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회심 - 이영훈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사울의 회심
이영훈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사도행전 9장 10-22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설교 한눈에 보기
1. 아나니아의 순종과 사울의 회복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능력 있는 신앙을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2. 눈의 회복
눈이 회복되어 영안이 열리면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우리 눈에서 원망과 불평의 비늘을 벗겨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3. 관계의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파괴된 관계가 회복된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용서할 수 있다.
* 핵심 메시지
주님의 사랑은 전인적인 회복의 역사를 이루게 한다.
* 청중의 적용 포인트
‘내가 회복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만나면 그 삶이 180도로 바뀝니다. 운명이 달라집니다. 저주받은 인생이 축복받은 인생으로, 절망의 인생이 희망의 인생으로, 문제와 고통이 가득한 인생이 기쁨과 감사로 넘쳐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던 삶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은혜로 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할렐루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일생은 감사의 일생이 되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일생을 감사의 삶을 사시길 원합니다. 감사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면, 구원을 받을 만한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만세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우리가 택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만입이 있어도 다 감사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내가 믿어서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믿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아나니아의 순종과 사울의 회복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1. 아나니아의 순종과 사울의 회복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7)
사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과 자기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삶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바뀌어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을 대적했지만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 받쳐 헌신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어떻게 그렇게 나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교회도 무너뜨리고, 예수님 믿는 사람 잡아다 감옥에 집어넣고, 나쁜 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를 부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강한 빛에 눈이 멀어서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한 사람에게 말씀이 임했습니다. 환상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을 감옥에 잡아넣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원수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위해서 안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못마땅했지만 주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머물고 있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해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으나, 말씀을 의심하거나 부인하거나 또는 순종하기를 망설이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은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말씀이 서는 곳에 서라”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 일생을 보장해 주십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면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 가운데도 주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채 낙심하고 절망하며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의 이야기에는 귀를 닫고 주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내가 그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제가 그 말씀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주님 말씀을 통하여 변화 받고 치료받고 용서받고 새 힘을 얻기 원하오니 오늘도 제게 말씀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들려주신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으로 변화되고 치료받고 자유케 되는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순종한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수를 받은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사용하시기 전,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주의 일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파하는 증인의 삶을 살고,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는 능력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는 증인이 되는 권능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증인의 권능을 받으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또한 기쁨과 감사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마음이 기쁘고 감사가 넘쳐나 매사에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활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단테의 「신곡」은 중년의 단테가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는 내용의 대서사시입니다. 여행을 하던 단테는 얼굴이 어둡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인물을 만납니다. 단테는 그에게 왜 방황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는 본래 지옥에 들어갈 사람인데, 마귀가 못 들어오게 합니다. 마귀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지만, 이 책은 열심이 없는 사람은 마귀조차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한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도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 3:16)
라오디게아의 물은 지열을 받아서 미지근합니다. 미지근해진 물에는 석회질과 같은 물질들이 섞여 세균이 많이 번식합니다. 이 물을 그냥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온갖 세균이 들끓는 라오디게아의 물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온갖 세상적인 것들이 다 들어왔습니다. 염려, 근심과 같은 세상의 세균들 때문에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없고 변화 또한 없었습니다. 첫 사랑의 열심과 뜨거운 예배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라오디게아의 신앙을 책망하시며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 하늘나라 갈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종국에 그는 복음을 위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힘든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이제 지쳐서 권사 직분 받고 조금 쉴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권사 직분은 쉬는 직분이 아닙니다. 더 열심히 성도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직분입니다. 주님 일에는 결코 은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는 하늘나라 갈 때까지 충성하는 것이고, 우리의 입술은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증거하는 증인의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버는 데 열심인 유태인을 빗대어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가게를 세우고 돈을 많이 벌었던 한 유태인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위독한 아버지를 뵙기 위해 자녀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어디 있느냐?”, 그러자 큰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아버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묻습니다. “둘째는 어디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셋째는 어디 있느냐?”, “네, 저 여기 있습니다.”, “그럼 막내는 어디 있느냐?”, “아버지, 막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그럼 가게는 누가 보고?”
그는 죽으면서도 가게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이 이야기는 유태인 아버지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라는 열심을 끝까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여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하여 주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일을 기쁨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의 복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2. 눈의 회복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행 9:18)
아나니아가 안수를 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강한 빛으로 말미암아 멀게 된 사울의 눈은 비늘이 떨어짐으로 다시 회복되였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사울이 큰 글자로 글씨를 썼다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있는 육신의 가시를 제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가시’를 두고 다메섹 도상에서 강렬한 빛을 비추인 후 나빠진 시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제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주님은 기도하는 사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린 바울이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으면 교만하게 될 수도 있어 하나님께서 가시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의 안수로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질 때, 그의 영안이 열리고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눈에서도 비늘이 벗겨지고 영안이 열리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눈에 어떤 비늘이 덮여져 있는지 깨닫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비늘, 미움의 비늘, 탐욕과 정욕의 비늘이 벗겨지기를 바랍니다.
몇 년 전,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가족에게 버림받은 채 성장한 지존파 단원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행복한 자들에 대해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들의 눈에 분노의 비늘, 미움의 비늘이 덮여 있었던 것입니다. 비늘에 씌여 바로보지 못했던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 죽이고 사체를 훼손, 유기하는 등의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그들이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서 미움의 비늘이 벗어졌습니다. 분노의 비늘이 벗어졌습니다. 증오의 비늘이 벗어졌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은 평안한 마음으로 사형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더 일찍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살인마가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요즈음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방황에는 문화, 특별히 영화 문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에는 욕하고 싸우는 내용이 많습니다. 영화 내용이 거룩한 내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은혜를 끼치는 영화가 제작되고, 겸손과 섬김의 가치를 인정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거리에서 은혜로운 찬양이 흘러나오고, 드라마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재로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문화인 기독교적 문화가 조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미움의 비늘도, 분노의 비늘도, 상처의 비늘도 벗겨져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가슴에는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래서 싸울 때도 너무나 거칠게 싸웁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한 형제, 친구들끼리 한편은 전경으로 또 다른 한편은 시위대에 가담해 싸웁니다. 가정에서도 부부지간이나 부모와 자녀 간에 부딪히고 싸웁니다. 이웃과 노사 간에도 갈등이 많습니다. 이러한 반목과 대립은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들고 나가서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증오의 비늘, 미움의 비늘을 벗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화해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비늘을 벗겨내야 됩니다. 원망, 불평하면 절대로 하나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감사하는 사람, 찬양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받아 우리의 마음과 영안의 비늘을 벗고 늘 감사, 찬양하여 주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관계의 회복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행 9:19)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잠시 못 보게 된 사울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기까지 삼일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때때로 영적으로 큰 도전을 받았거나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 우리도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몇 달 전, 성도님 한 분이 제게 갓난아이를 데려왔습니다. 태어난 지 한 달 됐는데 다운증후군이었습니다. 아이의 아빠와 엄마는 교회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잘못된 염색체가 고쳐지게 하옵소서. 아이 입이 열려서 엄마 젖을 빨게 하여 주옵소서. 귀가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 눈이 제대로 떠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 제목을 구체적으로 적은 편지를 가지고 와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고 저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부모는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 아이로 인해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더욱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있을 때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사울이 금식하며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며 주님 앞에 깨어지는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사울은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제가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모르고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고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가슴을 치며 눈물의 회개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울은 다메섹의 제자들과 함께 며칠 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다메섹에 있던 제자들은 사울이 이전에 지었던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사울을 용서했고 이들은 주님 안에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화목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완전히 파괴되어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인간 관계까지 회복시켜 주십니다. 서로 원수 관계일지라도 그 관계를 회복시켜서 친구가 되게 하고 형제, 자매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살다보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잘 아물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할퀸 사람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나를 모함하고 짓밟고 괴롭힌 사람들이 자다가도 생각나, 벌떡 일어나 분을 삭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결혼하고 시댁과 갈등이 생겨 깊은 상처 속에 눈물의 골짜기를 지납니다. 몇 년이 지나고 지나도록 그 고통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상처에 매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처에 매여 있으면 내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나의 육신에 병이 생깁니다. 상처에 매여 있으면 눈에 비늘이 가려지게 되고 내 삶 속에 기쁨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야 하는데, 영혼이 잘 못되니 범사가 잘 안 되고 주님의 축복이 사라져버리며 질병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모두 용서하셨으니 저도 제게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용서해야지’라고 생각했다가도 돌아서면 ‘그 못된 사람, 내가 가만두나 봐라’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게 상처 입힌 사람이 잘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 가운데 주의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나게 하셔서 용서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상처 입힌 사람을 주님의 능력으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자유함이 임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이십 년이 된 사람 때문에 아직도 속상해하고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이미 상대는 땅 속에서 다 썩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왜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서 내 마음을 좌지우지합니까?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고통과 괴로움을 끌어안고 살아봐야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용서하고 치료받고 변화된 모습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저는 손양원 목사님 일대기를 읽다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총으로 쏴 죽인 공산폭도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손 목사님의 따님은 이 일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오빠를 죽인 사람을 어떻게 오빠라고 생각하고 부를 수 있습니까?” 중학생 밖에 안 된 그 여동생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고통은 견딜 수 없이 컸습니다. 손 목사님의 용서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이 손 목사님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위대한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게 총살당해 순교하기 전까지 평생을 나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모습은 정말 귀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행해야 할 것은 바로 성령 충만 받아 과거에 우리를 괴롭히고 상처 입혔던 사람들에 대한 모든 안 좋은 기억을 예수님 앞에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원수와 같았던 사울이 변화되어 그들과 화목하게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이제 원수 되었던 사람들과 화목케 되고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이 바로 순종의 시간이요, 새 출발의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이전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나는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바랍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빛나고 아름답고 영광스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