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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우 시인과 청도 (상)
글/ 사진 김경식
긴 겨울이었다.
매년 온난화로 겨울이 사라진다고 걱정하였지만, 이번 겨울에는 오히려 빙하기의 시작이라고 보도 되기도 했다.
겨울이 길고 오히려 봄이 늦게 오는 것을 걱정한다.
겨울은 춥고 매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삼한사온이 사라지고 연속적인 영하의 날씨에도 살아남은
모든 생물들이 경이롭다.
우리의 겨울은 살아 있었다. 시베리아처럼 춥고 지루하던 겨울은 자신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떠났다. 겨울을 견디고 피는 봄꽃들은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운다.
봄꽃이 감동을 주는 이유다. 꽃을 피우기 위해 그들이 기다렸을 봄을 생각하면,
인내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경이감이 일렁인다. 살아 있는 생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청도 운문사 소나무 숲
춥고 매운 칼바람에 시련을 견디고 새싹을 돋게 하는 나무를 쓰다듬고 싶다.
하물며 봄꽃을 피우는 나무는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우리나라 봄의 상징은 진달래꽃이다. 그러나 나는 살구꽃이 핀 마을을 지나면 유년의 봄 추억들이 살아온다.
이호우 시인의 ‘살구꽃 핀 마을’이란 시를 읽으면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알 수 있다.
심성이 곱고 인심이 좋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그의 시처럼 만나면 반갑고 즐거운 존재였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웃과 정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 이호우 시인의 시조‘살구꽃 핀 마을’
기억이 날 것이다. 특히 농촌 출신들에게는 저마다 살구꽃의 정서를 지니고 있어 정감이 가는 시다. 살구꽃은 지난 시절 우리네 농촌의 보편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는 꽃이다.
시조 ‘살구꽃 핀 마을’의 작가 이호우 시인의 고향은 경북 청도이다.
소싸움으로 유명한 곳은 알아도 이호우 시인의 고향이 청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청도라고 하면
중국의 청도로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이호우 시인
이호우의 삶과 문학을 찾아 그의 고향 청도를 답사하는 시기는 아무래도 봄이 제격이다.
그것도 살구꽃이 피는 시기이면 더 좋으리라.
그러나 이번 봄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봄이 왔지만 봄이 아닌” 겨울날 아침에 청도를 향해 떠난다.
날도 흐리고 비가 내리는가 하면 이내 눈으로 바뀌는 날의 연속이다. 아침은 영하가 아닌 날이 별로 없었다.
3월 하순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겨울날씨이다.
봄이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청도는 행정구역으로는 경북이지만 경남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지금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접근성이 쉬어졌지만, 예전에는 찾아가기 쉽지 않았다.
청도군은 동쪽은 경주시, 서쪽은 대구광역시, 남쪽은 경남 창녕군, 밀양시와 울산광역시, 북쪽은 경산시· 대구광역시와 접한다. 청도군의 상징적인 꽃은 철쭉이고, 나무는 감나무이다. 감나무 고을답게 감나무가 지천이다.
청도는 집집마다 감나무 몇 그루는 울안에 키우고 있다.
감나무는 잎이 떨어지고 나면 줄기와 가지들이 검게 그을린 것처럼 칙칙하다. 그러나 청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감나무를 자식처럼 키웠다. 이제는 늙은 감나무들이 빈 동네를 지키고 있다. 그런 감나무들이 대견스럽고 정겹다.
청도는 산이 깊고 물이 맑다. 대구광역시의 식수를 위해 운문댐이 만들어진 것은 이곳이 물 맑은 청정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지산(1,240m), 문복산(1,014m), 운문산(1,188m) 청도의 동쪽으로 솟아 있고, 서쪽에는 비슬산(1,084m), 남쪽에는 화악산(932m) 등이 청도군을 둘러싸고 있다. 산의 높이와 계곡의 깊이를 헤아리면 이곳이 강원도가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할 정도이다.
운문호
동쪽에서 흘러내린 동창천(東倉川)과 서쪽의 청도천(淸道川)이 흘러 내려 청도의 중앙 남단부에서 합류한다.
이곳이 이호우, 이영도 시인의 고향마을 유호리이다.
결국 이호우 시인의 고향마을은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이며, 밀양강의 시작점이다.
건너 마을은 경남 밀양시 상동마을이다.
유년시절 나의 고향집에는 늙은 살구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이들은 봄이 오면 화려한
꽃을 피웠다.
봄은 언제나 살구꽃과 진달래꽃이 피면서 시작되곤 했다. 살구꽃이 피고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집안이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산과 들로 쏘다니며 놀다 보면 어둠이 내리곤 했다.
유년의 어느 봄날, 할아버지의 상여는 울안의 늙은 살구나무 꽃그늘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할아버지 세상 떠나던 날 저녁에는 살구꽃이 피었다.
그러나 7일후에 상여로 떠나던 날 아침에는 살구꽃이 지고 있었다.
떨어지던 살구꽃과 처연한 상여소리는 아직도 선연하게 내 기억을 흔든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할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하는 가족들과 동네사람들 머리위에
휘날렸던 살구꽃은 이별의 상징이었다.
결국 내 유년의 봄의 상징은 진달래와 살구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몇 년 후에 아버지도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 해 봄부터 살구나무도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살구나무도 세상을 떠났다.
고향집의 살구나무들이 어느 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는데 꽃을 피우지 않자, “청풍집이 망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살구나무가 죽고 몇 년을 고향에 가지 않았다.
운문댐을 지나면 넓고 푸른 운문호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운문사 가는 길은 절경이다. 살구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다.
운곡정사
운문사 가는 길에는 운문호가 찰랑이며 아름다운 파장을 일으킨다. 운문호를 조망할 수 있는
운치 있는 한옥이 우측에서 반긴다. 운곡정사이다. 이 집은 운문면 순지리 342-2번지에 있는 운곡 김몽로(金蒙魯1828~1884)의 생가(生家)이다.
경사지에 세워진 이 한옥은 대지를 2단으로 조성하여 사랑채와 제사를 지내는 정침(正寢)으로 나누어 건축물을
배치하였다. 내리던 이슬비도 그쳐서 잠시 운문댐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곳에 눈길을 주면서 달리다 보면, 음식점이 밀집한 동네에 닿는다. 어울리지 않은 풍경이다. 운문사 입구에는 음식점이 많다. 그중 횟집과 불고기집도 있다. 사찰 입구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지만 맑고 향기로운 마음을 얻기 위해 산사를 찾아온 이들은 실망이다. 음식점과 상가가 있는 장소를 지나면 이내 매표소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잽싸게 나타난 매표소 직원은 주차료와 입장료를 징수한다. 입장료가 없으면 운문사를 탐방할 없다.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것은 자연이다. 자연 중에서도 나무다.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 숲이 있어 단박에 기분전환을 하게 만든다. 백 살이 넘은 소나무들이 모여 사는 운문사 소나무 숲의 명성은 자자하다.
운문사 소나무 숲길은 속세의 근심을 잊고 욕심을 잊게 만든다. 생물학적인 사람살이는 고작 길어야 100살이 아닌가. 그런데 몇 백 년을 살 것처럼 욕심과 호기를 부리면서 살고 있다.
이 소나무들의 나이는 몇 백 살을 먹었어도 아직 정정하다. 숲 사이로 난 길은 운문사 주차장까지 계속된다.
운문사는 일주문이 없다. 소나무 숲길이 일주문을 대신하는지 모른다.
운문사 가는 길
운문사의 진산인 호거산은 바위산이다. 금강산의 어느 암반을 보는 듯 기이하다.
이곳에 암자가 있다. 북대암이다. 북대암은 제비집처럼 지어져 운문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음을 맑게 하고 절집을 들어선다. 천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왔던 절(가람)을 들어서니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오른쪽에는 키는 작지만 소나무 줄기들이 여러 방향으로 퍼져나가 마당 면적을 덮고 있다.
500살 된 늙은 소나무는 나무의 속성을 거부하듯 겸손하게
자신의 몸을 감추고 앉아 있다.
가까이 다가서 자세히 보아야 나무 기둥과 가지를 볼 수 있다. 보면 볼수록 신비감이 드는 소나무는 500년 동안 키는 크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넓게 확보하고 있다. 하늘 향해 키가 자랐으면, 그 풍랑의 세월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땅을 향한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참을 떠날 수 없었다. 이 소나무의 겸손함과 정갈함이 절집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문사는 분위기와 건축물이 정갈하고 깔끔하여 나무랄 곳이 없는 절집이다.
주변 환경도 안정적이고 절을 휘돌아 나가는 계곡물도 맑고 시원스럽다.
1,500년 역사의 풍랑 속에서도 살아남은 대가람의 경내를 걷는다. 멀리 운문산이 보이고 가까이 호구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높은 산들이 어깨동무하고 산맥을 만들어 운문사를 보호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산속에 이렇게 넓은 평지가 존재한 것이 신기하다.
1,200년전 에 운문사는 평지에 지어졌지만 가람을 두르고 있는 산의 보호를 받았다. 동쪽으로는 운문산과 가지산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비슬산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
세속오계를 전수했던 원광법사,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이곳에서 살았다.
원광법사(圓光 541~630)는 초등학생도 알만한 유명 스님이다.
세속오계를 지었기 때문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 진평왕 때, 이 절을 찾아온 화랑인 귀산(貴山)과 추항에게 원광법사가 알려준 다섯 가지 계율에서 비롯되었다.
세속오계는 다음과 같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일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도로써 어버이를 모시는 일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는 것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
살생유택(殺生有擇) 산 것을 죽임에는 신중 할 것
신라가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이런 계율을 가지고 실천했던
화랑정신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계명은 15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효하다.
보양국사는 운문사의 중창자이다. 그는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밀양의 봉성사에서 시무했다.
후삼국의 싸움판이 치열할 때, 왕건은 청도 인근까지 휘돌아다니며 전쟁을 해야 했다.
그런대 이곳 산적들의 세력이 만만하지 않았다.
산적들은 견성(이서산성)에서 치열하게 달려들었다.
왕건은 보양국사에게 어떻게 하면 산적들을 정복할 수 있는지 방법을 묻는다.
운문사
보양국사는 “개는 밤을 지키고 대낮에는 경계를 하지 않으며, 앞을 지키며 뒤를 방어하지 않으니
낮에 뒤쪽을 공격하시오”라고 말한다.
이에 왕건은 그가 알려준 방법으로 산적을 공격하여 승리한다. 훗날 왕건은 보양국사가 지금의 운문사인 오갑사를 중창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보양국사는 왕건으로부터 밭 500결(結)과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받는다.
태조 왕건이 운문이란 사액을 사용한 것은 당나라 때 승려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에서 따온 것이다.
운문문언은 당나라의 고승이었다. 그는 “석가모니가 만약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교만한 말을 다시 한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호방한 스님으로 유명하다.
작갑전(鵲岬殿) 문은 닫게 있다. 나는 이곳의 전설을 오래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 올 때 해룡이 청하여 용궁을 구경한다. 이때 금라가사를 한 벌 얻어 입는다. 해룡의 아들 이목에게 보양국潁?안내하여 작갑에 사찰을 창건할 것을 지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곳 지금의 운문사 언저리를 배회하다가 평지에 어른거리는 5층의 황탑을 발견한다. 그러나 평지에 도착하니 5층황탑은 사라지고 그곳에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보양은 직감적으로 작갑(鵲岬)이 ‘까치곶’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시 땅을 파니 그곳에는 많은 전돌이 묻혀 있었다.
이 벽돌로 절을 중창하고 작갑사라 하였다. 작갑사는 훗날 태조 왕건이 내린 사액에 의해 운문사가 된다.
결국 운문사는 왕건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절이다. 밭 500결은 당시 청도 농토의 10%가 넘었으니 경제적인 세력을 알만하지 않은가. 이뿐 만이 아니었다. 인종 7년(1129년)에는 국노비 500명을 운문사에 예속시켰다.
고려의 어느 사찰보다 크고 부자의 절이 되었지만, 무신정권하의 민란과 노비반란으로 명성을 잃게 된다.
고려 무신정권 시대에 농민과 천민들의 항쟁은 대단했다. 1176년 공주 명학소의 ‘망이 망소이’의 천민항쟁으로
고려 조정은 혼란에 빠진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
1193년(명종23년) 민중항쟁의 중심 무대는 이곳 운문사를 중심으로 한 깊은 산중이었다. 운문의 김사미와 밀양(초전)의 효심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토호와 사찰을 공격한다. 운문사는 그들의 거점이 되어 고려 조정은 운문사를 운문적이라 했을 정도였다. 이 난을 주도한 인물이 ‘김사미’이다.
그는 운문사의 김씨 성을 가진 사미승으로 보는 견해가 역사학회에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민란세력들은 경북 예천까지 세력을 확대하였지만 김사미는 개경의 무인정권에게 협상을 요구한다. 고려 조정은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편안하게 살게 해준다는 말을 듣고 김사미는 항복을 한다. 그러나 토벌작전에 나선 병마사는 김사미를 죽이고 잔여 세력의 소탕에 나선다. 고려 조정에 속은 농민군과 노비군들은 운문산으로 숨어들어 10년 이상을 저항한다. 결국 운문산은 고려 민중항쟁의 한과 역사가 서린 산이다.
당시 토벌군에 자원하였던 이규보는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 숲에서 버섯을 따서 구워먹었다”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낸다. 이규보가 누구인가. 고려 최고의 문인이 아니던가. 그가 이곳까지 와서 토벌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니 역사는 무서운 것이다.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의 문인답지 않은 모습을 운문사에 와서 배운다.
운문사의 담은 낮다.
감싸 안은 담장이 만약 높았다면 운문사는 고약한 절이 되었을 것이다. 운문사가 쌓은 음덕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이 숲길은 고려의 유명 인사가 걷던 길이다.
고려농민항쟁이 진압되고도 한참이나 지난 1277년 이 절에는 한 고승이 주지로 찾아든다.
일연스님이다.
당시 그의 나이 72세였다. 운문사 주지로 근무하던 5년 동안에 그는 삼국유사를 완성한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서는 참으로 빈약할 것이다. 그가 가고 왔을 길을
상상해 본다.
운문사
일연 스님은 충렬왕의 부름으로 개경 광명사에서 국존이 되었다가
군위 인각사에서 84세로 열반한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운문사를 부흥시킨 스님은 설송대사(1676~1750)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성은 백씨이다. 법명은 연초(演初) 설송은 호(呼)이다.
1688년에 운문사로 출가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13세였다. 휴정의 법맥을 이은 스님이다.
훗날 운문사의 재산이 밝혀진 것은 일제의 토지수탈정책에 의한 토지조사에 의해서였다.
절터를 포함한 영역이 약 622만평이었으니 이때까지도 운문사의 재산은 대단했다.
운문산은 평화와 저항의 산이다. 역사의 아련한 기억들을 담아 전하는 비문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싶어진다.
운문사에는 원응국사비(보물316호)가 1000년 가까이 서 있다. 이 비문은 윤언이(~1149)가 썼는데 그는 윤관장군의 아들이다.
그는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의 부하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부식에게 잘못 보여 좌천되기도 한다. 고려의 정당문학으로 큰 문장가였다. 글씨는 고려 최고의 명필 탄연(坦然, 1070~1159)이 썼으니 이 비석의 가치는 대단하다.
운문사는 새벽예불이 유명하다. 새벽 예불이 끝날 때는 운문사를 3차에 걸쳐 창건했던
원광법사, 보양국사, 원응국사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운문사는 석탑과 불상 등 7개의 보물이 수두룩하고 지금은 비구니 스님들의 승가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슬비가 내리는 절집 구경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이제 동창천은 운문댐에서 흘려보내는 물이 기원이 되었다. 이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임당리다. 임당리에는 ‘임당리김씨고택’이 있고 ‘임호서원’이 있지만 선암서원 방향으로
직진한다.
청도군 금천면 동곡의 동창천변에는 아름다운 경관을 간직한 선암서원이 있다.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선양하는 선암서원은 1568에 인근 매전리에서 옮겨왔다.
선암서원
이 서원은 다른 서원과 구조가 조금 다르다. 양반집 주택을 그대로 두고 뒤편에 강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동곡은 임진왜란 당시에 격전의 장소다. 선암서원 맞은편의 어성산전투에서 천성만호 박경선은 왜장을 안고 떨어져 순국한다. 그를 추모하는 추모비는 서원 뒤에 서 있다.
선암서원 아래로 동창천은 이른 봄이라 말없이 휘돌아 흘러간다. 그러나 여름의 동창천은
물결이 일렁일 것이다. 역사의 바람결은 언제나 그 물결처럼 흘러왔다가 흘러갈 것이다.
선암서원에서 공부하던 모든 이들은 죽고 이제는 공부할 이들이 없는지 빈 서원은 침묵이다.
아무도 없는 서원을 드나들면서 이곳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운강고택은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청도군의 특징은 문화재의 이정표가 제대로 없고 찾아가면 문이 닫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운강고택의 터는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1479∼1560)이 벼슬을 버리고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박하담의 후손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이 1824년(순조24)이 제대로 집을 지어 자신의 호로 번듯한 집을 남겨 놓았다. 그의 호 운강(雲岡)이 당호로 남아 오늘에 전한다.
운강고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口자형으로 건축되어 쌍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곡간채와 가묘로 구성된 이 집은 만화정이란 부속건물이 있다. 동창천을 바라 볼 수 있는 만화정은 6ㆍ25동란 때 이승만 대통령이 숙식했던 곳이다. 당시 동창천변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소요당 박하담은 조선 중종 때에 사미시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다. 선비들이 계속해서 화를 당하는 것에 염증을 느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퇴계 이황이 관직에 나올 것을 부탁해도 거절하고 이곳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의 후손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은 후학양성에 크게 주력한 인물이다. 지금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예전에는 이곳이 문향의 고향이었을 것이다.
청도 동창천
아름답고 멋진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즐비한 이런 마을에도 빈집이 수두룩하다.
이 마을에서 달이 뜬 날 밤에 이호우의 시조 ‘달밤’을 읽으면, 이 고장 옛 분위기가 살아올 것이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趙雄傳(조웅전)에 잠들던 그날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이호우 시인의 시조 ‘달밤’ 전문
시조 ‘달밤’은 1940년 <문장>지 6월과 7월 합본 호에 게재된 등단작품이다.
선암서원 앞 소요대
국토의 아름다움과 민족정서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당시 우리 농촌의 정경이 물씬 묻어 있는 4수 1편으로 구성된 연시조다.
가람 이병기는 이 시조를 추천하며 “ 새롭고 깨끗하며 아무 억지도 없고 꾸밈도 없고 구김도 없다”라로 평했다.
첫 수의 작품의 무대는 낙동강이다. 강이 달빛과 만나 애수와 조용한 공간을 조성한다.
자신을 금빛노을에 합일시키며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 했다.
둘째 수에는 우리의 국토와 고향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으며,
셋째 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생전의 모습을 회상하며 고향에서의 옛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다.
넷째 수는 현실적인 삶의 부조함에도 불구하고 고향의 달빛에 의지하며 아름다운 사랑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 시조는 1934년 그의 나이22세 때에 동네 친구들과 함께 기념 촬영한 사진 뒤에 친필로 남긴 시조의 완성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비파수 정든 노래 달모래에 숨어들 적
말술 앞에 놋코 높은 마음 난우노니
봄이야 가든 오든 이 밤 더디 세어라
--이호우 육필 1934년 8월30
비파수는 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다. 동창천과 청도천이 합류하는 고향에서 만나는 물길은 아름다웠으리라.
결국 그의 시심은 시비에서 강둑에서 바라보는 고향의 자연에서 얻어진 것이다.
운강고택에서 이호우 고향까지는 승용차로 한참을 달려야 닿을 수 있다.
청도의 지도를 펼치면 그 모양이 매우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운문면에서 풍각면이나 각북면까지의 거리는 45km가 넘기 때문이다. 운강고택에서 58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는 길은 동창천과 함께 동행이다. 길은 멀고 예상 시간보다 많이 걸렸지만 동창천의 물길을 보면서 달렸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다. ‘오누이공원’은 청도읍 내호리이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대부분 유천이라 부른다. 공원이라고 하기보다는 동네 아이들 놀이터 넓이다. 공원 앞으로 수량은 적지만 강물이 흘러가기에 위안이다. 강 건너에는 경남 밀양 땅이 아닌가.
이영도 시비(詩碑)의 조형물은 달무리의 형상을 원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하였다. ‘달무리’는 그의 대표시 제목이기도 하다.
이호우의 시비에는 ‘살구꽃 핀 마을’, 바로 옆에 서 있는 이영도의 시비에는 ‘달무리’가 새겨져 있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아 우주이던 가슴
그 자락 학같이 여기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 이영도 시인의 시 ‘달무리’ 전문
어머니에 대한 크고 넓은 사랑을 표현한 ‘달무리’는 안타까움과 간절한 그리움이 너울거린다. 초장에는 자식을 향한 측은지심을 , 중장에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종장에는 학처럼 곱고 고고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외로운 현실의 비애감이 묻어나는 달무리 시비를 읽으며 봄이 오는 강변을 서성인다. 이 시를 읽으니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이번 한식날은 어머니 묘소를 찾아보리라 다짐한다. 오누이공원 건너편에는 다방이다. 주차장에 승용차가 멈추더니 한 여자가 내린다. 배달을 하는 다방 종업원이었다. 그에게 이호우 시인 생가의 위치를 묻는다. “저 길 건너 , 골목안으로 쭉 들어가 예”
퇴락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고샅길을 걷는다. 이호우 시인의 생가는 지금은 문들 닫은 유천극장 앞이다, 오늘은 장날이 아니어서 상점들이 거의 휴업 상태인 듯 보인다. 농촌 경제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이곳 상점들이 예전처럼 활성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마을은 큰 개울이 합류하는 합수머리에 위치하여 있고, 이호우 이영도 시인의 고향마을이 아닌가. 왠지 푸근한 정서가 감돌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우리 국토의 여러지역을 답사하면서 시인의 생가를 제대로 답사하지 못한 경우는 별로 없다. 담을 타고 들어가기도 했던 기억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호우 생가는 달랐다. 담도 높고 대문도 큰 자물통으로 완전히 잠가 버렸다. 듣자하니 사람들의 방문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관리하는 자손들은 개방을 원치 않는 듯 보였다. 청도군청에 들러 이런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어느 정도 예감이 적중했다. 청도군에서는 이호우 이영도 시인 생가를 군에서 매입할 자금까지 준비하였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대문을 기웃거리면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자니 옆집 할머니가 나오시며 “ 그 집에 아무도 없어 예” 한다. 대구로 가서 겨울을 나고 아직 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기웃거리다가 모두 그냥 돌아가지...”. 노인은 말끝을 흐린다. 나에게도 더 이상 기웃거리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이호우 시인과 이영도 시인의 약력을 알리는 생가의 표지석도 대문이 닫혀 있어 읽을 수가 없다. 자료집에서 그의 비문을 옮겨본다. 이미 13년 전에 표지석을 세웠지만 지금은 그 비문을 읽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비문은 대문 밖으로 옮겨 놓아야 할 것이다.
爾豪愚(이호우) 선생의 생가 이곳은 '開花(개화)' '살구꽃 피는 마을' '休火山(휴화산)' '달밤'등 서정을 바탕으로 주옥같은 현대 시조를 남김으로써 한국 현대 시조의격을 한차원 높인 李鎬雨(이호우,1912~1970) 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으로 선생의 시혼이 감도는 유서깊은 생가이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선생의 업적과 격조높은 시정신을 기리고자 한국문인협회가 SBS 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대문학 표장사업의 일환으로 이 글을 새긴다.
1997년 9월 10일 社團法人 韓國文協會 理事長 黃 命
李永道(이영도)선생의 생가 이곳은 '보리고개' '달무리'등 민족고유의 情恨(정한)으로 단아하고 섬세한 가락으로 승화시켜 빼어난 시조를 남김으로써 현대시조사를 한층 빛낸 丁芸 李永道(정운 이영도, 1916~1976)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자리로 선생의 시혼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선생의 격조 높은 시업(詩業)을 기리고자 한국문인협회가 SBS 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대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이 글을 새긴다. 1997년 9월 10일 社團法人 韓國文協會 理事長 黃 命
이호우의 작품 활동은 1939년 동아일보 '투고란'에 '낙엽'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가람 이병기의 추천으로 '달밤'이 1940년에 문장지에 게재되면서 문학 활동은 본격화된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1941년부터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해방 될 때까지 상점도 운영하고 재제소 사업도 한다. 지금은 퇴락한 이 마을이 당시에는 가장 번성했을 때였으리라. 1952년부터 대구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서울지사장을 역임한다. 1955년 시조<바람벌>을 <대구대학보>에 <현대문학>지 발표하였다가 반공법으로 기소되어 큰 고초를 당하기도 한다.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 보자고 아아 살아 보자고.
욕이 조상에 이르러도 깨달을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로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이 눈물겹다.
벗아 너마자 미치고 외로 선 바람벌에 찢어진 꿈의 기폭(旗幅)인 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섧구나.
단 하나인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조국의 밝음을 기약함에 아니던가 일찌기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되기도 했어라
이호우 시인의 시조‘ 바람벌’ 전문
<바람벌>은 4수 1편의 연시조이다. 4수의 각 수는 사건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첫 수에는 <순>이라는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 <순>은 미움이 사랑을 앞선 당시의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아름답게 살아 보려고 했던 아이다. 그러나 이제 그 아이에게 절망의 눈물이 보인다. 둘째 수는 6,25전쟁을 비판한 내용이다. 한 조상 한 핏줄을 가지고 때어난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겠다고 총질을 하는 현실에 시인은 강산을 보며 부끄러워한다. 셋째 수는 비정하고 모순덩어리인 현실에 저항하다가 미친 친구를 기억하며 자신의 허약한 삶을 비판하고 있다. 그 친구처럼 미칠 수 없는 것이 슬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넷째 수는 그의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와 민족의 스승들은 “오직 조국의 밝음”을 기약하였기 때문에 경의를 표현한다.
영탄과 감상적이지만 생명의 소중한 자각을 현실감 있게 개관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바람벌’은 이호우 자신의 아호이다. 그의 삶은 ‘바람벌’처럼 당시 조국의 현실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모순과 황당함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조국의 현실에서 그의 삶이 온전할 리 없었다. 오히려 그의 삶이 평화롭다면 그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이 시는 비정하고 살벌한 당시의 분위기를 비판한 작품이다. 민족이 처한 시대상황을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그는 강한 분노를 느꼈으리라. 그러나,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섧구나‘의 표현처럼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심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되기도 했어라’이다. 죽지 못하고 사는 삶이 부끄럽다는 표현이다. 1950년대는 제목처럼 ‘바람벌’ 같던 세월이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6,25전쟁과 정치적인 암흑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비정하고 긴박한 삶속에서도 그는 1955년 첫 시조집 '이호우시조집',과 68년에는 '休火山(휴화산)' 을 발간한다. 문학적인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평범한 소재를 선택하여 썼지만, '휴화산'에서는 인간 욕망을 승화시켰다. 55년 첫 시조집으로 출간하여 제1회 경북문화상을 받는다. 72년 대구 남산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편저로 '古今時調精解(고금시조정해)'와 1968년 누이동생 이영도 시인과 함께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도 출판한다.
이호우 시인은 부친이 군수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부유했다.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의명의숙이라는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밀양보통학교를 졸업한다. 경기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신경쇠약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문학적인 정서를 함양한다. 몇 년 후에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하는 계기가 된다. 일본 유학을 하면서 발병한 신경쇠약증세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한다. 이호우 시인은 아버지가 일제하에서 군수로 근무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첩을 얻어서 사는 것도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호우의 조부와 증조부는 일제에 저항했던 분들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달랐다. 일제하에서 출세지향적이었기 때문이다. 지조 있고 의협심이 많았던 이호우는 자신의 아버지의 삶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려한다. 문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예술적인 취향에 문예적인 감각이 돋보였던 이호우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지 통해 작품을 발표한다. 이무렵 그의 문학적인 재능 특히 시조 영역을 알아본 사람이 가람 이병기 선생이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추천으로 그는 화려하게 시조 시인이 된다.
해방 이후에는 그는 가족들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다. 1949년 남로당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형 직전에 살아남는다. 그를 살려준 이는 김광섭 시인이었다. 김광섭 시인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시조 <초원>에는 남로당 간부라는 모함으로 사형선고까지 받고 죽음의 문턱에 있었던 시절에 갈망하던 자연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상긋 풀 내음새 이슬에 젖은 초원.
종달새 노래 위로 흰구름 지나가고,
그 위엔 푸른 하늘이 높이 높이 열렸다.
-- 이호우 시인의 시조 ‘초원’ 전문
푸른 하늘과 종달새는 자유의 상징이다. 당시 그는 얼마나 높은 하늘을 보고 싶었을까. 풀 냄새와 이슬에 젖은 초원을 걷고 싶었으리라.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난의 시기였다.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 년 전에 사형선고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난 그는 이제 현실과 맞서는 사람이 되어갔다. 다른 사람 같으면 두려움으로 떨어야 했지만, 그는 부정과 부패 세력에 저항하며 민중의 권리를 찾아 주려고 노력한다.
고난의 시기에 그의 시조 문학은 그의 대표시 ‘개화’처럼 피어났다.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 이호우 시인의 시조 ‘개화’ 전문
꽃잎이 피는 것은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우주론적인 인생관을 담고 있는 이 시조는 초장에는 개화의 진행, 중장은 개화의 절정, 종장은 개화의 완성을 담고 있다. 시조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시처럼 보이는 이 시는, 꽃이 피는 순간의 극적인 상황을 기도하는 모습처럼 경건하게 표현하고 있다. 꽃이 피는 긴장의 절정은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라는 마지막 종장에 상징적으로 쓰고 있다.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고 나도 가만 눈을 감고“라는 표현에서 이호우 시인의 성격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현대 시조가 도달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호우 시인의 시조 ‘개화’를 그의 고향 마을에서 가슴으로 읽는다.
이호우 시인은 이영도 시인의 친 오빠다.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를 연상케 한다. 우리 현대시조는 이들 오누이에 의해 큰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이영도 시인은 청마 유치환의 사랑의 편지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청마 유치환 시인과 이영도의 정신적인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유치환 시인은 丁芸(정운) 이영도 시인에게 사랑의 마음을 품으며 생의 후반기를 바쳤다. 21세에 남편과 사별한 이영도의 삶은 절망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딸을 키우면서 그는 문학의 길을 더듬거리며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주친 사람이 유부남인 유치환 시인이다. 유치환 시인은 ‘행복’이란 시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라고 이영도 시인과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청마와 이영도가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경남의 통영여중 교정이었다. 청마의 나이는 서른여덟 유부남이었고, 정운은 스물아홉의 청상 과부였다. 청마는 당시 사회의 윤리적인 정서를 거슬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이영도를 향해 몇 천 통의 사랑의 편지를 썼다. 20년 넘게 진행되던 편지는 1967년 2월. 청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침묵하던 이영도 시인은 청마를 위해 시조 한편을 쓴다. ‘황혼에 서서’ 이다.
산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
--이영도 시인의 시 ‘ 황혼에 서서’ 전문
이영도 시인은 청마 유치환의 정신적인 사랑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유명세를 탄다. 그녀는 청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단행본을 출간한다. 당시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말도 많았다. 청마가 이영도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기에 화제의 책이 되었고, 독자들은 놀라움을 금 할 수 없었다. 불륜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정신적인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오히려 감동을 주었다. 이영도 시인은 이 책의 수익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시조시인상' 기금으로 기증한 것이다.
청마가 이영도 시인을 위해서 써서 유명한 ‘행복’이란 시를 읽으면, 그들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비귀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유치환 시인의 시 ‘행복’ 부분
이영도 시인은 청마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이영도 시인은 1945년 죽순(竹筍) 동인으로 활동한다. 시조 제야(除夜)등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고등학교 교사와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였고, 부산어린이회관 관장, '현대시학'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며 활발하게 활동한 문인이다. 이영도 시인의 시조에는 우리 고유의 민족정서가 담겨 있으며, 잊혀져가는 고유의 가락이 꿈틀거린다. 그녀의 성격처럼 맑고 간결하며 경건한 정서를 가진 그의 시조를 읽다보면, 아름답고 관조적인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시조 ‘단풍’을 읽으면, 이런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너도 따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선 정이어라
못내 턴 그 청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향로!
--이영도 시인의 시 ‘ 단풍’
이영도 시인의 대표 작품으로는 '바람' '황혼에 서서' '미소' '아지랭이'등이 있다. 시조집 '靑苧集(청저집)' '석류' 등과, 수필집 '春芹集(춘근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 '머나먼 사념의 길목' 등이 있다. 1966년 제8회 訥月文化賞(눌월문화상)을 받는다. 이호우 시인의 고향에서 청도읍으로 향한 길에는 소나기가 퍼부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비였다. 무조건 찾아든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후 3시였다. 비가 멈추기를 기다려 청도읍을 거쳐 자계서원을 찾아 나섰다.
자계서원을 찾느라 고생했다. 청도읍에서 풍각면으로 이어진 20번 국도를 몇 번이고 오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자계서원을 찾기 위해서는 청도읍에서 풍각면사무소 방향의 20번 국도를 타고 가야한다. 칠성리에 소재한 신흥주유소가 보이면 이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이서면 방향으로 우회전한 후에 다리 건너 바로 좌회전하면 서원리다. 이 마을이 탁영 김일손 선생의 고향이다. 자계서원은 이 마을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을 흘러 청도 방향으로 가는 개울이 서원천이다.
동네는 작지만 서원은 오랜 풍상에서도 그 품격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런대 서원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다행히 서원의 담이 낮아 기웃거리며 사진을 촬영하는데 답답했다. 월담을 했다. 잠시 후에 ‘누구요, 누구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원을 관리하는 할머니였다. 왜 서원을 닫아 놓고 있느냐고 물었다. “평상시에는 항상 서원 문을 닫아 예”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서원 답사에 나섰다. 나는 오래전부터 탁영(濯纓) 길일손(金馹孫)의 고향 마을과 자계서원을 탐방하고 싶었다. 이제야 그날이 된 것이다. 그가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 아래서 역사의 아련한 소리를 침묵으로 듣는다. 바로 옆에 있는 문학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시가 새겨져 있다.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소리 부드러워 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인 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가네
-- 김일손의 문학비에서 옮김
이 시는 그가 26세 때 지리산을 탐방하면서 썼다. 이 문학비는 이상보 교수님이 회장으로 있는 한국문학비건립회에서 세웠다. 뒷면에는 문학비를 세울 때 협력한 지인들의 이름이 많이 보인다.
탁영(濯纓)은 김일손의 호이다. 탁영(濯纓)이란 “갓끈을 씻는다”란 뜻을 가진다. 그러나 이 호는 3세기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어부가’를 연상하고 지었을 것이다.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滄浪之水濯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네 결국 김일손의 호 탁영(濯纓)에는 그의 삶에 관한 의지가 담겨 있다. 조선 조정이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치면 머리를 감고 갓끈을 씻고 의관을 정제하여 벼슬하고, 정치판이 혼탁하면 발이나 씻고 초야에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그의 호에 살아서 꿈틀거린다. 언관(言官)으로 근무하던 김일손에게 중앙 정치판은 모순의 장소였다. 특히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 같은 훈구파들에게 날을 세웠다.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근무할 때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조에 실었다. 조의제문은 세조찬위(世祖簒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글이다.
김일손(1464~1498)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계운(季雲)이다. 김일손은 그의 나이 22세 때인 1486년(성종17)에 생원(生員)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다. 예문관에 등용된 후에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와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니 그의 실력을 알만하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근무하면서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기록하고 성준(成俊)과 함께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한다. 이극돈의 원한을 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그는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조의제문을 게재한 것을 이극돈이 연산군에 밀고한다.
결국 그는 권오복, 권경유 등과 함께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고 정여창 김굉필등 많은 사림들은 유배를 당한다. 1498년이 무오년이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 부른다. 무오사화로 성종 때 등장한 대부준의 신진 사림들은 집권층인 훈구파에게 거세된다. 정치는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목숨을 거는 일이다. 김일손은 중종반정(1506) 후에 신원(伸寃)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시호 문민(文愍)을 얻는다.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과 이곳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는 문장에도 탁월하여 ‘탁영문집’이 전한다.
김일손이 심었다고 전하는 500년 된 은행나무 아래서 역사의 아련한 숨소리를 듣는다. 수식목(手植木) 표석까지 은행나무 앞에 세워놓았으니 그가 심은 것은 믿겠지만 서원은 그의 사후에 세워졌으니 의문은 남는다. 서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곳에 미리 김일손이 심었거나 그의 집터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 기록을 아직 찾을 수 없다. 다만 감동적인 것은 자계서원이란 이름이다.
김일손의 참사(慘死)를 당하였다는 소식에 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에는 피물이 3일간 흘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이때부터 붉은 시내물이 흘렀다란 뜻을 가진 ‘자계(紫溪)’라 불렀다. 서원 이름도 운계서원(雲溪書院)에서 자계서원( 紫溪書院)으로 바뀐다.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번지에 있는 자계서원은 1518년(중종13)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선양하기 위해 위패를 모신 자계사(紫溪祠) 였다. 1576년(선조9) 서원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15년(광해군7) 중건된다. 이후 그의 조부 김극일(金克一) 후손인 김대유(金大有)를 추가로 배향한다. 1661년(현종2) ‘자계’라는 사액을 받고 사액서원이 되지만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84년 복원되었다.
결국 자계서원은 역사적인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이야기다. 다만 김일손의 삶과 학문의 흐름이 전할 따름이다. 그러나 강당, 동재와 서재, 영귀루(詠歸樓)로 이어진 서당의 전형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둠이 내린 청도를 떠난다. 역사와 문학에 스며든 우리 국토를 답사하며,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조상들의 행적을 찾는 일에 가슴이 뿌듯하다. 이 시대의 문학은 무엇인가. 일찍이 릴케는 자신의 시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 가난한 이의 빵조각 보다 못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까뮈는 자신이 주장하던 실존주의가 몽마르트 언덕에서 추위에 죽어가는 노숙자의 담요 한 장 만도 못함을 탄식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론의 회색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를 문학을 찾아 떠나는 길에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 격려하며 이 길을 걸어왔다. 이번 청도 기행은 역사와 문학이 자연이 어우러진 장엄한 길 이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했던가. 우리국토는 가는 곳 마다 사연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청도는 원광법사, 일연, 이규보가 삶터로 삼았으며 서성거렸던 곳이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야만적인 통치에 환멸을 느낀 민중들의 봉기가 운문사를 중심으로 발발하였다는 것은 내게 매우 의미는 기행의 토대가 되어 주었다.
작가는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고장의 문인 이호우와 이영도 시인은 가난하고 비정하던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문인이다. 이들의 삶과 문학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들의 고향에서 나는 오히려 격려를 받고 돌아왔다. 국토에 스며든 진실의 역사를 찾아 떠돌아다니며 문학을 챙기는 일은 쉽지 않다. 빈 서원과 고택들은 나를 슬프게 했다. 새마을운동 발생지인 청도군의 농촌 현실도 다른 지역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가는 곳 마다 동네를 노인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물어 볼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지도에만 의지하며 더듬거렸다. 무엇보다 이호우 시인과 이영도 시인의 생가의 대문이 잠겨 있는 것에 절망했다. 그러나 이 절망은 희망의 씨앗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호우 시인의 고향에 빈터마다 살구나무가 심어지길 희망한다. 살구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전국에서 이 마을을 찾는 관광의 명소가 되는 꿈도 꾸어본다. 생가도 완전히 개방되고 <이호우와 이영도문학관>이 설립되면 이 꿈은 이루어 질 것이다. 남녘에서부터 꽃이 피고 있다. 금년 봄에는 이호우의 ‘개화’처럼 꽃 한 송이 필 때도 ‘한 하늘이 열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영도 시비
이호우, 이영도 생가
이영도 시인
굳게 닫힌 이호우 시인, 이영도 시인 생가
오누이공원
이호우 시비
통영 유치환 생가
자계서원
김일손문학비
자계서원과 은행나무
자계서원
청도풍경 (우듬지 사이로 소싸움 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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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가 침묵하는 자리마다 빈 침묵으로 고뇌하는, 청도 그 자리의 감성과 이성.
김경식시인님의 글 소리마다 살픗한 숨결이 살아 봄하늘로 피어오르는 듯 느껴집니다. "이론의 회색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를 문학을 찾아 떠나는 길에 의미부여..." 김경식시인님의 언어들. 분명! 정화된 그 언어마다 효과적인 언어가 되어, 우리네 가슴을 아득한 공명으로 이끕니다.
오늘 저는,도서관에 들려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이호우, "개화",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를 빌려와 읽었어요.
부족한 제가 '문학기행의 단맛'을 음미하려는 준비된 의도인걸요.
아,"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저 또한 맑간 숨결을 따라하는 오늘!
별안개님의 성원과 격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