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릉(齊陵) 1대 태조(太祖)의 정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제릉은 태조 이성계의 첫째부인 한씨의 단릉이다. 2대 정종과 정안왕후가 묻힌 후릉과 함께 북한에 있는
2개의 조선 왕릉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ㅇ 신의왕후 한씨
한씨는 안천부원군 한경의 딸로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에 안변부에서 태어나 1351년(공민왕 즉위) 2살
연상의 이성계에게 15세의 나이에 시집 왔고, 함흥(咸興)에 살면서 방우, 방과(훗날 2대 정종), 방의, 방간,
방원(훗날 3대 태종), 방연 등 6남과 2녀를 낳았다.
태조 이성계는 왕에 오르기전 이미 2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는데 고향인 함흥에는 정부인 한씨가 아이들을 키우
고 있었으며, 서울인 개성(개경)에서는 뒤늦게 강씨(康氏)를 맞이하여 또 다른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
당시 풍습으로는 고향과 서울에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두는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향처 한씨는 이성계가 벼슬에 오르기전에 혼인하여 남편이 30년가량 전장을 누비면서도 집안일을 잊고 성공
하도록 살림을 잘 꾸리며 아이들 키우고 내조하였으며 위화도 회군 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포천에서
동북면으로 피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인 한씨는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기 1년전인 1391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왕비가 되지 못하였으며 이후 계비 강씨가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의 정비가 되어 조선국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정부인은 왕비가 되지 못한채 죽었고, 후처가 왕비가 된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미 많은 비극을
예감케 한다.
ㅇ 누가 정비(正妃)인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에 죽는 바람에 조선국 최초 왕비의 영예를 계비 강씨에게 빼앗겨버린
정비 한씨. 그러나 자신의 소생 2명이 왕위에 오르고, 특히 3대 태종(이방원)에 이르러서는 계비 강씨의
陵을 한양 시내 정동에서 외곽 정릉으로 이장후 봉분을 깎아버려 능을 묘로 강등하고 후궁으로 격하
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생모 한씨만을 유일한 왕비로 모셨다.
이후 현종때에 이르러 송시열의 상소로 강씨가 복위될때까지 260여년을 계비 강씨는 후궁의 지위로
버려져 있었으니 조선왕조 519년의 거의 절반을 정비 한씨가 유일한 왕비로 모셔진 반면 계비 강씨는
잊혀진채 지내온 것이다.
복위후 한씨를 정비 신의왕후, 강씨는 계비 신덕왕후로 하였다.
ㅇ 조선시대 왕후 이야기
조선왕조 519년동안 재위한 임금은 27명, 왕후는 추존왕후 포함 38명이다.
왕실 전주 이씨를 제외한 여타 성씨들은 왕후를 내기위하여 노력한다.
가문의 영광이자 출세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38명 왕후중 가장 많은 왕후를 배출한 집안은 파평 윤씨와 청주 한씨로 각각 5명이다.
그 다음이 4명을 배출한 여흥 민씨이며 안동 김씨와 경주 김씨는 각각 3명이다.
신의왕후 한씨는 안변(安邊) 한씨이며, 계비 신덕왕후 강씨는 곡산(谷山) 강씨이다.
조선시대 왕후들의 재미있는 기록을 보면
왕을 2명 낳은 왕후는 정종과 태종을 낳은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와
문종과 세조를 낳은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가 있다.
딸 2명을 왕비로 보낸 사람은 예종비 장순왕후(3째딸)와 성종비 공혜왕후(4째딸)로 보낸 한명회가 있다.
자식을 못낳은 정비(正妃)는 정종, 단종, 성종, 중종, 인종, 선조, 헌종비 7명이며
반대로 왕을 낳은 후궁은 추존왕 원종을 낳은 선조후궁 인빈 김씨, 경종을 낳은 숙종후궁 희빈 장씨,
영조를 낳은 숙종후궁 숙빈 최씨, 추존왕 진종을 낳은 영조후궁 정빈 이씨, 추존왕 장조(사도세자)를
낳은 영조후궁 영빈 이씨, 순조를 낳은 정조후궁 수빈 박씨, 영친왕을 낳은 고종후궁 순헌황귀비 7명
인데 이들은 현 청와대 옆 칠궁 사당에 모셔져 있다.
ㅇ 제릉 (齊陵)
끝내 남편이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는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한씨부인은 처음에는 해풍군 치속촌에
묻혔다가 1392년 7월 17일 조선 개국 다음날 절비(節妃)로 추존되고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칭하였다가 이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봉릉하였으며 제릉의 동쪽 마을에 재궁(齋宮)을 지어 초경사(肖慶寺)라 했다.
능에 제사를 올리는 사찰을 둔 것이다.
1398년 태조의 선위로 왕위에 오른 둘째 아들 정종은 11월에 모후인 절비 한씨의 묘호를 신의왕후
(神懿王后)라 추존했으며, 이듬해 2월에는 즉위 후 처음으로 제릉 참배를 위해 개성으로 행행했다.
이때 신하들이 제릉의 친제(親祭)가 효성은 지극한 일이지만 임금으로서의 봉선지도(奉先之道)는
아니라며 중지하기를 재차 요청했으나 정종은 들어주지 않고 개성으로 가서 제릉을 참배했으며 이
때 개경에서 흡족한 마음을 가졌던 정종은 결국 한양에서 개경으로 다시 천도하게 된다.
규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제릉은 1407년(태종 7) 박자청에게 왕비 릉의 규모로 확장케 하니 자세한
내역은 알 수 없으나 난간석과 석장승을 세운 박자청에게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제릉
은 왕릉 규모를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다음해 이방원의 건원릉과 후일 태종의 헌릉까지 조
성하여 조선초기 왕릉 조영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태종은 정종이 개성으로 옮긴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제릉에 고했으며 제릉의 재궁(무덤
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을 수리하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또한 1408년(태종 8년)에는 다섯째 아들 태종이 존호를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라고
높였는데 1683년(숙종 9년)에 여러 왕후중 태조비와 태종비의 존호에만 ‘태太’자가 있어 이를 삭제하
였으며, 1897년(광무 원년)에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고종이 황제위(皇帝位)에 오름에 따라
선세(先世) 추존의 옛예에 따라 태조를 태고조황제, 신의왕후를 신의고황후로 추존했다.
제릉은 조선건국전에 지어져 개성에 남겨진 바람에 지금은 북한땅이 되어버려 가볼 수가 없다.
문화재청이나 관련 사이트에도 명확한 최근의 사진이 없어 북한이 어찌 관리하고 있는지를 알수도 없다.
인터넷에 올려진 사진들로 아쉬움을 대신하고 언제고 답사 가 볼 그날을 기대해본다.
<제릉전경.... 왼편 앞쪽으로 낡았지만 정자각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수복방이거나 비각인듯한 건물이
보인다. 뒷편으로 사초지위에 석물과 봉분이 보이는데 3단이 뚜렷이 나뉘어져 보인다.>
![제릉](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84%2Fhappytour%2Fbbs%2F84%2F20100901_063857_88594debe0867399b181ee72a39f3a3.jpg)
<이 사진은 겨울에 뒷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곡장은 보이지 않고 축대식으로 쌓은 얕은 옹벽인듯하며 병풍석과 난간석은 건원릉과 비슷해보인다.
능침 주변의 석호, 석양이나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도 비슷하지만 홍살문은 보이지 않는다.>
![제릉.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84%2Fhappytour%2Fbbs%2F84%2F20100901_063857_313cffadcf68a5bf57c7d4b54a2b1ad.jpg)
<혼유석.. 장대한 규모나 5개의 고석은 건원릉과 다름 없어 보인다.>
![제릉](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84%2Fhappytour%2Fbbs%2F84%2F20100901_063956_a6dcf772f073f809720973e351f2aad.jpg)
<장명등... 팔각으로 화려한 조각은 비슷하나 전체적으로 무겁고 넓어 보이며 옥개석 윗부분이 없다.>
![제릉](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84%2Fhappytour%2Fbbs%2F84%2F20100901_064025_3787a27917c192353c994863326b1.jpg)
<병풍석 면에 조각된 그림.... 아래의 정릉 신덕왕후릉 병풍석(광통교에 묻힌)과 비슷하다.>
![제릉](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84%2Fhappytour%2Fbbs%2F84%2F20100901_064103_ca94c163ac88e6fced5b55dcf8b984.jpg)
<정릉에 쓰였다가 태종 이방원에 의해 광통교 석축이 된 병풍석... 거꾸로 박혀있다.>
![11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84%2Fhappytour%2Fbbs%2F84%2F20100901_064425_116761aa17b813233fe82d99403e41.jpg)
<상계에는 망주석, 중계에 문인석, 하계에 무인석이 도열해 있다.>
![제릉](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84%2Fhappytour%2Fbbs%2F84%2F20100901_064530_e674152487fedc8295de525f3b94cb2.jpg)
<제릉의 인석(左)은 동물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나 건원릉 인석(右)은 네모난 모양에 무늬를 새겼다.>
![DSC03290.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chosun.com%2Fimg_file%2Fclub_file%2F84%2Fhappytour%2Fbbs%2F84%2F20100901_064658_4c10b6c54197c4a19ca221377853eaf5.jpg)
<신의왕후 비석의 탁본...>
ㅇ 박자청(朴子靑)
조선 초기에 등용된 천인 출신 중에서 가장 고위직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개국공신 황희석의 家人출신
으로 태조때 중랑장(中郞將)으로서 궁문을 지키는데 태조 이복동생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가
임금의 명령 없이 들어가려하자 얻어맞으면서도 굳게 지켰기에 태조의 귀에 들어가 정4품 호군(護軍)
으로 발탁, 자신을 경호토록 하였다.
그후 건축에 재주가 있는 것이 알려져 나라 안의 모든 건축을 맡게 되면서 공조판서에까지 이르렀으니
한양은 정도전이 설계하고 박자청이 지었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제릉을 확장하거나 이성계의 건원릉
과 강씨부인의 정릉, 태종 이방원의 헌릉을 조성하고 다음해에 67세를 일기로 죽으니 세종이 그를 애도
하였다고 한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생모 한씨를 왕비의 지위에 올려놓고 계비 강씨는 후궁으로 격하시킨것이 260년이나
지속되었으니 정비 한씨는 영광을 못보고 죽은 한을 풀었을까? 또한 계비 강씨는 조선국 최초의 왕비, 최초의
국모라는 영광은 간데없이 그 기나긴 치욕와 굴욕의 세월을 어찌 지냈을까?
강씨부인 옆에 묻히고 싶어하던 아비의 소원을 외면한 한씨 소생 임금들...
자기 자식을 왕위에 올리려다가 어린자식들을 피바람에 죽게 한 강씨 부인의 욕심...
남편이 임금이 되기전에 죽어 왕비가 되어보지 못한 한씨 부인의 아쉬움...
참으로 꼬이고 엉키고 헝클어진 운명들이다.
강씨 부인의 정릉을 가보면 풀어질까?
http://blog.daum.net/happy-tou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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