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죤킹은 돈을 받고 한 일이 28가지 가 넘는다. 시간순으로 내가 한 일을 기억해본다,
신문배달, 찹살떡장수, 서적행상, 국세청 직원, 엘지전자, 삼성전자, 산업증권, 국선도사무처, 국선도강사, 서일대학사회교육원, 국선도원장, ING 생명, 넷투사이버, 퓨처비젼, 토탈아카데미, 농협생명, 창조학원, 상산학원, 멘토링학원, 강원저널, 내일신문배포, 시사강원신문기자, 제니엘, 개인과외, 공장일용직, 음식물수거, 대리운전, 이삿짐, 농촌피뽑기,
신문배달 : 초등학교 6학년쯤 한달남짓 했다, 6천원 정도 받은 기억인데...최초로 돈받고 한 일에 그 의의가 있다.
찹쌀떡 : 고3때 친구랑 둘이서 했다. 찹쌀떡~ 하면서 골목길을 다니는데...찹살떡! 하고 부르는 그 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지금 생각만 해도 기쁨의 미소가 나온다,
서적행상 : 대학생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방학동안 잠깐 하였다, 500원짜리 소설책은 1000원에 팔았다. 가계, 군청 등을 다니면서 “대학생인데 학비에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하며서 팔았다, 즐거운 추억이다.
국세청 직원 : 나의 첫 정식직장이다, 2년간의 세무대학생활을 마치면 누구나 8급 세무직공원원으로 임용이된다, 86.3년 3월. 첫근무지는 서울중부세무서 총무과 행정계. 군대가기전 4개월의 생활. 주요업무는 직장근처 은행회관에 가서 그 날 부도가 난 회사들 자료를 전국세무서에 알리는 업무였다. 아주 단순하고 한가한 일이었다. 생활은 대림동에 사시던 삼촌과 함께했는데 부엌도 없는 방에서 화장실에서 물을 길어서 방에서 밥을 해먹은 생활이 떠오른다, 삼촌께 방세는 따로 준기억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마운 일인데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가끔 국세청을 오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길에서 만나는 외국인에게 길안내 해주면서 다닌 일도 나의 기쁜 추억으로 기억이된다. 직장상사인 계장님과 동료 ?일로 기억되는 두 분을 포함한 직원친절로 행복한 직장생활이었고 군대간다고 해주시는 송별회파티에서 난생 처음으로 풀코스 중국요리를 먹어보았다. 아주 맛있었다. 한 번은 한 직원이 국세청 직원을 주고 오라고 봉투를 준다, 심부름을 하고 왔더니 수고비로 몇만원을 준다. 그 날 공돈 생겼다고 친구랑 일부를 잘 썼는데...내심 찜찜했다. 약간의 고민을 한 후에 다음날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분 서랍에 넣어주었다. 그 분은 특별히 아무런 말도 안했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것은 나의 최초의 일종의 뇌물 거절사건이었다. 또 특이하게 기억되는 사건이 있다, 직장동료였던 여직원을 짝사랑 비슷하게 했는데 직장동료들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어느날 관악산으로 야유회를 갔는데 술이 취하여서 하산하여 그 녀의 이름을 부르며 내려왔다. 그녀의 집근처 동네로 생각되는 곳에서 크게..아주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약 한시간의 집찾기 여행을 하였다. 난 그 당시에는 이른 아침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늦은 오후시간이었다, 이렇게 소소한 생활을 약 4개월 남짓하고 카투사로 군에 입대했다. 용산에서의 군생활을 마치고 성북세무서로 발령받았다. 총무과 행정계, 소득세과에서 근무를 하였다. 근무생활은 대체로 편한 편이었고 소득세과 근무시 신고서 접수를 하는데 독서실을 운영하는 어떤 분이 봉투를 주고 가는데 3만원이 들어있었다. 다음날 돌려주려고 갔는데 “금액이 적어서 그러시냐며 완강히 되돌려 받기를 거부하셨다.”, 죤킹의 방법은 출장때마다 음료수를 사드리자 하면서, 몇 번 음료수를 사서 갖다 드렸다, 결국 3만원은 다돌려드리지 못했다, 오십보백보이니 나는 뇌물수뢰자인셈이다. 강남세무서로 발령받아서 민원실에 근무하였다, 서류접수업무 담당이었는데 서류에 도장을 여러곳에 찍어주는 것이었다. 촌놈의 강남진출. 그 화려한 강남에서 43만원으로 기억되는 월급만으로 살아가니 특별히 저축할 여력도 없고 그냥 편하게 쓰고 살았다.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별로 못했다, 가끔 숙직 대직을 하면 5만원을 받았는데 아주 큰돈으로 짭짤한 수입이었다,
성북세무서에 근무할 당시 어떤 직원분이 화장실에서 돈을 받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나의 미래모습을 보는 것같아서 싫었다. 과장님께 사표를 제출하였다. 신중히 생각하라며 휴직을 하라고 하시어서 휴직을 하였다, 휴직후 복직한 곳이 강남세무서다. 강남에서의 약1년간의 생활. 특별한 기억이 없다. 다만 퇴직을 하고 짐을 써서 한강다리를 걸어서 간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약간의 눈물을 흘린 것 같다.
세무서 퇴직후 금성정보통신(주)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나중에 엘지전자에흡수합병되었다. 근무처는 안양에 있는 공장, 부서는 해외사업부. 업무는 자세히 기억이 안나고 공장근무복, 식당, 환영식때 먹은 장어구이가 선명히 기억난다, 안양생활을 몇 달하고 서울 여의도 쌍둥이빌딩으로 근무처가 옮겨졌는데 근무환경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20층에서 내려다보는 마포대교의 모습은 아주 아름다웠다. 당시 출근은 남들보다 한 두시간 일찍 7시쯤 사무실도착이다, 5시경 목욕탕에서 사우나를 하고 출근하니 교통혼잡도 피하고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부장님 자리에 앉아서 마포대교를 내려다 보는 즐거움이 아주 쏠쏠했다.
업무는 간단한 서류업무였는데. 이화여대를 졸업한 여자 선배분이 조금 깐깐한 편이었지만, 우혁으로 기억되는 바로위 고참, 그리고 그 윗분, 부장님, 동기생, 이렇게 한 팀이었고 업무는 한가한 편이었다, 난 항상 일복이 없는 편이다. 약9개월의 생활을 마치고 퇴사한다, 왜 퇴사를 하였을까? 상공회의소에 업무를 보러갔는데 여직원이 서류를 던진것에 대한 모욕감, 친구가 구자경씨위해 자원봉사하냐며 적은 급여를 비꼰 것, 영어사용기회가 없는 업무, 한차원 높게 회계사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 등으로 그만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고 신중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에 대하여 국세청도 그렇고 엘지전자도 그렇고 쉽게쉽게 결정한 것같다, 아마도 다른 곳에 가면된다는 자신감이 그 배경이었으리라.
약3개월의 도서관생활에 재취업을 결정하고 삼성전자와 유공해운에 동시합격을 하였다. 우체부의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오는 합격통지서를 받을 때, 일생의 최고기쁜 순간중 하나로 기억된다.
삼성전자 : 약1달 남짓 연수를 받고 있는데, 한국산업증권(주)에서 합격소식을 받는다, 큰 고민없이 삼성전자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 이유는 당시 삼성은 연봉 1200만원 수준, 한국산업증권은 급여도 1800만원으로 더 많고, 공기업의 안정성, 외국인에게 증권팔며 영어사용 생각, 결혼시 무이자대출 3800만원, 입사시 치열한 경쟁력을 뚫은 점 등이었다. 급여수준, 돈이 주요 선택이유 인 것이 한심스럽다, 다시는 “돈”을 기준으로 직업을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산업증권 : 국제금융부, 비서실, 국제영업부, 명동지점 이렇게 약 5년간 근무를 하였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직장생활이다. 첫근무부서 “국제금융부“ 모두가 선망하던 부서, 서울대,연고대 동기생들이 모두가 가고 싶어하던 부서에 ”백도 없고 학교도 최고명문이 아닌 곳이 내가 발령난 것은 입사시험성적이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로 인하여 나는 “백없이 실력이 통하는 사회구나”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가 젠틀한 분들속에서 존중받으려 생활하는 직장생활. 아주 천국이었다. 급여도 좋고, 업무도 스트레스가 거의 없고...여의도 좋은 빌딩 근무환경도 좋고...사장님이 바뀌고 비서실장이 새로운 분이 오시면서 국제영어부로 발령이 났다. 업무는 홍콩등 해외지사와의 연락사항 등. 단순하고 쉽다. 즐거운 생활을 하면서 97.7월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과 동시에 명동지점으로 발령이 나고, 지점생활은 나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하루종일 단말기를 쳐다보며 주문처리 하고 영업실적을 위해 고객유치활동을 하는 것 등이 싫었다. 특히 내가 확신을 갖지못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사람에게 투자하라고 해야하는 것이 아주 싫었다.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한다고 하며 웃돈을 약 4천만원을 준다고 하여서 아내에게 “계속근무하면 죽을 것 같다”이렇게 말하며 동의를 얻고 퇴사를 하고 받은 돈으로 결혼때 받은 대출금을 값았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아내는 이때 그 심정을 “땅이 꺼지고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고 밝혔다.
국선도 :
퇴사를 하기전 국선도라는 심신수련 명상단체의 리더를 뵙고 그 조직을 위해서 일하기로 하였다. 수입은 다소 적더라도 마음 편히 신선처럼 살고 싶었다. “반신반직“ 반은 신선처럼, 반은 직장인처럼. 이렇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국선도에서 청소도 하고 수련도 하고 행정업무도 보고 그렇게 생활을 해나갔다. 이 때 아들이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국선베이비다. 약2년간의 국선도 사무처 생활을 마치고 국선도 외부강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은행연합회, 서울온천, 서일대사회교육원 등에서 단전호흡을 지도하였다. 약1년간의 지도생활을 마치고 강원도 원주에 도장을 개설하여 치악산과 인연을 맺는다.
처음 도장지도생활은 아주 정력적이었다. 이른 새벽 4시경에 일어나서 새벽수련지도 하고, 저녁수련지도 끝나면 9시 정도. 인근아파트에 홍보지도 돌리고, 수련생 지도도 아주 정성껏해드리고, 도장청소도 깨끗하게 하고, 하얀지도자 복있고 점잖게 생활하고.....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무료봉사지도도 하고, 교통방송,MBC등에 출연도 하며 방송도 타고....교통방송은 한 번 출연하면 3만원을 주었다. 적은 금액이지만 방송출연료받았다는 긍지감으로 행복한 추억이다,
회원분들은 한의사,교수,판사,피디, 선생님, 직장인 등이었으며 회원과 지도자로 상호존중하는 생활이 아주 좋았다. 월평균 30~ 40여분의 회원이 계셨으며 일평균 수련회원은 15~20분 정도였다. 수입은 100만원 남짓이었으며, 보조지도자 한분 60만원 드린 것으로 기억된다. 가장의 경제수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였고 그 마저 대부분 나의 용돈으로 쓴 것 같다.
수련을 하러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건강차원에서 오셨고 아주 드물게 명상이나 구도 차원에서 오시는 분이 간간이 계셨다. 국선도로 인연을 맺게된 분들은 모두들 참 좋은 분들 갔다. 도장을 약4년간 운영하면서 수백명이 다녀가셨다, 한 분 한 분 떠오르는 그 분들의 행복을 염원해 본다. 학생들의 특별프로그램, 원주기독병원 특강, 원주간호대 교수님 연구프로그램 참여, **호텔 외부출장강의 등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국선도 지도자 생활을 꾸준히, 국세청공무원생활을 꾸준히, 엘지전자를 꾸준히 했더라면 지금보다 아내와, 어머니, 아들, 나자신, 친구들 모두가 더욱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쉬움은 있지만. 그 대신에 난 다양한 삶을 살았고 그 순간 순간 행복했다. 다만 매 순간 그 업에, 그 업무 충실하지 못하고 그냥, 그냥, 살아온 것에 대하여 부끄럽다. 더욱 연구하고 매진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어야 하는데...본업本業에...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며 걱정하고 때로 불만하고(만족하며 살았지만)살았던 나의 직장생활.
보험,
보험일은 아주 짧게 하였고 사람들을 그냥 편하게 대해왔던 내가 내 경제적이익목적으로 지인들을 대하는 것이 싫었고 힘들었다. 지금은 보험의 필요성이 확실히 느껴지기에 일을 잘 할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때가아니다.
학원강사 :
초등아이들 영어, 학교방과후 원어민수업, 개인학원, 개인과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이 일이 나의 적성에 참 맞는 일인데, ..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참 재미있고 좋았는데....도, 종교 등에 관심이 많은 내가 집중하지 않고, 특히 시험위주,입시위주의 교육에 대한 불만이 학원생활을 계속안하거나 못한 원인이다, 외국인이 함께 근무하는 학원이었다면 강사생활을 더욱 만족스럽게 잘 했을 것이고 지금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강원저널,시사강원신문
기자라는 특수한 일을 체험해 본다. 제대로 된 기사는 몇 개 쓰지도 못했지만, 직접쓴 글들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만족스럽다. 나름 잘 썼다고 생각하는데...일반 취재기자분들처럼 육하원칙의 공식적 기사스타일의 글은 잘 못쓰고 스토리식 기사를 잘 쓰는 것 같다. 사회비리고발 등의 기사보다는 취미, 활동, 소개 등의 글을 쓰고싶은데 글쟁이의 소질보다는 영상으로 화면으로 하는 것이 나의 적성에 더욱 맞는다고 생각한다.
카드배달:
아시는 형님께서 카드배달일을 하시다가 학원버스일로 옮기시면서 내게 카드일을 권해서 시작하였다. 하루 30~40십장 배달하며 월 60만원 내외의 소득을 올리는 알바일이다. 이 일을 3년간 했다, 영어과외 하나와 병행하여서 90만원 정도의 소득으로 개인용돈을 하면서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았다. 카드배달하면서 아름다운 자연, 거리 사진찍고, 좋은 분들은 대화도 나누고, 늘 새로운 사람만나면서 자신을 낮추고 친절히 사람을 대하는 일이 좋았다, 수입에 대한 불만은 가끔 있었지만, 즐거움과 만족감이 더욱 컸다. 영어과외일을 안하게 되면서 수입이 줄었고, 또 돈을 좀 벌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공장일을 시작한다.
공장일용직
고용노동부에서 하는 곳은 이력서를 넣어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일자리 소개없체에 찾아갔더니 연락이 와서 태장동 공단, 횡성음료수 공장, 문막공장 등에서 일했다. 이전에 횡성사료공장, 일반 건축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기에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고 의회로 일이 할 만하였다, 처음 한 일은 공기정화기를 조립하는 일이었는데 부품의 비닐을 벗겨내거나, 박스를 쎃거나 조립라인에서 나사를 박는 일이었다. 오전 8시20분 출근 5시40분 퇴근하니 저녁시간이 아주 편하고 좋았다, 카드일을 할 때는 9시 10시까지 불특정하게 일해서 저녁식사도 제때 못하고 밤에 일을 했는데 정시퇴근을 하니 아주 좋았다. 약 2달간 일해서 300만원 남짓 수익을 올렸다. 카드배달일 5개월치의 일이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공장일이 더욱 매력적이다,
일을 하면서 공장일기라는 형식으로 퇴근하면서 음성일기형식으로 녹음을 할 때의 행복한 기억이 난다. 음료공장에서는 대부분이 여성근로자이고 남자는 몇 명안되는 소수 태장공단에서는 그 반대다. 음료공장 포장라인에서 일할 때는 대화도 하면서 일을 해서 더욱 즐거운 일자리 체험이다. 문막공장에서는 탱크로리 청소일을 했는데 종일 밀폐된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정말 정말 너무 즐겁게 일을 했다. 누구의 지시나 간섭없이 그냥 닦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속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흥겹게 닦고 또 닦고....아마도 난 청소일에 소질이 있나보다. 설거지, 마당쓸기, 짐정리, 이런 일이 싫지가 않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백수
돈을 십원도 벌지 않고 생활한 것이 최근 3개월을 포함하여 2년은 족히 넘고 3년 남짓 되는듯하다. 백수인데도 더욱 바쁘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온다, 오늘을 생각해본다,
아침 8시 근린공원. 운동, 처음보는 학생들, 사람들 촬영 .
아침 10 아시는 분과 노상 대화와놀이. 도로변에 돗자리를 깔고, 휴대한 쿠션의자 앉아서 소풍나온 어린이처럼 논다. 지나가는 행인과 대화하며 유튜브출연 시키고, 남아프리카 원어민 여자선생님과 행복한 대화, 촬영.
낮 12시 송어횟집 점심 대접받고 룡수골~
오후 1시 룡수골...무덕대사님, 대화...이장님 대화,, 유튜브 출연했던 초등생킹님들과 놀기, 아이스크림 사주고 심부름값 껌 사주기, 자전거타기, 사진찍기, 강아지들 노는 것 구경하기 등
오후 6시 슈니첼 식당. 핸드폰자료 외장하드로 옮김, 얻은 편의점도시락 2이서 나누어먹기, 아는 형님 차대접 받고 잔돈4천원 챙기기.
오후 8시 친구랑 통화하기
오후 8시 30분 자서전 쓰기....지금 11시.
바쁘다, 백수가 더 바쁘다,
나의 직장생활을 돌아보면서 나는 나의 심층을 살펴보지 못했다, 왜 그일을 시작했으며 왜 그 일을 그만 두었으며 그 일을 하면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시한번 차근히 읽으면서 나의 앞으로의 일, 가장 중요한 지금, 그 일을 위해서 과거 일을 살펴본다. 종교관련일, 영어관련일, 노동하는 일, 새로운 창작일, 유튜브일, 글 쓰는 일? 과연 나의 인생 앞길에 내가 걸어가야할, 내가 만들어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이것은 내일 또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맥주 딱 한잔 마시고 잔다, 굿 나잇. 죤킹~
*심부름 값 500원 껌 이야기: 용수골 서곡초등생 4명을 다시 만났다, 양귀비 축제후 함께 즐겁게 놀았던 친구들이다, 나를 보더니,,죤킹..죤킹 하며 다가온다,...물총놀이등 이런 저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킹님이 구슬아이스크림이 먹고싶다하여. 3천원을 꺼내주며 사오라고 한다. 숟가락은 3개가져와라....킹님이 구슬아이스크림과 잔돈 500원을 내게 준다, 이 건 심부름값. 수펴가서 먹고싶은 곳 사먹어. 이장님께서 500원짜리가 어디 있냐고 하신다, 죤킹은 있다 반드시 있다 가서 사와라~....껌을 사왔다, 다섯 개 들었다 한다,..이건 킹님것이니까, 킹님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어라...나도 하나 주고....이렇게 5섯 사람이 500원으로 기쁨이.
나중에 수퍼아주머니를 뵈었다. “500원짜리를 찾더니 5섯 사람이 함께 먹어야 한다고 해서 껌을 권해주었다 하신다. 500원의 기쁨. 이것이 오늘 내가 누린 기쁨중 글로 살아남았다.
죤킹님~하며 부르는 그 킹님의 모습이 떠오르며 기쁨의 미소가 난다.
*죤킹은 용수골 초등 4분을 각자 자기이름을 부르게 하며 “아임 ~킹. ”하고 자기소개를 하는 비디오를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그 제목은 “용수골 킹님들♡Kings in YongSoo Go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