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田의 본래 지명은 太田
1.태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경부선 철도의 개통을 알리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기사에 태전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후 모든 공식자료(대한제국 정부의 공식문서)에 이곳의 공식지명이 태전으로 기재되었다 민족정기 말살의 원흉, 이또오 히로부미(이등박문
대전에 관한 예언들 [설총결 일부] 艮地太田龍華園에 三十六宮皆朝恩이라. - 간방(한국)의 태전은 용화 낙원의 중심지라. 세계만국(36궁)이 그 은혜를 조회하리라 [정감록의 일부] 살아자수(殺我者誰)오 소두무족(小頭無足)이 신부지(神不知)라. 삼인일석(三人一夕)은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도하지(道下止)하라. -이재전전(利在田田)은 진리가 매듭지어지는 구원의 도가 태전(太 [태전가사] 송송가가(松松家家)지낸 후에 이재전전(利在田田) 밭을 갈아, 안태전(安太田)을 많이 갈아, 궁을궁을(弓乙弓乙) 때가 오니 어느 밭에 가잔말가. -지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살아나는 법방인 송송가가 후에, 앞으로 궁궁을을의 때에는 태전에서 살아나는 법방이 나온다는 뜻. [춘산채지가] 내 손 잡고 놓지마라 떨어자면 아니된다. 우리 오빠 매몰하네 왜 이같이 못오는가? 우리 서울 새서울 이리가면 옳게 가네(남강철교 중에서) 여름도수 지나가고 추분도수(秋分度數) 닥쳤으니, 천지절후(天地節候) 개정(改正)할 때 오장육부 환장(換臟)이라. 수토복통(水土腹痛) 앓을 적에 임사호천(臨死呼天) 급하더라, 구년홍수(九年洪水) 몰아드니 몸돌릴 틈 없었구나. 이재전전(利在田田) 찾아가니 (칠월식과 중에서) -천지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우주가을 대개벽기의 위급한 상황에는 새서울인 태전에 가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격암유록] 利在田田陰陽田 二人太田水田穀 天牛耕田 田田 大難全世人心洶洶하니 入田券 얻기가 極難구나. (격암유록 전전가) -가을 대개벽기에 태전에서 출세하는 두 사람이 인간추수를 하며, 전세계 사람들의 인심이 흉흉할 그때에는 태전에 들어가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오늘날 대전의 원래 이름은 태전(太田)이었다. 그것이 대전으로 바뀐 것은 1909년 1월 이토오 히로부미가 태전을 방문했을때 대전의 웅대한 산수풍광을 보고 지세가 뛰어난 이곳에 '太'쓴다면 일본을 해하는 큰 인물이 나오리라 하여 지명을 대전(大田)으로 바꾸어 부르라고 지시한 데서 유래한다.
태(太)자는 사람형상의 大자에 생식기를 상징하는 점을 찍은 것으로 창조를 상징한다. 즉 태극의 의미이다. 더 이상
클 수 없고 높으며,근원적인 경지를 담고 있는 글자다.
이제 대전의 지명을 다시 태전으로 바로 잡아야 하며, 앞으로 바로 잡아질 것이다. 설총결에서 동북간방 태전이 용화낙원의 중심지가 된다고 하였으며, 격암유록에 수없이 나오는 전전은 바로 태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이태전수전곡 이재전전음양전:태전에서 두 명이 짓는 생명수(석정수)농사의 곡식은, 그 이로움이 전전에 있으니 전전은 음양 두 명의 진인을 뜻하는 田이네<은비가>]또한 태전은 세계문명의 중심지로 탈바꿈되게 된다.
그래서 행정수도도 대전으로 옮기게 된것이며, 1993년 세계박람회(EXPO)표어가 "세계는 대전으로 대전은 세계로!"된것도 우연이 아닌것이다.
대전시(大田市)는 원래 '한밭'이라 불려 왔던 곳이다.
고려 때 공주에 붙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공주군 산내면에 편입되어 내려왔다.
고종 32년에 회덕군에 편입되고, 1901년 경부선의 대전역을 설치함에 따라 급속도로 발전이 되었다
1926년 3월 대전면의 구역 확장에 의하여 외남면의 일부를 편입하고, 1931년 4월에 읍제를 실시하여 대전읍이 되었다.
1940년 11월 1일 대전부 구역 확장에 의하여 대덕군 외동면의 판암, 용운, 자양, 가양, 성남, 홍도의 6개리와 유천면의 용두, 태평, 유천, 산성의 4개리와 산내면의 석교리를 편입하여 동명을 모두 왜식의 정(町)으로 고쳤다가,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대전부를 대전시로 하는 동시에 동명은 정을 모두 동으로 고쳤다.
1962년 11월 1일 법령 제1167호로써 대전시 구역 확장에 의하여 대전직할시가 되었다.
관광지로는 사정지구 국민관광지, 보문산공원, 세천어린이공원, 가양공원, 유성온천지구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갈마공원, 광로공원, 구봉산공원, 남선공원, 동춘당공원, 목척공원, 뿌리공원, 서대전공원, 샘머리공원, 월평공원, 테마공원 등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평송청소년수련원, 동구청소년수련관, 대덕구청소년수련관, 대전청소년수련마을 등에도 청소년 학습장 및 야영장이 마련되어 있어 단체·가족·직장 단위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또한 엑스포과학공원·대청댐·대덕연구단지·한국담배인삼공사 등의 산업관광자원이 있다. 주요 산으로는 갑하산·식장산·계족산·금병산·구봉산·빈계산·장태산·보문산·우산봉·천비산 등이 있으며 고산사·성불사·무량암·일성사 등의 사찰이 있다.
그 밖에 동춘당·박팽년유허비·남간정사·도산서원·계족산성·보문산성·우술성·옥류각 등의 문화유적과 유물이 산재하고, 국립대전현충원·유성컨트리클럽·무수동·민속마을(중품마을), 만남의 광장, 신탄진 안영유원지 등의 관광지가 있다.
대표적인 먹을거리에는 6미3주(六味三酒)라 하여 이 지역의 으뜸으로 치는데, 6미는 대청호민물고기매운탕·설렁탕·숯골냉면·돌솥밥·구즉도토리묵·삼계탕(계삼탕)을 말하고, 3주는 구즉농주·대청참오미자주·동춘당국화주를 말한다. 보통 유성온천, 엑스포과학공원, 계족산 노을, 보문산 녹음, 식장산 자연휴양림, 장태산 휴양림, 구봉산 단풍, 대청호를 대전팔경으로 부른다. 특산물로는 유성배·유성딸기·산내포도가 있다.
문화재는 2001년 현재 총 137점으로 국가지정문화재 4점(보물 3점, 사적 1점)을 비롯해 시지정문화재 82점(유형문화재 31점, 무형문화재 10점, 기념물 39점, 민속자료 2점)과 문화재자료 41점이 있다.
대전의 원래 이름은 "太田" 이었습니다. 일제 시대때 이토우히로부미가 그곳을 지나다가 태전의 지기를 보고,민족이 크게 대성해서 일어날 형세 여서 ,격하해서 대전이라고 아예 지명을 바꾸었습니다.
대전의 지기는 봉황새가 둘러싼,그리고 계룡산의 정기로.....뭐 대충이런 야그 입니다.
그리고 "계족산"의 원래이름은 "봉황산" 입니다.
그것도 일제가 닭발산이라고 격하 한것이지요.
아 그리고 우리 그냥 하는 말 있잖아요? 몸은 여기 있고 맘은 딴데 가있을때"맘이 콩밭에 가있는데 무얼 하겠냐??" 이런 식이요
대전은 원래 아주 옛날에는 콩밭 이었답니다.대전을 두고 한말이지요.
대전의 변천과정
신라 때에는 비풍군, 고려 때에는 회덕현·유성현·진잠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하의 회덕현·진잠면으로 큰 변동없이 계속되어오다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진잠군 지역이 되었다.
그후 1914년 3월 1일 회덕군·진잠군과 공주군의 일부가 합쳐져 대전군이 신설되었고, 종래의 회덕군과 회남면 지역(현재 인동, 원동, 중동, 정동, 삼성동)을 중심으로 대전면이 신설되어 이 지역이 현재 대전광역시의 모체가 되었다.
그후 대전면에서 대전읍, 대전부가 되었다가 1949년 8월 15일 대전시가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덕군 전역을 편입하면서 대전직할시가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유래
대전은 순수한 우리말로 한밭(거대한 밭)=대전(大田)입니다
옛날에는 한밭고을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전의 변천과정
신라 때에는 비풍군, 고려 때에는 회덕현·유성현·진잠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하의 회덕현·진잠면으로 큰 변동없이 계속되어오다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진잠군 지역이 되었다.
그후 1914년 3월 1일 회덕군·진잠군과 공주군의 일부가 합쳐져 대전군이 신설되었고, 종래의 회덕군과 회남면 지역(현재 인동, 원동, 중동, 정동, 삼성동)을 중심으로 대전면이 신설되어 이 지역이 현재 대전광역시의 모체가 되었다.
그후 대전면에서 대전읍, 대전부가 되었다가 1949년 8월 15일 대전시가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덕군 전역을 편입하면서 대전직할시가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잘
연혁
지금의 대전은 조선시대의 충청도 회덕현·진잠현 일원, 그리고 공주목의 동남부지역에 해당한다. 1895년과 1896년의 지방제도 개정으로 각각 충청남도 회덕군·진잠군·공주군이 되었으며,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공주의 두입지(斗入地)였던 구즉면·탄동면·천내면·유등천면·사내면과 청주의 비입지(飛入地)였던 주안면, 그리고 문의의 비입지인 지평촌면이 회덕으로 편입됨으로써 회덕군의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오늘날 대전의 서부지역은 과거 공주에 속했던 곳인데 이때 회덕에 소속되었다. 20세기초까지 한적했던 '한밭'[大田]마을이 커지게 된 것은 1905년 경부선의 통과역으로 결정되고, 1910년 회덕군청이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1913년에 대전을 출발점으로 하는 호남선이 개통되어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지로 대두되면서부터이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진잠군의 북면(일부)·서면(일부)을 진잠면으로, 상면·하면·동면(일부)을 기성면으로, 회덕군의 천내면(일부)과 유등천면을 유천면으로, 천내면(일부)·공주군 현내면을 유성면으로, 내남면·현내면(일부)을 내남면으로, 탄동면과 공주군 명탄면을 탄동면으로, 구즉면·서면(일부)을 구즉면으로, 외남면·산내면(일부)을 외남면으로, 산내면(일부)을 대전면과 산내면으로, 북면(일부)·일도면(일부)을 북면으로, 일도면(일부)·동면(일부)·주안면을 동면으로 통폐합하여 대전군을 신설했다. 1931년에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32년에 충청남도 도청이 이곳으로 이전하자 신도시 대전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935년에 대전읍이 부(府)로 승격하면서 대전군은 대덕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대전시로 바뀌고, 1963년 대덕군의 유천면 일원과 회덕면·산내면 일부가 대전시에 편입되었다. 1977년에 동구·중구 설치, 1983년에 유성읍과 회덕면을 편입, 1988년에 서구가 신설되었다. 1989년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덕군 일원을 병합하여 유성구와 대덕구를 신설하고, 대덕군을 폐지했다. 1994년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개요]
대전광역시
동쪽은 충청북도 옥천군, 서쪽은 충청남도 공주시, 남쪽은 논산시·금산군, 북쪽은 연기군 및 충청북도 청원군에 접하고 있다. 서해안개발시대를 맞아 중부권의 중추기능을 담당하는 성장거점도시로 발전시킨다는 취지에서 1989년 직할시로 승격했으며, 이와 함께 유성구·대덕구를 신설하는 등 행정구역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4년 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부선·호남선,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의 분기점이 되는 교통의 요지로서 지금까지는 소비도시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대덕연구단지 조성,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개최, 3군사령부 이전 등을 계기로 행정·과학 중심도시,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핵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서울-부산 간 고속전철 건설도 추진되고 있어 이들 사업이 완성되는 2000년대에는 제2의 행정수도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발전할 것이다. 동구(東區)·중구(中區)·서구(西區)·유성구(儒城區)·대덕구(大德區) 등 5개구 86개 행정동 177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중구 대흥동이다. 면적 539.85㎢, 인구 1,438,778(2003), 인구밀도 2,666.2명/㎢(2003).
서구
시의 남서부에 있는 구. 구의 남서부는 구릉성 저산지이며 북동부는 갑천과 유등천이 만나는 범람원 평야지역이다. 구 면적의 절반 정도가 개발제한구역이며 시가지는 북동부 평야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유등천을 사이에 두고 서구 중심가와 접한 지역이 중심시가지였으나, 북부 둔산동 일대에 신도시가 조성되고 월평동과 정림동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면서 이 일대가 중심시가지가 되었다. 1988년부터 시작된 둔산 신도시 건설사업은 1995년말 완공되어 약 869만㎡에 아파트 및 단독·공동 주택 6만 1,080가구를 건설해 24만 4,320명을 입주시켰다. 구 관내의 원활한 교통소통을 위해 갈마천 복개공사가 이루어져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도로포장사업이 마무리되었다. 1994년 현재 도로포장률은 78.9% 정도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59개소, 초등학교 23개교, 중학교 20개교, 고등학교 9개교, 그리고 대전간호전문대학과 배재대학이 있다. 종교기관으로는 개신교 교회 235개소, 천주교 교회 6개소, 불교 사찰 29개소, 기타 교당 3개소가 있다. 의료기관으로는 종합병원 1개소, 병원 1개소, 의원 108개소, 치과의원 59개소, 한의원 47개소가 있다. 갈마(葛馬)·복수(福守)·변(邊)·용문(龍汶)·괴정(槐亭)·가장(佳狀)·도마(桃馬)·탄방(炭坊)·삼천(三川)·내(內)·정림(正林)·둔산(屯山)·월평(月坪)·도안(道安)·관저(關雎)·괴곡(槐谷)·흑석(黑石)·매로(梅老)·산직(山直)·장안(壯安)·평촌(坪村)·오(五)·오명(午鳴)·원정(元亭)·용촌(龍村)·봉곡(鳳谷)·가수원(佳水院)·만년(萬年) 등 28개동과 301개통 1,345개반이 있다. 구청소재지는 갈마동이다. 행정동별로는 갈마동(3만 5,432명)·가장동(3만 7,716명)·월평1동(3만 7,899명)·월평2동(3만 7,301명)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며 인구가 가장 적은 동은 기성동(1,608명)이다. 또한 기성동은 면적이 가장 넓어 인구밀도가 109명/㎢에 지나지 않는다. 기성동은 1989년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될 당시 대덕군 기성면이 편입된 곳이다. 면적 95.35㎢, 인구 411,576, 인구밀도 4,316명/㎢(1996).
▶ 도마동(桃馬洞)
갑천(甲川)변에 위치한 곳으로 말이 지나갔다는 의미가 되며 이러한 해석은 실제의 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산맥의 흐름 즉 내룡(來龍)을 의미하며 도마라는 지명 다음에는 꼭 말과 관련된 지명이 나오는 것이 그 좋은 예로 이곳 도마동 다음에는 갈마동(葛馬洞)이 있으며 대둔산의 마천봉(馬天峰)을 출발한 말이 이곳을 지나 갈마동으로 물을 마시러 갔다는 내용이 되어 한자표기도 度馬洞으로 고쳐써야 옳다고 생각한다.
서구 도마동의 유래
도마교리에서 동마동으로 와전
배재대학교 뒷산인 연자산 부터 북으로 내원사 뒷산인 도솔산까지 서쪽으로 병풍처럼 벌어진 야산이 구릉을 이루고 있고, 동쪽으로 유등천까지 펼쳐진 들판이 도마동이다.
도마동은 동쪽으로는 유등천을 경계로 중구 유천동과 서쪽은 서구 도안동, 남쪽은 복수동과 정림동, 북쪽은 변동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여지도서 공주목의 동유등천면에 보면 도마교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지에 도동, 동동현, 손도동, 바도동 등이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마동은 길 도 자 도마동이 되어야 마땅한데, 엉뚱하게 도자로 쓰게된 것은 일제 시대때 행정지명이 결정되면서 와전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밀양 손씨 족보에도 도교로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촌로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잇다.
밀양 손씨 족보에 ,의하면 도마리에 맨 처음 산 사람은 고려시대 때 호서백을 지낸 임건으로 순무사에 이 곳에 이르러 세 곳을 정했다 한다 첫째는 도교, 지금의 도승고 송화숙이 거처하도록 했으며 셋째는 외가동 지금의 변동(갓골)은 또 다른 사위인 참의공 박진이 살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때 도마동이라는 이름은 도교에서 유래된 도마리에서 도마리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