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추억 - No.2
1965년 4월 어느 따스한 봄날 증기 기관차가기 기적을
울리며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시골서 매일 보았던 커다랗고 시커먼 화통의 기차가
칙칙폭폭 소리를 내고 달리고 있었읍니다.
레일에 바퀴 닿는소리가 덜컹덜컹ᆢ 하며 계속 들려 왔
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도 창가에 기대어서도 먹으면서도
들리는 소리는 리듬이 있는거 같아 그렇게 싫치 않었
습니다..
그리고 서울역에 가까워 오자 부모님이 말 싸움중이
셨습니다.
아버지는 기차표 어디다 뒀냐 하며 어머니는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았냐 며ᆢ
서울에 전가족이 이사오니 아버님은 가장으로서 마음도
급하고 초조하셨나 봅니다
복숭아 농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서울로 오시게 된건
살던곳과 밭이 모두 전주 남원간 국도로 편입되어
할수없이 서울로 오게 된것입니다.
아버지는 임실군청을 상대로 보상비를 더받으려고
불도저가 집앞까지 밀고 들어 와도 움직이지 않셨습
니다.
군청에선 구입 원가로 쌀 50가마니 보상해 준다고
빨리 나가라고 계속 강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불도져가 땅을 헤치며 가는 모습을 보니 신기
하였습니다.
철없이 밑이 평평한 비슷한 돌을 골라 땅을 밀고 가는
놀이를 하곤했죠.
아버지는 2번의 이사비용에 새로운 생활로도 변경도
해야잖냐고 계속 요구하셔 쌀 80가마니 로 합의
하시고 이사중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금액이 크지 않은거 같이 보이지만
65년당시에는 쌀 한 가마니도 무척 중요 했었다
합니다.
전 그때 8세로 제1한강교의 현수철교와 강물 을 내려
다 보며 서울의 분위기를 처음 느낀거 같습니다.
시골 살때는 한강 같이 큰 물줄기도 없었고 이만큼
큰 다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막내동생은 업고 3명의 자식들에게 잃어
버리지 않게 엄청신경 쓰고 사전에 주의 말씀도 많이
하셨습니다
서울역 에 처음 도착하여 주위의 많은 건물과 사람
들이 많이 다니고 차량도 빈번히 지나가고 특히
식당들도 많었습니다.
그때 전차 소형버스 택시등이 얽혀있어 작은 아버지의
안내로 버스를 타고 독립문 을거쳐 서대문으로 이동
했습니다.
아버지는 서울생활에 대한 지식이 없어 서대문 현저동
에 친척이 얻어준 전세방에 입주 하셨습니다
인왕산 밑이 었는데 거기서 보면 정면으로 서대문
형무소가 보이고 길건너 마을인 똥골 그리고 글자
그대로 똥차가 열대 이상이 보였습니다.
아마 주차장이었던것 같습니다
몇 일전 추억을 더듬어 한번 가봤는데 앞쪽은
인왕산 I-PARK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뒷쪽은 녹지화
되어 있었습니다.
첫번째 이집은 시멘트 벽에 검은 기름종이가 지붕에
쳐있고 주인집, 유근이네 우리집이 살게끔 집이좀
길었습니다.
화장실은 집옆으로 재래식 한개 였습니다.
방은 한개에다 방문을 열면 부엌이 있고 연탄 아궁이
에 뒷쪽은 찬장을 놓았죠.
뒷창문을 열면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고있는 얕은
언덕 이었습니다.
서울의 달동네 입니다
그래도 그때 어머니께서 들기름과 소금을 김에 발라
구어주시던 모습과 그걸 맛있게 먹던 기억이납
니다
지금도 비슷한 종류의 김을 판매는 하지만 그때만큼
바삭바삭 하고 고소하지는 않은거 같습니다.
이사온 첫 집은 천정이 기와가 아니니고 기름종이 같은
것이 어서 비올때면 천장에서 후두두 후두두 하고
비소리가 들립니다.
작은 비인지 큰비인지 소리를 듣고 금방알수 있었습
니다.
한방울의 소리부터 조금씩 점차 늘어가는 빗소리, 많이
우수수 내리다 갑자기 정지하는 소리 참 다양 하였 습
니다.
rythm을 배우기에는 정말 좋은거 같았읍니다.
태풍장마철에는 거센 바람이 지붕을 들치듯이 지나
가며 비를 밤새 쏟아부었습니다.
뒷마당 나무 부딪히는 소리와 뿌러지는소리, 어느집
바케스와 세수대야 날라가는는소리, 쏴악 쏴악..
폭포 떨어지는 듯한 소리에 "엄마 괜찮아" 물어볼
정도로 겁이났지만 그래도 이불속 에서 무척 포근
하였습니다.
전 지금도 Pop song " Rhythm Of The Rain " 을 즐겨
듣습니다
내리는 빗소리와 더불어 시작되는 Listen to the
rhythm of the falling rain, Telling me just what a
fool I've been.......
새벽에도 깨어서도 이불속에서 밖을 보지않어도 비가
오는것을 알수 있었 습니다.
그 빗방울 소리가 너무 좋았 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누워서 비오는 소리를 천장에서 들으며 좀더
포근한 맛을 느끼고 싶은데 그렇치 못합니다
요즘은 아파트 에서 살다보니 문닫으면 아무소리 없습니다.
방문 열어 놔야 창을 두드리는 바람소리와 빗방울 이 떨어
지는 소리를 창밖에서 들을수있죠.
그때는 비가 그치고 밖으로 나가보면 나뭇잎사이로 달팽이
들이 기어다니는 모습도 볼수있고 그걸 잡아와 놀고 하였
습니다.
지금은 오염에다 소독 때문인지 서울서 못본지 오래 됬습
니다.
그땐 서대문 형무소 입구쪽에는 영천 에서 청량리 까지 운행
하는 전차의 종점이 있었습니다.
전차가 1930년경부터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 했습니다.
제가 초등3학년때까지 운행을 했네요.
그때 어머니와 전차를 타고 서대문 로터리에서 좌 회전하여
광화문을 거쳐 보신각종도보고 거리를 구경하며 종로
화신백화점에 내려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때는 다른 차들이 전차와 석여서 교묘히 운행 하는거 같
았습니다.
지금도 종로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때의 생각은 아예
않하고 현재의 일에만 열중하니 사람은 미래만 보고 가는 생물
인거 같습니다..^^
지방에서 나중에온 친구들도 전차를 못타본 경우도 많습
니다
대체 교통수단의 발달로 너무 빨리 없어진거 같습니다.
경희궁 국립박물관에 가면 그때 전차의 모습을 전시 해놨습
니다.
추석 설날은 즐거웠습니다
아버지가 장자 이셨기에 집에서 차례를 모셨습니다. 작은
아버지 그외 고향 친척형님들도 오시고 하셨습니다.
빳빳한 새돈으로 세배돈을 받았습니다.
그때 어머님의 한마디 " 보관하고 있다 나중에 준다 "고
말씀 하시고 다걷어 가시고 결국은 손에 쥐어본적이
없습니다..^^
그때 은행에 근무하신 정연이 형님이 항상 방문하셔 주신
새돈은 받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 잊을수가 없습니다.
구정이 끝나 아쉬움을 느낄때면 어머니께서 영천시장에
가셔서 나물및 견과류를 사오셔서 해마다 찰밥을 먹으며
정월 대보름 행사를 하셨습니다.
그땐 대보름이 언젠지도 몰랐었죠. 고마우신 어머니..!!!
지금도 대보름 전에 시장에가보면 그때 먹었던 피마자
시레기 다래나물 취나물 고구마줄기 호박 말린거등을
팔며 땅콩 호두 밤등의 견과류도 보입니다
가장 즐거웠던 일은 인왕산 공터나 형무소뒷편 돼지골
광장에서 가지고 간 깡통을 철사줄로 연결하고 표면에
대못으로 구멍을 크게 뚫습니다.
통안에 불붙힌 나무를넣고 신나게 돌리면 깡통 전체
에서 솟구쳐 나오는 카다란 불빛을 보며 좋아했습
니다
친구 선후배 여러명이 하다보니 열몇개의 불덩이가 주위
에서 돌고 도니 서로 웃으며 황홀해 했습니다
그 외의 일상생활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돼 아이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소변은 어머니가 놓아준 요강이 방끝에 있어 자다
일어나 소변을 보니 아침에는 거의 꽉 차있었읍니다.
싸다 흘리기도 하고 약간넘쳐 걸레로 닦기도하고했죠..
dirty 합니다.
그래서 형과 저는 때때로 밖에서 싸기도 했죠.
아침에는 어머니가 비웠지만 가끔 저나형이 비운적도
있었죠.
참 어려운 생활 이었죠.
하지만 아버님께 감사하는건 열심히 일을 하셔 의식주 는
대충 꾸려가는 형편이었습니다
대변은 밖으로 나가야하니 껌껌한 밤에 학교에서 들은
달걀귀신 이야기도 떠오르고 실제 학교에서는 화장실
밑에서 귀신이 나온다 하여 폐쇄시킨 곳도 있었습니다
겁나고 무서워 어쩔때는 잠자는 형을깨워 망을 보라
했죠.
좁은 방에서 6식구가 갈치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다 발을 넘어가야하니 형 동생의 발도 많이
밟았습니다
그때는 재래식 화장실 이어서 주기적으로 변을 퍼내야
했습니다.
똥차가 길거리에 오면 큰 똥바가지 2개를 멘 아저씨
들이 열심히 퍼서 지고 날랐습니다.
약간휜 막대기를 어깨에 걸치고 탄력을 이용 하여 통
을지고 계단을 뛰어 내려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건강하신 분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직업으로 가장 밑 바닥이 었기에 "너 커서
똥풀레"하는 말도 생기고 하였습니다..ㅎ
하지만 한집의 가장으로서 남이 가장싫다 하는 일을
열심히 하신 고마운 분들이셨습니다
일단은 아저씨를 보는순간 한쪽으로 대피 하여야 합
니다.
학교 갔다오다 계단을 내려오는 아저씨 의 바가지에
부딪혀 얼굴에 변이 튀어 울던 소녀 학생이 생각납
니다 ...
이거 어디다 화풀이를 해야 합니까 ^^
쓰레기차가 오면 으례 연탄재 및 쓰레기 담긴 나무박스
통을 가지고 거리까지 내려가 버려야 했읍니다.
않 버렸단 어머님께 그거 안버리고 뭐했냐고 한소리
듣습니다.
한 아저씨가 종을 딸랑딸랑 치며 마을을 돌아다
니며 쓰레기차 왔다는 표시를 합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재미있게 놀다가도 몇몇이
집으로 달려가 쓰레기 버리러 갑니다.
겨울에는 연탄재가 없어 좀 가벼웠습니다.
얼음언 곳에 뿌려서 다녀야 했기에 편했습니다
그당시 언덕진 비탈길 내지 계단은 연탄재를 뿌리지
않으면 미끄러워 못 다녔습니다
집에는 수도가 있었으나 겨울에는 지대가 높고
얼어서 않나와 마을밑 공동수돗가에서 물통을 들고
빨리가서 줄을 서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새벽같이 내려가 통을 대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지좌지 길게 줄을 선 물통의 모습과 한파에 떨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한두시간 정도는 통을 밀며기달려야 차례가 되었습
니다
외사촌 형이나 아버지께서 물지게로 물을 날랐습니다
가끔 어머니까 나르실때는어머니 얼굴에 땀이 고여있
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외사촌 형도 근처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으며
성격이 밝아 고모 고모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죠.
그때 겨울은 지금 보다 훨씬 추웠고 저는 일이 끝나면
잽싸게 제 방으로 들어 갔읍니다.
창문이 홑 창문 이어서 안쪽으로 하얗게 성애가 끼어
있어 손으로 녹이거나 거기에 글씨를 썼습니다.
성애의 무늬는 매일매일 바뀌어 아름다웠습니다 .
지금은 성애를 볼수가 없는거 같습니다.
연탄을 땟기에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셔 연탄
불을 갈곤 하셨습니다.
그당시 이산화탄소를 마셔 사망 소식도 간간히
들리고 중독 되면 창문을 열고 공기를 환기 시키고
당시는 김치국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저도 사촌형 집에서 자고오다 남의집 문앞에 쓰러져
집에서 김치국물을 마신적이 있습니다..
꿈속에서 잠시 머물다온 아리아리한 기억입니다.
연탄을 시킬때에는 아저씨가 지게로 배달하여 부엌
옆에 쌓아 놓으시곤 했읍니디.
외출시는 한두장을 새끼에 꼽아 배달하곤 했습니다.
초등 학교 때는 당번제로 미리나와 알탄을 가져와
난로에 넣고 불을 붙혔습니다.
그당시 건물이 일제시대에 지어서 인지 나무바닥
이래서 발이 너무시러워 수업내내 발을 비비고
하여도 추웠습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시러운거 같습니다
3학년 부터는 새로지은 건물에서 공부하여 신발을
신어 좀 덜했습니다
그땐 집에서 사용하던 초를 가져와 나무바닦 에 신나
게 문질렀습니다.
바닥이 번질번질 여차하면 자빠집니다.
도시락도 선생님 말씀대로 난로위에 올려놓아 몇십분
후 위치교환은 해주었지만 잘못된 경우는 아래쪽에
계속있어 밥이타곤 했죠.
잘사는 아이는 쏘쎄지 에다 계란 요리등 을 싸와 친구
들에게 한젓가락씩 뺏기다 보면 착한 본인은 먹을게
없었죠.
나중에는 부모님이 알고 선생님한테 얘기 하여 젓가락
질이 줄긴 줄었습니다..^^
그때 도시락을 못싸와 점심시간이면 밖으로 나간 아이들
도 있었습니다.
다행이도 수업끝날 무렵에는 선생님이 커다랗고 두꺼운
옥수수빵을 나누어 주었 습니다.
차후 우유 가루도 주어 목이메어 재채기도 많이 했습
니다.
고맙게도 미국에서 초등학교 에 지원해준 원조였습
니다.
그리고 초등때 월남전 파병이 있어 노래도 많이 불렀고
자랑 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완공한 경부 고속도로 노래고 불렀던 기억이 납
니다.
후일 제가 아파트 뒷산에 만난 강씨 아저씨도 저보다
9~10세 위인데 맹호부대 파월장병으로 수색대에 근무
했다합니다
저는 그분에게 "용감한 아저씨라" 닉네임음 붙히고 대화
할때 가끔 그렇게 불렀습니다.
월남 지도를보니 해병 청룡부대가 그당시 DMZ 부근
최전선 에서 싸웠네요.
초등때 친구들과 마을에서 의협심에 부풀어 신나게
불렀던 노래 두곡을 써봅니다.
맹호들은 간다
작사 유호 / 작곡 이희목
1.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다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2.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 가리까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용사들아
남북으로 갈린 땅 월남의 하늘아래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
3. 보내는 가슴에도 떠나는 가슴에도
대한의 한마음이 뭉치고 뭉쳤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태극깃발 가는 곳 적이야 다를 소냐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청룡은 간다
작사 조남사 / 작곡 이희목
1.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월남의 하늘아래 메아리 치는
귀신 잡던 그 기백 총칼에 담고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며
삼군의 앞장서서 청룡은 간다
2.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해병대
얼룩무늬 번개 되어 원수를 친다
자유 월남 짓밟는 붉은 무리들
청룡이 가는 곳에 어찌 맞서랴
온 세계의 곳곳에 평화 심고자
조국의 명예 걸고 청룡은 간다
경부고속도로의 노래는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 글을 쓰시고 1970년도 7월7일날
나왔습니다
1.아침 햇빛 신선한 푸른 하늘
산 좋고 물 맑은 고을 고을
겨레의 숨결이 배어 든 곳
꿈에도 내 소원 조국 번영
달려라 자주의 길
달려라 부강의 길
천리를 주름 잡는 고속도로
2.어제보다 내일을 바라보는
슬기론 이 나라 자손이다
조상때 못한일을 이루었네
달려라 자유의 길
달려라 평화의 길
3. 빛을 향해 달리는 우리 행진
뒷날의 역사는 증언하리
나약과 빈곤을 불사르고
고난과 시련을 이겼다고
달려라 승리의 길
달려라 통일의 길
역사를 창조하는 고속도로
여름에는 아이스케끼 장사가 통을 메고옮니다. "아이
스케끼"" 아이스케끼" 외치며 다닙니다.
병이나 철.구리및 돈을 주고 사먹었습니다.
처음에는 동그란 모양으로 아마 설탕을 넣은 얼음
이었으나 서서히 길쭉한 타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팥을 조금씩 조금씩 넣어가며 판매 했습
니다.
위생 이야 않 좋았는지 몰라도 시원하고 맛있었습
니다.
돈을 주시며 때때로는 병도 같이주시며 심부름 시키
시던 어머님 모습이 기억 납니다 .
찌는듯한 여름날 어머님은 수박과 얼음을 사오셔서
전식구가 시원한 화채를 해먹던 기억이 많이 납
니다.
그때는주로 냉장고가 없고 얼음 가게가 있어 얼음을
알맞게 구매하셔 새끼끈 에 매달고 오셨습니다.
옆집 아이가 와서 계속 먹고싶다는 표정으로 계속
서 있어 같이 나눠주고 한일도 많었습니다..ㅎ
그때 마을에 곱사아저씨가 가끔 지나가곤 하였는데
아이들이 오원짜리 왕기라하여 놀렸습니다.
저도 아이들 중의 일부 였습니다.
그때 아저씨는 화를내며 뛰어오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후회가 막급합나다.
그 아저씨가 엿장사를 하셨는데 엿을 좀사고 5원이
없어 깍아 달라했더니 계속 요구하여 생긴 별명 이라
알고있습니다.
그당시는 정말 불행한 시기 였습니다
조금 있다 방2개인 기와집으로 이사했죠.
형이 음악을 좋아 하여 그때 LP 판도 사고, 저도 원판
OST는 비싸고 하여 빽판으로 몇장샀습니다.
형이 원판을 많이 사와 저도 같이 듣게 되었습니다.
형 한테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때 유행하던 Pop song 및 경음악은 거의 들을수
있엇습니다.
정말 꿈같은 노래가 많았습니다.
Love is blue, God father,Isadora,Love story, ...
The night Chicago died, If you go away,Stoney...
중1땐가 그때 유명 했던 영화, 크리스 미쳠의 Summertime Killer
를 학교에서 단체로 보러갔습니다.
미쳠의 핸썸한 모습과 그의 motor 타는 솜씨와 복수의 모습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때 OST 곡인 Run and Run 도 지금와 다시 들으니 가슴이 뭉클
합나다. Love Story 도 마찬가지죠.
이런 좋은 추억과 감성을 잃어 버리고 그냥 바쁘게 살아 온거
같습니다.
초등 2~3 학년때는 TV 보러 100원 준비 하고 가곤
하였습니다.
재미 있었던 프로중 하나는 " combat " 였습니다
배우 "빅 모로우"가 주인공 "쏜더스" 중사로 출연하여
2차 대전중 독일군과 싸우는 프로였습니다
이는 우리 입맛에 딱 맞는 pro중 하나였습니다
젊은 병사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전투하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친구들과 산 에서 총싸움 놀이시 응용하곤 했습
니다.
그때 독일군 복장을 처음으로봐서 다음부터
영화에서나 다른프로에서 보면 않좋은 편으로
인식이 들었습니다.ㅎ
의리의 사나이 돌쇠, 김일의 레슬링 및 축구경기를
봤습니다.
마을 친구및 동생들과 집을 찿아가 pay를 하고 좋은
자리 잡으려고 했습니다.
끄땐 패티김 쇼를 매일 방송하여 항상 본 기억이납
니다.
그때 우리나이는 정말 보기 싫었죠
보다 졸려서 헤메이다 메인 때는 정신을 차리고 볼려
했으나 자다가 그냥 온적도 몇번있죠..^^
조금후에 아버님이 동남샤프 티비를 사오셔서 집에서
어머님 좋아하시던 "여로"및 많은 프로를 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님은 휴일도없이 평생일만 하셨습
니다.
아이들 에게도 할아버지의 일한얘기를 알게 모르게
몇번헀습니다.
아버지는 군에서 GMC를 운전했던대로 운수업을 하셨
습니다.
당시 기아에서 만든 삼륜차 3.4대을 운영 하셨습
니다
그당시는 보험이 없어서 운전수 들이사고를 내면 보상비
신경 쓰느라 바쁘셨던거 같습니다
사고도 간간히 있어 어머니 하고도 이야기 하시고 걱정
도 하시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후일 4륜으로 빠뀌면서 차값이 형편없어져 손해가 컸다
고 합니다.
알고는 계셨지만 미리 팔어야 했다고 말씀하십
니다
아랫 집 친구의 아버님은 기관사 였습니다
놀러가서 사진을보니 기차 운전석 자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친구가 부러웠습니다
시골서 매일 보던 검은 기차가 다시 생각났습
니다
또 한 친구는 아버님이 경찰 이셨습니다.
모자 앞의 경찰 마크도 보니 부러웠습니다
고물장수도 계셨고 막일꾼 등 다양 하였습니다
그래도 친구끼리의 관계는 그것하고는 상관없이 항상
즐거 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영천시장에 다니셨습니다
가끔 저보고 가자해서 따라갔습니다.
장을 보시고 저에게 짜장면을 사줍니다
그 다음 서대문 로터리 화양극장으로 같이 가서 영화
를봤습니다.
어머니도 30대이시고 그당시 여성 대부분이 그렇듯이
영화 프로를 사전에 보셨다가 장에 가는날 맞춰 보시는
거같았습니다
장바구니 들고 혼자가시기 뭐하니까 저를 데리고
가신거 같습니다.
그때 본 영화가 하숙생, 서울이여 안녕, 여자의
일생, 미워도 다시한번 등등.. 인거 같습니다.
어머니는 영화를 보시고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 하며
좋아 하시는거 같았습니다.
그 당시 남정임. 문희. 윤정희 를 많이봐서 정말 아름
다웠습니다
저도 그 배우들의 미모와 연기에 반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됬습니다 ㅎ
배우 남정임의 한컽에 반하면 마치 중독들린것 처럼
그리워 했습니다
그녀는 아깝게도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거같습니다.
나이에 비해 너무 빨리 본거같아 여성에 대한 정과
아름다움을 조숙히 느끼게 해주신 어머님 감사합
니다..^^
지금은 윗 사진에서 보니 " 처녀의 조건" 예고 하는거
같습니다..^^
그때는 운동 으로는 축구및 레슬링이 인기 였습니다.
이회택, 차범근, 김재한 ,김진국, 김호곤 이세연 골키퍼
등 너무 좋아 아이들과 서대문 형무소뒤 되지골로 여차
하면 축구를 하러가 신나게 뛰었죠.
그 당시의 소년들은 다 그랬을 겁니다.
지금도 붉은악마( Red devil) 정도는 안되지만 지금도
축구 경기하면 매일 봅니다.
레슬링도 남의집에 놀러가 다리꺽기 당수 헤딩을 하고
놀았죠.
그땐 어머니께서 허락하셔 태권도장에 다녔읍
니다.
관장님의 기압 하에 한동작 한동작 열심히 배웠
습니다.
제가 그때 2년정도 다닌거 같습니다.
저는 초단인 검은색 까지 땃습니다.
지금도 잊을수 없는것이 띠의 color 였습니다.
흰색. 노란색. 청색 . 붉은색. 최종 검은색까지 도복을
가지고 운동하러 갔던 기억이 생생 합니다
특히 좋아했던 색인 청색이나 붉은색 띠를 가지고
2층 도장에 오르 내리던 기억과 대련 기억을 잊
을수 없습니다.
초단을 따자마자 어머니가 갑자기 중지를 시켰습
니다.
제가 무척 좋아했기에 어머니께 더 배우겠다고, 밥도
굶어 가며 엄청 떼를 썻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 의해 어쩔수
없이 멈췄 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 나옵니다.
보통 어머니는 저의 부탁을 99% 들어 주시고 하셨는데
이해 할수가 없었습니다.
후일, 6촌형이 태권도 고단수 인데 부천에서 깡패 두목
으로 있었고,그런 소릴 들으시고 그렇게 반대 한것입니다.
그 형님도 저 한테는 인정이 많으셨고 그 이후에도 잘
대해 주셔 고마운 형입나다.
어머니,그때 "계속 배웠으면 지금쯤 고단자가 되어 현대
사회를 살아 가는데 훨씬 유용했을 텐데요" 하고 간간히
생각해본다.
그때 요괴인간, 손오공, 아톰, 은하철도999 및 플란더스
의개 인기 있었습니다.
후일 알고 보니 일본게 많았습니다.
animation 쪽 에는 상당히 실력있는 나라 라 지금도 생각
합니다.
그때는 공부하고는 담을 완전히 쌓고 안중에도 없
었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알게 모르게 아이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말하는것을 들어 도움이 많이 되었습
니다.
사십몇년이 흘렀지만 그래도 시골서 막올라온 어린
촌놈 눈엔 1학년때 10반 강영숙 선생님의 얼굴이
너무 아름답고 잘해주셔서 아직 까지 기억합니다
어머니가 한번 학교에 다녀가신후로 성적이 "수"
3과목 "우" 4과목 "미" 2목 의 최고 점수를 주신
4학년 2반 최준식 선생님을 기억 합니다.ㅎ
이 성적은 초등사상 최고의 점수였습니다.
선생님 그립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때 잊을수 없는 게임은 망까기(비석치기) 였습
니다.
주위의 기와장을 네모 낳게 갈아 7~8m 거리앞에
세워 두고 넘어 트리는 것입니다
우린 열명 이상이니 5명씩 2팀으로 갈라 상대방
비석(망)을 쓰러트리는 것입니다.
4명이죽고 1명이 다섯개의 비석을 다 쓰러트리면
5명 전체가 다음 단계로 넘어 갑니다
실패하면 공수가 바뀝니다
1차는 멀리 던져 비석 쓰러트리기, 2차는 비석 던진
후 외발로 맞추기 다음은 발등으로 하는 발등치기,
무릎에 끼워 하는 무릎치기, 배위에 올려놓고하는
배치기, 어께에 올려놓는 어깨치기, 머리위에 올려
놓고 하는 머리치기 ...
전부 성공하면 더 어려운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 하
기도 하였습니다 ....
이때 손은 사용할수없고 그대로 7~8m를 걸어
상대방 비석위에 떨어트려 쓰러 트려야 합니다.
온몸을 써서 운동할수 있고 팀의 조직력을 키울수
있는 멋진 운동 입니다.
다마치기 깔빼기 으치니쌈 알령구리 매일했죠.
삼각형에서 남의 다마를 밀어내어 따는기분 이란,
쌈치기 에서 왕창 따서 검은 신발 주머니에 넣는
기분이란 ..
어쩔 때는 많이 딴 다마를 10원에 3개가 판매도 하
였습니다.
돈의 맛을 처음 안거 였습니다..ㅎ
그때 어릴적 친구들과 뛰놀던 기분을 어떻게 표시
합니까 ..^^
요즘 아이들 과는 완전 반대죠. 공부에 시달리는
요즘 애들이 안돼 보입니다
거기다가 딱지 먹기, 딱지도 둥근게 있었고, 네모난
종이가 있어 딱지에 표시된 계급별로 해서 뒤집어서
따먹는 것 이었습니다.
그때는 칼라로 그려져서 진도개 원수서 부터 시작
하여 딱지마다 별이 엄청 그려져 있었습니다
또 손으로 만든 방석딱지도 있어 힘차게 쳐서 뒤집
어야 먹을수 있어 팔운동 정말 알게 모르게 열심히
했습니다.
밤에는 야간등이 켜진 담벼락 옆서서 묵찌빠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
그당시는 지면 서열이 바뀌는 게임이 었죠
겨울에는 손이 심하게터서 등껍질에서 피가날 정도
로 놀았습니다
담 벼락은 바람을 막아주어 밤에도 놀러나온 친구
들과 말타기 게임도 하곤했습니다.
선두 말이 계속 가위바위보 에서 지면 업드린
말들은 힘들어서 잘하라고 불평하곤 했습니다
그때 수명의 기수들이 멀리부터 뛰어와 사정없
이 탔었죠..
말들 허리부러집니다..ㅎ
그래도 그때 철없이 걱정없이 친구들과 뛰어 놀던
때를 잊을수 없습니다.
부분 부분 철거되어 다른곳으로 이사가고 점점 헤어
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역촌동 뒷편 신사동까지 걸어가 축구도
하고 그랬으나 중학생이 되서부터는 어려워 졌죠
그 당시 많은 거리를 걸어가고 오고 하였습니다.
인왕산은 정면으로 해서 올라 갔습니다.
아가리 바위를 통과 해서 아슬아슬히 바위에 찰삭
붙어 손으로 밀면서 정상 장군바위 까지 올라 가기를
엄청 했습니다.
아마 떨어 지면 사망 일겁니다.
이쪽은 아직도 위험 하여 등산 통제 구역 입니다.
또 우회 하여 해골바위를 통과 하여 올라가서
머리에 신갈나무 숲가지로 무장을 하고 총싸움
등을 하고 놀았죠.
인왕산 과 안산이이 주 놀이터 였습니다.
소총도 나무를 대고 못을 밖아 멋있게 만들었습
니다.
그 당시는 따발총이 좋아 고무줄(총알)을 3개를
걸고 방아쇠 를 서서히 당기면 하나하나 발사되어
파리 도 맞춰 죽입니다
나머지 많은 고무줄(총알)도 총열과 방아쇠
의 장착 고무줄에 걸고 다니며 놀았습니다
장검도 긴 나무를 깍어 만들었 습니다
의리의 사나이 돌쇄처럼 열심히 칼싸움을 하였
습니다.
혁띠 내지는 헝겁끈에 차고 다니며 놀았습
니다.
저는 무명의 쌍칼찬 무사가 좋았습니다
손가락에도 맞아 멍이들고,가끔 머리에 맞아
무지 아퍼도 열심히 칼을 휘둘렀습니다
5학년 정도에 플라스틱 칼이 칼집과 더불어 나왔
으니 멋은 있었지만은 약해서 자주 구부러졌습
니다
4학년때 부턴가 화약을 넣는 총이 판매 돼어
그거 한자루 갖는것이 소원이 었습니다
38구경 경찰이 사용하는 model 이 나왔는데
상태는 형편 없지만 화약을 넣고 쏘니그 소리도
들을만 했습니다.
붉은 종이위에 조그만 화약이 동그란 모양
으로 한발씩 밑으로 연결 되어 있는 좁은 띠
모양 이었 습니다.
봄 이면 꽃이 많이 핍니다
꽃을 따서 거꾸로 들고 꿀을 많이 빨아 먹었
습니다
꿀벌만 먹는 것이 아니고 어린 우리들도 같이
먹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꿀도 비쌌고 간식거리도 적다 보니
산에 가서 아니면 거리에서 달콤한 천연의 맛을
본거 같습니다.
사루비아 꽃이 제일 달콤했던거 같습니다
그때 누가공부 하라는사람도 없었고 다만 방학때
되면 통신표 때문에 몇일전부터 어떻게 하지 하면서
걱정을 엄청 했었죠.
방학 당일 한번 혼나면 모든게 해방이었죠..
개학 하면 준대는등 거짓말 해가지고 2~3번 지나
갔으나 도장을 몰래 찍느라 애먹었죠..^^
참 걱정도 가지가지, 인생사는게 쉽지않았습니다
..ㅎ
하루는 축구하고 일이 있어 혼자 오다 길을건너려고
서 있는데 무악재 고개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
오던 우유 배달 아저씨에 부딪혀 나자뻐졌습니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엎어져 헬떡거리고 있었는데
주위에는 아저씨들이 빙둘러 서서 오뉴월 똥개보
듯이 구경만 하고 있고 부축해주거나 괜찮냐고 물어
보는 어른한명 없었읍니다
자전거 타는 아저씨도 간신히 일어나 쨉싸게 가버리
셨습니다
조금 있으니 정신이 들어 집으로 왔습니다.
어우, 그때 섭섭한 마음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때 심한충격에도 숨을 못쉬게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운동장 가고 올때면 항상 무악재 길을 건넜습니다.
2 개의 길이 있었는데 변전소 옆길과 바로위 마을길
이었습니다
마을길로 가면 대형 철탑이 있는 공터로 지나갑니다
어린 친구 십여명이 철탑위로 올라가 가장 높이 올라
간 친구에게 "무섭지 않냐며.."
물어 보곤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거기서 떨어 지면 바로 사망이었습
니다.
인왕산도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손에 땀을쥐며
오르내렸던 친구들 이었기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아...! 용감했던 어린시절 입니다.
공터에서 해골및 뼈다귀를 많이 봤습니다.
또 발굴현장에서도 트럭이 와서 실고 갈정도로
많았죠
그 당시는 서대문형무소 무연고 죄수와 6.25때 죽은
이들 인가 생각합니다.
아주 가끔 간수들이 기다란 수레에 시신을 가져와
묻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목사나 신부님도 오셔서 기도를 하는것 같았습
니다
공터를 내려가면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겨울에
많이 놀았습니다.
또 거기서 스케이트 타던 소년을 구해준적도 있었죠
온도가 올라 질퍽질퍽한 얼음위에서 타다 변두리로
미끄러져 물에 퐁당하여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
습니다
제가 긴막대기를 구해와 엎드려 손에 닿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결국 그소년은 그걸 잡고 간신히 나올수 있었습
니다
지금 생각 해도 생명을 구해준 아주 좋은일 이었
습니다..
ㅎ
여름에도 사람들이 낚시도 하고 간간히 수영도 하였
습니다
그때 익사해서 가마니로 덮어 놓은분 옆에서 통곡
소리도 들리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연못에서 죽은 사람이 해마다 몇 명씩 생기
니 귀신이 물속에서 끌어 당긴다는 말도 있었습
니다.
그래도 해마다 들리는소리는 "나는 문제 없어"
내지는 "이 정도는 수영 해서 왕복은 할수 있다"
라는 자랑뿐 였습니다 .
인간사는 이렇게 반복 되는 모양 입니다.
물도 녹색 이낀 푸른색으로 상당히 큰 연못이 었습
니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여름에는 낚시 수영을 겨울에도
들어가 썰매나 미끄럼 타기를 했습니다.
그 당시는 놀이 문화가 무척 열악한 때였습니다
운동장에는 항상 사람이 많 았습니다.
주변 동네의 모든 분들이 모여서 운동을 하죠
초등생 중등생 고등생 및 어른들도 공놀이를 하셨죠.
운동장 상당히 컸 읍니다..
돼지 우리는 한쪽에 있었고 그 앞쪽은 서대문형무소
의 높은 뻘간 담벼락이 세월애 바래 길게 늘어서 있었
습니다.
지금은 군부대가 들어서 있습니다
그때는 시골의 풍경이 좋아 혼자 또는 친구 한두명
과 북한산 계곡에 가서 시골길을겄고 또 삼송리
까지가서 논길을 한참 걸었 습니다.
그리고 일산 까지 가서 들길을 거닐며 하루종일
그러다 왔습니다
한번은 오는길에 잠이 들어 남산 뒤의 금호동 까지
가서 차비가 없어 남산 방향을 생각하며 걸어
오기도 했습니다.
와보니 깜깜한 밤이 었고 너무 배가 너무 고팠습
니다.
초등때 가장 즐거운 날은 소풍가는 날이었습니다
소풍은 북한산성 시냇물 내지는 바로뒤의 안산이
었습니다
소풍 전날과 당일은 기분이 들떴습니다.
어머님이 시장에 가셔서 김밥 재료와 칠성사이다
음료병을 사다 놓으셨습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며 잠도 잘오지
않었습니다.
가방을 메고 어머님이 주신 용돈을 챙긴다음 반별
로 서울여상 앞에서 만원버스를 타고 북한산으로
갑니다
저의 초등교와 서울여상은 무악재길을 사이에두고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은 바로위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라 좋
았습니다
어릴적 줄을 서서 선생님 따라 가며 앞뒤 친구와
즐겁게 얘기 하며 걷던 길이 그립습니다.
완전히 비포장 시골길 이었죠.
어느 햇빛이 내리쬐는 날, 가로수들이 자기 모양
을 뽐내는 시골길 에서, 철없이 즐거워 하며
걸어가던 친구들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지금은 apt및 상가가 즐비하고 길이 포장되어
있어 그때의 분위기를 찿기는 힘든거 같습
니다
한번은 진관사를 가는데 비가오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비를 맛으며 기자촌을 통과하여
한참 걸은거 같습니다.
진관사 옛길을 따라 아이들이 줄을 서서 올라
가던 모습이 아름답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5월5일에는 운동회를 많이 하였습니다
5월은 푸르구나 오늘은 우리들 세상이
었습니다
앞쪽 에는 안산과 뒷쪽은 인왕산의 모든
초목들이 연록색을 고 학교옆 동산에도
푸릇푸릇 하였씁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도 가끔오셔서 보시고 박수를
치시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보통 학교 갈때는 어머니가 싸주신 양은도시락
과 김치병을 거의 모든 책이 꽉 차있는 가방에
넣고 갑니다.
시간표를 본적이 없어 항상 무거웠습니다..ㅎ
비가 오면 비닐 우산을 챙겨 무악재고개를 넘어
학교로 갑니다.
바람 불면 우산이 뒤집어 지는것은 일도 아닙
니다.
다시 열심히 폈으나 또 뒤집어 지기 일수였죠.
어쩔때는 인왕산 뒷길로 로 넘어서 갔습니다 .
많은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달동네 산길 이
었습니다
그리운 초등 등교 길 이었죠
그때 계란 후라이를 깔아 주는 날은 너무 고마웠
읍니다.
그때도 어머니는 무척 고생 하셨습니다.
막내 동생을 거기 에서 나아 자식을 5 남매나
돌보느라 힘드신거 같습니다.
다른 부모님들도 먹고 살냐 애들 돌보랴 마찬
가지로 힘들었죠 .
간간히 만화방 에 종종갔습니다.
돈이 없을시는 어머니 돼지 저금통에서 한두번
꺼내다 어머니 한테 들키고 말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도 크게 야단 치시지는 않었습
니다.
라면을 하나 사가지고 스프를 넣고 부수운 다음
만화보는게 커다란 기쁨이 었습니다.
그때 권웅의 "격전장의 핀꽃" "돌아오지않는
병사" 외 모든 작품," 007 우주 에서 온 소년"
..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권웅의 작품들을 보며, "다함께 저
능선을" 을보며 본인도 참여 인물 처럼 생각
하여 흥미진진했고 거의 전권을 보았 던거 같습
니다.
초등 졸업식날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끄때는 이름 모를 찍사 아저씨께 부탁하여 여기
저기 폼을 잡으며 많이 찍었습니다.
친구들과도 어머니와도...
그 아저씬 사진을 보내 주지 않었습니다.
아마 빈 카메라로 폼만 잡으신거 같습니다
어머니는 돈을 당시에 다 지불 하셨습니다
지금도 섭섭한 생각이 듭니다 ....
전 6년을 다니며 공부는 못했지만 개근상
을 발었습니다
한번의 지각도 결석도 없었습니다.
겨울 추위에 몸살이 걸려도 아픔 몸을 이끌고
바람부는 무악재 고개를 넘었습니다.
몸이 휘청거리고 어지러웠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약을 먹어도 발도 시럽고
몸상태가 말이 아니 었습니다.
그거 생각하면 지금도 고통이 느껴 지는거 같
습니다...ㅎ
그 땐 학교 빠지면 안되는 걸로 알고있어
힘들어도 나가곤 했습니다.
내 친구들도 개근상은 거의다 받은거 같읍
니다.
집에 오면 이불을 덮고 바로 눕습니다
그 때의 기분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죽도 끓여 주시고 약도 먹여
주시고 신경을 쓰셨습니다
저는 소형 라디오를 켜놓고 그당시 유행하던
배호,남진,나훈아,이미자등 .. 노래를 듣고
좋아 했습니다
오동동타령, 불효자는웁니다, 목포의 눈물,
아마도 빗물이겠지, 기적소리만,이별이
주고간 슬픔,뜨거운안녕,돌아가는 삼각지,
장충단 공원,...
너무 많습니다.
저의 모교는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안산초교 였습니다
1971년 30회였으니 지금은 73회 입니다.
오래된 학교 입니다.
1936년 홍제공립 보통학교로 인가 받았다
합니다
인왕산과 안산은 꿈의 놀이터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곳 입니다
창원 친구의 말때로, 경복궁을 지을때 무학
대사가 인왕산을 등지고 북악을 좌청용,
목멱(남산)을 우백호로 하자 했는데 정도전
이 궁궐은 남쪽으로 해야한다 하여 지금
처럼 되었습니다
무학의 말대로 경복궁이 동쪽을 향 했다면
우리가 일본을 지배 하며 조공도 받지 않았
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정조때 화가 정선도 "인왕제색도" 도
그리고 "안현석봉" 도 그리고 참 역사적
으로도 배울게 먾습니다.
안현석봉은 안산의 저녁 봉우리에 피어
오르는 봉화를 그린것입니다.
두 산을 그리 올라 내리듯 만약 학교가
네팔 안나푸르나 (8,091m)산중에 있었다면
젊은 호기심에 올라 갔을것 입니다..ㅎ
그리고 중등 가기전 에는 같은동내 친구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거 같습니다.
그 친구 이름이 재성이 입니다..ㅎ
그 녀석도 저를 좋하여 많이 만나고 하였습
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동성애도 좀하는 때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녀석은 저를 바위 큰데다 눕히고 자기도 잠시
누웠습니다
자기 집에서도 같이 이불속에 누워 이야기를 했
습니다
저도 그때 그 친구와 있는게 좋았습니다.
친구 누이가 문을 열고" 야..! 니들 거기서
뭐하냐고 말도 했습니다....ㅎ"
그 친구는 잘 살아 집이 좀 컸습니다.
나중에 가보니 그 녀석도 멋 적은가 저를 피하는
거 같았습니다..
자식, 정신적으로 그럴수 있지..
뭘 그걸가지고 그래..^^
저는 사는 분위기가 시골이 한적하고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과수원 이사 오기전에는 오수밑의 양선부락 에서
어머니가 방아간을 하셨고 아버지는 군 제대후
남원 정기화물 운전사로 근무할때 였습니다
원래 고모는 일찍 돌아가셨고 제가 태어 났을땐
제2 고모 였습니다.
아버지는 고숙을 믿고 그 당시 과수원을 쌀50
가마니에 구입하셨다 합니다
그러나 일년 반만에 국도계획이 나있어 공사 예정
이었습니다
고숙은 과수원 소개시킨 댓가로 쌀 몇 가마니를
받았다 합니다
제가 지금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원 주인이 얼마나 애타게 부탁 했는지 몰라도
매제 한테까지 그러는건 아닐거 같아서요
하기야 친 고모가 돌아가셨으니 어떻게 보면
막말로 매제가 아니었죠
하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대학때 까지도 고숙고숙 하며 따랐으니
까요.
저는 그때 까지도 그런 내용을 모르고 고숙집에
들르고 사촌형을 좋아했습니다
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저를 모두들 좋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버님께서 복숭아 농장을 하시면서 저는
참으로 연분홍 칼라에 반했고 고숙덕에 서울로
올라와 살게된것이죠.
아버님 말씀이 도로가 않났으면 거기서 계속 살았
을거라 말씀 하십니다.
부모님도 가족들도 그때가 행복해 보였습니다.
저도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해서 그런지 몰라도
서울 생활의 추억도 있지만 시골 살때가 마음이
더 좋았습니다.
우리의 지킴이 누렁이도 옆에 있으니까요.
그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서죠
그러나 변하지 않은건 큰 시냇물 입니다.
그때의 물이 지금도 흘러가는 것 같았읍니다.
옛날 낚시하고 그물로 고기를 잡았던 곳의 정자는 그대
로 서 있었습니다 .
옛 정취를 말해주듯 시냇물이 흐르는 작은산 바위가에
고즈넉 히 서 있었습니다 .
기와에는 잡초가 자라나고 기둥은 낡아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거 같았습니다.
가슴이 찡 하여 그때의 철없고 행복한 어린시절이 생각
납니다.
그때 잡은고기를 그릇에 담으며 형들은 계속 그물질을
하였습니다
세월이 가져다준게 뭡니까 .
삶의 편리성 입니까..
부의 축적입니까 ..
가는 세월 어쩔수가 없었지만 너무 아쉽습니다 .
방앗간도 그때 철거됬고 학교는 텅빈 폐허의 건물로
남어있어 한번 들어가 보았습니다.
30~40년전 모습을 그대로 본다는것도 기뿐일이었습
니다.
옛날 그림에 학교 모습이 떠오르질 않아 애먹었습
니다.
그림은 못그린 니다만 그때의 모습이 생각나서 생각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기차길도 고가 ktx 선로로 변경되어 시냇물 왼쪽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증기기관차에서 고속열차로 변경되어 이삼백 키로로
달릴질 모르지만 옛날의 그때느꼇던 전원의 멋과
분위기는 느낄수없는거 같습니다.
그러나 철거되지않은 좌측의 복숭아 농장은 옛모습
그대로 복사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몇년전부터는 전주 순천간 고속도로가 생겨 어머님
산소갈때는 자연스레 이길로 달리다보니 옛길을
이용치 않습니다.
실제 고속도로는 현대식으로 시간도 단축되고 좋읍
니다만 길을 달릴때 주위의 아스러한 맛을 느끼지
못하고의 오수로 다이렉트로 갑니다.
그래도 오수읍내는 발전이 더딘거 같습니다.
주위에 다방도 몇개있고 건물도 낮고 조그마한
읍입니다.
식사를 하고 원동산 의견비를 둘러보고 고향으로
갑니다.
몇 년동안 남는시간을 이용해 팔순의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부터 해서 맛있는 식당 그리고 야외
로도 종종 모시고 나갔읍니다.
대화할 시간도 충분했고 그때 제가 부모님께 잘못
했던 일을 사과하고 또 사과 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한거 있으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커오며 어머님 말씀 않들은 일 심지어는 고등때는
말대꾸했던일 엄청 잘못하였습니다.
그때는 전 참 나쁜놈이 었습니다
그때 누워서 " 저것도 자식 이라고" 하시며 이라고
울음을 보이시던 어머님 얼굴이 떠오를때 마다 가슴
이 답답 하였습니다.
지금 팔순의 아버님이 저한테 신경 쓰시듯이 자식은
평생 짐덩어리 라는말이 맛는거 같습니다..
그래도 없는거보다 있는게 낫다고 얘기들 많이
합니다.
제가 아이때 돌아 가셔서 거의 기억이 없는 할아버지
와 할머니외 그외 친척들까지 제가 모르는건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주십니다.
어쩔때는 왜 그걸 알려고 하냐 물어보면 "아이들 에게
말해주려고요" 합니다.
그럼 아무말 않하시고 말씀 하십니다.
깜삼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