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목사님
(나 2: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님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아멘
원어중심 성경강의 나훔 38번째, ‘파루르, 빛’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뒤에 보니까 오늘 ‘Walk in the Light’라고 돼 있네요, 빛속으로 걸어라라고 하는 거죠, ‘빛 가운데 걸어라’.
오늘 제목이 ‘파루르, 빛’인데 오늘 제목과 어울리는, 제가 어울리는 거죠, 여기는 원래 있었고, 오늘 설교 내용이 어울리게 될 것 같습니다.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라고 하죠.
니느웨는 큰 성이에요. 그래서 율법의 큰 성, 우리를 이야기하는 거죠. 우리 안의 율법을 텅 비어버린 거예요, 니느웨를 텅 비어버린 건, 우리 안의 율법을 텅 비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공허하고 황폐하게 만들어버리신 거죠.
주민이 낙담하여 라고 해요.
‘주민’은 ‘레브’예요, 그래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딱딱하고 완고하잖아요, 그런 그 율법적 마음이란 말이에요, 원래. 그 마음을 ‘마사스’ ‘녹여버리셨다’. 에스겔서 36장 26절 합독하시겠습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녹은 그 마음이 부드러운 새 마음이죠, 새 마음이 새 영을 받은 마음인 거예요. 새 영을 받았다는 거는, 진리의 말씀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은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걸로 치환해서 읽자고 했죠. 그러니까 모든 말씀을 진리로 듣고 깨닫는 것이 새 영을 받은 거고, 새 영을 받았다는 거는 부드러운 마음이 됐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 ‘레브’라는 글자 자체가 이게 파자하면 ‘라메드’와 ‘베트’죠, ‘라메드’와 ‘베트’, ‘가르치는 성전’이라는 거예요, 의미 자체가, 마음이.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성전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서 깨닫게 하시는 곳이 마음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성전에 진리를 주시는 거죠, 그래서 새 마음, 곧 새 성전을 만들어 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베레크’라고해요, ‘무릎’이죠. 그러니까 율법의 무릎을 꿇고, 무릎이 굳건하게 서 있는 두 기둥, 율법이란 말이에요, 선악의 그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거를 꿇려버리시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어 버리는거죠. ‘바라크’가 하나님을 ‘찬송하다, 무릎을 꿇다’는 뜻이잖아요, 그리고 ‘베라카’ 그게 ‘복’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베레크, 베라카 같은 글자란 말이에요, 바라크도 마찬가지고, 자음은 다 똑같단 말이에요. 그리고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라고 해요.
‘허리’는 ‘모텐’이에요, 역시이 율법의 허리를 무너뜨리고 진리의 허리띠, 진리잖아요, 말씀이란 말이에요. 진리의 말씀, 진리의 말씀은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진리,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죠. ‘진리의 허리띠로 띠워서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라고 하잖아요, 원치 않는 곳, 십자가의 자리로 끌고 가 주신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멸망하는 니느웨에 대한 저주 같지만, 성경은 항상, 성경 독자인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표피적으로 보이는 그 내용과는 정반대로 이면적으로 보면은 그 속뜻은 구원의 말씀인 거예요.
성경을 보는 그 원칙이 그거라고 했죠? 나에게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항상 내 안의 일을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성경을 보실 때 그러한 관점으로 보시란 말이죠, 내 안의 일을 나에게 주시는 거에요. 내 안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거예요. 다른 누구에게 주는 게 아니에요. 마치 성경을 볼 때, 악인은 벌하고 의인은 상을 준대, 그래서 내가 상 받는 의인인 것 같고, 또 불신자들은 악인 같고, 이렇게 느끼기도 하는데, 성경에 들어온 자는 전부 성도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말하는 악인은 전부 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당일수록 나예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전부 가르침이란 말이에요. 가르쳐 주시는 거고, 그걸 통해서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세리가 전부 나라고 했잖아요, 내가 의인이라고 자랑하던 바리새인, 과거에 내가 그랬잖아요, 내가 뭘 잘못했나, 뭐든지 내가 옳고, 내 뜻대로 살려고 했고, 그래서 내 관점에서 맞으면 맞는 거고, 틀리면 틀린 거고, 전부 나의 의를 주장하는 자였단 말이에요.
거기에서 '제가 죄인 맞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할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 이걸 깨닫는 게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롭게 된 세리란 말이죠, 그게 새 사람이란 말이죠, 진리를 깨달은 자란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악인을 저주하고 징벌하시는 것 같은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그건 전부 악인인 나를 가르쳐서 의인 만드는, 성전 만드는 그러한 축복의 말씀이란 말이죠.
그리고 또 다른 원칙 하나는, 하나님이 악인인 나를 저주하고 징벌하는 그런 이제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내가 악인이라면 마치 하나님이 엄청나게 나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대상은 항상 내 안에 옛 사람, 내 안에 그 진리 아닌 거, 율법을 미워하시고, 저주하시고, 징벌하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의 말씀으로 떨어지는데, 그건 모두 성도를 깨닫게 하시는 거고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두 마음, 우리의 왕 노릇, 하나님 노릇을 끊어내시는 거예요.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 주고자 하시는 사랑의 말씀이라는 거죠.
지금 우리 일상에 하나님이 말씀을 주고 계시죠, 모든 것이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성경을 이해하는 또 다른 원칙이에요, 내가 진리를 깨닫는 원칙이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말씀이란 말이에요, 우리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많이 있죠, 그것들이 전부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관계들도 많이 있죠, 부부도 있을 거고, 부모, 자식 관계, 형제, 자매 관계, 많이 있을 거예요, 그게 전부 말씀이에요, 그걸 내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란 말이예요. 그리고 현상들,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 불고, 태풍 불고, 전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에게 다름 아닌 나에게 주시는 말씀, 그걸 통해서 나는 깨달아가는 거예요.
하나님 뜻이 뭔가 자꾸 구하는 자로 가셔야 되는 거예요. 뭐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새성전으로 만든다면 그 말씀은 전부 무슨 말씀이겠어요? 죽이는 말씀인 거예요, 옛 성전 허물고 새 성전으로 만드는 그런 말씀인 거예요. 하나님은 새 창조를 위해서 이 땅을 운행하고 계신 거예요, 그게 아니면은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땅이 운행되고 있다는 건 하나님이 나를 새 성전 만드시려고 하는구나 그러면 그 전제는 뭐예요? 전제 조건은, 새 성전이 되려면 옛 성전 허물어야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예요? 항상, 나를 죽이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에게 어떤 일이 오고, 또 관계를 통해서 어떤 일들이 있고, 또 그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고 이런 것들이 전부, 나를 죽이는 말씀으로 깨달아가셔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나를 죽이시는가, 나의 두 마음을 어떻게 꺾어주시는가, 이 관점에서 모든 걸 보셔야 되는 거죠.
우리 인생 자체가 광야란 말이에요, 출애굽하고 광야를 지금 이스라엘 40년 광야를 돌잖아요, 성도의 인생 자체가 광야예요, 광야는 성도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출애굽한 성도의 인생, 그게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냐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단 말이에요, 나의 마음 안에서. 그 인생 자체도 광야고, 인생을 겪는 나의 마음, 그게 광야란 말이에요. 그 광야에서 많은 일들을 겪어요, 그 일들이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하고, 또 슬프게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는 거죠. 이렇게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이걸 느끼는 이유가 뭐예요? 이렇게 감정이 부침이 있다는 거는 말씀으로 주신 일을 말씀으로 못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뻤다 슬펐다 하고 행복했다 불행했다 이러는 거예요,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주셨는데 그것들을 말씀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일로, 사건으로. ‘다바르’라는 단어가 있다 그랬죠, 그게 ‘말, 일, 사건’이라는 뜻이죠, 원래는 ‘말씀’이에요, 말이고 말씀인데, 그걸 우리는 일로, 사건으로 경험을 해요, 경험을 하는데, 그걸 보이는 대로 보는 거예요, 껍데기 그대로 보는 거예요.
그걸 ‘파님’이라고 한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라고 주시는 것들, 나타내신 것들, 보여주시는 것들, 그것들이 우주 만물이고, 자연들이고, 바깥에 모든 것들, 보이는 그 모든 것들, 자녀들도 있을 거고, 비즈니스도 있을 거고,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건 전부 ‘다바르’란 말이에요. 근데 그거를 우리는 하나하나의 일로, 사건으로, 본단 말이에요. 어떤 일이 있고, 어떤 일이 있고, 어떤 일이 있고, 근데 이거는 문제고, 이거는 좀 괜찮고, 전부 이렇게 보고 있죠. 근데 그렇게 보면은 그게 전부 일이 되고 사건이 되는데 그러면은 뭐예요?
말씀이 토막이 난 거예요, 조각이 난 거예요. 말씀을 하나로 보지 못하고 나누었단 말이에요. 내 마음이 지금 그러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뭐예요? 이게 율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이란 말이에요, 반석이란 말이에요, 그걸 주시는데 근데 그걸 이스라엘은 깨는 거예요, 율법으로, 하나하나 세목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돌들 주워가지고 사람 치고 있는 거죠. 율법으로 보게 되면은 살인하는 자로 갈 수밖에 없는 거란 말이죠, 그거 보여주시는 거예요.
우리 광야에 그 광야 인생에 일,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건 전부 말씀이란 말이죠. 근데 우리가 이제 우리 일상에 일어나는 일들,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게 전부 말씀인데, 그렇다면은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가치를 판단하고 있어요. 어떤 일은 중요하고 어떤 일은 덜 중요하고 그렇게 보고 있죠. 그러면서 또 취사 선택을 해요, 요거는 받아들이고 이거는 무시하고 또는 버리고, 내 거 아니고 이거는 꼭 붙잡고 이렇게 이제 취사 선택을 한단 말이에요. 그걸 보이는 대로 보면, 그 보이는 그것들이 가치를 갖게 되는 거예요. 따로따로 각자의 가치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열이 나누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취사 선택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걸 장사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9장 45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눅 19:45-46)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46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기도의 집’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 그 뜻을 찾는 자 하나님의 뜻은 하나라니까요, 나 죽여서 새 성전 만드는 거 그거 하나예요. 그러니까 기도라는 거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말을 듣고, 나에게 내가 원하는 거 이루어지는 거, 이걸 기도라고 생각을 하지만,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예요, 구하고 찾는 거예요. 하나님 뜻은 항상 내 안의 성전이라니까요, 새 성전 만드는 거니까 나를 죽이는 거죠, 옛 사람을 죽이는 거죠, 죽이는 말씀이란 말이죠. 그걸 구하는 집인데, 성전인데, 근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를 만들었다’라고 하는 거, 하나님 말씀 가지고 장사하니까, 우열 나누고, 취사 선택하고, 이게 하나님 걸, 자기 마음대로 팔고 사는 강도짓을 하고 있는 거죠.
이 일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지금 누가복음에서, 주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니까 이런 나쁜 놈들하고 쫓아내니까 우리는 그저 보면서 벌을 찾지만, 이 나쁜 놈들 쫓겨나야지 당연하지 주님이 당연한 일 하셨지 옳은 일을 하셨지 이렇게 보는 거지만, 지금 우리 안이 지금 강도의 소굴이라니까요, 주님이 그래서 오셔서 쫓아내셔야 되는 거예요, 뭘로 쫓아내시겠어요? 장사하는 두 마음을 쫓아내시는데 뭘로 쫓아내셔요?
주님은 말씀으로 오신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장사하는 마음, 그 두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주시는 거죠. 선악을 판단하는 그 일, 그 일이 장사하는 일이고, 우리 안에 그 마음이라고 하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일이란 말이죠.
지금 우리가 계속 인생 살면서 선악 판단하고, 선악을 판단하면 항상 희로애락의 감정이 나와요, 감정이 왜 나오느냐 하면 그것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선악을 판단하니까. 그래서 화낸다는 것도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그게 하나님께 화내는 일이고 그래서 또 화를 내고 있고, 화라는 건 그렇단 말이에요.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로 보지 못할 때, 우리가 취사 선택을 하기 때문에, 판단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화를 내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고 이것들이 전부 그러한 작용 때문에 일어난다는 걸 이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성도는 그래서 그거 깨닫고 점점점점 이제 속지 않는 자로 가는 거예요. 당연한 걸로 이제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뭔가 상대가 나한테 잘못을 하고 그래서 내가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하고 화내고 이걸 당연한 걸로 해요. 인지상정 아니야? 이러면서 당연한 걸로 하는데, 당연한 게 아니에요, 말씀이라니까요.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일을 했으면 그건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내가 어떻게 깨닫느냐의 문제인데, 그걸 일단 내가 판단해서 이건 악이야라고 판단을 해버렸다니까요. 이게 하나님께 화내는 일인 거에요, 그러고 있단 말이죠.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라고 해요.
‘유익하던 것’ ‘켈도스’, 선악의 판단을 하게 되면 선악, 나에게 ‘이익’이 되는 거, 그게 선인 거죠, 그러니까 선악의 기준은 항상 손해와 이익이에요. 뒤에 ‘제미아’라는 단어가 나오죠, 이게 ‘손실, 손해’라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손해와 이익에 의해서 선악을 판단하는 거예요. 선악의 기준은 항상 손해와 이익이에요, 이익이 되면 선이에요, 남들이 나쁘다고 손가락질해도 나는 선에요, 그리고 나에게 손해가 되면 그건 악이에요, 아무리 착한 일이라고 칭송을 해도 이건 나한테 기분 나쁜 일이 되는 거예요. 물론 명예라는 그런 더 큰 이익을 바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정적인 손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만 그것도 역시 탐심에 의한 거란 말이에요.
바라는 게 따로 있었고 그걸 더 크게 여겼다면, 그 켈도스란 말이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디아’란 말이에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때문에', '위하여'라는 의미는 없어요, 디아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는 진리로 내 안에 오시는 주님이란 말이에요. 말씀이란 말이에요, 말씀이 육신 되어 오셨는데 그 말씀을 진리로 나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란 말이에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진리의 말씀으로 내 안에 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해주신 그분 덕분에 다 해로 여기게 됐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내가 판단하던 그것들이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이거 이익이야 했던 것들이 다 참된 이익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영혼을 위해서는 손해다라고 하는거예요, 이 땅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익을 보더라도, 영혼에 대해서는 손해다라고 하는거예요. 사도 바울이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 게 내 유익이야, 이익이야 하던 거, 그게 뭐예요? 율법 지키는 거, 그리고 교회 핍박하던 일이었잖아요. 디아 크리스토스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니까, 내가 했던 그 모든 일들이 손해 보는 일이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의 두 마음으로 이익과 손해를 나누면서 이건 선이고 이건 이익이고 그렇게 봐왔던 것들, 그것들이 진리를 알고 나니까 그거 전부 손해고 망하는 일이더라라고 하는 거죠.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누가 복음의 말씀이 여기에서 인용된 거죠, 내 ‘이름’ ‘솀’이라고 했죠, 이름, 이름은 말씀이죠 솀. 파자하면 ‘쉰’과 ‘멤’이고 ‘분석된 말씀’이라는 의미가 나와요. 내 말씀으로 불려져야 한다, ‘카라’예요, ‘선포한다’, 내 말씀을 선포해야 될 곳, 그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는 거예요,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내 말씀 들으세요 하면서 길게 기도하지만, 그게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뜻을 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를 향한 기도는 하나님이 먼저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도하시고, 그 일이 나에게서 깨달아지는 거예요 성도는 그걸 깨달아가는 자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단 말이에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상, 그것들이 전부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씀을 우리는 성도는 상고하고 묵상하면서 깨닫는 거예요. 그 하나님 말씀의 뜻은 항상 구원의 복음이고, 나 죽여서 새 성전 만드는 거, 천국 만드는 거죠, 요거 깨닫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거 이거 전체가 기도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도 인생 자체가 기도예요, 성도 인생 전체. 그 기도를 하는 성도의 삶, 생활, 그 인생, 그거 자체가 자기를 드리는 살아있는 제사란 말이에요. 로마서 12장 1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거룩한 산 제물’, ‘하기오스’ 그리고 ‘자오’, 자오의 분사형이죠, ‘산’. ‘뒤시아’, ‘희생 제사’라고 하는 거, 예배, 희생 제사, 여기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는데 제물이 아니에요, 제사예요, 제사고 예배라고 하는 거예요. ‘하기오스’, ‘거룩’의 의미는 이게 ‘신에게 바치는’ 의미라고 했죠, 신에게 바치는. 그러니까 십자가에 바치는 거예요, 십자가 죽음 죽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은 주님이 하기오스 프뉴마로 오시잖아요. 십자가에 죽은 자가 ‘거룩한 무리’, ‘성도’죠. 그러니까 ‘십자가에 죽는 그 거룩한 산 제사가 영적 예배다’라고 하는 거예요.
영적 예배는 십자가에서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상에서 드리는 거예요, 그걸 산제사라고 하는 거예요, 예배 시간에 드리는 거 그것만 예배가 아니라, 일상이 예배가 되는 거예요. 생활 자체, 한 걸음 한 걸음, 40년 광야의 모든 길을 기억하라고 해요. 40년 광야길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원문을 보면 ‘40년 광야의 모든 길을 기억하라’, 그거는 무슨 말이냐 하면 한 걸음 한 걸음이 전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니까 그 말씀을 받아서 깨닫는거예요. 어떤 건 중요하고, 어떤 건 덜 중요하고, 이렇게 취사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십자가 복음으로 받는 거라니까요, 성도는.
그렇게 십자가에 죽는 거룩한 산 제사가 영적 예배다. 요게 ‘로기코스 라트레이아’라고 해요, ‘로기코스’, ‘영적’이라고 하는데, ‘말씀’이에요, 말씀으로 받는 거예요, 그걸 ‘로기코스’라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진리를 깨닫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씀의 예배. 그리고 ‘프뉴마’, ‘성령, 영’ 그것도 진리의 말씀으로 치환해서 읽자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로기코스’나 ‘프뉴마티코스’나, 영적이라고 하는 프뉴마티코스나, 같은 의미라는 말이에요.
지금 헬라어, 히브리어가 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무시하셔도 돼요. 그 증거를 대드리려고 자꾸 말씀드리는 거예요. 원래 성경은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가 이걸 증거를 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룩한 산 제사’라고 하는 거는 ‘십자가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산 제사라고 하는 거예요.
성도가 진리를 깨닫는다라고 하는 거는 십자가 진리를 깨닫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죽이러 오는 그 말씀을 이해하는 거에요, 그게 산 제사를 드리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생활 속에서, 일상 속에서, 내가 진리를 깨닫고 나의 죽음을 자꾸 경험하는 거예요, 그게 날마다 죽는 거예요. 날마다는 모든 날에 죽는다는 거예요, 날 자체도 ‘욤’이 잖아요, 욤은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고 하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욤은 ‘오르’란 말이에요, 오르를 ‘욤’이라고 하자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르는 ‘빛’이에요, ‘진리’를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날 자체가 진리예요, 그러니까 진리를 깨닫는 때를 낮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모형으로 주시는 게 낮과 밤이에요. 성도가 깨달으면 낮이란 말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낮’은 전부 ‘진리를 깨닫는 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거는 낮과 밤이지만, 그런 표면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성경은 전부, 성도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 십자가 죽음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무슨 날, 무슨 날, 많죠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 성령의 날, 그게 전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진리를 주셔서 성도를 깨닫게 하는 때, 그때란 말이에요. 헬라어로 ‘카이로스의 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진리를 깨닫는 때, 진리를 깨닫는 때가 낮인 거예요. 그리고 그 진리를 깨닫고 십자가에 죽음을 죽을 때, 그걸 ‘산 제사’라고 하는 거고 그걸 ‘영적 예배’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 못 알아먹고 방해하는 그 두 마음을, ‘장사한다’라고 하는 거고, 그걸 주님이 ‘에크발로’, 쫓아 내신단 말이에요, 내쫓아버리는 거예요, ‘뒤집어 엎고’, ‘카타스트레포’, ‘뒤집어 엎고 쫓아내는 거’예요, 에크발로. 성전이 되어야 할 내 안에 들어오셔서 선악의 두 마음, 그게 매매하는 마음이란 말이에요, 장사하는 마음, 그걸 완전히 뒤집어 엎으시고 새롭게 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선악의 두 마음이라는 건,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의 유익을 택하도록 끌어가는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 두 마음이 발동하는 것이 십자가에서 죽지 못한 나의 율법인 거고, 그 두 마음의 판단이 작용하는 모든 일을 장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일이 일어나는 내 마음이 시장이란 말이에요. 그게 ‘아고라’라고 하는, 시장, 그 두 마음이 부대끼는 이 세상과 내 마음이, 모두 장사하는 시장이란 말이에요. 세상이라고 했는데 바깥 세상으로 볼 것도 없어요, 내 안이 세상이에요, 내가 세상이고 우리를 ‘에레츠’라고 한단 말이에요, ‘땅’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땅을 세상이라고 또 성경에서 말하죠. 내가 세상인 거예요.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뭐 이렇게 노래하기도 하지만, 세상이 문제가 아니에요, ‘이거 왜 이래’ 하는, 내 마음이 문제인 거예요, 사실은. 그래서 주님이 성전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다 뒤엎어 버리시는 거예요. 창세기 19장 24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창 19:24-25)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유황과 불’, 유황은 ‘진리’예요, 불은 ‘성령’이에요, 역시 진리예요. 그러니까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비같이 내리시고’ 그리고 ‘그 성과 온 들과 그 모든 것’, 내 안의 모든 것이에요, 모든 것을 ‘엎어 멸하셨더라’, ‘하파크’란 말이에요, 엎어서 멸하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다, 뒤집어 주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멸한다고 표현은 했지만 우리 성경은 표현하고 있지만, 파님으로 보면 그렇게 이해되지만, 뒤집어 엎어서 변화시켜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시킨 거는 악당들에게 불지옥을 던져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진리의 성전이 되어야 할 나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그 두 마음을 완전히 갈아엎어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변하여서 새 사람을 만들어 주시는 거란 말이죠.
성경은 이렇게 저주의 심판 같은 일들을 많이 이제 나오는데, 그것들이 다 알고 보면은 ‘구원의 은혜’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발견하는 거예요, 성도는. 이걸 발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두려워 떨죠,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잘해야 된다라고 강박을 갖는 거예요. 하나님께 잘 보여야 된다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는 거예요. 이걸 겉으로 보니까 이거 큰일 났네, 잘못하면 불심판받고 불지옥 가겠네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뭔가 열심이 나오는 거에요. 그리고 도에 지나는 뭔가도 나오고, 자꾸 그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의를 깨닫게 되면, 보니까 멸망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니까 뭐예요? 변화하여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네, 근데 뭐예요? 여기에 우리가 기여한 게 있어요? 우리는 죄 짓고, 간음하고, 그거밖에 없었는데, 소돔성에서 고모라성에서, 그거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유황불을 던져서 ‘하파크’ 완전히 ‘뒤집어주신다’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이 다 만들어주신거예요, 내 안의 일이라니까요, 이게. 내 안의 일로 깨달으면 이거는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되는 거란 말이죠.
성경은 계속 내 안에 주시는 말씀이다라는 걸 놓치면 엉뚱한 열심이 나오게 되는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그러면 감사가 나오는 거죠, 그리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그래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잠잠히 엎드리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뜻을 구하는 자로 가는 거란 말예요. 우리 인생에도 이러한 심판 같은 일, 저주 같은 일이 자꾸만 일어나잖아요, 일로 본다고 그랬죠, ‘다바르’. 그게 전부 선악의 관점으로, 손해와 이익 관점으로, 이렇게 자꾸 판단이 되는 거고, 그러면 테스 형 왜 이래 막 이런 노래가 나오게 되는 거죠.
그 일들은 그렇지만 전부 하나님이 우리의 선악의 두 마음을 뒤집어주시는 거고, 항상 선하신 하나님의 한마음 으로 만들어주시는 그러한 일이란 말이에요. 새 성전 만들어주시는 일, 그걸 ‘에르곤 아가토스’라고 한다고 했죠,
선하신 일, 선한 일, ‘에르곤’이 ‘일’이고 ‘아가토스’가 ‘선’이란 말이에요, 선한 일이에요, 하나님의 선은 이 일을 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선하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항상 선하세요, 항상 성전 만들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이 일로 가고 있는 거예요. 다른 나에게 좋은 거 주셔서, 내가 판단하는 좋은 걸 주셔서, 선하신 하나님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인생을 주시고, 광야 내내 뭔가를 깨닫게 하신다면, 당연히 뭔가 굴곡이 있게 돼 있어요. 성도는 그러한 일을 만날 때 당황하지 말라는 거예요, 뭔지 알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에게 주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죽여가시는가 그 관점으로 봐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복 주시는가, 요 관점으로 보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관점을 달리하면 엉뚱한 데로 가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죽여가시는가 이 관점으로 보셔야 돼요. 그래야 새성전으로 지어지는데 그러니까 모든 일들이 이 관점으로 보셔야 감사로 받아지게 돼 있는 거예요. 어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나에게 뭔가 힘든 일을 자꾸 시켜, 그러면 선악의 관점으로 보고 나에게 무슨 복을 주시려나 이 관점으로 보면 나는 복이 아니라 전혀 다른 걸 받고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괴롭히는 것 같고,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스트레스라는 걸 받게 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눈물 짓고 한숨 짓고 그렇게 된단 말이죠.
근데 성도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죽여가시는가의 관점으로 보면은 그 일들이 뭐예요? 내가 여전히 판단하고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 그 선악의 두마음을 죽여가시려고 뭔가 역사를 하고 계시구나, 선하신 일을 하고 계시구나, 이걸 알게 되면 감사가 나와요.
우리 인생에는 유황과 불이 쏟아지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뒤집어 엎어주시는 거예요. 그게 에르곤 아가토스 라고해요. 선한 일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성도에게는, 뒤집어주시는 일이. 그러니까 성도에게는 불행이 없는 거고, 괴로움이 없는 거예요, 전부 감사한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지어가시는 과정으로 이해하니까, 모든 관계, 모든 현상, 마찬가지란 말이죠. 우리와 약속하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가시는 그 의의 하나님을 찾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의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걸 신실하게 지켜가시는, 그 일이 나에게 나타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증인이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예요. 모든 관계, 모든 현상, 마찬가지인데, 그것도 공부하면서 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본문으로 가서요.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라고 해요.
이 앞에 있는 구절들은 4분의 한 3 되는 구절들은, 세 번에 걸쳐서 했고 이게 이제 마지막 4분의 1 구절을 오늘 마무리하는 거예요. 모든 낯, ‘낯’은 ‘파님’이에요, 파님. 이게 ‘얼굴’이라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파님은 나타난 거예요, 얼굴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내용을 드러내는 거죠. 그걸 통해서 단순히 얼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속의 내용까지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거죠.
모든 파님이 ‘파루르’, ‘빛’을, 빛을 ‘카바츠’, ‘잃는다’라고 해요. 카바츠가 그런 뜻은 아닌데 ‘모으다’라는 뜻인데, 근데 여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라고 하는데 ‘카바츠’ 라는 말, ‘파루르’라는 말이 나와요, ‘파님’이라는 말이 나오고, 근데 요 구절이 다 나오는 게, 이게 딱 한 군데 더 있어요. 나홈 2장 10절 말고는, 요엘서 2장 6절에 딱 한 번 더 나와요, 그 외에는 전혀 안 나와요, 성경에.
(욜2:6)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우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라고 해요.
예 ‘그 앞에서’, 이것도 이제 파님이죠, ‘민’이라는 전치사 앞에 있어요, 그래서 ‘그의 파님으로부터’. 파님은 이제 하나님이 진리를 알라고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거예요, 보여주신 모든 것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 이걸 이제 파님이라는 개념으로 우리가 보는 거예요. 그것들로부터 ‘백성들이 질렸다’라고 해요, ‘훌’이라고 해요, ‘괴로워하다’는 뜻이에요, ‘빙빙 돌다, 괴로워하다’, 괴로워하고 힘드니까 백성들이 어떻게 해요? 부르짖죠. 출애굽기 2장 23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전에 한번 본 구절이죠?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아보다’라고 해요, 아보다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게 됐다’라고 하는 거예요. 아보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의 수고예요.
지금 우리가 이제 파님, 보이는 것들 나타내 주신 것들 관계 마찬가지, 겉으로 보이는 건 전부 파님이에요, 근데 그 속에 이제 성도는 내용을 발견하는 거예요. 관계에서도, 또는 일에서도, 모든 환경에서도, 근데 이제 두 마음으로, 선악의 두 마음으로 보게 되면은 그러면, 이제 우리 안에서는 마음에 부대낌이 자꾸 나타나는 거죠. 선악을 자꾸 취사 선택해야 되니까, 판단해야 되고 취사 선택해야 되니까, 그래서 조금만 더 좋은 거, 좋은 거, 최선을 찾죠, 최선을 구하고. 그래서 만약에 이제 더 나은 게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좀 덜한 걸 찾으면 그러면 나중에 후회하기도 하고, 그게 없었다면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다른 더 좋은 게 있다 이러면 굉장히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마음이라는 게 항상 그렇단 말이에요. 보이는 걸 보이는 대로 보면은 거기에는 계속 가치가 나타나게 되고, 뭔가 더 좋은 거 더 좋은 거 이걸 찾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최선이 아니면 항상 손해라고 생각해요, 요게 마음의 부대낌이에요, ‘아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를 ‘에베드’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두 마음으로 판단하면서 계속 취사 선택하는 거. 우리에게 주신 일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말씀으로 보게 되면 그 일들은 사실은 괴로운 아보다가 아니라, 노역이 아니라 다 선의 재료들인 거죠. 말씀들이란 말이에요, 진리의 말씀이라니까요, 전부 선의 재료. 합력해서 선을 만드는 거예요, 성전 만들어 가는 거라니까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만드는 게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좋은 일을 했다, 이럴 때 칭찬할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합력해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선을 이루는 거 하나님의 선, 에르곤 아가토스, 새 성전 만드는 선이라니까요. 그걸 하고 있단 말이에요.
모든 일들이 합력해서 하고 있는 게, 나 죽이는 거에요, 성전 만드는 게 알고 보면 나 죽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일들은 나 죽이려고 달려든다라고 보시면 돼요. 나의 두 마음을, 그 두 마음을 점점점점 삭제해 가면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로 가는 거예요, 성도는. 자꾸만 이게 무슨 뜻이지? 라고 이제 가게 돼요, 두 마음으로 이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하는 그 마음에서 자꾸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면 기분이 나빠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거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걸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뭘 가르쳐주시려고 하는가, 자꾸 욜로 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뭐예요? 이 사람은, 하나님이 통치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를 하나님 나라라고 한단 말이죠.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일을 말씀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저 일로 사건으로 보느냐 말씀인 그 일들을 말씀으로 보지 못하고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로 보게 되면 그 일들은 아보다가 되는 거고 그래서 에베드로 괴로워하게 되는 거죠, 노예로 종으로.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뭘로 보고 계시냔 말이에요, 일로 사건으로 보고 계세요? 아니면은 말씀으로 보고 계세요.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한번 떠올려보시고 그걸 나는 뭘로 보고 있냔 말이에요. 이것도 일이고, 이것도 일이고, 그래서 뭔가 손해 될 것 같은 것들은 문제고, 사건이고 그렇게 또 분류가 되고, 이거는 기분 좋은 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 이걸 이렇게 차곡차곡 분리를 시키고, 분류를 하기도 하는데, 근데 그거 전부 말씀이라고 했죠. 율법의 세상, 이 애굽을 살면서 율법의 종 노릇을 하는 자가 이 모든 것들을 일로 사건으로 보게 되면은, 그가 율법의 종노릇하는 에베드란 말이에요, 노예란 말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일들을 말씀으로 지금 보고 계시다면 그가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란 말이죠, 천국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것도 지금 내 안에 이루어져야 돼요. 급히 먹으라라고 하시잖아요. 유월절에 출애굽할 때 ‘너희는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고 급하게 먹으라’고 하죠. 지금 당장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된다는 거예요, 머뭇거리는 게 아니라. 두 마음의 율법으로 탄식하며 부르짖는 곳이 애굽이고, 지옥인데, 그게 전부 우리 안에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 파님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래서 부르짖어요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다 라고 하죠.
하얘진 게 아니라 ‘모으다’라고 했죠, 카바츠. 오늘 본문에서도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라고 하는데, 같은 거란 말이에요. KJV 성경 같은 경우에는’ 파루르’를 ‘blackness’라고 해요, 제가 영어 성경을 좀 소개해놨죠.
ASV (나 2:10)
She is empty, and void, and waste: and the heart melteth, and the knees smite together, and anguish is in all loins, and the faces of them all are waxed pale. (그들 모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KJV (나 2:10)
She is empty, and void, and waste: and the heart melteth, and the knees smite together, and much pain is in all loins, and the faces of them all gather blackness. (그들의 얼굴은 모두 검게 변했다)
RSV (나 2:10)
Desolate! Desolation and ruin! Heart faint and knees tremble, anguish is on all loins, all faces grow pale! (창백해졌다)
ASV는 ‘waxed pale’이라고 해요, 하얘졌다 그래요, ‘하얘졌다, 창백해졌다’. 그리고 KJV는 ‘blackness’ ‘검게 변했다’라고 하고요. 그리고 RSV는 ‘grow pale’ 이라고 해요, ‘창백해졌다’. 이렇게 지금 성경 번역본들이 낯빛이 창백해졌다, 하얘졌다 이렇게 번역하고 있는데 일단 그렇다고 치고요.
사람들의 낯빛이 하얗게 된 이유는 뭘까요? 요엘서에서, 요엘서는 메뚜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거죠.
(욜 1: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라고 해요.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 이런 것 때문에 하얘진 건데 근데 이름은 다르지만 이건 전부 다 메뚜기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 메뚜기가 어떤 성격이냐면 요엘서 2장 25절에 보면요.
(욜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충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라고 하죠.
그러니까 이 메뚜기는 '내가 너희에게 보낸 군대'라고 하는데, 군대. 근데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다'고 할 때 '너희에게'라는 말이 너희 앞에 베 전치사가 있어요. '베'라는 전치사는 '~~ 안에'라는 뜻이죠, in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시는데, 뭘 어떻게 보내셨냐면, '우리 안에 보내셨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계속 우리 안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메뚜기도 우리 안에 보내는 무언가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게 군대라고 하는 거예요, 메뚜기는 하나님이 보낸 군대예요. 나훔서에서도 큰 군대가 아수르를 치죠, 그 군대는 바벨론이죠. 그러니까 메뚜기나 바벨론 군대는 같은 의미인 거에요.
'그 큰 군대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준다', '갚아준다-는 말은 '샬람'이에요. 갚아준다는 게 아니라 '완전하다, 완성하다'. '내가 너희를 완전하게 한다'라고, 피엘형이에요, '반드시 완전하게 한다'라고 하는. 출애굽기 21장 33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출 21:33-34) 33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하므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 34 그 구덩이 주인이 [잘 보상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오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하므로', 이제 '빠진다'라고 하죠. '구덩이'라는 말은 '보르'라고 해요, 보르는 '수조, 물웅덩이'라는 거예요, '구덩이, 우물' 이런 뜻이죠. 이게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서 빠진 곳이란 말이에요, 거기가 보르란 말이에요, 보르는 물웅덩이를 뜻하고. 그러니까 '물'이니까 진리가 나오는 곳인데 거기서 죽죠. 이게 무덤의 의미도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빠져서 죽었다.
그러니까 진리가 나오는 곳이고 그 진리에 의해서 죽고 부활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이 보르라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가 있는 거에요, 십자가 그 진리. 진리에 의해서 죽고 부활하는 곳이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걸 열어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한다'라고 해요. '파타흐' '열고', '카사' 덮지' 않는다, '로 카사'가 되겠죠, 덮지 않았다라는 거에요. 구덩이를 덮지 않았다는 거는, 구덩이는 십자가 진리니까, 십자가 하늘의 비밀이죠. 십자가 진리를 가르쳐주는 구덩이가 열려 있었다, 가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거는 진리를 계시했다라는 그런 의미인 거예요. 진리를 가리키는 그 헬라어 자체가 '알레데이아'라고 하잖아요. 이게 '진리'인데 의미가 '가려워져 있지 않음'이라는 의미라고 해요.
덮은 거를 열었어요, 성막을 덮은 짐승 가죽을 열어버린 거죠. 그게 휘장이 찢긴 것과 같은 의미죠. 그러니까 진리를 드러내는 거예요. '보르'를 열어뒀다는 거는 진리가 드러난다는 거고. 그 진리의 '소나 나귀가 빠지면', '소' 소는 '쇼르' '소, 황소'라고 하는데, 소는 '하나님'이죠,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하나님, 예수란 말이에요. 율법의 소란 말이에요. 그 율법의 소가 죽잖아요, 그 구덩이에 십자가에 죽게 되는 거죠.
그리고 '나귀' '하모르'라고 해요. 이게 붉은 빛 짐승이죠, 나란 말이에요. 내가 '구덩이에 빠지면', '빠진다'는 말이 '나팔'이에요. 나팔은 '떨어진다'는 뜻인데, '죽는다'는 뜻이에요, 그런 뜻으로 많이 쓰이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빠져서 죽으면 그러면 그 구덩이 주인이 잘 보상하라'라고 하는 거죠. '보상한다'는 말이 '샬람'이에요. 그러니까 구덩이 주인,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완전하게 한다. 앞에서 나온 구절하고 같은 내용이죠, 내가 먹은 횟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준다라고 하는 거 같은 내용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잘 보상한다'라고 하는데, 완전하게 완성시키는 거고,
그리고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준다'라고 할 때는 '케세프'예요. 돈이 은이란 말이에요. 우리의 그 율법, 율법이 진리의 구덩이 거기 십자가에 빠져서 율법이 죽으면 '은' '그리스도'잖아요, 속전. '그 진리로 대신 갚을 것이다'라고 하는 거죠. '그 돈을 준다'라는 거예요, 그걸로 갚아준다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라고 해요. '죽는 것', 죽는 것은 소나 나귀의 죽음이죠. 그 율법이란 말이에요, 율법이 죽는 거예요. 그게 '무트' 진리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죠. '그 죽음을 그가 차지할 것이라'고 합니다.'레' 전치사 앞에 있어요. '그를 위하여 차지한다'라고 하는데, 이 '차지한다'는 말은 '하야'에요, 하야. 동사, 비동사란 말이죠, 영어의 비동사,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 그를 위하여, 그는 성도란 말이에요. 성도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나 나귀를 죽이면 그 값 물어주고 사체는 아까우니까 가져가서 고기라도 먹어라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성도는 반드시 진리의 구덩이, 십자가에 빠져서 죽고 부활하게 된다는 거고, 하나님이 보상하시는데 속전으로 그리스도라는 진리로 그 죽음을 완성시켜주신다라고 하는 거예요. 완성, 테텔레스 타이란 말, 완전하게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거죠. '샬람' '갚아준다', 샬람이라고, 그게 완성되는 거예요. 이게 진리고 이게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율법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거는 성전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란 말이죠.
그리고 메뚜기를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 이거 넷으로 표현하죠. 같은 걸 넷으로 표현한 거예요, 넷은 성전 얘기하는 거예요. 재앙 같은 심판을 통해서 우리를 성전으로 만들어준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샬람' '완성된다' 피엘형이에요, 강조형이죠. 그러니까 '반드시 완성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계 9:7)a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라고 해요.
'황충' '아크리스'라고 하는데, 주석들을 보면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와요, 나와서 사람들을 막 괴롭히는 그 마귀적 권세를 가진 존재, 이렇게 본단 말이에요. 그래서 택한 백성 이외의 자들을 괴롭히는 권세를 받았다, 이렇게 보기도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 원칙에서 어긋났죠?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원칙 있죠? 성경을 이해하는 원칙, 성경은 항상 내 안의 일을 말씀하는구나, 그걸 놓치면 안 되는 거죠.
'황충' 하나님이 나를 성전 만드시려고 보낸 군대, 그러니까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 군대는 뭐예요? 말씀이란 말이에요, 말씀을 보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황충은 악당들만 상대하고 나와는 무관한 존재가 되고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이게 내 안에 일이라는 걸 알지 못하면 그 황충이 악당들을 괴롭히고 나는 이제 봐주고 그렇게 오해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뭐예요? 반쪽자리가 되는 거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복음을 놓쳐버린 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성경은 생활을 위하는 교훈의 책이 되는 거죠.
항상 내 안에 성전을 하나님이 가르쳐주고 계시단 말이에요. 내 마음이 엉망진창인데 바깥쪽만 오해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항상 문제는 나예요, 천지 간에 하나님과 나만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게만 이해하셔야 되는 거예요, 나 말고 다른 누가 많이 있다라고 받는 게 아니라 참된 성도는 하나님과 나만 있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다 말씀으로 나에게 기능하는 거예요, 그 말씀을 깨닫는 거란 말이에요.
666이 문제고 일론 머스크가 뇌에다가 칩을 넣는다고 하는데, 이게 베리칩인가 말세가 이제 정녕 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문제는 베리칩이 아니라, 666은 내가 666이에요. 내가 문제라니까요, 문제는 항상 나예요. 하나님과 나만 있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나만 문제죠, 다른 누구를 찾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분은 말씀이에요. 그분 탓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항상 문제인 거란 말이에요. 보이는 거 나타난 건 전부 나 죽여서 새 성전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교육의 재료란 말이에요. 그 나타난 것 파님이잖아요.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 있으면 내가 영혼 안에 들어간 거예요, 영원하신 하나님과 내가 하나란 말이에요. 그럼 나는 영혼 속에 들어간 거죠. 파님이라는 거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거예요. 이 보이는 것들 나타난 것들은 잠깐이라니까요.
그러면 그 잠깐 있는 것들이 영원에게 무슨 영향을 주냐고요. 내가 영혼 안에 들어가 있다면 그것들은 나에게 전혀 영향을 줄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그것들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괴로워하는 거는 내가 영원 안에 못 들어갔다는 증거밖에 안 되는 거란 말이에요. 영원 속에 들어가셨다면, 하나님과 하나라면, 하나님만 보고 있고 모든 걸 말씀으로 보고 있다면, 그 파님들이 나에게 어떻게 괴로움을 줄 수가 있냔 말이에요. 다 교육의 재료인데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애면글면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잖아요.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모든 파님, 우리가 사는 그 시간들의 모든 역사는 영원에서 보면 티끌도 되지 않는단 말이죠.
시간을 사느냐 영원을 사느냐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시간과 영원을 마치 대등한 관계로 보면서 따지기도 하지만, 시간과 영원은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란 말이에요. 영원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전부란 말이에요. 전부 안에 모든 것 안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라니까, 빨리 가려고 하고 자기 앞을 가면 기분 나빠하고 막 이러기도 하는데, 시간의 비중이 너무 커서 그렇단 말이에요. 먼저 가세요, 웬 말씀이신가 이러면서 보내드리는 거죠. 중요한 건 마음이란 말이에요. 천지 간에 하나님과 나만 있어요, 내 안에 모든 다른 것들은 말씀이란 말이에요.
누가 '이 교회 이단 아니냐'라고 한다고 그런 말씀도 하셨는데, 파님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죠. 내가 영원 안에 들어가 있다면 근데 그런 소리는 다 들어야 돼요. 사실 진짜 성도는 뭔가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다르다는 게 '나는 너희와 차원이 달라'가 아니라 모든 건 과정이에요. 우리도 다 거쳐온 길이에요, 그 길을 다 거쳐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그러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왜 감히 나를 무시해' 또 '나의 진의를 몰라' 이러면서 구구절절 설명해줘야 할 필요도 없는 거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니까요. 내가 못 가르쳐요, 내가 아무리 잘 설명해도 나는 안 돼요.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면 깨닫는 거고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야 되는 거고 그런 거죠. 때가 돼야 되는 거란 말이죠, 하나님의 때가.
모든 일들 관계들 현상들 전부 말씀이라고 했는데, 일들은 앞에서 말씀드렸고,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전토 이런 말이 있는데,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이게 관계 이야기하는 거죠. 왜 사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내 가족 행복이라고 하잖아요. 많은 분들이 가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족의 행복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고 대부분 그렇게 알아요, 대부분. 그래서 '나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아' 이러면서 뭔가 희생하는 듯도 한 그런 표현도 쓰는데, 그때 그건 전부 알고 보면 자기 사랑이란 말이에요. 내가 잘 돼야 되는 거예요, 내 가족이 안 되면 내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괴로운 거란 말이에요. 가족은 확장된 자기란 말이죠, 전부 자기로 귀결된단 말이에요.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하나님인 거란 말이죠.
제가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천국 가려면 배우자의 동의를 받으세요.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자기의 영적 상태가 어떤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같이 붙어 있는 사람이에요, 한 집에 사는. 그래서 자녀들과도 이렇게 거리가 조금 있잖아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잘 못 보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제 부부 간에는 계속 보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런 말을 한 거예요. 교회 같은 데서 그분 정말 믿음이 좋으시고 존경받고 모든 사람이 칭송하고 인정도 하고 그럴 수는 있지만, 그분이 진짜 하나님 나라로 지어지고 있는지를, 십자가 진리를 깨닫고 그 두 마음이 죽어가는지를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배우자만이 알 수 있다는 거죠, 같이 지내는 사람이 매우 민감하게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일상에 주시는 모든 말씀을 통해서 내가 잘 죽어가고 있는지 이거는 같이 생활하는 가족이 아니면 알기 어렵단 말이에요, 그래서 배우자의 인정을 받는 일이 쉽지가 않아요. 눈을 감아보세요, 확인 좀 해볼까요?
배우자는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주셨죠. 원문으로 보면 이게 '맞은편의 도우미'라고 해요, '에제르 네게드'라고 하는데 '맞은편', 네게드가 맞은편이에요. '에제르'는 '도우미'예요, '에벤에셀' 할 때 '에셀'이 '에제르'예요. 근데 네게드 앞에 '케'라는 전치사가 있어요, '~~ 처럼, ~~ 같이'에요, 그러니까 '맞은 편 같은 도움'이에요, 맞은편 같은 도움. 도움은 도움인데 '맞은편 같다'라고 그러니까 옆에 계신 분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헷갈릴 때가 많죠? 베필이 네게드란 말이에요, 배우자는 기본적으로 네게드예요. 맞은편이에요, 대적이에요. 그 속성을 이해하셔야 돼요. 안 그러면 괴로운 거예요.
그런데 도우미라고 하는 거에요, 도움. 이게 도우미에요, 맞은편 같은 데 도우미에요. 파님으로 보면 네게드인데 영으로 보면, 그러니까 파님으로 볼 때는 영 마음에 안 들지만 그건 내 마음이 문제였던 거고 내 마음이 항상 내 마음이 문제예요, 내가 문제예요 영원으로 보면. 영원으로 보면 도우미란 말이에요. 어떤 도우미 였냐면 구원을 돕는 존재인 거예요. 그러니까 배우자가 얼마나 중요하냐면 가까이 있으면서 날마다 영적 상태를 점검해줘요, 그리고 날마다 죽노라를 실현시켜주는. 덕분에 잘 죽잖아요, 날마다 죽노라를 그 누가 도와주겠어요? 그분 아니면 힘들다니까요.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밖에서는 안 보면 그만이에요. 관둬라, 내가 너랑 다시는, 이러면서 돌아서서 떠나면 그만인데 집에 가면 이분은 안 떠나고 계속 있어야 되니까. 그러니까 이게 이분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가 있는 거예요. 내가 죽어가고 있는가 깨달아가고 있는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자 말이에요.
시간은 잠깐이고 영혼은 영원한데 그걸 위해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겠다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계시잖아요 오늘도. 근데 그렇게 구원을 도와주는 그 귀한 존재를 우리가 막 괴롭다고 너무 박대하고 이러면 안 되는 거죠. 하나님과 나만 있어요, 나만 문제예요. 나에게 구원을 도와주시려고 주신 그 말씀을 그를 통해서 잘 배우셔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 그분이 없으면 굉장히 손해인 거예요,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그거를 통해서 자라나셔야 되는 거예요.
비혼주의도 많다 그러고, 늦게 이렇게 만혼도 많다고 하는데, 꼭 결혼을 하셔야 되고 그래서 지옥도 맛보시고 그러면서, 그걸 맛봤기 때문에 또 천국을 소망할 수가 있는 거고. 결혼은 곧 지옥이다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많다라고 하는 거예요.
시간에서 보는 손해는 티끌이에요, 영원에 비하면 티끌이란 말이에요. 손해를 볼 일을 자꾸 만나셔야 되는 거예요, 만나면 만날수록 이익인 거예요. 영원으로는 득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익인 줄 알았는데 손해가 됐다라고 하는데, 손해인 줄 알았는데 이익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관계도 마찬가지고 모든 일들이 마찬가지죠. 시간 속에서 보는 손해는 영원의 이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찾아가셔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가족의 행복을 중요시한다고 그러는데 그 행복이라는 거는 결국 자기 사랑인 거예요. 이 행복을 제가 정의해 드린 적 있죠? 끝없는 탐심 추구다라고 했잖아요.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탐심을 채워주어야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가족의 행복이라는 거는 결국 확장된 자기의 끝없는 탐심 채우기인 거죠. 성도는 이제 그 일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자기를 주장하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땅을 사는 이유 자체가 자기의 확장인 그 가족의 행복과 이 땅에서 뭔가 남들이 칭송할 만한 그런 제 업적을 이루고 그래서 이름을 남기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왕 된 나라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를 지어가는 거 그걸 위해서 땅을 사는 거죠. 성도의 인생 목적은 하나님이 베풀고 진설해 주신 파님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뜻과 원리인 그 십자가 진리를 깨닫고 배우는 거죠. 십자가 진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다 들어 있단 말이죠. 성도는 그 진리를 잘 배우고 나라로 지어지는 것 이게 광야 인생을 사는 목적이란 말이죠.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칭찬하고 찬송하는 자들의 나라인 거고, 이 일이 스스로 자랑하던 율법이 꺾이는 일, 율법이 꺾이니까 율법의 무릎이 꺾이는 일이고 무릎을 꿇고 찬양하는 복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황충은 내 밖에 어떤 악당들을 찾아가서 고통 주고 벌 주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름 아닌 나, 나를 성전 만들려고 내 안에 보내시는 군대 즉 말씀인 거란 말이죠.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아'라고 하는데, '전쟁' '폴레모스'라고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전쟁은 항상 하나님이 나와 싸우시는 전쟁인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전쟁은 나의 것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항상 이기시잖아요. 그러니까 그 싸움의 대상은 항상 나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전쟁에서 멸망하는 존재 그게 나의 옛 사람이라는 걸 그러한 관점에서 항상 발견하셔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주석이나 일반적인 성경 해석을 보면 황충이 전쟁하는 대상은 불신자가 되는 거죠. 그렇지만 전쟁은 항상 나와의 전쟁이 이라는 거예요.
전쟁이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어로 '밀하마'라고 해요, 밀하마. 이게 '라함'이라는 말, '싸우다, 전쟁하다, 먹다' 여기에서 유래한 거예요, 그 앞에 맴이 붙은 거예요, 맨, 오른쪽에 맴이라는 글자가 붙은 거예요. 그래서 밀하마라고 하는데, 전쟁을 이게 '싸우다, 전쟁하다, 먹다'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레헴'이 '음식, 빵'인 거죠. 그러니까 전쟁 자체가 말씀의 전쟁이잖아요, 양식의 전쟁. 그러니까 말씀의 전쟁이 일어난다라고 하는 거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내 안에 그 율법 두 마음 간의 전쟁이다라는 거죠. 항상 전쟁은 이거예요, 이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세상에 전쟁을 보여주시기도 하는 거죠.
모든 나타난 것, 보여지는 것들, 그것들의 정체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와 성전을 짓기 위한 그러한 진리란 말이죠. 그 일을 가르쳐주는 일들인 거예요 모든 것들은. 출애굽기 10장 5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출 10:5)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 그리고 '사람이 땅을 볼 수 없다'라고 해요. '지면'은 '아인 에레츠' 아인 하 에레츠. '하'는 관사죠, 에레츠 땅이죠, '땅의 눈'이라고 하는 거예요 땅의 눈. 땅의 눈, 눈은 진리를 뜻하잖아요, 그러니까 땅의 진리의 의미가 되는 거죠. 땅의 진리는 율법이죠. 율법을 '카사' '덮는다'라고 하는 거죠. 율법을 덮고 그리고 땅은 또 우리잖아요, 우리를 뜻하니까 '우리의 눈을 덮었다' 이런 말도 되는 거죠.
그리고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게 그가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에서 그는 바로가 되는 거예요, 애굽의 바로, 바로가 나죠, 세상의 왕 노릇하는 나. 내가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 거, 그러니까 땅을 보지 못한다라고 하는 거는 지금 뭐예요? 보이는 걸 보이는 대로 보는 그 땅적인 시각, '아인' 그걸 차압하는 거죠. 그러면 땅을 못 본다는 거는 결국 하늘을 보게 된다는 거죠. 하늘을 보게 하시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영원을 보게 하시겠다.
이게 지금 뭐예요? 마치 저주 같은 그런 애굽의 열재앙이라고 하고, 저주 같은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결국 축복의 말씀인 거예요. 구원의 말씀이고 축복의 말씀인 거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재앙이고 저주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의 뜻은 축복이에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다 이러하단 말이죠. 재앙 같은 일들이 일상에서 일어나요,
나는데, 그 내용을 알고 나면, 성도는 그 내용을 발견하는 자란 말이에요. 하나님 뜻을 깨닫는 자예요. 그걸 깨달으면 그건 전부 축복이라는 걸 알 수가 있는 거죠. 하나님이 나를 복 주시려고 영원 주시려고 이러한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이걸 깨닫는 거란 말이죠.
'메뚜기가 내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바라드' '우박'이라고 하는데, 우박은 물이 하늘에서는 기체고 영이에요 영, 영인데 진리의 말씀이죠. 그 진리의 말씀이 땅에 내려와요, 내려왔을 때 우박의 형태로 딱딱한 우박의 형태로 내려오는데.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 돼서 우리에게 오신 거란 말이에요, 그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근데 이제 딱딱하니까 땅을 때리죠, 육을 죽이는 율법으로 보시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율법은 본질은 원래 진리란 말이에요. 물이었단 말이에요, 진리의 말씀이죠. 우박은 원래 물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애굽에서 열가지 재앙을 준다고 하는데 그게 열의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그걸 준 이유가 뭐예요?
(출 10:2)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내 아들과 내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라고 하는 거예요.
그 표징, 표징을 전한다라고 하는데 '표징'은 '오트'예요. 그게 이제 '표적'이라고도 하고 '징조'라고도 하는데,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 처녀는 순결한 여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 신랑이 누군지 모르는 자', '마리아' 그 '마라'의 쓴물인 우리가 잉태하여서 아들을 낳는 것, 이게 구원의 표적인 거죠. 그러니까 '아들을 낳는다'라는 건,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아들을 낳는단 말이에요. 성도는 그리스도라는 아들을 낳는데 그거는 곧 '성도가 진리를 깨닫는다'라는 의미인 거예요, 진리를 깨닫는다. 그게 아들을 낳는다는 거예요. 모든 말씀을 진리로 깨닫는 거 그가 아들인 거고 그 아들은 그리스도라는 진리란 말이죠. 이사야서 55장 5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사 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영화롭게 했다'라는 말이 '파아르'예요. 파아르가 이제 빛을 뜻하는 '파루르', 파루르라는 단어의 동사형인 거예요.
여기 이제 영화롭게 했다라고 하는 거죠.
(출 8:9)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 나일강에만 있도록 언제 간구하는 것이 좋을는지 내게 [분부하소서] 라고 해요.
'분부하소서' 이게 '파아르'예요 파아르, 분부하소서가.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 '끊는다'는 말이 '카라트'예요. 끊어버리라는 말인데 이게, '언약을 자르다, 언약을 맺다'라는 뜻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개구리를 왕과 왕에서' '카라트'한다라는 거는, '왕궁'이라는 거는 '바이트'예요, 바이트는 '집'이에요, 집은 '성전'을 뜻하죠. 성전에서 개구리 율법을 끊어내는 것. 그러니까 애굽에 떨어지는 열재앙, 이거는 뭐예요? 언약을 맺는 일인 거라고요. 저주처럼 보이지만 이거는 율법을 끊어냄으로써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인 거죠.
그리고 그 열 재앙 열 심판은 십계명과 같은 말씀이라고 했죠? 출애굽기 20장 4절 이게, 개구리 재앙이 두 번째 재앙이잖아요.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라고 해요. 이제 두 번째, 10계명 중에 두 번째 말씀이라 같이 가고 있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겉으로만 보면 우상이란 말이에요. 개구리는 물에 서 있다가 처음에는 올챙이잖아요. 물에서 있다가 땅으로 나오죠, 땅에 살고 그리고 뛰기도 해요, 팔짝하고 뛰기도 해요. 하늘에서 살기도 해요, 잠깐이지만. 이게 이제 바로의 상태인 거예요.
바로는 우리를 뜻하죠.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우리의 상태, 성도의 상태를 개구리로 가르쳐주는 거란 말이에요.
물에서 살다가 땅으로 올라왔다가 잠깐 하늘의 진리를 맛보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그렇지만 결국 계속 돌아가죠, 땅으로. 딱 우리의 상태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늘을 소망하지만 땅에 집착을 버리지 못한 그러한 상태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나일 강에만 있도록 언제 간구하는 것이 좋을는지 내게 분부하소서', '분부하소서' '파아르'예요. 이게 히트파엘형이에요, 제기 용법이에요. 그러니까 '분부하소서'가 전혀 아니고 '스스로에게 영광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일 강에만 있도록 간구하는 거, 이게 '말씀이 떠나가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유익을 구하는 일이에요. 그게 자기에게 영광이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파아르'가 '영광스럽다'의 의미를 갖는 거예요. 이 파아르에서 파루르가 온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빛은 영광의 의미가 있는 거란 말이죠.
(사 49: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내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나를 영화롭게 한다 라고 하죠.
'영광을 드러내는 일', 그러니까 이게 '파아르'의 의미고 파아르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러한 빛의 의미가 있는 거죠. 이사야서 61장 3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 '화관'이 '페에르'예요.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준다'라고 하는데, 화관이 페에르, 페에르가 파아르에서 온 말이에요. 이게 머리 장식 두건이라는 건데, 그러니까 파아르의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인 거죠.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낸다'라고 했죠. 그리스도께서 머리잖아요 머리.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리스도를 주어서 죄를 대신한다'. 죽음과 회개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고 '기쁨의 기름으로', '기쁨의 성령으로 슬픔을 대신하고 그리고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한다'라고 하는 거죠.
이것이 성도에게 진리를 주심으로써 성도에게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광인 거죠. 그리고 그게 전부 그리스도를 가르쳐주는 그러한 내용인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성도에게 주신다라고 하는 거예요.
'모든 낯이 빛을 잃는다'라고 하는데 '잃는다'는 말이 잃는다의 의미가 아니라 '카바츠'라고 했죠, 카바츠 '모으다'라는 뜻이라고 했죠. 신명기 30장 3절에 보면
(신 30: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게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라고 해요. 그리고 4절에는
(신 30:4)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신다] 라고
그러니까 이 하나님이 우리를 '모으신다'고 할 때 '카바츠'라는 말을 쓴단 말이에요.
'모든 낯이 빛을 잃는다'라고 했는데 이거는 빛을 잃는 게 아니라 모든 파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나타내서 그걸 통해서 진리를 깨달으라고 하는 거,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거 그게 파님이라고 했죠? 그 모든 파님이 모든 낯, 낯은 파님이란 말이에요. 파님이 '빛'을 그 진리의 빛,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을 '카바츠' '모은다'라고 하는 거예요, 모으는 거란 말이에요. 모아서 '하나님의 그 뜻을 아는 자로 지어가겠다'라고 하는 거.
이 구절은 역시 너네가 망해서 멸망해서 완전히 창백해지고, 완전히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보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 진리를 우리에게 모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겠다라고 하는 복음이 담긴 그러한 구절인 거죠.
그 진리의 빛인 성도에게 날마다 파님들이 주어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통해서 진리로 지어져 가는 거란 말이죠.
진리가 내 안에 모이고 계시죠? 차곡차곡 쌓이는 거란 말이,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돌아서면 까먹기도 하고 그 말씀을 기억을 못하는 것 같기도 한데, 콩나물처럼 매일매일 그 물이 그냥 흘러내리지만, 그렇지만 콩나물은 자라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가고 계신 거란 말이죠. 성도는 그래서 하나님의 견인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 네가 그 세상 끝까지 땅 끝까지 갔더라도 쫓겨났더라도 내가 너를 모아서 하나님 나라로 지어가겠다라고 하신단 말이죠.
우리에게 일상에 주시는 그 파님 속에서 하나님의 그 진리의 비 잘 받아서 잘 깨달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 빛을 주시고 진리를 주시고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그 파루르, 그 빛을 드러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파님들 속에서 날마다 주시는 그 빛들 속에서 그 진리 깨닫고 하나님 찬송하고 하나님 나라로 지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