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5권. 18세기, Le XVIIIesiècle273-506
제07장, 18세기 중기(1740-1775): 정신의 철학: 꽁디약
- Deuxième Période (1700-1740): La philosophie de l’esprit: Condillac 338-354
1장 일반 고찰들 Considérations générales
18세기의 지배적인 관념들이 논쟁들의 환경이고 격렬한 선전들의 장에서 주장되고 발전되는 것은 1740년에서 1775년 사이에서 이다. 이 논쟁들과 선전들은 식자층의 작은 세상을 감동시키기도 하고, 사회 전체를 열광하게 하기도 하고, 철학자들에 반대하여 공공적이고 시민적이고 교회적인 권력들의 개입을 종종 끌어내기도 하였다. 이런 시기 사이에, 흄(Hume, 1711-1776),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꽁디약(Condillac, 1714-1780), 디드로(Diderot, 1713-1784),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 볼테르(Voltaire, 1694-1778), 루소(Rousseau, 1712-1778),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뷔퐁(Buffon, 1707-1788) 등이 자신들의 중요 저술을 출판했다. (338)
꽁디약은 이 찰나에 인식을 그자체로 탐구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보다 인간들의 행복에 적대적인 “편견들”의 적이었다. 그리고 마땅히 사유를 새롭게 하고 공적인든 사적이든 풍습들을 개조하는 “빛들(lumières)”에 대한 선전가이다. 이것은 마치 독일인들이 말하듯이 계몽(Aufklärung)이다. 특히 사회적 경제적 편견들이 문제일 때, 인물들 또는 확립된 권력들을 공격하지 않고서 편견들을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 이로부터 그 시대의 철학적 문학의 선량한 편에 서는 팜플렛들과 선전무대들이 나온다. 이러한 철학이 성공 없이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철학은 공적인 여론에 이야기하고 또한 이 철학은 여론에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창조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철학은 학술적이고 또 학교의 이런 기술을 내팽겨 쳐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의 많은 작자들은 이런 기술을 폐기했고, 17세기에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것을 그런 대로 다시 다루었다. 항상 모다 명석하게 보다 투명하게,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낙천적 확신을 가지고 탐구한 것이다. 모든 일상적인 정신은, 이미 잘 인도되어 있기에, 인간의 행복에 관심 있는 모든 주제들에게 낙천적 확신을 가지고 침투할 수 있었으며, 접근할 수 없고 모호한 주제들은 가장 큰 이익과 더불어 마땅히 포기 되어야 하고 포기될 수 있었다. (339)
이러한 변형형성(transformation)에서 인위적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철학은 노동임과 동시에 노동이 표현하는 거대한 사회 운동의 결과이다. (339)
중세 이래로 철학자들이 형성되고 있었던 사회 터전[환경]들의 점진적 이동을 따라가는 것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상황들이 철학과 종교직[성직] 사이에 확립했던 내밀한 연관은 조금씩 단절되었다. 16세기 이래로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교수들이 아니라, 자유로운 작가들, 소귀족의 인물들 또는 3신분의 사람들이었다. 17세기에 철학이 아마도 신학과 새로운 계약이 성립된다. 실재적이라기보다 더 겉보기 같은 계약일지라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심지어 말브랑쉬는 철학을 신학에 합체하기보다 오히려 신학을 자신들의 철학과 합체하기를 원했단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체계들은 무너지고, 그 체계들은 마치 “관점들(visions)”처럼 생각되었다. (339)
그 당시 완전한 한 종족[무리]의 종철학자들이 제1평면에 나타난다. 이 철학자들은 대학의 전통과 모든 연결로부터 끊어진 채 고전과 과학으로 학문을 형성하였는데, 인간과 우주의 새로운 개념작업을 정신들[학자들] 속에 조금씩 침투하게 하였다. 이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제3신분에, 즉 오래전에 시작되어 상승하는 운동을 타고서 보다 높이에 도달하려는 부르주아계급에 속한다. 공공 업무들도 잘 다루고, 보다 중요한 장관직에 들어간, 이 부르주아 계급은 [세상사에] 자기의 관념[생각]들과 자기의 보는 방식들을 강요하였다. 순수 사변에는 거의 맞지 않는 이 계급의 실증적 정신은, 실천적 결과물들 욕망하면서, 과학들과 이것들을 적용하는 기예[예술]들을 분리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과학들과 이 과학들의 방법에 맡기면서, 정직함이 성공의 조건이 되는 문제제기들 속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기를 원한다. 이런 정신이 18세기의 철학자들에게 반영되었다. 인간들 자신들의 고유한 반박에 대한 고민을 동반하고서도 그 인간들에게 유용하다는 정열, 이들의 관념[생각]들을 퍼트리기 위하여 볼테르 같은 이와 디드로 같은 이가 부과한 성실성과 힘든 방법, 모든 체계에 대한 그리고 너무 과도한 기술적인 모든 언어에 대한 그들의 공포, 과학들의 정신과 직업들의 정신을 철학 속에 옮겨놓으려는 그들의 욕망,이러한 것이 특성들이다. 이 특성들 속에 이들의 작품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진실로 그들의 성공일 것이다. (340)
II. 꽁디약: 분석– Condillac: l’analyse 340.
꽁디약(Etienne Bonnot de Condillac, abbé de Mureau, 1714-1780)은 그르노블 태생으로 법률가 가정 출신이다. 우선 그는 성직자가 될 운명으로 생-쉴피스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740[스물여섯]년에 졸업하였고, 그는 성직취임을 거부했으며, 그는 파리에서 살았다. 거기서 철학자들 루소, 퐁뜨넬, 디드로들과 자주 만났다. 1746[서른둘]년에 인간인식 기원에 관한 시론(Essai sur l’origine des connaissances humaines, 1746)을 출판했고, 1749[서른다섯]년에 체계론(Traité des systèmes)(재판 1771)을, 1754[마흔]년에 감각론(Traité des sensations, 1754), 1755(마흔하나)년에는 「신의 현존에 관한 논문(Dissertation sur l’existence de Dieu)」을 포함하는동물론(Traité des animaux, 1755)을 출판했다. 그는 베를린 아카데미를 위하여 「신의 현존에 관한 논문」을 1746년에 미리 썼던 것이다. 1758년[마흔넷]에 파르마(Parme, it. Parma, 이탈리아 북부)의 공작 페르디낭 드 부르봉(Ferdinand de Bourbon, 1751-1802)의 아들 가정교사가 되었고, 1767년[쉰셋]까지 파르마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는 파리로 돌아왔다가, 1772[쉰일곱]년 프뤽스(Flux) 성으로 은퇴했다. 여기서 그는 13권의 연구 강의들(Cours d’études, 1775)을 출판했는데, 이 속에는 문법, 사유의 기예[기술], 글쓰기 기술, 고대 역사, 근대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1776(예순둘)년, 상업과 정부의 상호 관계론(Le Commerce et le gouvernement considérés relativement l’un à l’autre, 1776)을 썼다. 그의 사후에 논리학(La Logique, 1780)과 계산들의 언어(La Langue des calculs, 1798)이 나왔다. (340)
꽁디약은 과거 세기의 합리주의 학설들에 대한 출발점 자체를 비판했다. 사람들은 하나의 자료를, 마치 완전히 확실한 격률들 일체에 근거하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이치(raison, 입법)”에 의거하는데, 사람들은 그 자료 넘어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이런 이치는 모든 반성에 앞서 우리 속에 형성되었다. “우리가 반성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 속에서 발견한 관념들과 격률들이 어떻게 거기[반성]에 도입될 수 있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것[관념들과 격률들]에 관한 어떠한 의심도 없이 우리는 이들에게 이법(raison)이라는, 즉 자연의 빛이라는, 태생의 원리라는, 이름을 부여 한다.이것이 철학자들의 큰 오류이다. 철학자들은 정신의 작품이라는 관념들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낌새를 차리지 못한다]. 또는 그것을 의심한다면, 그들은 그것의 일반화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340)
그런데 이런 발견은 사변적인 순수 호기심의 일거리가 아니었다(마치 지성에 관한 플라톤주의자들의 이론들이 있을 수 있듯이). 왜냐하면 “우리들의 오류는 우리의 관념들이 잘 못 행해진 데서 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바로잡기 위한 유일 한 수단은 그것들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 또는 이법은, 이것의 기원이 이것을 설명하면서 정당화 되어야만 하는 자연적 덩어리(bloc naturel)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반성이 다시 만들도록 허락하는, 즉 철학적 반성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보다 더 나은, 일종의 구축물 또는 제작물이다. 이 작업 속에 참여되었던 것은 정신의 미래 전체이다. (341)
이런 예비적 고찰은 데카르트 만큼이나 로크도 목표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꽁디약은, 복합 관념들의 현존이 단순 관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 졌다는 본질적인 점에서, 로크와 일치한다하더라도, 꽁디약은 그[로크]가 다음을 가정했다고 비난하는데, 즉 “영혼이 감관들에 의해 관념들을 받아들이자 곧바로 영혼은 제멋대로(à son gré) 관념들을 반복할 수 있고. 이것들을 혼성[조성]할 수 있고, 이것들을 통합할 수 있고, 이것들로 모든 종류의 복잡한 용어들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관념들을 끌어내기 앞서 오랫동안 감각작용들을 체험했다는 것은 변함없다.” 따라서 어떻게 그리고 왜 복합관념들이 만들어지는 지를, 그리고 언제 관념들이 합법적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남는다. 그러므로 꽁디약의 분석은 작동들 또는 조작들의 묘사로 이루어진다. 이 조작들에 의해 우리는 관념들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수학이 문제인가? 꽁디약은 자신의 계산들의 언어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었는데, 그 규칙은 어떠한 정의도 어떠한 격률도 도입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계산 조작으로부터 모든 진리들을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다. (
아마도 몇 가지 고려에서 규칙들에서 데카르트로부터 그가 믿었던 것보다 더 멀리 있지 않다. 데카르트 또한 “단순한 자연들”의 성질들[고유성들] 속에서 ‘복잡한 자연들’로서 이루어진 이것들의 결합의 이법[이유]을 찾았다. 오로지 꽁디약의 단순(le simple)은 데카르트의 단순과 매우 다르다. 이런 이유로 중요한 것은 “감관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단순한 관념들”이며, 이 관념들을 조합하려하는 정신에게서는 일종의 무기력한 재료이다. 그것들의 내밀한 자연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녹색이라 것을 내가 청색이라 볼 수 있는 것만큼 거의 중요하지 않다. 거기에 어떠한 혼동이 없이, 만일 우리가 초원의 색깔을 녹색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단지 알맞다면 말이다. (341)
단순관념은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고정된 기호(le signe)를 가지고 있는 요소(un élément)이다. 이 요소는 그것의 자연에 의해 그리고 경험과 용도와는 독립적으로 이런 저런 다른 관념과 더불어 어떠한 연결을 부르지도 요청하지도 않는다. 정신의 발전은 다양성 덕분에 연결들(des liaisons)로 이루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이 연결들을 유용성(l’utilité)에 따라 확립할 것이다.꽁디약이 인간인식의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말하듯이, “반성하는데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연결들을 스스로 제안한 목표에 그리고 사람들이 스스로 처한 상황들에 부합하여 형성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외부 세계와 묶는 점들을 다수화해야만 한다. 내적 성찰은 철학하는데 나쁜 방법이다. 이런 것은 필수적이지 않다. “몇몇 철학자들처럼 고독들 속에 스스로 후퇴하여 신중의 취하는 것, 또는 지하실에 스스로 갇혀있는 것‥… 매우 작은 소리 또는 최소한의 미광과 같은 모호함[어둠] 속에 사람들이 스스로 후퇴하는 것은 방심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낮 동안에 그리고 소음의 한가운데서 나는 한 대상에 관해 반성한다면, 빛과 소음이 갑자기 끝나게 하는 방심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그것은 “거기에서 큰 도움을 끌어내기 위하여 습관만을 필요로 할” 매우 작은 장애물들이다. 사람들은 신비적 관조에 대해 “일대 일로[단 둘이서]”, 그리고 데카르트적 성찰에 대해 고독에서[혼자서], 완전한 반명제를 꿈 꿀 수 없다. 내부적 발명은 실재성보다 더 적게 넓고 또 더 많이 한정되어 있다. 꽁띠약이 갈릴레이(1564-1642)의 개혁에 관하여 쓰기를, 우리가 우리의 상상작업 속에서자연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자마자. 우리가 스스로 제안한 연구는 경계를 더 이상 갖지 않는다.이 연구는 우주를 포함한다. 철학은 닫힌 눈으로 성찰하는 한 인간의 과학이 더 이상 아니다. 철학은 모든 기예[기술]들에 관심을 갖는다. (342)
관념들의 기원의 문제는 방법의 문제와 동일하며, 의심할 여지없는 첫 경험을 발견하는데 있다. 이 경험에서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근원을, 재료들을, 작업 장치들을, 우리 인식의 도구들을 볼 수 있다. 구체적이고 완전한 이런 경험은, 이 경험에 대한 인식의 나머지는 무한정한 반복일 뿐인데, 관념들과 언어의 기호들과 연결이며, 이 수단에 의해 관념들 자체들 사이의 연결이다. 꽁디약의 눈에, 인식의 유일한 결함(le défaut)은 기호들과 관념들 사이에서, 기하학에서는 현존하는 완전한 상응[소통]이 없다는 것이다. 기하학에서는 각 단어의 의미가 정확하고 불변하는 방식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 결함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가 인간의 상황 속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신은 인간을 매우 발달된 기관들과 더불어 창조하였기에, 인간은 첫 순간들에서부터 그의 이법[이치]의 완전한 용도를 가졌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새로운 감각작용들 체험할 정도에 따라 그리고 새로운 반성들을 행할 정도에서만 기호들을 개입시킬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처해있었을 상황들에 따라 초기 관념들을 조합할 것이다. 인간은 각 집합을 각각의 이름으로 고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복잡한 두 용어들을 비교할 때(그 점에서 인식이 이루어지는데), 그는 쉽게 이 용어들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343)
인간 인식들의 기원에 관한 시론의 인간은, 우리가 주목하건데, 특이하게 지상의 낙원(Paradis, 에덴동산)의 아담을 닮았다. 철학의 목표는 편견들과 전통들로부터 안전하게, 우리를 정신적인 순진무구의 상태 속에 두는 것이다. (343)
논리학에서 언어는 약간 변한다. 정신이 자기도 모르게 따라갔던 방법을 재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는 필요가 우리 인식을 발달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할 때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에 관하여 성찰한 후에, 말하자면 자연적 자발성을 향한 반성과 더불어 되돌아 온 후에, 또한 시작에서 만큼이나 자발적으로, 우리가 그것[반성]을 생각함이 없이 그것을 실천하는 이런 점에서 반성과 더불어 우리 스스로 친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 속에는, 마치 의지의 정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치 우리 정신의 자연적이고 초보적인 진행으로 우리를 이끄는 완화와 같은, 방법적 순서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일종의 낙천주의가 있다. 나는 잘 정돈된 전체의 전형을 인위적으로 구축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 전형이 이미 현실화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정된 필요들에 상응하는 일상적 사물들의 영역에서, 모든 인간은 잘 정돈된 인식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런 단순한 이유[이치] 때문에, 그 인간은 자기 필요들의[자기에게 필요한] 질서자체에서만 사물들을 판단했을 뿐이며, 본질들에까지 가지 않고 자기 자신과 사물들과 연관에 그칠 뿐이었다. 지적인 질서는 마치 감화적[애정적] 질서에 의해 자연섭리로서 암시된 것과 같다. 우리가 그 질서 안에서 사물들을 연구해야만 하는 질서는 사물들이 그 질서 안에서 우리의 필요에 만족하게 하는 질서에 의존한다. (343)
종합적 방법은, 정의들과 연역법들에 의해 진행하는 방법이다. 철학자들은 그 방법을 기하학자들에게서 빌려왔다고 (잘 못) 믿었다. 그 종합적 방법은 방법들 중에서 가장 나쁜 방법이다. 꽁디약 같은 이에게서 정의 처할 위치가 없다.정의는 자의적 일 수 있고, 또는 이때에 정의는 분석과 혼동된다. 모든 관념(꽁디약은 여기서 로크를 따른다)은 단순하거나 또는 그것이 정의될 수 없을 때는 복합적이다. 그리고 분석만이 그것이 무엇으로 또 어떻게 복합되어 있는 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정의가 한 단어의 단순한 의미를 지시하지 않는다면, 그 정의는 소위 말하는 사물들의 본지를 파악하는 학설들에 속한다. 이것이 항상 정의는 좌초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343)
반대로 분석은 자료(le donné, 주어진 것)로부터 출발하고, 분석은 자료에 머문다. 그런데 분석은, 혼재된 전체로부터 출발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세부사항들을 계속적으로 또한 따로 지각하는데 있다. 세부사항들이란 우선은 가장 중요한 점들과 그 자체들로부터 유래하는 점들이고, 다음에는 매개적인 부분들이며, 마지막으로는 동시적이고 구별된 지각작용을 갖는 것이다. 결국 한 전체에 대한 동시적이고 혼재된 지각작용으로부터, 부분들의 계속적인 지각작용을 매개로 해서, 그 동일한 전체에 대한 동시적이고 구별된 지각작용으로 이행하는데 있다. 이것은 분해 작업과 재구성 작업(recomposition)의 운동이다.이리하여 우리는 알지 못하는 풍경의 지각작용 속에서 통속적으로 진행하고, 풍경은 우리에게 조금씩 친숙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과학들에서도 이처럼 진행함이 틀림없다. 꽁디약에게서는 어떠한 지적 후생설(l’épigénèse)eh 없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딱딱한 껍질 속에(in nuce)주어졌다. (344)
이러한 방법의 고찰은, 마치 체계론이 그렇게 알려주는 것처럼, 앞선 세기의 거대 체계들로부터 악덕들을 분간해 내는 데 있다. 소위 이런 체계들은, 실재상으로는 완전히 임의적인 원리들이지만 소위 말하는 원리들 위에 종합적으로 구축한다. 이 체계들의 동인(動因)은 즉 데카르트와 말블랑쉬의 격률인데, 이것은 한 사물에 대해 사람들이 명석 판명한 사물의 관념 속에 가두어놓았던 것을 본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적용할 수 없는 격률이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관념들이 완전한 사물들의 관념들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너비라는 동일한 관념은 데카르트에서는 실체의 관념이고, 스피노자에게는 속성의 관념이며, 라이프니츠에게서는 불완전한 사물의 관념이 아닌가? 따라서 명증성이나 또는 태생성의 도움은 정당하지 못하다. 데카르트의 물리학[자연학]은 더 이상 행복하지 못하며, 이때 물리학[자연학]은 사물들의 기계적 구조에 근거한 가설들 속에서 그것의 원리들을 찾는다. 정신은 가설들을 상상하면서 모험에 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설들을 전체를 소모할 정도로 충분히 자연을 인식한다는 것을, 이것이 거짓이지만, 믿지 않는다면 말이다. (344)
꽁디약은 체계 그 자체에 대하여 정신을 단죄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체계는 “하나의 질서 속에서 기예 또는 과학의 차이나는 부분들의 성향이다. 이 질서 속에서 이것[부분]들 그 자체 모든 것들은 서로 상호적으로 지지하며, 또한 이 질서 속에서 후자의 부분들은 원리들이라는 전자의 부분들에 의해 설명된다.” 또한 이런 원리들은 이미 알려진 현상들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뉴턴의 물리학에서 일어난 일이며, 꽁디약에게서는 이 방법의 완성된 모델이다. 그는 어떻게 알려진 현상인 중력 작용이 동등하게 달리 알려진 현상들, 즉 조수운동들과 행성들의 운동들을 생성하게 하는지를 제시하였다. 꽁디약이 그것을 칭찬하는 것, 그것은 그런 체계로부터 결정적이고 진보적인 획득물이라는 것이다. 중력 작용은 사실의 자격으로 확실하게 남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현상들의 원리로 연속될 것이다. 그것은 일단 현상들의 이법가 되었다(rendu raison). 그것에 환원할 수 없었을 사실들의 발견은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 꽁디약이 형이상학에서 실현하기를 시도했던 것도 같은 종류의 체계이다. (345)
III, 꽁디약(연속): 감각론 - Condillac (suite): Le Traité des sensations 345
관념들의 기원에 관한 주제와 이런 방법에 대하여, 감각론(Traité des sensations, 1754)은 적용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것들의 보편성에 관한 확실한 증빙자료이다. 결국에는 거기에 관념들의 범주 전체가 있는데, 로크는 이것의 기원을 제시하지 못했으나, 꽁디약 자신은 인간인식 기원에 관한 시론(1746)에서 스스로 침묵을 지킴으로서 이것에 대해 분석하기를 거부했던 것 같았다. 이것은 로크가 반성의 관념들이라, , 다시 말하면 영혼의 능력들의 관념들, 즉 감각, 상상, 기억, 판단, 추리 등이라 부른 것들이다. 꽁디약(1714-1780)이 시론(1746)에서 상상과 기억을 관념들의 연합으로 데려가기 위하여(데카르트와 말브랑쉬 이래로 전통적 서술인데) 부여했던 지표작업들은, 그가 추상작업과 판단을 마치 환원할 수 없는 조작들처럼 생각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감각론에서 반대로 그는 자신의 방법을 끝까지 따라가면서, 변형된 감각작용(sensation transformée)이라는 것이 영혼의 어떠한 조작도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이러한 진행은 그에게 아마도 디드로(1713-1784)에 의해 암시되었다. 디드로는 자신의 맹인들에 관한 편지(Lettre sur les aveugles, 1749)에서 시론(1746)의 애매성을 보게 했고, 디드로는 버클리의 관념론을 회피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345)
나중에 자신의 논리학(1780)에서(II부, 8장) 유며안 주제의 의미로 되돌아오면서, 꽁디약은 감각론(1754)은 미지수[알려지지 않은 것]를 분간해 내기 위하여 동일성에서 동일성으로 가는 방정식의 해결방식과 아주 유사하게 하였다고 우리에게 설명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변형론(la transformation)이 증명할 수 있는 심리학적 자료에, 즉 [또한] 전개[발전]의 내적 관찰에 관련되지 않았다. 이것은 용어의 대수학적 의미에서 변형론이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능력들(facultés)이라는 알려진(기지의) 항목들을, 주의, 비교, 판단, 감각 등등을‥… 갖는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능력들의 기원과 생성작용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것(미지수)도 갖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각작용이 다른 모든 것[능력]들의 기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감각작용은 모든 것들에 섞여 있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감각작용이 통과하는 변이들은 다른 모든 것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관찰은 문제로부터 기지수들[알려진 것들]을 제시하는데 쓰인다. 이 관찰은, 적어도 저자의 의도에 따르면, 그것의 해결 자체에는 전혀 쓰이지 않는다. 이런 비교의 명석함은 아마도 실재적이라기보다 더 겉보기이다. 어떻게 감각작용을 대수적 변수[변이]에 동화하게 하는가? 그리고 다른 능력을, 예를 들어 주의를, 이런 변수[변이]의 규정된 가치에 동화하게 하는가? 실재상으로 감각작용은 오히려 사람들이 그에게 주목하는 국면들에 따라서 마치 다양한 이름들을 가질 수 있는 등장인물과 같다. (346)
그의 주제를 엄격하게 정의하기 위하여 이러한 이름들을 국면들에 따라서, 감각작용 전체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능력들(les facultés)을 생겨나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보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를 조각상의 가설로 이끈다. 그는 이 가설에 따로 분리하여 그리고 계속적으로 감관들의 각각을 부여한다. 그리고 우선 모든 감관들 중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서 고려된 감관이 후각(l’odorat)이다. 그런데 그는, 후각 기관에 한정된 인간에게서, 오성은 통합된 다섯 감관들과 더불어 그만큼이나 많은 능력들을 갖는다는 것을 제기한다고 주장한다. 꽁디약의 중심적인 주제는, 능력들의 생성의 관점에서 다섯 감관들이 서로 서로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에 퍼져있는 선입견이었으며, 즉 정신의 기능 작용과 감관들의 각각이 서로 고유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꽁디약은 이 문제를 일반화했으며, 그는, 모든 감관들이 동등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에 근본적 해결책을 부여했다. (346)
그러나 이런 각각의 감각장용이 모든 능력을 포함한다할지라도, 1746년의시론에서 그가 말했던 대로, 그러면 지성의 조건으로 관념들과 기호들(les signes)의 연결을 갖는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모든 심정적 능력들은 기호들의 사용에 앞선다. 이것이 바로 감각론(1754)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들 중의 하나이다. 이 능력들은 하부 단계에서 현존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예로서 수(le nombre)가 문제인가? 기호들에 앞서서, 우리는 세 가지 대상들을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빛을 보다 멀리 운반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은 기호들의 기예(l’art, 기술)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원초적 단계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 능력들은 “많은 수의 대상들에게 적용하면서 더 많이 전개되는 이런 동일한 [심정적] 능력들일 뿐이다.” 이런 확장[외연]을 허락하는 것은 기호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감각론은,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능력들의 미분적인 것들처럼 주어지며, 기호들은 능력들의 적분을 허락한다. 정신의 문제는 감각작용들과 기호들과 더불어 최소한의 비용들로 해결된다. (346)
이로부터 감각론은 살이 없고 뼈만 남은 특성이 된다. 이것은 심리학으로부터가 아니라 분석으로 나온다. 따라서 어떤 능력들이 후각 기관에 한정된 인간에게서태어나는지를 우리가 탐구한다. 첫째 감각작용에서 유일한 사물이 조각상의 의식에서 현존한다. 냄새 예를 들어 장미의 냄새가 현존한다. 이 찰나에는 장미의 냄새에 대한 의식만 현존한다. 이 의식은 전적으로 이런 냄새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장미의 냄새가 되고, 마치 한 찰나 이후처럼, 의식은 자스민의 냄새가 될 것이고, 그러고 나서 패랭이 꽃 냄새가 될 것이다. 그 의식 속에 다른 것들을 배제하고 유일한 감각작용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이 주의(l’attention)이다 향기로운 물체가 [후각] 기관에 작용하기를 그쳤을 때도 냄새는 느껴지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의 감각작용이 오래가면서, 새로운 냄새가 생산된다고 가정해보자. 오래 지속하는 인상은 기억(la mémoire)이 될 것이다. 만일 조각상이 현재의 인상과 동시에 과거의 감각작용에 주의를 기우린다면, 이런 이중적 주의는 비교작업(la comparaison)이다. 만일 이때에 비교작업이 닮은 것들과 차이나는 것들을 지각할 때, 이것이 판단(le jugement)이다. 만일 비교와 판단이 여러 번 반복된다면, 그것은 반성(la réflexion)이다. 만일 조각상이 기분 나쁜 감각작용을 느끼면서도 기분 좋은 감각작용을 다시 불러온다면, 이 추억(le souvenir)은 더 많은 힘을 가질 것이고, 상상작용이 될 것이다. 오성은 이렇게 생성된 능력들의 일체이다. (347)
감각작용 전체는 필연적으로 기분 좋거나 기분 나쁘게 한다. 무차별적인 것들[감각작용들]은 없다. 오성의 능력들과 더불어 조합된 이런 특성으로부터, 의지(la volonté)의 능력이 태어날 것이다. 만일 조각상이 기분 나쁘게 감화를 입는 찰나에 추억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기분 좋은 냄새의 추억은 하나의 필요이며, 그리고 이로부터 욕망이 파생하는 경향성이다. 만일 욕망이 지배한다면, 그것은 정념(une passion)이다. 사랑과 증오, 희망과 불안은 이렇게 태어난다. 만일 조각상이 그의 욕망의 대상에 도달할 때, 그리고 욕망의 경험이 만족할 때, 경험이 그의 욕망들에게 어떠한 장애도 발견하기 못한다고 판단하는 습관이 생겨난다. 욕망은 원한다는 것[의욕]을 생겨나게 한다. 이 의욕은 욕망의 대상이 우리의 역량(le pouvour)속에 있다는 관념[생각]을 동반하는 욕망일 뿐이다. (347)
결국 이렇게 후각 기관에 한정된 조각상은 관념들을 추상하고 관념들을 일반화하는 역량(le pouvour)을 갖는데, 예를 들어 여러 변화 모습들에 공통하는 즐거움을 고려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조각상은 수의 관념을 갖는다. 왜냐하면 조삭상은 자기가 겪는 상태들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조각상은 가능한 것(le possible)의 관념을 갖는다. 왜냐하면 조각상은, 자기가 현실적으로 있으면서 냄새라는 것을 그만두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것[냄새]을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각상은 지속(la durée)의 관념을 갖는다. 왜냐하면 한 감각작용을 다른 감각작용으로 대체하면서 조각상은 계속(la succession)의 관념을 갖기 때문이다. 결국 조각상은, 자기가 체험한 감각작용들과 자기가 회상했던 감각작용들의 집합체인 자아(moi)의 관념을 갖는다. 한마디로 후각 기관에 한정된 조각상은 모든 [지각] 능력들(facultés)을 소유한다. 그리고 어떤 한 가지 감관[감각기관]에 한전된 조각상에서 명백하게 마찬가지 이다. (348)
그러나 사람들은, 그 조각상이 자기의 모든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특이한 결과에 이른다. 조각상은 추리한다. 욕망하며 원한다. 그럼에도 외적 세계가 현존한다고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기 고유한 신체도 알지 못한다. 이런 지식에서 감각작용들에게 환원할 수 없는 인식이 있을 것인가? (348)
두 가지 문제를 구별해야만 한다. 첫째 문제는 꽁디약이 글 썼던 시기에 유행 중이었다. 그것은 유명한 몰리뉴(William Molyneux, 1656–1698)의 문제이다.어떻게 우리는 크기와 거리를 지각하는가? 둘째 문제는 꽁디약에게 고유한 문제인데, 어떻게 우리는 사물이 우리 밖에 있다는 것은 인식하는가? (348)
사람들은 어떻게 몰리뉴가 로크에게 문제를 제기 했는지를 안다. 수술 받은 맹인이 촉각에 의해 구별하는 육면체의 표면을 시각에 의하여 연이어 구별하는가? 로크는 아니라고 대답했기에 그와 일치하였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이 이미 보았던 대로, 버클리의 견해였다. 그러나 버클리는 특이하게 문제를 일반화하였다. 투시자(clairvoyant) 그 자신을 위하여, 크기들과 거리들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시각에 의해 암시되었다는 것을 제시하여다. 1728년에 왕립학회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에서, 외과의사인 체셀딘(William Cheselden, 1688-1752)은수술에서 백내장을 걷어냈던 열넷 청소년의 관찰을 출판했다. 이 유명한 관찰은 로크와 버클리의 견해를 전적으로 확정했다. 환자는 대상들이 자기 눈에 “닿아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눈이 크기의 연관들을 판단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기 눈앞에 있는 엄지 손가락의 대상이 그에게는 마치 방 전체처럼 크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자신의 뉴턴의 철학(1741)에서 자신이 동의했던 버클리의 견해와 체셀딘의 경험을 알게 했다. 이리하여 크기들과 거리들에 대한 시각적 지각은 획득된 지각이라는 것이, 촉각만이 이것들을 직접적으로 지각한다는 것이 널리 퍼졌다.(348)
이런 문학[인문] 전반에 대해 꽁디약은 많은 독서를 하지 않았기에(그는 1746년에 시론을 완전히 작성했다 고백하는데(§43), 그는 베이컨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시론의 시기에 로크와 볼테르를 알았을 뿐이다. 그는 당연히 획득된 지각작용의 용어에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그 용어는 인정할 채비가 덜 되어 있다는 것을, 즉 무의식적 판단들이라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시각과 촉각을 연결하는 판단들을 우리에게 의식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가 성공적으로 결론 짓기를, 이것들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말하기를 “눈을 곧 뜨기를 바라고 자들은, 그 자신들이 빛, 색깔, 너비, 크기들 등을 깨닫게 되는 것이 나가 보기에 충분히 적합하다는 것이다. 나는 더 높이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나는 명백한 인식을 갖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체셀딘의 맹인에 대한 주제에서, 그는 그 이후에도 종종 다시 다루었던 이런 비판적 관찰을 행한다. 그의 판단들은 획득된 지각작용들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의 실행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인식 기원에 관한 시론(1746)시론과감각론(1754) 사이에서, 1749년에 디드로는 보는 자들 [눈의] 사용법에서 맹인들에 관한 편지(Lettre sur les aveugles à l'usage de ceux qui voient, 1749)를 출판했다. 그는 몰리뉴의 문제를 다시 다루었다. 그 문제에 관하여, 그는 로크와 꽁디약에 반대되는 두 견해를 인용했다. 체셀딘의 경험은 꽁디약에서 만큼이나 그에게도 거의 입증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수술[조작]이 눈만큼이나 미묘한 한 기관에서 생겨나게 했던 혼란들의 이유에서이다. 환자가 제기된 질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듯이, 그도 확신하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서는 문제 속에 두 가지 구별된 점이 있다. 수술 받은 자는 곧바로 이어서 대상들을 서로 서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촉각에 의해 주어진 대상들을 시각에 의해 재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첫 질문에 관해서, 디드로는 수술받은 눈이 볼 수 있는 무한한 세부사항과 수술받지 않은 눈을 회피하는 세부사항을 주목했다. 그 자신에 의한 시각적 광경은 혼재된 감각작용들으로 혼성[구성]되어 있고, 촉각과 시각의 상응에 대한 경험은 우리 인식을 완전하게 하는데 많이 쓰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디드로는 시각이 본질적으로 촉각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촉각의 도움없이도 극히 세밀한 세부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거기에서 새로운 시각적 지각작용들과 촉각의 지각작용들 사이에 비교가, 따라서 어떤 심정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술 받은 자는 마치 정사각형과 원과 같은 단순한 두 도형들을 재인식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반성은 이런 상응에 관하여 불확실성만을 그에게 줄 뿐일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기하학적 도영들 보다 더 복잡한 대상들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것이다. (350)
꽁디약은 1754년 감각론(1754)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루었다. 그는 스스로 취소했고, 그리고 그는 로크에게 근거가 있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에서 이라고 한다. 아마도 디드로의 반성들에 놀라서, 그는 대상들이 정확한 한계없이 있는 원초적으로 혼재된 시각적 지각작용과 정해진 장소에 위치해 있어서 구별된 대상들의 현실적 지각작용 사이를 구별한다. 이 결과는 촉각에 의해 실행되었던 필수불가결한 분석에 기인했다. 이 촉각만이 시각적 지각작용에서 혼동되어 있는 것을 분간하게 허용해 준다. 따라서 처음 형태들을 알게 하는 것은 바로 촉각이다. 그리고 시각이 형태들을 지각하는 것은 촉각과 연관들 덕분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하게 된 감각작용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완전하게 된] 감각작용은, 버클리에게서처럼, 이 감각작용이 도움을 받았던 촉각적 감각작용들을 전혀 암시 하지 않는다.이 [완전하게 된] 감각작용 속에는 원초적 감각작용 속에 있었던 것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감각작용은 눈을 뜨자마자, “조각상이 우리와 동일한 사물들을 본다. 그러나 조각상은 사물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지 않다.” 조각상은 사물들을 보지만, 그러나 조각상은 사물들을 주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조각상은 사물들을 분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50)
외적 세계의 인식의 문제에 관하여, 꽁디약은 [위와] 똑같이 변했다. 감각론(1754)의 초판에서 그는 그 인식을 촉각적 감각작용들의 공현존에 부여했다. 조각상이 한 팔에 열기와 다른 팔에 냉기를, 머리에 통증을 동시에 느낄 때, 조각상이 이 감각작용들을 구별된 것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만일 감각작용들이 서로 서로 바깥에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리하여 외재성의 인식은 운동에 독립적이다. 그러나 둘째 판본에서(1778년), 그는 또한 흐릿한 촉각적 감각작용들도 펼쳐지지 않고서도 동시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외재성의 용어는 운동 없이 생겨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다.그 용어는, 다른 딱딱한 물체에 의해 우리의 신체 운동이 멈췄을 때, 생겨난다. 이런 이유에서 딱딱함[견고성]은 서로 배제하는 두 사물을 가정한다. 그리고 견고성은 이 두 사물에서만 느껴질 수 있다. 만일 문제 중인 딱딱한 물체가 우리 신체의 바깥에 있는 물체라면, 접촉만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만지는 것이 우리의 고유한 신체이라면, 만지는 부분과 만져지는 부분에서 동시에 접촉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체는 우리 자신의 것처럼 그리고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알려지게[인식될] 것이다. 결국 냄새들, 소리들, 색깔들이 그 자체로 단순한 변모들이나 변양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이것들이 외부 대상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조각상에게 낌새를 알아차리도록 시작하는 것은 다른 감각작용들과 통합된, 촉각의 감각작용이다. 우리로 하여금 감각작용들을 대상들에게 부여하게 하는 경험은 변화하는 강도성(intensité)의 경험이다.이 강도성의 경험은 감각작용들에서 대상들에서 멀어짐과 가까워짐에 따라서 생산된다. 이리하여 외재성의 판단들이 순수 감각작용들로 귀착하게 된다. (351)
4절 꽁디약 (연속) : 과학, 잘 만들어진 입말.
- Condillac (suite): la science, langue bien faite .
감각작용은 모든 우리의 역량들(nos facultés)를 포함한다. 기호들(les signes)의 용법이 이 역량들을 넓힌다. 분석과 언어 사이에 친근성뿐만이 아니라, 분석이 스스로 전개하기를 원하자마자 동일성도 있다. 여기서 또한 꽁디약은 자연에게 많이 부여한다. 최상의 분석적 방법은 자발적이 된 통속적 언어이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기술적(techique) 언어를 가지고, 그 방법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게 할 뿐이었다. “철학자들에 앞서서, 사람들은 실체(substance)가 그 아래 놓여 있는 무엇(ce qui est dessous)과 다른 것을 의미하는 지를, 그리고 사유하다(penser)가 재다, 균형을 이루다, 비교하다(peser, balancer, comparer)와 다른 것을 의미하는지를, 묻지 않았다.”감각해보라 또는 구체적으로 조작해보라, 그러면 입말의 단어들이 합법적으로 의미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351)
따라서 “잘 만들어진 입말”보다 분석을 권하는데 다른 어떤 수단도 없다. 이것이 미완성의 유고 저작에서, 즉 계산들의 입말(1798)에서꽁디약이 하고자 원했던 것이다. 과학은 이미 잘 만들어진 입말일 뿐이라는 그의 격률에 따르면, 이런 입말은 수학 그 자체이다. 그는 손가락을 가지고 하는 계산, 즉 계산의 “자연적” 방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다른 방법들은 수학의 방법의 변형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기획하였다. 사람들은, 손가락들 대신에 기호들로 대체하는 수단을 이용하면서, 진보한다. 기호는 계산과 같은 방식으로 선택되면서 점점 단순화되고, 계산은 점점 더 멀리까지 넓혀진다. 이런 점진적 확장은 다음 방식으로 특징지워진다.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했던 수단들은 알려진 것으로는 첫째 수단들이기에, 이 수단들은 - 만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한 수단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가 추론한다면,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수단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가 이미 행했던 것처럼 - 사람들이 발명했던 모든 수단들에게 필연적으로 인도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를 잘 멈추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무지하거나 또는 충분히 고 하잘 것 없음에도, 우리 스스로 우쭐대기도 하고, 그리고 특히 우리가 커다란 간격들 뛰어넘으면서 발견물들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자 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판단 그 이상을 가지고서, 우리 정신이 결코 아무 것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을 믿고 또 믿게 하는 겸손함을 가져야만 했을 것이다‥… 방법이 발명하는 것은 마치 망원경들이 발견하는 것과 같다(I, 14장)” 분석은 겸손함의 자백이다. 분석은, 가장 정화되고 가장 고양된 방법들이 가장 단순한 방법들의 형식들이라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이런 방법들을 서로 서로들에게 정신 전체가 통과하게 할 수 있다. 결국 전시의 방법은 발명의 방법과 동일하다.
거기에 특히 프랑스에서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19세기 초까지 스스로 발전할 정신의 방향이 있다. 사람들이 이런 자들을 이데올로그들이라 불렀다. 꽁디약에게는 다음처럼 보였다. 즉 분석을 형이상학(정시의 이론이란 의미에서)에 적용하는 것이 어렵지 않듯이 수학에 적용도 어렵지 않았다. 만일 “수(數)와는 아주 다른 것에서, 잘못 규정된 용어들만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우리 입말의 자연[본성]”이었다면 말이다. (352)
V. 샤를 보네 - Charles Bonnet 352
제네바의 자연학자인 샤를 보네(Charles Bonnet, 1720-1793)는 꽁디약과는 독립적으로 영혼의 역량들의 분석할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리고 조각상의 가성을 상상했던 것 같다. 이것이 영혼의 역량들에 관한 분석적 시론(Essai analytique sur les facultés de l'âme, 1760)의 서문에서 주장한 것이다: “우리들은 관념들에서도 분석에서도 많이 다를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가 보기에 저자(꽁디약)가 충분하게 분석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가끔 건너뛰어 갔다‥… 그는 매우 중요한 문제들 젖혀두고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다.”분석을 특성화하기 위하여, 보네는 꽁디약의 이미지와 매우 다른 이미지를 사용한다. 꽁디약은 변형작용의 관념을 대수학에서 빌려왔다. 보네는 자연학자로서 연쇄와 계열의 관념을 사용했다. 그 분석은 “필연적이 아닌 조각상에게 받침대를 형성하게 하지 않는데 있으며,그것의 현존의 모든 고리들을 서로서로 연결할 정도로 연쇄가 도처에 정확하게 연속되어 있는 것처럼 연결하는데 있다.(§71)” 연속성은 동일성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네는, 활동성이 수동적인 감각작용에 완전하게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조각상이 자기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감각작용에게 부여하는 선호(la préférence, 선택)는 조각상이 이 감각작용에 행사하는 행동이다. 선호한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규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쾌락을 탐구와 고통으로부터 탈피는 즐겁고 고통을 겪는 감각작용과는 아주 다른 행동들이다. 그리고 주의는 감각작용과 구별된 [의식적] 역량이다. 이러한 지적들을 통해 보네는 내적이고 직접적인 관찰로부터 잘못 인식된 권리들과 동일시하는 분석의 남용에 반대하는 길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정확하게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발전이 이 세기의 말에 데스뛰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 1754-1836)와 멘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에게 제안할 문제이다. (353)
6절 데이비드 하틀리 - David Hartley
하틀리(David Hartley, 1705-1757)는 자신의 인간, 그의 틀, 그의 의무, 그의 예상들에 관한 관찰들(Observations on Man, His Frame, His Duty, and His Expectations, 1749)에서, 1755년에 감관들, 관념들, 운동들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Explication physique des sens, des idéees et des mouvements)이라는 제목으로 부분적으로 번역된 작품에서, 그도 또한 정신에게 “뉴턴을 뒤따라 분석과 종합의 방법”을 적용하기를 시도했다. 믿음에 관한 관념들의 연합에 의해 행해진 영향에 관하여 로크의 논평들로부터 출발하여, 그는 현상에서 심리학적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전체적 설명을 찾기 위하여, 그 현상을 일반화하였다.
데이비드 흄 이후에 쓰여졌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스코틀랜드 철학자[흄]의 작품과 별도로 나타났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오직 심리학적이고 또한 인식 비판의 문제들에는 낯선 것이다. 그럼에도 보다 한마디로 야심적이다. 왜냐하면 그 작품은 관념 연합적 사실들에 대한 설명이라고 또는 적어도 심리학적 대응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뉴턴의 광학(Optique, 1704)에서 발설된 가설에 따르면, 감각작용은 결국 감각 기관들, 즉 신경섬유들과 두뇌 속에서 포함된 에테르의 진동들에 의해 생산된다. 관념들의 연결은 두뇌 속에서 작은 진동들의 연결을 토대로서 또한 원인으로서 삼는다. 이 작은 진동들은 감관들에 의해 기원적으로 생산된 진동들과 동일한 순서로 재생산되는 경험을 간직한다. 게다가 이 주제는 어떠한 정확한 심리학적 탐구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저술은 감관들, 자동적이고 의지적인 운동들, 언어, 판단 등에 관하여 종종 기발한 여러 관찰들에 의해 소개되어 있다. (353) (14:13, 57NMD)
# 참고문헌 - Bibliographie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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