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뉴욕의 가을 햇살이 세건의 희미한 눈을 간지럽혔다. 세건은 몇 번 눈을 깜박거리다가 거
추장스럽게 휘날리는 레이스 천개를 걷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끄응..."
창문을 바라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뜬 지 오래였다. 아침도 점심도 거르고 이렇게 늦게까지 자버
리다니. 세건은 멍한 정신을 잠시 가다듬었다.
하루에 세 시간도 채 자지 않고 체력단련을 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늘어져
버리니 몸이 나른할 만도 하다. 이곳은 아지트와는 또 다른 의미로 굉장히 편해서, 세건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아버리고 만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에는 오직 사준 아니면 성희의 장난전화만이 걸려오는, 무
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집전화가 시끄럽게 운동을 방해하자 세건은 짜증을 내며 전화기로 달려갔
다.
"여보세요?"
[나다.]
"........나?"
세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눈살을 찌푸리고는 반문한다. 무언
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세건으로서는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전화받는 시간도 아까워 죽겠는데 답답하게 뜸까지 들이다니...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란
말 모르는 건가.
"누구십니까?"
[벌써 목소리도 잊은 거냐? 한세건.]
"....설마."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방이 피식 하고 웃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라면 느끼지 못했
겠지만, 아무리 잡음이 섞여 있다 해도 예민한 세건의 청력에는 상대의 잔 숨소리까지 똑똑히 들
렸다.
"실베스테르...?"
[그래.]
세건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뺨이 순간 붉게 물들었다.
설마 실베스테르였다니. 아무리 얼굴을 못 본 지 1년이나 지났다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실베
스테르의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세건에게 매우 창피한 일이었다.
전화 너머의 실베스테르의 목소리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전과 다름없이 무덤덤하긴 하
지만 묘하게 들떠 있달까.
"... 웨, 웬일입니까?"
[웬일이라니. 그냥 안부 인사나 할까 하고.]
"아아."
[잘 지냈나?]
"음. 항상 그렇죠 뭐. 실베스테르는요? 요즘 뭐해요?"
[나도 늘 그랬듯이 여기 일 처리하고 있지.]
"아, 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세건은 평소의 그와 다르게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애꿏은 전화선만 손가락
으로 꼬고 있었다. 근 1년만에 듣는 실베스테르의 목소리인데,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또 이상한 말이라도 꺼내서 지금보다 더 뻘쭘해지면 어쩌지?
세건이 그렇게 갈등하고 있을 때도 국제전화의 요금은 여지없이 부과되고 있었다. 뭐 어차피 돈
이 너무 많아서 곰팡이가 피다 못해 썩는 사람들이니 별로 상관은 없겠지만, 문제는 이렇게 대화
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전화 너머의 실베스테르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세건, 이곳으로 올 수 있겠냐?]
"...당연히.... 예엣?!"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던 세건은 의외의 말에 놀라 소리쳤다. 지금 미국으로 온 거라고 한 게 맞
는 건가? 세건은 우물우물거리며 전화기에 바싹 귀를 갖다대었다. 담담한 실베스테르의 목소리
가(애써 담담하려고 하는 것 같은 기색도 비치긴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비행기표는 보내놓을 테니, 잠깐 들러라. 부탁할 일도 있고 하니.]
"아... 예. 그러죠."
세건은 얼떨결에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해버렸다. 실베스테르가 다시 키득거리는 소리가 귀
를 간지럽혔다. 그의 가는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세건은 갑자기 스테이트로 날아오게 된 것이다.
물론 서린은 남겨두고 왔다. 짐을 챙기는 세건을 보고 옆에서 시끄럽게 울부짖어대긴 했지만 (나
도 비행기 타보고 싶어요!) 그래도 그동안의 고충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세건
은 발버둥치는 서린을 가볍게 몇 번 밟아준 다음 비행기에 올랐다. 혼자 남겨두기 좀 껄끄럽지 않
은 건 아니지만, 미국까지 가서 시달리기는 정말 싫었던 탓이다.
세건은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올린 다음 침대에서 내려섰다. 밝은 햇살이 잘 다져
진 세건의 동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방은 아마 여자아이가 전 주인이었던 듯, 온통 흰 레이스로 치장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공주님
이었던 모양. 그런데 어째서 실베스테르의 거처에 여자가 머물고 있었던 거지? 풀리지 않는, 아
니 풀 시도조차 하지 못할 위험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세건은 그 문제는 일단 뒤로 제껴두고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아.
쏟아져내리는 따뜻한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미국에 온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실베스테르는 '잘 왔다' 이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세건의 앞에
가끔씩 얼굴만 내밀 뿐, 더 이상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분명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부른 거라고
해 놓고는, 대체 무슨 일인지.
실베스테르가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왜 하필 세건이란 말인가?
실베스테르와 세건은 사실상 남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1년 전, 실베스테르가 스테이트로 떠나버
렸던 그 날, 아슬아슬하게라도 이어져 있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사실상 끊어져 버렸던 것이
다. 흡혈귀 사냥꾼간의 관계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세건도 그것을 납득하며, 아쉽지만 이것으로
끝,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실베스테르가 먼저 연락해왔다. 누구보다 그런 원칙을 잘
알고 있는 실베스테르가 말이다.
세건이 지금 답답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베스테르가 세건에게 끊어진 연락을 다시 취하면서까지 부탁할 일이란, 세건이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완벽하고 유일무이한 존재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세건을 이곳으로 부른 목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다니?
그때, 실베스테르의 허스키한 저음이 방 밖에서 들려왔다. 세건이 알아들으리라고 생각하고 일부
러 크게 소리지르지 않는 것 같았다.
"한세건, 일어났나?"
세건은 시끄럽게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끄고 얼른 수건을 집어들며 대답했다.
"아 지금 막."
"잠깐 나와 봐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세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체 궁금한 것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세건이
었지만 이번 건은 정말 세건을 답답하게 했던 것이다. 세건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온 몸에서 흘러
내리고 있는 물기를 재빨리 닦아내었다.
세건이 런닝셔츠 바람으로 방을 나서자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실베스테르가 눈에 띄었다.
세건은 아직까지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실베스테르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무슨 일이예요? 그동안 얼굴 볼 생각도 안 하더니."
"설마 삐진 거냐?"
"삐지긴요. 제가 무슨 계집앱니까? 설마 그래서 저런 괴상한 방을 내준 거예요?"
"뭐, 그거야- 흠흠. 그건 그렇다 치고."
실베스테르는 초콜릿 광고가 나오고 있는 TV를 탁 끄고 세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베스테르
는 한국에 머물고 있을 때와는 달리, 스누피 티셔츠 대신 엷은 회색 라운드티를 걸치고 있었다.
그런 실베스테르의 모습은 어쩐지 어색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게 굉장히 어울리기도 했다. 뭐
워낙에 맵시가 좋은 사람이니 위화감이 들지 않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세건은 멍하니 실베스테르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어색하게 기지개를 켰다.
"...끄으응, 뭐예요? 용건만 간단히."
"널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궁금했지?"
"음. 솔직히."
"클럽 하나만 처리해 주면 돼."
세건은 고개를 갸웃하며 실베스테르를 바라보았다. 겨우 클럽 하나에 실베스테르가 쩔쩔매다니.
실베스테르가 못 하는 일을 세건이 할 수 있을 리가-
"...클럽이라고요?"
"에스프리 쪽 갈보들이 모여있는 것 같은데...."
실베스테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세건은 문신이 새겨진 팔을 쓰다듬으
며 괜시리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아무튼, 가 보면 알게 될 거다. 주소는 가르쳐 줄 테니."
"...예..."
세건은 내밀어진 실베스테르의 손에서 종이를 받아들었다. 예쁜 필기체로 씌여진 알 수 없는 주
소. 앞으로는 세건 알아서 하라는 뜻이겠지. 세건은 묻고 싶은 것이 태산같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종이를 구깃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은 다음 일어섰다.
"그럼 지금 다녀오죠. 댓가는?"
"무엇이든지 요청하는 대로 주기로 하지. 갔다와서 말하라고."
"그러죠 뭐."
실베스테르는 망설임 없이 점퍼 하나를 들고 무장을 한 다음 아지트를 나서는 세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통해 보이던 세건의 그림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실베스테르는 한숨을 내쉬
며 텔레비전을 켰다. 마침 할로윈 시즌인지, 화면에서는 온갖 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바로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날짜개념도 없이 사는 걸 보니, 폐인이 다 됐군."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영양가 없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는 TV화면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던
실베스테르는 갑자기 불안한 듯이 시선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역시...잘못 생각한 건가."
갑자기 실베스테르의 뒤에서 검은 인영이 스르륵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기척도 없이 존재를 드
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실베스테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은 인영은 잠시 실베스테르의 옆에
서 있다가 약간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비스트를 여기로 부른 거지요?"
"...뭐, 노파심이랄까."
"노파심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모르겠군, 왜 저 녀석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는지. 조금 정신이 나갔었나 보지."
"......"
"뭐- 간만에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녀석에게 보낸 겁니까?"
실베스테르는 그를 잠시 응시하다가 눈살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그'와 무슨 좋
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약간의 협의가 있었달까... 탐탁치 않긴 하지만 한 번쯤이야 녀석이 알아서 잘 하겠지."
클럽을 찾아내어 바이크에 제동을 걸고 나니, 벌써 달이 떠 있었다.
생각보다 미국의 슬럼가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세건이 기본적인 영어회화가 가
능하다 해도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피자 가게와 각종 상점들이 즐비한 골
목골목을 한참이나 누빈 다음에야 그 뒤에 가려진, 페인트칠을 언제 했는지도 모를 지저분한 건
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후유...젠장할."
세건은 습기찬 헬멧을 벗고 머리를 한 번 털었다.
이럴 땐 무책임하게 자신에게 의뢰만을 맡기고 뒤로 빠져버린 실베스테르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클럽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그냥 '다녀와라', 그 한 마디만을 하고 뒤돌아보지도 않
았다. 무심한 건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대체 어떤 곳이길래 실베스테르가 직접 처리하지 않고 세건을 시키는 것일까?
클럽의 삐걱거리는 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심장까지 격동시키는 강렬한 비트
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세건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무장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무슨 일인지는, 부딪쳐 보면 알 수 있겠지.
바람에 흔들거리는 문을 활짝 열자, 약간 퀴퀴한 냄새와 함께 고막을 찢을 듯한 음악소리가 세건
의 귀를 강타했다. 세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재빨리 안의 상황을 파악했다.
분명히, 흡혈귀만이 가지는 독특한 체취가 가득했다. 이제는 블러드스톤 펜듈럼 따위를 쓰지 않
아도 육감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느낌, 살기다. 갑자기 들어온 환한 빛에 잠시 시야가 흐려졌지
만, 곧 적응되어 온 벽면에 도배되다시피 한 Jack' O lantern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하아?"
세건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는 기분나쁜 표정의 호박머리,
흡혈귀 주제에 이상한 옷을 해 입고 열광적으로 춤을 추고 있는 무리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할로윈 파티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
...'마치 할로윈 파티'가 아니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할로윈이다.
"...빌어먹게도 좋은 타이밍이로군."
세건은 한국어로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속으로. 이곳은 온통 예민한 감각을 가진 흡혈귀
들 뿐이라 자칫하다간 개시하기도 전에 잡혀버릴 우려가 있다.
세건은 얇은 런닝셔츠 한 겹을 통해 느껴지는 차가운 총구와 도폭선뭉치를 확인하며 천천히 무리
속으로 끼어들었다. 세건이 치고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흡혈귀들은 열과 쾌락에 취해 몸을 흔들
어대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느 무리들은 잔에 피를 가득히 채워 건배를 하고 있었다.
"...Mad hot..."
세건은 투덜거리며 예리한 눈초리로 인간의 존재가 느껴지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보아하니, 이곳은 에스프리의 하급 떨거지 흡혈귀들의 모임인 듯 저질의 느낌을 팍팍 풍기고 있
었다. 실베스테르는 왜 이런 곳의 처리를 내게 맡긴 거지? 왠지 불쾌하다. 설마 날 시험해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인간의 냄새는 없었다. 마음놓고 쓸어버려도 괜찮을 것 같군, 세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비릿한 미
소를 지었다. 만약 실베스테르가 세건을 시험해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라면- 기대에 부응해 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때, 거친 숨결이 세건의 귀에 닿았다. 세건은 움찔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거친 금발
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흡혈귀 하나가 싱글싱글 웃으며 서 있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세건은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나타내며 그 흡혈귀에게 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 그런 세건을 무
시한 채, 흡혈귀는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세건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스물스물하고 시린 느낌
이 세건의 전신을 읍습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입인가?"
"......"
발기한 흡혈귀의 양물이 허벅지에 닿아오는 것을 느끼며 세건은 몸을 떨었다. 그때 그 힙합흡혈
귀가 에스프리에서 흡혈귀의 불감증을 고치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떠들어 대더니, 정말이었나 보
다.
정말 지저분한 족속들이군. 흥분할 대상이 없어서 사내자식한테 느끼다니...
세건은 치밀어오르는 혐오감에 인상을 쓰며 흡혈귀의 머리에 글록을 꺼내 가져다 대었다.
"Will you back off, slut?"
-타앙!
열정적인 사운드에 맞춰 글록의 은탄환이 흡혈귀의 머리통을 부쉈다. 단말마의 여유도 없이 피와
섞인 뇌수가 흩어져 폭포수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의 침묵.
아니, 모두가 놀라 행동을 멈춘 가운데 스피커에서 재생되고 있는 그룹사운드의 드럼 소리만이
높게 울려퍼졌다. 침묵이 아닌 침묵이 잠시 계속되었다. 마치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있는 비트는,
그 침묵에 놀라우리만치 잘 어울렸다.
"...Ji...Jim!!!"
너무나도 흔한 이름이 경악처럼 어느 흡혈귀의 입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모두의 표정이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험악하게 변화했다.
"son of bitch!"
"shit! Jim!"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푸른 눈동자를 하고 짐승같은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그들을, 세
건은 코웃음을 치며 바라보았다. 여유로움, 그 자체. 귀화가 흐르는 눈동자를 하고 한 흡혈귀가
세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건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벽에 걸려 있던 호박 하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나 운명을 다했다.
클럽 안은 대 혼란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할로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참극. 그리고 그 가운데에
녹색으로 빛나는 세건이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세건의 발에 걷어채여서 저만치 나가떨어진 흡혈귀의 머리 위로 주르륵 하고 호박의 잔해가 흘러
내렸다. 박살난 색전구가, 세건의 가만히 내린 발 끝에 닿아 데구르르 하고 굴러갔다.
"즐거운 할로윈이지, 갈보들?"
세건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까 걷어채여 생을 마감한 흡혈귀가 마지막이었는지 더 이상 일
어나는 녀석은 없었다. 온통 피로 칠갑이 된 클럽 안에서, 홀로 세건만이 웃고 있었다. 어떤 슬래
셔 무비보다도 그 장면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끔찍했다.
그때였다. 클럽의 문 뒤쪽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온 것은 말이다.
-짝짝짝짝!
"......?"
세건은 얼굴을 굳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세건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부드러운 흰색 데님 슈츠를
걸친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브라보, 멋진데, 세건?"
"...팬텀?"
세건은 뚜벅뚜벅 걸어오는 팬텀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팬텀은 피투성이가 된 실내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네녀석이 여기에..."
"아아, 이 클럽의 소유주는 바로 나니까."
"...왜 네가 에스프리의 클럽을 갖고 있는 거냐."
"뭐, 나는 그냥 할로윈 파티나 하라고 잠깐 빌려준 것 뿐인데? 에스프리가 무슨 돈으로 파티를 열
었겠어?"
"......"
얄밉게 말하는 팬텀을 기분나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뒤로 돌
아섰다. 지금은 팬텀과 붙어봤자 승산이 없다. 싸우는 것도 때가 있는 법-
지금은 그냥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Trick or Treat."
갑자기 들려온 팬텀의 목소리.
팬텀은 한 쪽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다른 한 쪽 손을 세건에게 내밀고 있었다.
"뭐야 그건."
"할로윈이나 한 번 챙겨볼까 하고. 왜, 동네 꼬마들이 분장하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사탕 주세
요~ 그러잖아."
"네놈은 부르주아 분장이냐?"
세건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팬텀은 싱긋 웃으며 세건에게로 다가갔다.
"미국에서는 할로윈이 아주 중요한 연례행사라고. 무시하지 마."
"무시 안 했는데. 그래서 이런 퍼포먼스까지 열어줬잖아?"
"사탕 안 줄 거야?"
"사탕은 무슨 얼어죽을."
"...Trick or Treat.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 거야."
팬텀의 속삭임이 지그시 세건의 귀에 와 닿았다. 세건이 움찔하자, 팬텀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띄
우며 세건의 허리에 손을 나긋나긋하게 감았다. 세건은 한 두번 당해본 일이 아니라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봐, 아직도 이렇게 느끼한 짓 하고 다니는..."
타앙-
순간, 팬텀의 머리카락을 총알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깜짝 놀라 세건과 팬텀이 문 쪽을 돌아보
자, 그곳에는 은발의 남자 한 명이 거대한 저격총 하나를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달을 뒤로 한 그의 주위에는 심상치 않은 오라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실베스테르?"
"걱정되어서 와 봤더니, 역시나군."
팬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세건에게서 떨어졌다.
"어이. 합의 내용은 어떻게 된 거야. 신경 안 쓴다며?"
"흡혈귀와 흡혈귀 사냥꾼의 계약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을 텐데?"
"......이봐요. 대체 무슨..."
두 남자의 대치상태에 잠시 멍해져 있던 세건은, 머리를 짚으며 그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다. 대체
계약은 뭐고 합의내용은 뭐란 말인가? 그러나 세건의 시도는 다시 이어진 팬텀의 말로 실패하고
말았다.
"실베스테르, 이렇게 배신을 때릴 줄은 몰랐는데."
"나는 세건을 조금 시험해 보고 싶어서 부른 거지, 네놈을 위해서 부른 게 아니라고. 그리고 배신
이라니. 먼저 허튼 짓 않겠다고, 사업가로 살아가겠다고 한 게 누군데?"
"그건 '한동안'이란 말이 앞에 붙어야 한다고!"
"닥쳐. 먼저 계약을 깬 건 갈보 네놈이다."
세건은 티격대격하는 두 남자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렇게 한동안 뻘
쭘하게 서 있어야 했다.
-숨겨진 이야기.
"...실베스테르, 정말 세건을 이쪽으로 불러 줄 거지?"
"네가 약속만 잘 지킨다면."
"그거야 걱정 말라니까. 나는 빌 때문에 한국으로 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딱 한번이다. 그 이상 허튼짓하면 정말 죽여버릴 줄 알아."
얼마 전 있었던 실베스테르와의 대화, 그것은 팬텀에게 충분히 위험한 망상을 하게 만들기에 충
분했다. 세건이 미국으로 온다!
온갖 상상을 다 하던 팬텀은 야경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마스터, 설마?"
"음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야. 가정, 가정이라고."
빌헬름은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서류 정리가 엄청나게 밀려 있었기에 별 말 하지 않고 다
시 안경을 치켜올렸다.
첫댓글 개그에 할로윈이라...좋군요..ㅠ_ㅠ;
꺄악~ 역시나 이브나드님이셔요오!!!;ㅁ; 무지하게 좋습니다아-!;ㅅ;b
할로윈... 이 소설 분위기 죽이는데 나등씨 (머엉) ... 나 11월에 생일인데, 기대할께.<-
그 히죽히죽.. 참 수상했죠... 이런 비리(?)가 있었군요. 멋진 개그였습니다♡
재, 재밌습니다 ;ㅁ; 이제서야 소설을 보게되다니, ♡ 너무 좋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