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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에 올리는 주제 글 사이사이에 죽음 관련한 기사 또는 좋은 글을 싣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 째, “나 말기암, 그래서 뭐”의 미용계 대모(代母) 그레이스 리 이야기입니다.
글 순서
1."나 말기癌 그래서 뭐" (2010. 8, 조선)
2."내 장례식장엔 핑크 꽃 가져와" 그녀, 지다 (2011.3.1., 조선)
3.그녀의 빈소는 핑크색 꽃으로 물들었다(2011.3.2.,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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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 말기癌 그래서 뭐" (2010년 8.21, 조선일보)
미용계 代母 그레이스 리 '생애 첫 숏커트'
유방암이란다 가슴을 잘랐다…
위암이란다 위를 잘랐다....
대장암이란다 대장을 잘랐다…
이번엔 다 퍼졌단다…
53년 나의 상징 단발머리를 잘랐다
콧대 높은 '미용사 선생님'
"난 꼴불견 손님에겐 머리 안 잘라줬어 안 오면 그만이고…"
쿨하고 당당한 삶
"속으론 힘들지만 징징거리는 건 질색이야, 노생큐지"
"야, 역사적 순간이다. 너 좋겠다. 얼마나 재미있어?"
"남자처럼 뒤를 팍팍 쳐. 군인 머리처럼 확 올려붙여."
"아니 노노, 더 올려. 오~케이 그렇게."
(사진. 네 번째 찾아 온 암과 깔끔하게 싸우기 위해 머리를 잘랐다)
2010년 8월 13일, 오후 5시 11분 31초. 그레이스 리(78·이경자)가 53년간 고수해온 단발머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리는 지지고 볶는 게 아니라, 잘 자르는 것만으로도 멋이 난다는 걸 처음으로 한국에 알린 사람이다. 그 여자, 그레이스 리의 상징이 바로 단발머리였다. 그건 채플린의 콧수염이나 마릴린 먼로의 금발이었고, 찐빵의 '앙꼬'이거나 냉면 속 달걀 반쪽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묘하다. 커트보를 걸친 선생은 거의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데, 가위 든 이의 몸짓은 좀 부자연스럽다. 강남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헤어 디자이너 이희가 주눅 들었다. 스승의 머리를 자르는 일이 쉽지는 않을 터. 그러나 머리 자르다 가위까지 떨어뜨릴 일이 뭐가 있을까. "하긴, 네가 지금 불안하지 않으면 인간 아니여. 불안하게 돼 있어."
사연이 있다. 그레이스 리는 "내 모든 기술을 이희에게 전수하고 싶다"며 몇달 전부터 이희미용실에 들러 후배에게 기술 전수 중이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암이 재발했다. 항암주사로 다 빠지게 생긴 스승의 머리를 자르는 제자의 심정이 얼마나 착잡했을까. 유방암·위암·대장암을 꿋꿋이 이겨냈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더 심각하다. 하지만 그레이스 리는 마치 "여기 커피 좀 더 줘요" 하는 느낌으로 자기 운명에 대해 말했다.
네 번째 찾아온 손님
―암에 여러 번 걸리셨습니다.
"자다가 자기 젖 만질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2001년 늦가을 새벽 4시 반쯤, 잠에서 깨어나 무심결에 만졌더니 뭐가 안에 있어. 병원에서는 더 진단할 것도 없이 유방암이래. 그래서 반 잘라냈지. 그리고 2년 전 배가 아파.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래. 진단받고 나서는 양곱창을 몇 인분이나 먹었나 몰라. '앞으로는 못 먹겠다' 생각하니 막 들어가. 그런데 위 절제 수술하고 나선 한동안은 못 먹겠더라고. 위장 사진 찍어서 보여주는데 그게 다 내장, 양 아냐. 하하하. 그리고 한 6개월 후에 또 배가 아파. 대장암이래서 15㎝ 잘라냈어. 지난주에도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이번엔 아들이 쉬쉬하고 말을 안 해. 의사한테 내가 직통으로 찾아갔어. 그런데 의사가 그냥 '복부예요' 하면서 복수가 찼대. 배에 다 퍼졌단 얘기지. 더 안 캐물었어."
―충격 받으셨죠.
"그럴 일 뭐 있어. 나 이번에 선고받고 나서 엊그제 용평 갔다 왔어. 우거지사골국, 램찹, 산채비빔밥 먹고 밤엔 음악회를 보고. 어쩜 귀·코·입이 어떻게 그렇게 다 즐거울 수 있느냐고."
―그게 그래도 마음이….
"사형선고는 이미 대장 수술할 때 받았어. 3개월 살기 힘들다 그랬는데, 수술하고 벌써 2년째잖아. 이번에도 항암치료 안 한다 했어. 그런데 의사가 협박해. 안 하면 고통이 심하다고. 난 아픈 건 싫거든. 3주에 주사 한 번씩, 6세트를 맞으래. 그래서 어제 맞고 왔어."
―암에 걸리면 다들 어떤 이유를 찾습니다. 선생님 경우엔 뭘까요.
"소심공포증?"
―그게 뭔가요?
"내가 말을 확확 해버리니까 다들 모르는데, 내가 무지 소심해. 머리를 자를 때도 한 번에 뚝뚝 자르지 못해. 양심을 속이는 일도 잘 못해. 그래서 잘났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야."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못 넘어가고 바로잡는 성격, 이런 것을 말하는 거다. 자기 책에도 커닝해서 졸업한 얘기를 길게 써놨다.)
―머리 자를 때 기분이 어땠나요.
"조금 전까진 울면 어쩌나 했는데, 웬걸.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재밌잖아. 이거 병 안 걸렸으면 죽을 때까지 단발만 하다 갈 뻔한 거 아냐. 몇년 전에 잘라볼 걸 그랬나 봐. 잘 어울리지 않아요? 괜찮아. 아주 좋아."
생애 처음으로 머리를 커트하고 1시간 반쯤 후, 그레이스 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희미용실로 찾아온 젊은 여성의 머리를 커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생님이 머리 안 잘라주면 그냥 땋고 다니겠다"는 광팬 약 스무명의 머리를 아직도 잘라주고 있다. 장소는 그의 제자들이 운영하는 미용실.
―남의 영업장에서 이건 불법 영업 아닙니까.
"돈 제대로 안 받으니까 불법은 아니야. 옛날에 받던 거 생각하면 지금 20만원은 받아야 하는데, 5만원만 받아. 내가 쓰는 건 아니고, '미용인기금'으로 적립하고 있어. 죽고 나서 부조금 오는 것도 거기 합칠 거야."
사진기 뷰파인더로 본 그레이스 리의 팔뚝은 사내의 그것과 같았다. 손은 컸고, 팔 근육은 펄펄했다. 그가 결코 '폼'으로만 살지 않았다는 얘기를 그의 팔뚝이 하고 있었다.
미국서 온 콧대 높은 '선생님'
국내 1호 유학파, '그레이스 리'에게 머리를 자르는 일은 장안의 마나님들에게 '열망'인 적이 있었다. 미용실 주인을 '돼지 엄마' '쌍둥이 엄마' 식으로 부르던 시절, 1972년 서울 도큐 호텔에 문을 연 미용실에는 꽃과 음악이 흘렀고, 원장은 패티김 같은 롱 드레스에 긴 손톱과 긴 속눈썹으로 손님을 맞았다. 미용사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일도, '파마하면 공짜'였던 커트에 디자인비까지 합쳐 내는 것도, 예약하는 것도 다 그곳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정말 밥맛'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호텔 미용실에 오는 여성이란 남편 잘 둔 여자, 혹은 그 남편이랑 술 마셔 주는 여자 아니었나요? 손님 구성이 좀 아이로니컬했겠습니다.
"그랬지. 처음 문을 열고 나서 '미국 유학파 1호' 어쩌고 하면서 매스컴에 나가니까, 고관대작 부인들하고 댄서들, 마담들이 몰려와. 나는 손님 한 사람에 30분씩을 할애하는데, 그 중 10분은 대화시간이야. 뭐 하는지 알아야 어울리는 머리 잘라주지. 그런데 마담들이 그걸 싫어해서 발길을 끊더라고."
―오만하셨다면서요.
"어떤 유명한 미용실 원장은 내가 어떻게 기죽이나 보러 왔다고 하더라고. 의자에 앉아 껌 씹으며 미용사에게 '수표 바꿔와라' '구두 닦아와라' 시키고, 하는 얘기라곤 '내 다이아가 더 크네, 네 것이 크네' 이런 얘기 하는 여자들, 딱 질색이야. 그런 손님은 머리 안 잘라줬고, 나 꼴보기 싫다고 안 온 손님도 많아. 어느 날 고관 부인이라고 왔는데, 자길 대접 안 한다고 투덜거려. 그래서 내가 '손님은 이 머리가 잘 어울려요. 이 이상 할 자신이 없어요'하고 돌려보냈어. 그랬는데 얼마 전 봤더니 '선생님이 이 머리 좋다고 해서 계속 이 머리 했어요' 하는 거야. 아이고야. 정말 미안해 그 양반한텐."
―장안에서 대단한 사람들을 희롱하면 좋았습니까.
"네. 우리나라 사람들 머릿속엔 미용하는 사람들 무시해도 괜찮다, 이런 생각이 많을 때였으니까. 물론 옛날 미용사들도 문제 많았어. 가게 한 편에서 식모처럼 찬밥 후루룩 물 말아 먹고, 돌아서서 다시 머리 하는 건 자기한테도, 손님한테도 실례야. 그러니 누가 존중했겠어."
―미용사한테 교사 자격증 있느냐. 왜 선생님이라 불러야 하느냐, 기분 나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 미용실에 가보니 20대 어린애한테도 '센세(先生)'라고 합디다. 나도 왜 그러냐 물었어. 그랬더니 '우리는 몸, 생리학을 바탕으로 머리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선생이다' 이래요. 우리나라 시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미국에서도 생리학 용어가 시험에 많이 나와. 일본 사람들 말이 맞는 거지."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공부 안 해도 하는 거 아닌가요.
"나도 미용사만 감쌀 생각은 없어. 무조건 '선생'은 아니지. 스타일리스트까지만 선생이고, 그 밑에는 그냥 '씨'라고 불러야지."
―잘 자른 머리는 어떤 머립니까.
"웬만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자르고 드라이하면 그날은 다 근사해. 그 다음날, 샤워하고 머리 감고 나면 엉망이 되는 게 문제지. 잘 자른 머리는 그 사람의 직업과 두상, 이미지랑 잘 어울려야 하고, 기술적으로는 자른 뒤 머리를 흔들었을 때 형태가 완전해야 해. 그런 머리는 한 달 반 정도는 거뜬해. 한국 여자는 머릿결이 좋아서 파마를 할 필요도 없어. 집에서 관리하면 돼. 그런데 그런 얘기 했다가 미용실로 욕하는 전화 오고 난리 났어. 왜 남의 밥줄 끊느냐고."(그레이스 리는 1977년 조선일보에 '상식의 허실'이라는 칼럼에서 파마하지 말라, 미용실 자주 가지 말라는 내용을 써서 파란을 일으켰다.)
이경자―승용이 엄마―그레이스 리
'그레이스 리'에 앞서, '이경자'는 두 갈래 인생을 살았다. 유복한 어린 시절, 불행한 결혼생활.
1932년 궁정동 계리사의 집에서 태어난 이경자는 청운소교, 6년제 이화고녀(이화여고)를 마쳤고, 피란지 부산에서 부모가 정한 남자와 19살에 결혼했다. 이듬해 첫 아들 승용을 시작으로 딸 둘을 더 낳았지만, 15년 만에 이혼했다. 이혼 후 그녀는 미국으로 날아가 미용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적부터 꽤 강단 있던 분이 왜 그렇게 남자 보는 눈은 없었습니까(자서전 '오늘이 내 삶의 클라이맥스다'에 묘사된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남편의 권위주의와 폭력, 자살 시도 등…. 그러나 그녀는 "피란 시절, 부모가 시켜서 한 결혼"에 대해 그리고 "아주 김새는 일"에 대해 말하길 꺼려했다).
"그건 말하기 싫어. 하면 기분 나쁜 얘기잖아."
―오래된 얘기 아닙니까.
"정말 싫어."
―서른네 살 이혼녀, 왜 미국이었습니까.
"68년, 위자료 2000달러를 들고 갔지. 돈과 자유가 있는 곳이었으니까. 처음에 코넬대 호텔경영학과를 가려고 했지. 근데 안 받아줘. 한국의 고졸에 영어도 못하는데 누가 받아주겠어. 하는 수 없이 미용학교인 월프레드 아카데미에 들어갔지. 졸업시험은 커닝했는데, 그게 2등이 됐지 뭐야."
'이거 졸업해야 빨리 한국 가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고 앞자리 '샘'에게 읍소해 시험 답안을 베낀 것이 그만 2등 졸업이 됐다. 다른 학생들 눈초리가 사나워졌고, 그녀는 더는 부끄럽기 싫어서 미용자격 시험을 악착같이 공부해 붙었다. 자격증을 받은 날, 그녀는 그걸 들고 아파트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1968년 뉴욕 최고의 미용실 헨리벤델에 취직했고, 거기서 전설의 헤어드레서, 폴 미첼에게 머리 디자인 법을 배웠다. 그때 배워 한국에 소개한 것이 두상을 일정한 부분으로 나누어 머리를 잘라 조형미를 완성하는, 섹션 분할 커팅법이다.
―거기 미용실에서는 뭘 하셨나요.
"당연히 머리 감기는 것부터 했지.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비눗물이 뚝뚝 떨어지는 데도 그냥 끝내버리더라고. 애들 목욕시킨 경험에다 서울 명동의 미용실에서 나한테 해줬듯 머리 감기며 지압을 좀 해줬더니 미국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 보통 하루에 팁을 7달러쯤 받을 때 나는 15달러씩 받았어."
폴 미첼은 "한국서 주부였다"는 그레이스 리의 감각과 성실함에 반해 그가 세운 대중적 미용실 크림퍼스에 스타일리스트로 자리를 내줬고, 그레이스 리를 "크림퍼스의 보석"이라고 칭찬했다. 서울로 돌아온 것은 1971년 12월.
아이들은 언제나 즐거운 편지만 보내왔지만,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다. '아이들의 엄마로서만' 함께 살겠다며 전 남편 집에서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그녀. 마치 영화처럼 '탈출 작전'을 벌여 1973년 3월, 남산외인주택을 얻어 '탈옥'에 성공했다. 아이들을 데리고(막내딸은 1년 후 남편이 재혼하면서 그녀의 품으로 왔다).
중국집 주인, 그레이스 리
도큐 호텔 이후 대학로·신촌·청담동 등지에서 미용실을 열어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녀. 1979년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한국 최초의 금메달을 따냈고, 1991년 '그레이스 리 커팅클럽'이란 조직을 만들어 기술 보급에도 앞장섰다. 그러다 2003년, 나이 71세에 경남 통영으로 내려가 식당을 차렸다. 청담동 '시즌스'의 첫 주인이기도 했던 그녀이긴 했지만, '통영'은 의외였다.
―'중국요리 이선생'은 어떻게 차리게 됐습니까.
"일제강점기 계리사였던 아버지는 미식가였어요. 나 역시 비슷해서 여학교(이화여고) 다닐 때도 도시락 반찬 섞이는 게 싫어서 도시락 안 가져간 적도 있어요. 애들 호떡집에서 모일 때, 난 혼자 명동 금강그릴에 가서 오므라이스 먹었어. 미용실 할 때도 식사 시간엔 꼭 좋은 식당에 가서 좋은 음식 먹었어요. 2003년 어느 날, 박여숙화랑 파티에 갔는데 회를 써는 이가 아주 괜찮아. 그이가 나더러 '낚시 좋아하신다며 통영에 놀러오라, 내가 배가 있다'고 하는 거야. 그가 아마추어 사진가라 날 예쁜 데만 데려간 거야. 내가 홀딱 넘어갔지. 그래서 바로 다음날, 거기다 아파트 한 채 사고 일주일에 서너번 낚시하면서 놀았어. 그러다 어느 날 서호시장에 가보니 머리가 빙빙 도는 거야. 싱싱한 생선이 많아 황홀해서 말이지. '여기 무슨 식당이 없나' 물었더니 '중국집이 시원찮아요' 하는 거야. 오케이 그럼 중국집이다, 하고 차렸지."
―통영에 중국집이라, 식당 알리는 데 애먹었겠습니다.
"전혀. 식당 차렸더니 매스컴에서 다 알려줘서 정말 장사 잘됐어. 서울·부산서 몰려 오고. 안 될 수가 있나. 직원 7명에, 최고급 재료 쓰면서 값은 쌌으니. 그거 하다가 2억 넘게 까먹었어."
―생계 때문에 식당 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정말 인생 쓴맛을 보신 적이 없네요.
"그래서 내가 돈을 몰라. 빌딩 지으면 미장원, 식당을 꼭 하는데, 부동산 값 올라서 돈 번 것 빼고는 영업해서는 돈을 번 게 없어. 이 나이엔 돈 필요하면 아들한테 좀 달라 그러면 되니까 문제없어."
1차 인터뷰를 마친 후, 그와 함께 먹은 저녁메뉴는 안창살이었다.
누가 뭐래도 클라이맥스다
그리고 사흘 후인, 16일 삼성병원 암병동 통원치료실로 그를 다시 찾아갔다. 그녀는 항암제가 가져다주는 고통 때문에 이날 오전 병원에 입원했다. 볶음밥 두어 숟갈, 복숭아 세 쪽이 그녀의 하루 끼니였다.
―선생님, 어떠세요?
"기분이 너무 좋아. 오전엔 몸이 조여 와 너무 괴로웠는데, 안 아프니까 너무 좋잖아. 그런데 나 할 말 있으니까 꼭 써줘. 이게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텐데. 첫째, 난 협회라는 곳이 좀 더 잘해줬으면 좋겠어. 복지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일을 좀 해달란 말이야. 헛돈 쓰지 말고. 그리고 미용인들에겐 말이야, 기초가 든든해야 한다고 해줘요. 화랑가서 그림 보고 색감 높이고, 손님과 대화하려면 연극도 보고 문화를 알아야 해. 화장, 염색, 커트, 파마, 디자인 이런 거 한꺼번에 다하지 말고 전문화해달라고 해줘. 미장원 체인 차려서 돈만 벌려고 하지 말고. 물론 이미 다들 잘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말이야."
―1970년대 이혼이라는 아픔을 딛고 이후 인생 변신에 성공했습니다. 선생님에게 헤어 디자인이란 작업은 어떤 의미입니까. 재능은 어디서 옵니까.
"내가 많을 땐 하루 28명, 보통 12명씩 40년을 잘랐어. 몇만명은 되겠지. 그들이 인정해준다면 내가 달란트가 있는 것이지, 나 스스로는 그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헤어 디자인? 난 어려운 말은 몰라. 어쩌다 밀려서 살려고 한 거지. 무슨 유학파 1호? 좋아하시네.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그럼 암은 뭡니까.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까.
"젊을 적부터 죽음을 생각해서 그런지 난 이상하게 죽는 게 두렵지 않아. 그냥 놔버리면 되는 거잖아? 난 82살 내 생일 무렵에 자연스럽게 죽고 싶었어. 그런데 그것도 어렵게 생겼어. 그런데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암이라…. 나 같은 사람이 걸렸으니까, 이러고도 대담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계기?"
―선생님의 쿨하고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힘들다 말하지 않으려면 내면은 더 힘든 거 아닌가요?
"힘들어. 몇 배 힘들어.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게 얼마나 힘들게. 하지만 난 힘들다 말하는 게 싫어. 내가 장난기가 있어 남이 나 아픈 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게 싫어."
―선생님 소식 들으면 '안됐다' 하는 사람도 많겠습니다.
"오, 난 그건 싫어. 내가 징징거리는 것도, 남이 그러는 것도 아주 질색이야. 노생큐."
온종일 남의 머리 감겨 15달러 벌던 시절, 뉴욕 최고의 플라자호텔 바에서 7달러50센트짜리 모에샹동 샴페인을 마셨던 여자. 그는 나락에서도, 자신의 이름처럼 우아함(grace)을 지켜왔다. 그 원동력이 뭔지 물었다. "몰라, 나도 그걸 몰라. 내가 실은 아주 촌스럽고 고지식한 사람이란 것밖에는…. 댁이 좀 찾아봐."
전화벨이 울렸다.
"어, 내가 지금 항암치료 중이야. 8월 말쯤 전화할 테니 그때 자릅시다. 오케이, 오케이. 그날 봅시다."
만 78세에 네 번째 찾아온 암과 싸우고 있는 그레이스 리 혹은 이경자. 그녀는 이 와중에도 '영업 중'이다. 그녀의 클라이맥스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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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장례식장엔 핑크 꽃 가져와" 한국 머리 문화 바꾼 그녀, 지다
(2011년 3월 1일, 조선)
"나 죽으면 갖고 있는 옷 중에 제일 예쁜 옷 입고 와야 해. 그리고 꽃도 말야, 왜 장례식장에서는 흰꽃만 쓰지? 난 핑크나 빨강처럼 예쁜 게 좋아. 그리고 절대 울고 짜고 하지 마. 음악은 아주 경쾌한 걸로 틀었으면 좋겠어. 죽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러니 좋지 않겠어? 장례식도 경쾌하게 치르면."
두 번째 항암치료를 받은 지난해 늦가을, 그레이스 리는 아주 명랑하게 자신의 장례식 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딱 80살 생일(12월 9일)을 치르고 열흘 후쯤 죽고 싶다"던 '나이 든 소녀'가 조금 일찍 하늘로 떠났다.
'한국 미용계의 대모'로 불렸던 그레이스 리(이경자·79)가 28일 오전 11시 별세했다. 세 번째 찾아온 암을 물리치기 위해 6번의 항암치료를 버텨낸 그녀지만, 체력이 미처 받쳐 주지 못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이화여고를 졸업한 그는 결혼 후 15년간 주부로 지냈다. 불행한 가정생활 끝에 이혼한 그녀는 1968년 미국으로 가 미용학교인 월프레드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같은 해 뉴욕 최고의 미용실 헨리벤델에 취직했고, 거기서 전설의 헤어드레서 폴 미첼에게 헤어 디자인을 배웠다. 그녀 주머니엔 언제나 동전과 1달러짜리가 가득했다. 머리카락이 뽀독뽀독할 때까지 헹구는 한국 아줌마의 머리 감기는 방식에 뉴요커들은 열광했다. 그녀는 말했었다. "그 돈(팁)으로 뉴욕 최고의 호텔 바에 가서 재즈를 들으며 샴페인을 마셨지."
그레이스 리는 살아서 한국의 머리 문화를 바꿨다. '유학파 1호'로 1971년 귀국해 이듬해 도큐호텔에 미용실을 연 이후 대학로·신촌·청담동에 미용실을 열어 머리를 볶는 것이 최고의 멋인 줄 알며 '파마 지상주의'에 빠져 있던 한국 여성들에게 우리의 머릿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머리 잘 자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멋진지를 알려줬다. 머릿결과 얼굴 선을 살리는 그녀의 '단발머리'는 대유행했다. 미용실 자주 오지 말고 집에서 머리 만지라며 개인용 헤어드라이어 쓰는 법을 알려준 것도 그녀였다. 자존심 강했던 그녀는 디자인비를 따로 받았고, 미용사에게 잔심부름시키는 손님은 받지 않았다. 미용사를 '선생님'으로 부르게 만든 자존심 강한 예술가였다.
헤어 디자이너가 아니었으면 '요리 연구가'로도 이름났을 사람이다. 71세에 통영에 중식당을 열었고, 청담동에도 음식점을 차려 미식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그레이스 리가 "내 친구 같은 아들"이라던 장남 김승용(59)씨는 "너무 경박해서는 안 될 것 같아 파티처럼 장례식을 치르긴 어렵다. 하지만 빈소엔 흰 국화 대신 장미꽃 같은 화려한 꽃을, 너무 슬픈 찬송가 대신 재즈 같은 찬송가 연주를 틀어놓겠다"고 했다. 유족으로는 김승덕(57·프랑스 파리컨소시엄 국제기획위원), 김승화(54·뉴욕 벤밀러 변호사 사무실 대표) 두 딸이 더 있다.
살아서 운명을 거부했고, 떠나면서도 관습을 깨고 싶었던 타고난 '끼'의 예술가, 이경자 혹은 그레이스 리였다.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발인 2일 8시 30분. (02)3410―6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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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녀의 빈소는 핑크색 꽃으로 물들었다(2011년 3월 2일, 조선)
미용계 代母 그레이스 리 유언대로 흰꽃대신 장식
"부음을 듣고는 가서 너무 울면 어쩌나 했어요. 그런데 핑크색, 빨간색 꽃 때문인지 무작정 슬픈 게 아니라, '아, 선생님이 좋은 곳으로 가시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헤어 디자이너 이희)
지난달 28일 별세한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이경자·79)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흰꽃은 싫어. 예쁜 꽃을 가져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머니 뜻을 받들어 상주인 김승용(59)씨는 28일부터 빈소에 흰 국화대신 분홍, 빨강 등 다채로운 색의 조화를 놓아뒀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국 헤어디자이너의 대모 그레이스 리의 빈소 모습. 하얀색 꽃을 주로 쓰는 일반 빈소와 달리 고인의 유언대로 붉은 꽃들로 장식돼 있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국 헤어디자이너의 대모 그레이스 리의 빈소 모습. 하얀색 꽃을 주로 쓰는 일반 빈소와 달리 고인의 유언대로 붉은 꽃들로 장식돼 있다.
1일 삼성의료원 빈소에는 이색적인 빈소를 보려고 일부러 들르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첫날엔 더러 흰꽃을 보낸 이도 있었지만, 1일부터는 문상객들이 아예 붉은 꽃을 사들고 왔다.
상주 김씨는 "문상객들이 '장례 참 멋있게 치른다'는 반응이 많고 '사진 찍어도 되나' 묻는 이도 꽤 있다"며 "어르신들도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여 좀 놀랐다"고 했다.
'빈소=흰국화'가 상식이 됐지만, 이런 풍습은 개화기 이후 일본과 유럽을 통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민속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칠용 한국공예가협회장은 "빈소에 꽃을 바치는 문화는 근대 이후 형성된 것"이라며 "예전에는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뜬 사람의 장례를 치를 때, 상여를 붉은 꽃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말했다. 상가에 놓인 '울긋불긋 예쁜 꽃'은 파격이지만, '비례(非禮)'는 아닌 셈이다.
후기
2011년 3월 1일, 공휴일 이른 아침 시간에 저는 서울 삼성병원의 그레이스 리 빈소를 방문했습니다. 예상대로 문상객은 아무도 없어 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아나운서 김재원과 이금희가 먼저 와 접객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고인께 인사를 드리고, 상주를 뵈었습니다.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이른 시간에 조문을 오니 상주도 누군가 매우 궁금해 했습니다. 애도를 표하고, 제 소개를 드렸습니다. 제 명함을 찬찬히 읽던 상주가 말했습니다. “아! 이런 일을 하시는 분도 계시군요! 어머님이 생전에 아셨으면 분명히 꼭 만나고 싶어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어머님 이야기는 신문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참 대단하시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그렇게 기억을 하고 있던 차 어제 신문에서 모친의 별세 소식을 읽었습니다. 생전에 뵌 일은 없지만 가시는 길에 인사는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소원하신대로 꽃과 음악이 준비되고 있는지도 보고 싶었습니다.”
빈소는 그분이 소원하신대로 분홍색과 붉은색의 장미꽃으로 덮여 있었고, 탱고 음악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접객실에서는 고인의 생전 활동 영상이 모니터에서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때 제가 상주의 허락을 받고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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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문의 글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자존감이 대단한 여자였네....
긴 글을 올리면서 미안한 마음을 가졌었는데, 그러나 추려서는 그녀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가 쉽잖아서... 읽어 줘 고맙네. 가방끈 등과는 상관없이 죽음에 대해 담담한 태도를 지니고 산 그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네. 그리고 하나 더. 지금은 고인이 된 이문재 맘이 고딩 때 필동에서 미용실을 하셨기에, 그렇게 연결이 되니 친숙한 기분도 들었고.
이분은 신앙으로 죽음을 극복하신분이다... 원래 성격도 낙천적이고 당당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