공백의 눈빛을 가진 소우가 노래를 부를 때면 사람이 바뀌듯,
그 목소리에 감정을 싣는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소우는 저럴 때, 너무 무서워."
현욱이 건우의 귀에 소근거렸다.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섭긴... 한 주먹감이지."
건이 별 거 아니란 표정으로 말했다.
"치이. 소우한테 잡혀서 바로 업어치기 당한 적도 있으면서..."
"쳇! 그건 방심했기 때문이라고!"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려서 하는 공격, 방심했을 때 순간적으로 나오는 방어가 진짜 실력이지."
건우가 저런 바보는 처음 봤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
건은 건우가 얄미운 듯 뭐라 반박할 말을 찾았지만, 옳은 소리였기 때문에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슬슬 감식 결과가 나올 때가 되었군."
휴대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한 소우가 말했다.
다리를 꼬고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소우는 완벽한 미인을 모델로 삼아 만든 조각상처럼 예뻤다.
건우와 다투다가 돌린 시선의 끝이 그런 소우에게 가서 박힌 건은,
한참동안 넋이 나간 듯 소우의 옆모습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얼굴은 여자 같은데 말이야. 몸은 분명 남자고... 뭔가가 잘못 만들어진 게 틀림없어.
대체 왜 저렇게 예쁜 거지? 리니지 주인공들보다 더 예쁘잖아. 제기랄...'
"이상하다."에서부터 시작된 생각은 결국 "예쁘다."는 팔불출 같은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생각은 소우가 고개를 돌려 서늘한 눈으로 건을 쳐다볼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핫!"
갑작스럽게 소우와 눈이 마주치는 통에, 건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뺐지만,
소우는 무심하니 건을 응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란 건이 쑥스러울 정도로 무심했다.
그 모습을 보며 건우는 생각했다.
'이것 보라고, 에스텔. 누나는 절대로 선우건을 좋아할 리 없어. 아무리 냉랭한 누나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갑자기 눈이 마주치면 조금은 동요해야 할 것 아니냐고! 이번만큼은 네 예감이 틀린 것 같은데?'
김민혜의 눈물의 심경 고백이 있은 후, 사흘이 지난 날, 가요계 아니, 연예계에 대파동을 일으킬만한 기사가 터졌다.
그것은 스머프의 불구속 입건.
스머프는 라이벌 그룹 OMG의 멤버 이소우의 목을 고의적으로 노렸다는 이유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소우가 팔을 심하게 다쳐서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전부 아는 사실.
그 이유가 목을 노리고 달려든 스머프의 칼을 피하다가 팔에 칼을 맞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스머프를 믿고 따르던 팬들뿐만이 아니라, 연예계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단지 KMC의 대상을 받기 위해 라이벌 가수의 목을 상하게 하려 했던 스머프의 행동은
무척이나 잔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달려드는 기자들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경찰서로 들어가는 스머프의 모습에
많이 당했던 OMG조차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인이 죄를 저지르면 유명했던 만큼, 크게 타격을 받고 재기 불능 상태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때문이다.
스머프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20대 초반이니, 이번 사건으로 인해 연예계에서 차출 당하고 나면
다른 직업을 찾기 힘들어 좌절할 것이 분명했다.
복수엔 성공했지만, 다들 씁쓸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소우만큼은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들어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소우의 표정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스머프는 끝났어."
소우가 말했다.
"아아. 그런 것 같네."
"그렇다고 안심하고 나태해지지는 마. 언제 스머프 같은 라이벌이 눈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오케이, 오케이. 걱정하지 마라, 개소우."
건이 씩 웃으며 소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우린 앞으로도 엄청 열심히 노력할 거니까... 그렇게 딱딱하게 긴장해 있지 말라고!
앞에서 알짱거리던 스머프 녀석들이 잡혀간 판에 뭐가 그리 걱정인 거냐.
기분도 좋은데 겁나게 맛있는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건의 말에 신나서 일어나는 현욱과 민하의 모습을 보며 소우는 피식 웃었다.
'뭐.. 이런 녀석들이니, 긴장할 필요는 없겠지. 어디서든 살아남을 녀석들이니...'
"화재의 원인?"
이른 아침.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읽던 소우에게 오랜만에 일찍 일어난 민하가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고,
소우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민하를 따랐다.
한참 말없이 걷고 있는데 민하가 물었다.
"아무리 알려고 해도 잘 모르겠더라. 예전에... 너희 집에 났던 화재의 원인이 뭐냐?"
"화재의 원인?"
소우가 돌아봤다.
민하로서는 무척 궁금했던 일이었고, 예전부터 묻고 싶었지만 소우에게 상처가 될 것만 같아서
자제하고, 또 자제해서 묻지 않았다.
하지만 스머프의 일도 통쾌하게 처리했으니, 조심스레 물어보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 소우에게 질문한 것이다.
그런데 소우는 민하의 걱정과는 달리, 남의 일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민하를 쳐다봤다.
"그래. 화재의 원인."
별로 신경 안 쓰는 듯한 소우의 표정에 민하는 조금 안심하고 물었다.
가만 생각하던 소우가 말했다.
"아버지의 라이벌이었던 가수 기억나?"
"음... 누구였더라?"
한참을 고민하는 동안, 소우는 아무 말도 않고 민하의 곁에서 걸었다.
스머프의 일 때문에 연예계가 너무 떠들썩해서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휴식을 하기로 했다.
몸을 닦달한다고 노래를 잘 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편안한 마음 상태에서 더 좋은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요새 OMG는 늦잠도 자고, 늦게까지 뒹구는 등 거의 폐인이라 할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 아침을 준비할 필요도 없으니 일찍 들어갈 필요 또한 없어서 민하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아... 기억났다. 그 가수 말이지? 머리가 좀 길고..."
"그래."
"그 사람이 왜?"
"그 사람이랑 아버지는 같이 음악을 시작했지. 서로 좋은 라이벌이라고 알려지면서 그 두 사람을
같이 초대하고, 거의 듀엣인 것처럼 취급했어. 하지만 아버지의 실력이 더 나아서인지 어째서인지
점점 아버지의 인기가 많아졌고, 그 사람은 우리 아버지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까..."
소우는 민하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 사람은 자기가 잘 되지 않은 게, 다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했고..."
"설마..."
민하가 경악의 표정으로 소우를 쳐다봤다.
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화재가 난거지."
"......하지만 그 사람은... 곧 연예계를 떠난 걸로 아는데..."
"죄책감 때문이었겠지. 아버지가 자살한 것을 안 그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못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지만, 결국 자수를 하지는 않았어."
"왜... 고소하지 않은 거야?"
"평생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라고..."
소우가 전에 없이 냉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우의 얼굴을 찬 냉기가 서려 있었지만,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민하는 왜 소우가 스머프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스머프가 아무리 비열한 짓을 해도 그냥 넘어갔지만, 라이벌 가수인 자기에게 해를 입힌 것은
과거 아버지를 죽인 그 사람이 떠올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아직... 용서하지 않았구나."
소우가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차가워 민하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소우가 아닌 것만 같았다.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평생..."
소우에게서 야차의 표정을 본 민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쩐지 소우가 무거운 짐을 떠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둘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우가 올라가고 나서, 민하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그것은 건이 한 말 때문이었다.
"야. 개소우랑 무슨 짓을 하고 왔길래, 저렇게 표정이 안 좋은 거냐?"
"응?"
민하는 소우의 표정이 평소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아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보였던 차가운 표정은 금세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건의 말에 민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개소우 말이다. 꼭 울 것 같은 표정이잖냐."
"........!"
민하야 말로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느꼈을 소우의 슬픔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이 슬펐고,
자기는 발견하지 못한 소우의 표정을 읽은 건에게 소우에 대한 마음에 밀렸단 사실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에이씨. 씻기 귀찮아."라고 말하고 욕실로 들어가는 건의 뒷모습을 보며 민하는 생각했다.
'바람둥이가 진짜 사랑을 하게 되면 정말 열정적인 사랑이 된다고들 하지.
그래서 너도 그렇게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거냐. 소우가 남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루기 힘들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흐음..."
민하의 말을 들은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냐?"
"응."
"언제부터?"
"저~~~번부터... 내가 원래 누나에 대한 것 만큼은 무지 예민하잖아."
"하긴... 그런데 용케 입 다물고 있었네."
"응. 그 녀석이 누굴 좋아한다는 걸, 이리저리 떠벌릴 이유도 없고..."
건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건이한테는 소우가 여자라는 걸 말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왜?"
"그 녀석... 진심이다."
"알아. 그런 것쯤은... 그래서 가만 놔두는 거라고..."
"겉으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도, 속으로 많이 고민하고 있을 거야. 소우가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게다가 너와 소우는 다른 애들 사이에선 거의 사귀는 분위기이고 말이야."
"민하 형. 난 지금 OMG가 좋고, 건이도, 현욱이도 좋아. 붙어 있었던 시간도 길고, 저 녀석들, 좋은 녀석들이잖아.
그런데 말이지. 우리 누나랑 선우건이 사랑을 하게 되는 건 싫어. 이건 시스터 콤플렉스 차원이 아니라,
선우건은 우리 누나의 상대가 될만한 재목이 못 돼.
우리 누나도 건이한테 별로 마음에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하지만, 건우야."
"앤드류 같은 남자, 건이 같은 남자. 형이라면 누굴 선택하겠어?"
"앤드류지."
생각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듯 나오는 민하의 대답. 건우가 씩 웃었다.
"것 보라고... 앤드류는 완벽해. 겁나게 잘난 외모에, 잘난 능력, 겸손한 태도와 제대로 박힌 정신 상태,
그리고 누나에 대한 사랑... 그런 사람이 소우 누나에게 몇 번이나 고백을 하고, 열정적으로 다가가도
군더더기 없이 아주 차갑게 내친 사람이 우리 누나야. 그런 누나한테 건이가 눈에 차기나 할 것 같아?
괜히 기대하게 했다가 건이만 더 상처받는다고..."
"......."
건우의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민하는 잠자코 있었다.
건우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처음엔 건이 싫었다.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성격도, 멍청한 점도,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게으른 태도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편협한 사고 방식도...
그런 것들이 싫어서 건이 소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든 건과 소우를 떼어놓을 생각이었다.
설령 소우가 건을 좋아한다고 해도 건과 소우를 떼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이젠 그래서가 아니다.
에스텔은 소우가 곧 건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했지만,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소우는 여전히 세상엔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자신만을 알았다.
남의 마음을 살피지 않는 성격이 하루 아침에 변할 리 없었기에, 건이 적당히 하다가 소우를 포기하기를 바랬다.
점점 깊어졌다가는 크게 상처를 입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건이
또 다시 사랑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 것은, 건우로서도 별로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걱정이다. 늘 사람을 건성으로 사귀던 건이가 이번만큼은 진짜 사랑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남 걱정하지 말고, 형이나 걱정하셔."
뜨끔.
"뭐?"
"내가 말했잖아. 우리 누나 일이라면 좀 민감해진다고... 육감 소년 이건우를 무시하지 말라고..."
"육체... 소년?"
"육감 소년!!!"
"하하. 육체 소년이 더 어울리는 거 아니냐?"
"말 돌리지 말라고!!"
민하가 요리조리 말을 돌려 빠져나가려 하자 건우가 버럭 소리를 쳤다.
민하가 쓰게 웃었다.
"그래. 맞다."
"......진작에 느끼고 있기는 했는데..."
"하지만 난 건이가 소우와 잘 됐으면 좋겠다."
"바보 소리 좀 하지 마. 남의 사랑을 챙겨줄 여유도 있다는 건가?"
"여유라기보다는... 우정이 더 멋있지 않냐?"
"형은 바보냐? 그렇게 뒤에서 건이 녀석 챙겨 줘봤자, 형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알아."
"그럼 동정인 거야? 건이가 부모님이 없이 자랐으니까, 이 사랑만큼은 잘 됐으면 하는?"
"아니. 동정이 아니라... 기대겠지."
"무슨 기대?"
건우가 눈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잘 생기긴 했지만, 인상이 너무 강해서 얼굴을 찡그러뜨리니 무섭기 그지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흠칫 놀라며 건우를 피했을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처음엔 우정 반, 동정 반의 심정으로 소우를 양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냐."
민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자기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건은 소우의 그런 면까지 발견했다는 것을...
건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민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확실하게 결심한 거다. 건이라면 소우를 분명 행복하게 해줄 것 같거든."
".....쳇."
건우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물론 건이가 좀 못 미덥긴 하겠지만, 너무 건이를 견제하지는 마라. 건이도 그렇게 책임감 없는 놈은 아니니까..."
"그래,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말이지... 문제는 내가 아니라 누나라고..."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문제지. 설령 건이가 결국 소우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한 발 물러서서 지켜 봐주면 되는 거잖아."
"뭘 그리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게냐."
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대화에 심취해 있어서 연구실 문이 열리는지도 몰랐던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강우는 언제나처럼 긴 머리를 질끈 묶고, 깨끗한 실험복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었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건우와 민하를 본 강우가 싱긋 웃었다.
무척 매력적인 미소였다.
"아주 즐거워들 보이는구나."
"그래 보여?"
건우가 툴툴거리듯 물었다.
"그래. 허허.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인지 무척 기분이 좋단다. 자주 좀 찾아오거라."
"형이야말로,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찾아와도 보이질 않으니, 원..."
"비밀 집단에서 힘든 연구를 맡겨서 말이다. 우리 동생들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때, 성민이 집으로 들어왔다.
강우에게 열쇠까지 받았는지, 분명 건우가 문을 잠궜는데, 벨도 울리지 않고 혼자 들어왔다.
"성민이..."
강우가 반갑게 성민을 맞이하는 걸 보며 건우가 중얼거렸다.
"저래서 잠깐 연구실 밖으로 나왔던 거구만..."
"그러게."
민하가 웃었다.
성민은 집요하게 달라붙는 강우를 애써 떼어내며 소파에 앉았다.
"성민이. 왜 그리 차가운겐가. 내 몹시 섭섭하이."
"장난 좀 치지 마, 이강우. 아아, 건우랑 민하도 있었구나. 안 그래도 건우, 너한테 말할 게 있었는데..."
"나보다 건우가 더 좋다는겐가? 역시 젊은 물이 좋은겐가?"
"이.강.우! 적당히 좀 하고 떨어지라고! 아무튼 이놈의 장난기... 네 장난기와 소우의 냉정함이 좀 섞였어야 했어.
너무 상반되게 몰려간 거 아냐? 으휴..."
"허허. 진심이래도 믿지 않는구만..."
"됐어, 됐어."
성민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건우를 향해 말했다.
"건우야. 이제 OMG 스케줄 잡아도 되는 거지?"
"응? 아, 스케줄..."
건우가 잠시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간도 꽤 지났고, OMG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는 것은 다들 아니까..."
"그래. 후아. 이제 겨우 숨통 트게 생겼다. CF랑 토크쇼 같은 프로그램 잡아놓을 테니까,
내일쯤에 회사로 한 번 들려라. 알겠지?"
"알겠어. 그럼 형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 방해 안 할게."
"너마저 장난이냐? 제발 강우한테는 물들지 말아라."
"크크큭."
건우는 멋들어지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민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건우가 말했다.
"아무튼 형. 지금은 누나가 여자라는 걸 밝힐 때가 아니야. 적당한 때가 되면 누나가 알아서 밝히겠지.
첫댓글 재미있게 읽으세요 ^ ^*
았싸! 또 일빠~~~~ 오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어요♡ 2빠 ㅋㅋ
오키!!3빠!!짱이에욥!!
조회 5에 보는 ~~ㅋㅋㅋㅋ 이거 다봤는 ㄷ ㅔ 재밌어요,ㅋㅋ
6빠!!!!
첨으로10위안에.ㅠㅠ// 재미있어염.^^*ㅣ.
잼따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훗8빠
후훗8빠
후훗8빠
-_-; -_-; ㅇ ㅏ오아오; 백묘님이 허가하셨따니... 조아리님의 공지사항으로 인해 내 리플 삭제!ㅋㅋ 조아리님 수고하십쇼~보는 님들도 수고하십쇼~
↑그런말 하는거 아니됩니다..수정하세요..
ll상큼쥔이l...님¸ 퍼온거라뇨/? 이소설 베라에서 연재된걸로 아는데요=ㅁ =? 아닌가?
퍼온거 아니래요ㅇ, ㅇ!!! 왜 그런코멘밖에 안올리시지 ? 55화까지 보다가 감..ㅠㅠ 너무 재밌어요>_< 백묘님 글쓰는솜씨 진짜 좋으시다>_< !!!
헐 현욱오빠 성격이랑 우리오빠성격아랑 넘무 비숫하당..건이 오빠는 넘우 불쌍해요ㅠ^ㅜ 근냥 고백이라도 ㅎ ㅏ묜 조울텐ㄷ ㅔ꼭이루워 졌씀죠겨,,,근대..상쿰쥔이뭐라 좀 퍼오기랑도 하면 안돤다는 이유이성 어심그말삭제 하지 조나짜증만빠인거알아 보눈사랑신경거슬리게좀 하지좀 마 그런짓이라면 사양해줄태니까
아!! 소설 너무재밌어요 ㅠ ㅠ 백묘님 소설 너무 잘쓰시는거 같아!ㅠ ㅠ 확실히 슬플땐 슬프고 웃길땐 웃기고 !! 아 너무 잘쓰신거같아요!!^ ^
넘넘 잼따>_<♡이거 완결나면 울꺼가틈>_<!
전 소우가 다친거 보고 진짜 눈물났어요 ㅠㅠ 근데 난 건이랑 잘되는거 싫지만 잘어울릴수도 -_ㅠ;;
하울의 움직이는성 보고왔음..ㅋㅋ 너무 재미있어요>_<!!!
백묘님 쓰신글 전부다 재밌음 ㅠㅠ
윗님말씀 동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