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코너]<6496>비우당 다리
발행일 : 2004.09.17 / 여론/독자 A3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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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 팔도에서 과거 보러 상경한 선비들이 반드시 찾아보게끔 돼 있는 두 집이 있었다. 하나는 남산에 있다는 9999칸이나 된다는 중종 때 선비 홍귀달(洪貴達)의 허백당(虛白堂)으로, 단칸 헛가리집이지만 그 속에 드러누워 9999칸의 생각을 펼칠 수 있다 하여 그렇게 소문난 집이다. 다른 하나는 낙산 두메에 있는 선조 때 선비 이수광(李♥光)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이다. 그 비우당이란 이름을 단 청계천의 다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우당 가는 길을 잇는 다리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겠지만, 큰 뜻이 담긴 다리 이름이기에 되새겨볼 필요를 느낀다.
비우당은 비를 근근이 가린다는 뜻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아니라 겨우 비나 가리는 것으로 족한 오두막집이다. 선조 때 왜란에 종군했고 실학자이며 판서를 역임한 지봉(芝峰) 이수광이 이 집에 들어 살면서 지은 이름이다. 그렇게 지은 내력에 대해 지봉은 이렇게 써 남겼다. “낙산(駱山) 동쪽 모서리에 정승 유관(柳寬)의 옛 집터가 있었는데 일산(日傘)을 받쳐 두루 천만 리의 평안을 얻었고 천하가 그로써 새지 않았다. ” 조선조 초 3대 임금을 받든 정승 유관이 이곳에 초가를 짓고 사는데, 어찌나 청빈한지 장마철이면 비가 새게 마련이었고, 새면 과거 급제 때 하사받은 일산(日傘)을 펴들게 마련이며, 아내에게 “일산 없는 집은 장마철을 어떻게 나나”라고 물었다는 이야기에서 펼친 일산 철학이다.
이것이 연고가 되어 이 집에 우산각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선조 무렵에 판서를 두루 역임한 이희검(李希儉)이 그의 외4대조 할아버지의 집인 이 우산각에 들어 살았다. 이 양반도 어찌나 청렴했던지 ‘옷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고(衣足以蔽身) 밥은 창자만 채우는 것으로 족하다(食足以充腸)’는 철학을 몸소 실천, 친지들이 추렴해서 장사를 치렀을 정도였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이 집에 들어 산 분이 바로 이희검의 아들인 이수광으로, 이 집에 계승해내린 청빈정신을 비우사상으로 개념화하여 이곳을 성지화한 것이다. 다리만 말고 그 정신이 복원되는 데 일조가 됐으면 하는 청계천 다리다.
첫댓글 예전에 조선일보를 통하여 이규태 선생의 칼럼을 많이 읽었지요.
낙산 쌍용아파트에 손자가 살아서 자주 가보았던 '비우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