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거꾸로 타기=====
(제11구간=제21소구간 ; 늘재→전망대 바위(696.2m 아래)→밤티재→입석바위(698m)→문장대 (1,054m).휴게소→문수봉→청법대.경업대-신선대-입석대-비로봉 (1,032m)-천황봉(1,057m)-전망바위-피앗재 ; (20회차)
-들어간 날 ; 2004. 1. 18 (일)
-날씨 ; 전구간 눈밭. 흐리고 가끔 눈발. 오전 따뜻, 오후 쌀쌀
-구간 ; 제11구간, 제21소구간. 제20회차
-코스 및 표고, 시간
05:40 늘재 출발
06:40 전망대 바위
07:50 밤티재
08:30 묘지지나 능선 빈터- 라면+김밥으로 아침식사
09:00 아침밥 말끔히 출발
11:50 문장대 휴게소. 당귀 막걸리 반말(점심 대신) 12:20까지
12:50 신선대 휴게소=막걸리+전 안주, 음료, 라면등 있음-그냥 통과
13:15 입석대(1,003m)
14:20 천황봉(1,057.7m)
17:20 피앗재
18:20 만수동 계곡 하산 완료
-운행거리; 도상 약15Km, 누계 266.5Km
-운행시간; 당일 12시간 40분 .
-교통편 및 대간 능선 접근= 거창팀; 승용 직접=김천-상주-내서-25번 국도상-화령재아래
하송삼거리 문장대 모텔옆 기사식당앞 합류
서울팀; 청산학원 전용특별버스 밤 11시30분 출발.- 04:40 하송삼 거리 합류
-쓴돈; 차에는 휘발유. 배낭에는 담은 술 약간
-특기사항; 지난해 덕유구간 이후 흰눈 산행 처음. 우리만 보고 밟기엔 너무 섧어...
-대사들; 거창 백신종. 윤성진 2명
서울 유영래대장과 12명 총원 14명
산행그림
곰내미에서 농사짓는 식구들과 저녁 술자리가 너무 찐해져 밤 11시쯤 빠져 나와 두시 간쯤 눈을 붙이고 윤성진 무심회장을 꼬셔 새벽 2시 20분 거창을 출발했다. 밤길이지만 속력을 냈다. 자주 다닌 길에다 조금이라도 눈좀 붙이려는 욕심- 깜깜한 새벽을 뚫고 3시 50분 약속 지점에 도착, 의자에 비스듬히 누웠다. 20분쯤 지나 대장과의 통화- 이번 기사께서 초행에 밤길이라 길을 두 번이나 놓쳤나 보다. 4시 40분쯤 합류 만수동으로 곧장 간다는 게 또 비재길 놓치고, 갈령 놓치고, 버스는 계속 주행-엄머? 하산 예정 지인 늘재로 미끄러지며 웽웽-
대장에 긴급동의- 속으로 한참 망설이며 구시렁거려 쌓다가- 형님 오늘은 거꾸로 타얄 것 같소, 지금 만수동으로 들어간다면 피앗재까지 3시간쯤 걸릴.... 했더니,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한참을 지난 뒤 어렵게 결정한 듯, 자! 차 세우세요. 야 다들 내리어!- 그리 하야 대간 종주중 처음으로 백두쪽에서 지리로 향하는데, 이 맛 또한 좋을 듯 해. 우리 집이 가까워지니...49번 국도상 늘재 고갯길은 눈이 얼어붙어 빙판이다.
5시 40분 속리를 향해 뿌연 새벽을 헤드렌턴으로 가른다. 날은 밝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던가? 비교적 포근한 날씨에 바람도 없다. 거꾸로 걸으며 생각하니 산 이름도 오늘은 거꾸로다. 피앗재에서 오르면 俗離山인데 늘재에서 오르면 離俗山이라 불러야 옳다. 글치?
40분쯤 오르니 629봉. 육이구? 어감이 이상하구마, 오를수록 눈이 제법 쌓여 있어 출발 때 아이젠은 모두 했기 때문에 스팻츠를 두르도록 했다. 우리의 종마 F1- 원교(중학교 2학년)가 씩씩하게 함께 걸어 모두들 뿌듯해 했다. 역시 종마! 자격에서부터 혈통관리에 평소 소홀함이 없는 듯 했다. 따식이 애비에 농담들을 던져 싸서 그렇지, 똘똘해- 합격점 통과- 배낭 속에 아이젠과 스팻츠가 있지만 정말 너무 오랜만에 밟는 눈이라 맨발로 걸었으면 싶어 그냥 K-2비브람 25년된 신발에 의존키로 했다. 다음 판엔 옛 어른들의 입산 차림으로 짚신에 죽장 하나만으로 동계산행을 해볼 작정이다. 히히 벌써 동상 걸려 발가락 없어진 뭉텅발이 보이누먼. 숨들 고르고 발끝에 후랫쉬불 단 듯 번쩍이며 7시 50분 밤티재에 내려섰다.
절개지 옹벽 공사한다고 잿만당이 엉망이다. 어둠은 걷혔지만 흐린 아침이라 우중충한 분위기. 시장끼가 걸음을 잡는다. 아침을 밤티재에서 먹자 했지만 양반이 어찌 길가에서 수저를 들수 있느냐 하여 곧장 입산금지 푯말이 크게 세워진 대간 마루금을 내 딛는다. 양반되기 힘들고 배 또한 억수로 곺구나! 양반은 끼니를 굶어도 이빨은 쑤시라 했던가? 40분쯤 걸어올라 전망 좋은 넓은 터에서 끓이기 시작. 가장 맛있는 라면 국물+김밥. 떡라면 하려고 집에서 가래떡 한 봉지 가져갔는데 점심 걱정에 아끼기로 했음. 1시간씩 여유 있는 아침식사 시간을 쫓기듯 30분만에 마무리하고 서둘러 행진, 전진
눈과 상고대가 어우러져 온통 하양이다. 그래도 키큰 나무들의 양지쪽이 녹아 나무 선을 잡아주니 눈이 꽃이 되었다. 오를수록 산은 낮아지는데 쌓인 눈은 높아지고, 대간 구간 시작하며 가장 긴 암릉길-개구멍 바위터널 세 곳- 두 곳은 내 여덟달 된 돈 배가, 아니 똥배가 겨우 비집고 나갈 수 있으니 배낭도 던져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그래도 온몸이 다긁히고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자일을 걸고, 이미 매놓은 밧줄은 그 진 삭아 곧 사고를 낼 듯- 이왕 고생한 상주시청산악회에서 돈도 좀 쓰고 힘도 좀 보태면, 이 좋은 코스가 더욱 빛 날 듯. 상주시청산악회 파이팅!!!
고꾸라지고 미끄러지고 소쿠라지길 2시간 50분, 운무속 운설중 문장대에 서니 속리가 속리가 아니라 속세로구먼! 이길 저길 가까운 길을 올라온 산꾼들이 왁자한 게 눈오는 장터 분위기다. 문장대엘 3번만 오르면 극락에 이를 수 있다하여 이리 법석일까? 본래 오늘처럼 구름 속에 묻혀 있다하여 운장대라 하였는데 세조가 이곳에서 매일 시를 읊었다하여 문장대라 하였다니...쇠사다리와 어지럽게 얽힌 밧줄, 철골이 꼭 지옥? 가는 길 같다. 문장대휴게소표 씨라기국이 일미이고, 당귀 동동주가 특미라. 점심대신 점술 한잔으로 땜질을 하고 북풍한설 휘모는 중에 별 인간들 설쳐대는 걸 뒤로하고 속리 제일봉 천황봉을 향하여 바삐 걸음을 옮긴다. 아무래도 늦은 하산이 걱정이 된다. 술 반말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남은 술 페트병에 한병 옮기고 서둘러 취한 걸음으로 문장대 탈출! 에그 시끄러움. 지금부턴 완전히 취중운행, 졸음운전-밥도 멕이질, 잠도 재우질 않고 계속 걸려봐라! 항우장사도 술, 잠 앞엔 꼼짝을 못하는 벱!
오후 2시 20분 우리의 천황산- 우리를 함부러 써도 안될 일. 그러나, 참말로 너,나, 합한 우리가 보듬을 수 있다면 야 우리 산이라 해도 무난할 듯. 인간 삶이 그 이름을 바로 세우는 기나긴 역정 일진대-공자왈 正名論이라, 그 산 속리가 아니라 너와 나의 속리! 그래, 우리의 속리!!
천황봉 정상 표지석에 새겨진 노산 이은상님의 "금강에서"-
금강이 무엇이뇨 돌이요 물일러라
돌이요 물일러니 안개요 구름일러라
안개요 구름일러니 있고 없고 하더라
빗돌 쓸며 커렁커렁 읊고자 하였건만 허허, 아니로고!
산을 떠난 인간들이(산에 든 인간이면 이리야단하고 법석이 아니련만)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박고 기념담을 나누고 바람 속에 안개 속에 눈발 속에-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 대충 우리도 사진 한컷 담고 안개려니 구름이려니 쏟아져 내리듯 하산을 시작했다. 이 나라 산천 어디에고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길과 노래 없는 땅이 있을까.-(고운선생 흔적중 가야산 해인사 맞은편 고운암이 그중 제일이라!!=적극 안내 함-혼자 들기 아까워...) 조선 팔경이 어디 어느메인진 다 모르지만 암튼 속리 또한 조선 팔경의 하나라 극찬하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뒷길을 돌아보니 대장 말마따나 경상도쪽 산 능들은 바위도 썽깔있게 생겼고, 충청도쪽 산 능은 수월키도 해라! 근디 은근히 골병은 충청도쪽 산이여. 속리를 드는 곳이야 무릇 기하 이랴만 보은 내속리로 드는 게 양반 길인가 보다. 임금님 든 길이어서 일까. 말티고개 해발 800m-고려 왕건이 닦았다하니 굽이굽이가 옛 조상의 숨결이라! - 죄 많은, 한 많은 세조 임금이 법주사 기도 들 때 가지를 아래로 축 내려 읍을하매, 다시 가마가 걸릴듯해 "연 걸린다!" 하니 가지를 들어 무사히 지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 갈 땐 비가 너무 쏟아져 이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대나. 하여 참으로 기이한 인연에 정이품의 품계를 하사 하니 지금의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이라. 소나무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놀라움! 벼슬도 좋지마는 지금은 만사 돈 아닌가? 경북 예천의 石松靈 소나무(천연기념물 294호)는 자기 앞으로 토지가 등기되어 있다. 성이 석씨인 노인이 600여년전 폭우에 떠내려온 소나무를 마을 앞에 옮겨다 심었는데, 신통하게도 잘 살아나 마을 수호목으로 흠없이 자라는 지라, 무려 높이와 넓이가 하늘 땅을 메울 정도라니! 그후 이마을(예천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이란 어른이 후손이 없자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모두 석송령에 이전-때는 바야흐로 1928년이라- 세계에서 유일하게 재산세를 내는 소나무가 대한민국엔 있다니-근디 요즘은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해 이곳에도 뭇 인간들이 몰려와 막걸리를 퍼 멕이는 바람에 우리의 석송령이 비틀 거린다는데, 에그 그 막걸리 우리의 종마에게나 보내주면 고맙단 인사나 들을 텐데...어휴, 가지 운문 아래 운문사 반송은 일년에 한번씩만 막걸리 대접을 하니 독야 청청하던디- 법주사 팔상전과 금동미륵대불, 금강문, 사천왕문, 원통보전, 미륵전...가람 배치의 정형으로 양산 영축산 통도사, 김제 모악산 금산사와 함께 교본으로 꼽힌다니.
저으기 정상주를 손에 들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시낭송을 곁들여야 했는데 사바 속세가 다름 아니라 서둘러 찬바람과 함께 쏟아지듯 하산- 속리산에 떨어지는 이 눈이 녹으면 한강, 금강, 낙동강으로 등돌려 흘러가니 삼파수라 하는데, 삼파수- 세갈래로 찢어진단 말인가?
정말 사다리를 타듯 무서운 속도로 내려서면 대목리로 가는 갈림길. 오후 2시20분 출발했으니 기본 3시간? 버스 타는 시간 곳까진 4시간 소요. 벌써 몇 사람은 지쳐 있었다. 남은 시간 한시간 반이라며 용기?를 넣어주며 정말 지루하게 나아갔다. 윤성진 무심회장의 지구력이 대단한데 와 진짜 속리산에 당했단다. 이렇게 지루하게- 앞도 뒤도 뵈질 않고 눈덮힌 산 길 바람 부는 마루금 휘청 이며 걸어야 하니. 눈은 나아 갈수록 높아지고 첫발 내딛는 길잡이는 샛눈으로 길을 잡아 나아가고...아차 하면 모두가 헛고생으로 대간길을 놓치니!
해설은 필요 없을 듯, 맨 앞서는 사람의 발자욱만 따라 하산 하산...속도가 늦어지니 대장이 맨 앞에서 길을 끈다. 아튼 피앗재에서 혼자 떨고 기다리는 대장과 모두 합류-5시 20분- 결국은 대간 속 12시간! 지난번 하산 코스로 다시 내려서니 감개가 무량이라. 근디 대사들 걱정이 또 얼음 깨고 퐁당 퐁당 시킬까봐 은근히 떠는데.... 일찌감치 걱정끝 오늘은 세낭, 세족 없음. 온도 급강하. 백설분분.
버스에 온도를 높이고 기다리는 나이든 기사 아저씨는 3시경 하산한다는 인간들이 하산은커녕 통신마저 두절이라. 119로, 회사로, 조난신고 하느라 진땀을 뺐다는데....이 양반이 놀라긴 제법 놀랐는지 새벽 만날 때 투덜거린 인상이 활짝 펴져 어서 오라고 인사를 안 하나, 다 왔냐며 싱글벙글 까지 안 하나. 온몸에 붙은 얼음과 눈 채로 차안에 들어도 군소리조차 없네. 허허 재밋는 일이여.
만수동에서 어두운 버스를 타고 그대로 졸도? 새벽 출발한 하송 삼거리까지 이동 -7시 30분 기사식당으로 모두 들고, 거창으로 와야할 우리는 부여잡는 술꾼들과 삼겹살을 뿌리치고 애마를 몰고 칠흑 길을 달려 달려...
거창의 밤 11시 소주 2병에 해물탕 국물로 21시간의 긴 속리구간 해단식 마치고 집에와, 대충 물 끼얹고, 마누라 못 듣게 끙끙 앓으며 꿈나라로...
한해의 끝, 대간 정기 받아 모다 다 나누어주고, 속리 산신령께 한해 운수풀이 안겨두고...이렇게 섣달 그믐이 저무누나!
내 나이 52년생 52살이 모양있게 짝을 비켜 가누나!!
첫댓글 아쉽다. 사진 빨리 보고 싶습니다. 내 것은 왜 안보이는지... 백두대간 이어가기 팀들도 접수해 볼까나 합니다.산을 탄 것인지 부처님 마음을 탄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히히 사진은 안보여요. 눈을 감으면 보일 수도 있구요. 세락거사님은 내공이 높은지라 문장대 뒤에서 쉬하는 그림까지도 보일터인디...ㅎㅎㅎ
맞아요. 그게 잘 보이다가 지난 부친제사때 아들과 함께 음복한 사실이 있어서 1년정도 더 고생해야 보일듯합니다.그때되면 또 제사이고 영영 내공이 쌓이질 않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