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힘으로 오른다
(인수봉 취너드 B 선등기 )
내가 등반이란 개념을 가지고 처음 산을 오른 것이 2005년 7월 20일이니까 등반을 시작한 지도 이제 막 2년이 넘었다. 그 동안 인수봉, 선인봉, 노적봉 장군봉, 적벽 등 등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산행으로 봉우리에 오른 것을 꼽아보니 20여회이상 되는 것 같고 나름대로 조금은 등반 기술도 익힌 셈이다.
돌아보니, 나이 들어 시작한 등반이 그래도 지금의 이 정도까지라도 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구니 해도 노원암장서 만난 왕봉순 싸부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는 나를 처음으로 인수봉 정상을 밟게 해 주었고, 등산 학교를 다니게 했고, 빙벽 세계에도 끌어들였고, 인공 등반의 맛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또 나를 수시로 괴롭히기도 했는데 그것은 틈만 나면 내게 ‘취너드B’ 언제 선등할 거냐고 다그쳐댔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만 있어봐. 실력을 좀더 쌓은 뒤에. 선등할 생각만 하면 밤에도 잠이 안 와’하고 피해가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말을 바꿔 공언하기 시작했다. ‘2007년 여름이 가기 전에(8월이 가기 전에)’라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마음 속으로 날을 잡기 시작했고, 1차로 날을 잡은 것이 8월 12일이었는데 그날 하늘은 우리들 등반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단합대회만 신나게 하고 다시 3일 뒤 15일로 연기하고 헤어졌는데 전날까지도 비는 그쳐 주지 않아 15일 등반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15일 아침에 왕대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종균 대장이 15일 등반을 강행하자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 좋아’ 속으로는 좀 켕기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30년 넘게 등반을 해온 베테랑 클라이머들이 하자고 하는데 초보인 내가 마다할 수는 없었다.
8시반경 어프로치 완료. 취나드B 코스를 바라보니 진민씨 말처럼 물이 줄줄 흐르는게 그야말로 완전 샤워중이다. 나는 내심 혹여 오늘 등반은 어려우니 워킹이나 하자든가 다른 코스로 등반 코스를 바꾸자고 하면 못 이기는 척 따라줄 용의는 있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고 나의 지독한 싸부 왕대장 하는 말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바위가 좀 마르면 출발합시다’ 하고 하네스를 차기 시작한다. ‘그래 맞아 오늘 못하면 또 언제 날 잡아 한단 말이냐. 다음 주 일요일도 일기예보로는 비가 온다 하고. 미끄러우면 미끄러운 대로 한번 해보는 거지 뭐’ 나도 마음을 다잡아 먹고 벨트를 묶는다.
1피치는 그런대로 홀드가 좋으니까 무난히 등반. 2피치가 문제였다. 잘 아는 바와 같이 2피치는 작은 크랙을 뜯고 트래버스한 다음 올라가는 구간, 그런데 물이 줄줄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말릴 필요도 없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이다. 내게 가느냐 마느냐의 선택의 여지는 없다. 다만 오르냐 못 오르냐만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망설일 순 없었다. 쵸크를 바를 필요도 없다. 나는 힘차게 발을 떼었다. 그리고 전진 또 전진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두 손은 손가락이 반마디도 안 들어가는 언더 크랙을 잡고 두 발은 물이 줄줄 흐르는 슬랩을 딛고 서 있는데, 딱 한걸음 한발짝만 떼면 볼트에 걸린 슬링을 잡을 수 있는데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순간 불안감이 찰나처럼 뇌리를 스친다. 그러나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과감하게 발을 떼어 오른손으로 슬링만 잡으면 된다. 왼발에 힘을 주고 오른발을 떼려는 순간 그만 왼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이쿠’ 나도 모르게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온다. ‘아니 그런데 빨리 안 걸리고 뭐가 이렇게 한참 내려가는 거야’ 불과 3~4초도 안 되는 로프에 매달리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로프에 매달려 주위를 둘러보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하얀 초크가루. 내가 미끄러져 내려온 길을 궤적처럼 표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얼른 몸을 돌려 로프를 잡고 일어나 본능적으로 팔 , 다리, 목, 허리를 돌려보며 점검해 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는 것 같다. 1피치 확보 지점에 몰려 있던 우리 동료들 괜찮으냐고 소리친다. 나도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괜찮다고 소리친다. 왕대장은 카메라를 들이대며 V자를 그려 보이란다.
‘그럼 그렇지 V자를 그려 보여야 용기백배하여 또 올라가지’ 나도 카메라를 향하여 V자를 그려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론 좀 창피하고 비참한 기분이 든다. 오늘따라 등산학교 동문 골수산악회 윤지현, 최석문 등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 마음을 고쳐 먹는다. ‘여기서 물러서면 창피한 것이지만 다시 올라가는데 뭐’ 다시 한번 세심히 루트 화인딩을 해본다. 그리고 어떤 홀드를 어떻게 잡고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지 발동작 손동작 하나하나의 시나리오를 짜본다. ‘각본이 짜여졌으면 다시 한번 해 보는 거야.’ 앞에서 한걸음을 더 못 떼어서 미끄러진 원인을 분석하여 이번에도 과감하게 도전하여 마침내 슬링을 잡는데 성공한다. 트래버스엔 성공하였지만 직상크랙도 물이 줄줄 흐르는 게 만만치 않다. 다행히 볼트까지 오르는 데 성공하여 퀵드로를 하나 걸고 일어선다. 그 다음 볼트를 밟고 일어서서 두 세 걸음만 오르면 큰 홀드가 잡히는데 큰 홀드 한걸음 앞에서 또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땐 욕심내지 말고 잘게 쪼개서 걸음을 떼었어야 하는데 단번에 큰 홀드를 잡으려고 하다가 또 한번 줄쩍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이번엔 로프가 다리에 걸려 거꾸로 떨어지고 만다. 엉덩방아를 어찌나 세게 찧었는지 엉덩이가 얼얼한데 몸은 완전히 거꾸로 매달려 다리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얼른 로프를 잡고 일어나 다시 한번 몸 컨디션을 점검해 본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다. 아직 팔다리가 멀쩡한데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 등반 기술도 미약하고 일천한데 거기 등반 의지마저 미약하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선등을 하겠다고 달려들었단 말인가. 나는 사지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한 끝까지 오르리라고 다짐한다. 다시 한번 루트 화인팅을 하고 도전하여 마침내 그 악마같은 2피치를 다 오르니 밑에서 동료들이 환호를 보낸다.
3피치는 홀드가 좋아서 무난한 등반. 4피치째 굵직한 크랙은 경사도가 심해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걱정하고 있는 내 마음을 꿰뚫었는지 왕대장 하는 말, 4피치는 홀드가 좋아서 더 쉽다는 것이다. 딴은 ‘그렇기도 하지만 비가 와서, 습기가 차서, 미끄러워서 그렇지.’ 파랗게 이끼가 낀 바위를 노려보며 나도 전의를 불태운다.
첫 볼트까지는 무난히 퀵드로를 걸고 두 번째 볼트를 향하여 전진하는데 손을 집어 넣은 크랙 속이 미끄러워 힘을 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손을 빼고 물러설 수도 없고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다’ 순간 머리 끝이 바짝 선다. 필사적으로 바위를 부둥켜안고 안간힘을 써서 한걸음 더 전진하여 드디어 큰 홀드를 잡고 안심한다. 동굴을 지나 쌍크랙을 오르는데 하늘이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려나 조금만 참으면 될텐데.’ 다행히 비는 4피치 확보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쳐 주었다.
5피치의 시작은 반침니, 왼쪽 어깨로 바위를 짊어지듯 떠밀고 오퍼지션 오른발로 바위를 차면서 오르고, 왼쪽 레이백으로 우향크랙을 뜯고 오르면 경사가 세지 않은 슬랩. 슬랩을 올라 널찍한 바위에 오르면 취나드 B 코스는 끝이다. 귀바위 밑에 오르니 의대길로 먼저 올라있던 지현과 석문이 반겨 맞아준다.
퀵휙스로 확보한 다음 완료를 소리치고 왕대장 빌레이를 봐준다. 왕대장이 올라오고 그 다음은 인석형, 인주, 용윤, 오종균, 경호형, 라스트로 진민씨가 차례로 올라온다. 모두들 선등을 축하한다고 손을 잡아주는데 기분이 참 좋다. ‘와 이런 맛에 정말 위험을 무릅쓰고 선등을 하는가 보구나’ 무엇보다 7명의 대원을, 내가 맨 앞장을 서서 이끌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뿌듯하다. 우리는 등반기념으로 다 같이 어깨 동무를 하고 사진 2방을 찍고 서둘러 하강 준비를 했다. 비가 올지도 모를뿐더러 인석형의 약속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끝내 인석형은 약속시간에 대어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 올라오고 말았다. 하강을 끝내고 약속시간에 대어가려고 서둘러 하산하다가 그만 넘어져서 팔뚝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비석 있는 데로 무사히 하강하니 순철 형님이 몸이 불편한데도 막걸리를 사 들고 올라오셔서 우리 일행을 맞아 주셨다. 순철 형님이 제일 먼저 따라준 서울막걸리, 너무 맛있었고 평생 있지 못할 것입니다.
대학 시절, 은사님 중에 산악인 김장호라는 분이 계셨다. (1999년 작고) 그땐 다 몰랐었다. 그 은사님이 얼마나 산을 좋아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요즘 들어 등반을 시작하고부터 그 분이 남긴 산에 관한 에세이집(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등)을 새로 펼쳐보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된다.
그분이 남긴 에세이 중에 ‘제힘으로 오른다’ 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선생님은 ‘모로가나 외로가나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다가 아닌 시대에 우리들의 알피니즘은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에베레스트 원정대 훈련대장일까지 맡아보셨던 선생님은 어떤 봉우리에 올랐는가보다는 어떤 길로 어떻게 올랐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여기에서의 봉우리는 히말라야나 알프스 등의 거벽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견강부회가 될지는 몰라도 인수봉만 해도 그렇지 않을까. 인수봉을 고독길로 오르는 것과 빌라길로 오르는 것 중 어느 길이 더 힘들까? 또 어느 길로 오르는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일까? 거기 더하여 선등으로 오르는 것과 후등으로 오르는 것 중 어떻게 오르는 것이 더 제힘으로 오르는 것일까? 그리하여 어떻게 오르는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일까? 아마도 고독길보다는 빌라길이, 후등보다는 선등이, 인공등반보다는 자유등반이 보다 더 어렵고 위험 요소도 많고 따라서 등반의 가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를 아는 모든 선후배 동료 여러분! 나는 아직 여전히 선등이 두렵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나에게 절대로 선등하라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두려움으로 하여 어느 날 나는 또 선등을 몹시도 갈망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무도 뿌리가 자라면 부목이 필요 없게 되고 새들도 깃이 자라면 둥지를 떠나 제 힘으로 날아오른다. 어린이도 ‘제 힘으로’ 오른 것이 아니면 나무 위에 올랐어도 운다.
그렇다. 오늘 내가 등반을 마치고 진실로 기쁜 것은 바로 이것, 누구에게 빌붙지 않고, 누구에게 크게 의지하지 않고 제힘으로 올랐다는 것이다. 2005년 7월 20일 맨 처음 취나드B를 오르고 등반기를 쓰면서 나는 다짐했었다. 앞으로 기술을 연마하고 체력을 단련하여 사람다운 몸짓으로, 제힘으로 오르는 모습을 보여주겠노라고. 그렇게 하기까지 무려 2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이번 등반을 통하여 어느 정도 사람다운 몸짓으로 등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그래서 나에게 등반을 가르쳐 준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기쁨을 주었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다. 나를 오늘의 이 등반세계로 이끌어준, 나를 아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2007년 8월 18일 한정수
첫댓글 감동이......눈물이......존경합니다....
이글을 읽으면서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고 비슷한 길을 가는 저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듭니다. 선등 축하 드립니다.항상 안전한 등반 하시길 바랍니다.오랜기간 바위에서 뵐수 있기를..........
앞으로도 많은 등반기를 남기셔야 되겠는데요...ㅎㅎ 모아서 많은 후배들에게 읽게 하셔도 좋겠읍니다...!
오래오래 이날의 기분을 간직하시고 항상 등반에 임하시기를.....
첫 리딩등반을 축하드립니다! 산행기도 가슴에 와 닿을정도로 잘 쓰셨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안전 등반 하세요! 파이팅!
바뻐서 이제야 정수아우님 후기를 읽었다네 ㅎㅎ 암튼 대단하네^^ 멋쟁이 정수아우가 대장이 되었다네 ^^축하 축하!!
진정한 클라이머는..선등을 함으로써..다시 태어난다구 합니다..ㅋㅋ..나이는 숫자에 불과 할지두 모르죠..정수형..홧~팅임다..!
외롭고 쓸쓸한 톱,클라이머는 자일을 죽을뚱 살뚱 매지요, 사랑하는 악우가 거기에 있기에...
이렇게 좋은 글 읽으려면 자주~ 선등하시라고 해야 겠는데요~
정수형 멋지십니다...그리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마음이 담긴 산행기 잘 보갑니다..그리고 형님들의 열정과 우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짝,짝,짝..ㅎㅎ
쌤....감동이어요..^^
옆에서 지켜보면서 많은것을 느끼게하는 하루였습니다,,,물바위에서 두번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오르시는 모습은 진정한 클라이머신것 같습니다,,,,축하드립니다,,,*^^*
형에 그 열정에 제가 부끄러워 지네요.암장에서 아무말 없이 계셔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언제나..늘..항상 안전등반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