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백제 왕흥사 사리는 어디로 갔을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07년 10월 10일이었습니다. 충남 부여 왕흥사 목탑터를 조사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원들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목탑터 초석의 사리구멍을 막은 돌뚜껑(25㎝×15㎝×7㎝)이 보였던 건데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흙탕물 속에 사리기가 잡혔고요. 대나무칼로 조심스레 흙을 제거하자 글자가 한자 한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10월 10일 부여 왕흥사지의 목탑터에서 확인된 사리기 일체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정(丁), 유(酉), 년(年), 2월(二月), 15일(十五日)’. 목탑의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글자였습니다.
그다음 명문에서 조사원들의 숨이 탁 막혔습니다. ‘백(百), 제(濟), 왕(王), 창(昌)’….
‘백제왕 창’이라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위덕왕조’는 “(27대) 위덕왕의 이름이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라 했습니다.
명문을 이어보니 “정유년(577) 2월 15일,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고, 본래는 2매를 묻은 사리가 신의 조화로 3매로 변했다(丁酉年 二月 十五日 百濟 王昌 爲亡王子立刹本舍利 二枚葬時神化爲三)”고 했습니다.
<삼국사기>는 틀렸나 연구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왕흥사의 조성 시기(577)가 역사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는 “600년(법왕 2)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했고, 634년(무왕 35) 봄 2월 준공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삼국사기>는 후대(고려시대)의 기록이 아닙니까. 아무래도 당대(577)에 쓰인 사리기 명문이 더 정확하겠죠. 그렇다면 왕흥사는 역사기록(600)보다 23년 빠른 57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게 맞겠죠.
그래도 그렇지 <삼국사기>가 1~2년도 아니고 23년이나 틀렸다면 신뢰성에 큰 상처가 생기는 게 아닐까요.
틀리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답니다. 연구자들은 왕흥사 명문 가운데 ‘찰(刹)’이라는 글자에 주목합니다.
‘찰’은 ‘절(寺)’일 수도 있지만, ‘장대와 기둥’을 의미하는 ‘탑(塔)’일 수도 있답니다. 왕흥사 명문에 나온 ‘입찰(立刹)’ 연대는 탑을 세운 577년을 뜻한다는 겁니다. 왕흥사는 23년 후인 600년 창건됐지만, 건물 전체가 634년에 완공된 것이고요. 그럼 ‘사찰(寺刹)’, 즉 ‘탑(刹)’과 ‘절(寺)’을 완성할 때까지 총 57년이 걸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위덕왕이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세웠다(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라고 했는데요. 위덕왕(재위 554~598)의 아들이라고 역사서에 기록된 이는 아좌(阿佐)태자 한사람뿐입니다. “597년 백제왕(위덕왕)이 왕좌 아좌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일본서기>)는 내용이 있죠. 아좌태자는 일본 쇼토쿠(聖德·574~622)태자의 스승이 됐고요.
왕흥사 명문을 보면 위덕왕에게는 577년 무렵에 죽은 아들이 또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죽은(亡) 아들을 위해 세운 절이라는 겁니다. 위덕왕이 서거했을 때(598)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아좌태자 대신에 위덕왕의 동생(혜왕)에게 왕위가 돌아갔다는 얘기네요. 왜 아들 대신 동생이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혜왕(재위 598 ~599)은 2년 만에 서거하고, 그 아들인 법왕(재위 599~600)이 뒤를 이었는데요. 그분 역시 짧은 재위(2년)에 그쳤는데, 그때(600) 일단 왕흥사의 창건을 선언한 것이 되죠.
사리기 속에 순은제(99%)와 순금제(98%) 사리함이 들어 있었다.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8000여점이나 쏟아진 국보급 유물
사리기 명문도 그랬지만,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리기와 그 주변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이었습니다.
사리함 안에는 은제사리병이 있었고, 다시 그 안에 금제사리병이 들어 있었는데요. 둘 다 순금(98%)과 순은(99%)이었습니다.
사리공 주변에서 확인된 8150여점의 공양품은 또 어떻습니까. 하나하나가 국보·보물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유물이 출토된 곳에서 불과 5㎝ 옆에 근래에 묻은 PVC 파이프가 있었는데요. PVC 매설공사 중에 훼손될 뻔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아슬아슬 피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금목걸이와 금귀고리는 솜씨가 일품이었습니다.
굽은옥의 머리를 씌운 모자형 장식과 작은 고리를 연접해 만든 공모양 장식, 탄화된 나무를 장기알처럼 깎고 가장자리에 금판을 덧씌운 장식 등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특히 ‘공모양 장식’의 경우 중간중간 연결된 접점에 1㎜ 정도에 불과한 금속 알갱이들을 붙였습니다. 가락지와 구슬, 허리띠 장식 등 각종 은제품과 젓가락, 팔찌, 동전 등 동제품도 정교한 솜씨를 자랑했는데요.
그중 중국에서 통용된 상평오수전 2점과 오수전 1점 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백제가 중국 남북조와 동시에 활발한 교역을 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공양품 중 쌀알보다 훨씬 작은 구슬에 샤프심보다 약간 작은 구멍을 뚫은 초절정 정밀 극세공을 자랑하는 것도 있습니다.
백운모판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했는데요. 운모판의 두께는 0.008㎝에 불과합니다. 도교에서 불로장생의 약재로 알려진 연꽃 모양의 운모판은 무덤 주인공의 관모에 장식했던 게 분명합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에 따르면 왕흥사 사리용기 및 유물과 무령왕릉 출토품 사이에 강한 친연관계가 있답니다.
무령왕릉(525~529)과 왕흥사 탑(577) 사이에는 50년의 시간차가 있잖습니까. 그런데 왕흥사 탑의 모자형 장식과 탄화된 나무를 깎아 금판을 두른 장식 등은 무령왕릉 출토 금속공예품과 쌍둥이라 할 만큼 유사합니다. 또 왕흥사 사리용기의 꼭지도 무령왕릉 동탁은잔과 연속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령왕릉 공예품이나 왕흥사 공예품은 모두 왕실물품을 제작하던 공방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 것이 아닐까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사리기 명문에 등장하는 ‘백제왕 창’은 다름아닌 백제 27대 위덕왕의 본명인 창(昌)이었다.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사라진 사리의 행방은?
한가지 여담이 있는데요. 사리기 명문은 “…원래 사리 2매를 봉안했는데, 나중에 신의 조화(신령스럽게)로 3매로 변했다(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금제 사리병 안에 사리 3매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병 안에는 2매나 3매는커녕 단 1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빼간 흔적도 없었습니다.
대신 물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년수’도 아닌 ‘천사백년수’라 해서 관심도 끌었는데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혹시 사리가 녹았을 수도 있는 이 사리병 속 물을 분석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결로현상 때문에 생긴 물(H2O)이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사리를 넣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래놓고 ‘신의 조화로 둘에서 셋으로 변했다’는 등의 신이(神異)를 강조한 정치적 이벤트를 벌인 걸까요.
물론 모든 것을 과학과 논리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10세기 편찬설)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백제 무왕 때(639) 불에 탄 제석사지 탑 아래 초석에서 수정병이 확인됐는데, 사리가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임금이 불공을 드리고 참회한 뒤 병을 열자 영롱한 사리 6과가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또 442년 중국 송나라 서춘이라는 인물이 항아리에 넣은 사리 2과가 20과로 늘었는데요. 훗날 그가 타락하자 사리는 온데간데없어졌답니다.
사리를 공경하는 이는 얻지만, 업신여기는 이는 잃는다는 겁니다.
왕흥사 사리기에 3과가 남아 있어야 할 사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춘처럼 타락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왕흥사 목탑터에서 확인된 공양구들. 백제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또 다른 궁금증이 있죠. 위덕왕은 왕흥사뿐 아니라 왕들의 무덤을 조성한 능산리에 또 하나의 절을 세웠는데요.
1995년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사리감에는 “백제 창왕 13년(567) 왕의 누이동생(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창왕이 죽은 아버지(성왕)를 기리기 위해 절을 세운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 위덕왕이 10년 뒤(577)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또 다른 절인 왕흥사를 건립했다는 겁니다.
창왕은 왜 그 같은 불사를 잇달아 감행했을까요. 여기에는 창왕과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 그리고 한성백제 이후 기운 국세를 만회하려다 실패한 백제의 아픈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3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자(475)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죠. 그러다 다시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확보하고 바다를 통한 해외 진출 등을 모색하기 위해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겨 중흥을 꾀합니다(538). 재위 중 사비시대를 연 중흥군주가 성왕(재위 523~554)입니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과 손잡고 북벌을 단행했고, 한강 하류의 6개군을 점령하죠. 그러나 553년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고토 수복의 꿈이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이때 성왕의 아들인 창(위덕왕)이 복수의 칼을 가는데요. 부득이 <일본서기>를 인용하자면 “태자인 여창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급기야 554년 12월 태자(창)가 대가야 연합군까지 동원,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했는데요. 신라는 한강 하류인 신주(新州) 주둔 군대까지 빼돌려 관산성 포위에 나섭니다.
이때 아버지(성왕)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섰다가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삼국사기>는 “554년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다시 <일본서기>에 따르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태자 창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분이 위덕왕(창왕)이었습니다. 패전을 자책하던 위덕왕은 555년 8월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출가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왕흥사는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낙화암과 마주보고 있다. <삼국사기>는 “완공된 절이 (백마)강가에 있는데,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했다. 왕(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향로를 들고 불교법회가 열리는 주위를 도는 불교의식)을 펼쳤다”고 했다. /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 제공
신하들은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려면 종묘·사직을 지켜야 한다”면서 “대신 불법의 덕을 쌓으라”고 권유했답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 ‘불덕을 쌓아 잘못을 뉘우치라’는 신하들의 권유에 따라 능산리 절과 왕흥사를 잇달아 세운 것이겠죠.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불사이기도 했고요.
사비백제의 랜드마크여야 할 왕흥사
며칠 전 사비백제 왕과 왕족의 무덤인 부여 왕릉원(능산리고분군)의 동고분군에서 새로운 무덤이 확인됐습니다.
중앙과 동·서로 나뉜 부여 왕릉원에는 적어도 20여기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답니다. 이번에 확인된 고분을 포함한 동·서고분군은 왕은 아니고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답니다.
이미 복원 정비된 중앙고분군 7기의 무덤이 사비백제 시대의 왕릉으로 보입니다.
사비 천도(538) 이후 백제를 다스린 임금은 여섯 분입니다.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과 무왕(재위 600~641), 의자왕(재위 641~660) 등이 있죠. 익산 쌍릉에 부부묘를 조성한 무왕과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을 빼면 4명의 임금이 이 7기 중 4기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중 ‘중하총’이 심상치 않은데요. 무령왕릉의 무덤 형식인 아치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고분의 주인공을 무령왕(재위 501~523)의 아들인 성왕으로 꼽는 견해가 있습니다. 왕흥사를 조성하기 시작한 위덕왕은 ‘동하총’이나 ‘동삼총’의 주인공으로 추정된답니다. 위덕왕과 비슷한 시기에 죽은 혜왕과 법왕은 ‘서하총’, ‘서상총’, ‘중상총’ 등 중 두곳에 묻혔을 거고요. 물론 모두 추정일 뿐입니다.
<삼국사기>가 묘사한 7세기 전반의 왕흥사는 대단했습니다.
“절은 (백마)강가에 있는데,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했다. 왕(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향로를 들고 법회가 열리는 주위를 도는 불교의식)을 펼쳤다”고 했습니다. 무왕 역시 성왕, 위덕왕처럼 불교의 힘을 빌려 나라의 중흥을 빌며 백마강을 건넜을 겁니다. 백마강 하면 우리는 낙화암과 함께 삼천궁녀를 떠올리죠. 백제의 찬란한 678년 역사를 삼천궁녀의 안타까운 설화로 마무리 짓는다는 건 어쩐지 서글픈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왕흥사의 화려했던 리즈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