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가 이슬비가 되어 내리고 있는 공항에서 도
꾜행 대한항공이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한 것은 오전
8시 5분경, 박영준이 지닌 짐이라곤 며칠 전 새로 산
샘소나이트 서류가방 한 개뿐이었다.
오전 10시 5분, 일본의 나리다 국제공항에 내린 박
영준은 곧바로 공항로비에 나와 있는 노스웨스트 항
공사의 데스크에서 서울에서 미리 사둔 표로 오후 3
시편 서울행 좌석을 예약했다. 그 다음 공중전화로
긴자의 도뀨호텔에 예약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도착
을 알렸다.
모든 절차를 마친 박영준이 게이세이 전철편으로 도
꾜의 우에노역에 내린 것은 그로부터 1시간 40분 뒤
인 오전 11시 45분이었다. 그는 길고 우중충한 지하
도를 빠져나와 오까끼마찌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
다. 좁고 번잡한 오까찌마찌 시장은 도꾜도 내에서도
물건값이 싸기로 이름난 재래시장이었다. 그 시장을
가로질러 나가면 지하철역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각
종 상품을 덤핑 판매하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오래 전 박영준은 독일로 유학 가기 전에 먼저 일본
으로 건너와 견문을 넓힐 겸 두어 달 도꾜에 머문 일
이 있었다. 그 때 그가 기기하던 작은 비즈니스 호텔
이 우에노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음식값 비싸
기가 가히
세계적인 도꾜 한복판에서 하루 세 끼를 꼬박 사먹
어야 했던 영준은 그때 싸구려 음식점을 찾아 역 부
근 일대를 안 가본 곳이 없었다. 때문에 그 주변 지
리는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오전인지라 아직은 한가한 편인 시장 골목을 빠져나
온 박영준은 전철역 네거리를 건너 일본 전국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진 덤핑 상점 다께이야로 들어섰다.
싸구려 물건을 사기 위한 소매상들은 물론 각지의 지
방 사람들까지 몰려드는 상점은 언제나 없이 붐비고
있었다.
박영준은 한달음에 3층으로 올라갔다. 30명도 못 되
어 보이는 건물이었지만 1층의 식품부를 비롯해 5층
가구부에 이르기까지 쌓아 놓은 물건들은 그 종류와
양이 엄청났다. 전날, 도꾜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물
건을 사거나 그렇잖으면 무료한 시간 심심풀이로 자
주 들르던 곳인 만큼 어느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도 훤했다.
그 때보다 조금 더 넓어진 듯한 3층은 기성복을 비
롯해 넥타이, 구두,내의 등 일습을 갖춘 매장이었다.
박영준은 체크 무늬가 큼직한 컴비 상의와 거기에 맞
춰 입을 바지를 산 다음 핑크색이 엷게 들어간 와이
셔츠와 단조로운 무늬의 넥타이까지 샀다.
쇼핑을 끝낸 그는 다른 물건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곧바로 가게를 나왔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우에노역까지 온 그가 오후 1시 출발의 게이세이 전
철에 뛰어올랐을 때가 5분 전이었다.
나리다 공항에 도착한 박영준은 지체없이 대합실 로
비에 있는 무인수하물 보관함으로 가 서류가방을 집
어넣었다. 가방을 넣기 전 서울에서 산 가발과 안경
을 꺼내 다께이야 쇼핑백으로 옮겨 담았다. 그가 출
국심사를 거쳐 탑승구로 달려나왔을 때 스피커에서는
최종 탑승 요망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코먹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비나 눈은 오지 않았지만 잔뜩 찌뿌린 날씨가 걱정
스러웠으나,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해 주었다. 박영준
이 가진 짐이라고는 다께이야 상점명이 인쇄된 큼직
한 종이쇼핑백 한 개뿐이었다. 비행기는 정시보다 10
분쯤 늦게 김포공항에 닿았다.
사람들을 앞질러 그는 제일 먼저 통관수속을 끝냈
다. 시계는 5시 30분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박영준은
귀빈실 쪽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공항
청사 안에서는 가장 한적한 곳이 그 곳임을 그는 미
리 계산해 두고 있었다.
가장 안쪽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들고 온 쇼핑백에
서 일본에서 산 양복과 와이셔츠, 넥타이를 꺼내 바
꿔 입었다. 입었던 옷들은 차곡차곡 접어 백 속에 담
았다. 아무도 없는 세면기 앞에서 가발과 안경까지
썼다. 이윽고 화장실 거울 속에는 박영준이 아닌 전
혀 다른 모습의 신사가 한 사람 서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박영준은 태연한 걸음걸이로 밖으
로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탄 그가 이재성이란 이름으
로 예약, 요금까지 선불해 두었던 P호텔앞에서 내린
것은 오후 7시 10분 전이었다.
프론트 직원은 예약명부를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숙
박 카드를 내밀었다.
외국에서 온 여행객이 아닌 다음에야 신분증이나 패
스포트 제시를 요구하지 않는 관례에 고마워하며, 박
영준은 숙박 카드에 투숙 시간만 써 넣은 다음 내주
는 룸키를 받았다.
1305호실. 창 밖으로는 남대문 쪽 야경이 한눈
에 들어왔다. 넥타이 매듭을 조금 늦춘 박영준은 수
화기를 들었다. 외부용 다이얼을 누르는 그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 듯했다. 신호는 곧 떨어졌다. 그는 또박
또박 일곱 개의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끝이 갈라지는 듯한 묘한 여운의 석혜리의 음성이
고막에 와 닿았다.
영준은 순간 훅하고 숨을 들이켰다.
"접니다, 영준."
"아니, 오늘 일본 간다고 들었는데 안 갔나 보지?"
"날씨가 나빠 못 갔습니다. 지금 혼자 계세요?"
"아니, 왜 아줌마하고 나뿐인데."
"지금 옆에 아무도 없어요?"
"그래, 나 혼자 있어. 왜 그래?"
자못 의심스럽다는 목소리였다.
"잘 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쩔까 해서죠.
저, 제가 지금 시청앞에 와 있는데 이곳으로 좀 나으
셨으면 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영문을 알아야 나가든 들어가
든 할께 아냐?"
미심쩍고 귀찮다는 어투였다.
"제가 염려하던 일이 드디어 벌어진 것 같아요. 지
금 아버지와 그 여자가 호텔방으로 함께 들어갔습니
다."
"뭐, 뭣? 아버지가 그 여자와 어쨌다구?"
"같이 호텔방으로 들어가셨다구요. 제가 우연히 앞
을 지나다 두 사람을 보고 따라와 봤더니 방으로 들
어가지 뭡니까."
"확실해? 똑똑히 보고 하는 소리야? 그 서가년하구
둘이가 맞아?"
"그러니까 전화를 했지요."
"어, 어느 호텔이야, 거기가?"
석혜리의 목소리는 앙칼지긴 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진정하세요, 우선. 저도 사실 전화드리기가 힘들었
지만 지금 덮쳐 더 깊어지기 전에 후환을 없애는
편이 집안을 위해 좋을 것 같아서 알려드리기로 결심
한 겁니다. 서주임을 회사로 끌어들인 책임도 있
고."
박영준은 되도록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지금 가도 늦
지 않겠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서둘고 당황하는 석
혜리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한 30분쯤 됐는데 벌써 나오시겠습니까? 지금 출발
하면 늦어도 20분정도면 올 수 있을 테니까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저는 지금 두 사람이 들어간 건너편
방이 비었다니까 그리로 가서 지키고 있을 생각입니
다. 우선제가 있는 방으로 오시죠. 1305호입니다."
"곧 갈께."
수화기를 놓는 거친 소리가 박영준의 귀를 울렸다.
석혜리가 지하차고로 가 차를 몰고 집앞 골목을 빠져
나와 한길까지 나오는 데는 약 10분쯤이 걸릴 것이
다. 그 10분간이 문제였다. 그 시간, 그 골목에서만
박회장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정확하게 20분쯤 후 석
혜리는 호텔에 도착할 것이다.
초조하고 긴 시간이었다. 박영준은 약간 틈이 생기
도록 방문을 열어 놓았다. 복도는 쥐죽은 듯이 조용
했다. 줄곧 문밖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20분이 지났다. 아직 아무 소
리도 없었다.
영준은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문득 화장대 거
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순간 오싹 소
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초조함으로 미처 잊고 있던
가발과 안경을 벗어 침대 시트 밑에 숨겼다. 다시 거
울을 보았다. 그때였다, 급한 노크 소리가 들린 것
은.
박영준은 날쌔게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 열린 문을
활짝 당겼다. 베이지색코트 차림의 석혜리가 새파랗
게 질린 얼굴로 마치 밀치듯이 서둘러 방으로들어섰
다.
"어디, 저 건너방이야? 확실해?"
그녀는 금방 그곳으로 뛰어갈 자세였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번들거리는 두 눈에서는 마치 푸른 불빛
이 이는 듯했다.
"쉬잇!"
박영준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재빨리 등 뒤
로 출입문을 밀어닫고는 손잡이 잠금쇠까지 눌러 버
렸다.
"올라오실 때 아무도 못 만났어요?"
"아무도 못 만났어. 그새 나가긴 않았겠지?"
"안 나갔어요. 우선 좀 앉으세요."
석혜리는 놓여 있는 두 개의 의자 중 한 곳에 쓰러
지듯 주저앉았다. 그녀는 버릇처럼 다리 한쪽을 들어
포갰다. 순간 코트의 앞자락이 벌어지며 희고 매끈한
다리가 노출됐다.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색 니트스커
트가 앉음과 동시 위로 올라가며 다리는 바깥쪽 허벅
지까지 그대로 드러났다.
박영준은 순간 심한 현기증과 함께 구토를 느끼며
비스듬히 옆을 향해앉은 석혜리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때 무슨 말인가를 할 듯 영준을 향해 석혜리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흰 목에 가늘고 검은
줄이 날쌔게 감겼다.
침대 곁 나이트테이블 스텐드에서 미리 뽑아 감아쥐
고 있던 전선이었다. 그녀의 큰 눈이 더욱 커다랗게
확대됐으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
녀의 두 팔이 휘젓듯이 영준에게 다가들었다. 그러나
그의 몸 어느 한 부분도 잡을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였다.
박영준은 온 힘을 팔에 기울여 줄을 조이며 속으로
하나 둘 세어 나갔다. 2백까지 세었을 때 석혜리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머리가 앞으로 떨어지듯 툭
꺾였다. 풀어헤친 긴 머리칼이 한꺼번에 앞으로 흘러
내렸다.
다리는 꼬인 채 양팔은 맥없이 팔걸이 옆으로 뻗어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팔의 힘을 늦추지 않고
있던 박영준은 마침내 손에 달라붙어 버린듯 감긴 전
선을 풀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그는 전선을
호주머니속에 집어넣었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
친 그는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석혜리의 죽음을 확인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아직 떨림이 가시지 않은 다리를 옮겨 출입
구 쪽으로 몇 발짝 움직이던 그는 후다닥 놀라듯 다
시 돌아섰다. 늘어진 석혜리 쪽으로 다가간 그는 흘
러내린 그녀의 팔을 툭툭 차보았다. 맥없이 흔들거렸
다. 다시 바닥에 놓인 그녀의 한쪽발 끝을 지그시 밟
아 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생각난듯 침대 시트 밑에 넣어 두었던 가발과
안경을 꺼냈다. 그리고는 목욕탕의 손잡이 위에 손수
건을 덮어씌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 앞에서 가발과 안경을 매만져 쓰는 그의 손은
아직 떨리고 있었다. 그 다음 역시 손수건을 덮어 더
운 물을 틀었다. 손수건을 적신 다음 비누를 수건으
로 문질렀다. 비누가 묻은 손수건으로 출입문의 안쪽
손잡이와 스텐드 등 자신의 손길이 간 곳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닦아낸 그는 마침내 문 바로 안쪽 벽에 기
대 두었던 쇼핑백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황망중이었
지만 그는 출입문의 바깥 손잡이를 닦아내는 것도 잊
지 않았다.
침침한 복도를 날랜 걸음걸이로 빠져나와 엘리베이
터 앞까지 왔다. 붉은 카핏이 발목이 묻힐 만큼 묵신
하게 깔린 13층 복도와 엘리베이터 홀은 바다 속처럼
깊은 적막에 싸여 있을 뿐 아무런 인적도 없었다.
더 이상 떠날 비행기가 없어서인지 김포 공항 국제
선 대합실은 많이 비어 있었다. 그래도 몇 백명의 사
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그곳을 지나 박영준은 3층 화
장실로 가 원래의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전날 미리 예약해 둔 대로 NWA사 카운터에서 출
국 수속을 마쳤을 때 시계는 밤 9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꾜 경유 호놀룰루행 비행기는 예정 시간보
다 30분이나 늦은 10시 20분에야 겨우 발진했다.
어둠을 박차고 상승을 계속하던 비행기가 마침내 제
고도를 잡은 듯 뒤로 쏠리던 몸이 바로 된 다음 박영
준은 좌석 옆 작은 창 밖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밤하
늘을 내다보았다. 땅에서는 비바람 폭풍우가 몰아칠
지라도 구름을 뚫고 위로 올라가면 하늘은 언제나 맑
고 고요했다. 영롱한 별 무리가 보석상자처럼 아름답
게 흩으러져 있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영준은 문득
콧날이 '쌩'해지는 비애를 느꼈다. 창 밖을 내다보던
머리를 돌려 좌석에 깊숙이 묻은 그는 눈을 감았다.
감긴 그의 눈꺼풀이 파문지듯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
다.
박영준이 일본의 나리다 공항을 떠나는 마지막 리무
진 버스로 긴자의 도뀨 호텔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새벽 2시가 가까워서였다. 프론트데스크에서 내미는
숙박 카드를 받아든 그는 날짜는 전날로, 투숙 시간
은 시계가 가리키는 대로 2시로 기입했다. 어제 낮
나리다 공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이 곳으로 왔었다면
닿았을 바로 그 시간이었다.
새벽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샌 박노걸은 걱정보다
강한 의혹으로 마음이 한층 괴로웠다. 아내 석혜리의
이기적이고도 개방적인 성격으로는 능히 저지를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부부로 결합한
후 어째선지 턱없이 잦은 부부 싸움을 벌였었다. 그
럴 때 석혜리는 제 성미에 못이긴듯 문을 박차고 나
가 밤새 돌아오지 않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박노걸은 걱정으로 밤을 홀딱 새워야 했
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날 오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집이나 사무실로 전화해 어느 호텔 몇 호실에 있다고
알려온다. 박노걸이 부랴부랴 달려가면 그녀는 으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를 유혹해 침
대로 끌어들이고는 숨막힐 듯 깊은 애무를 쏟아붓는
다. 그것이 그녀가 남편에게 표시하는 잘못에 대한
사과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난 밤엔 다투기는 커녕 만나지도 못했었
다. 오랫만에 예비역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한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벌써 차를 몰고 나
간 뒤였다. 자정이 될 때까지는 또 그 흔한 모임에
갔거니 하고 생각했으나, 새벽이 가까워 오면서 그의
마음 속에는 차츰 어두운 의혹이 한 가지 무겁게 자
리잡기 시작했다. 바로 이재성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었다. 아들 영준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이기는
했지만, 얼마 전 L호텔에서 목격했던 두 사람의 다정
했던 모습은 그 날 이후 내내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
지 않고 있었다.
그 날 밤 아내보다 한 발 뒤늦게 그가 집으로 들어
갔을 때 그녀는 대뜸 회사 일이 걱정돼 이재성과 만
나 함께 식사를 했노라고 털어놓았다. 비록 객실에
함께 들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먼저 털어놓는
그녀의 태도로 봐 별일이 있었겠느냐며 그는 내색 없
이 스스로를 달래었다. 그 날 밤 석혜리는 모처럼만
에 선정적인 교태로 박노걸을 한껏 만족시켜 주기도
했었다.
그런 그녀인지라 또 무슨 핑계인지 이재성을 만나
어찌어찌 함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석혜
리만 응한다면 두 사람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이라
는 생각이 박노걸을 한층 괴롭혔다. 호화로운 호텔
방에서 밤새도록 뒹군 뒤 한낮까지 자고는 전화를 걸
어 자신을 부를 것만 같은 예감으로 그는 몸을 떨었
다. 박노걸은 아침도 뜨는 둥 마는 둥 일찍 회사로
나와버렸다. 그러나 아침의 임원회의를 주재하고 부
서별로 가져온 결재서류를 모두 훑어보고 난 열한시
넘어까지 아내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박노걸은 마침내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
은 가정부는 걱정하는 빛도 없이 아무 소식도 없었노
라고 대답했다. 설마 오늘 중으로는 무슨연락이 있어
도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마음으로 일찍 점심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여비서가 들어와 N
경찰서라면서 전화기를 집어주었다.
"N경찰서 수사괍니다. 사모님에 대해 몇 마디 묻고
자 전화드렸습니다."
정중하기는 했으나 어딘지 투박하게 느껴지는 나이
든 사내 목소리에 박노걸은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
았다.
"네, 말씀하시지요."
"사모님께서 어젯밤에 댁에서 주무셨습니까?"
상대방의 물음에 박노걸은 순간 말이 막혔다. 그러
나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아니, 왜 그러시는지 이유부터 말씀하셔야지요."
"서울 3床0117이 사모님께서 타시는 차가 분명하지
요?"
"예, 틀림없습니다만, 무슨?"
서둘러 대답하는 박노걸의 머리 속으로 교통사고라
는 직감이 퍼뜩 떠올랐다.
"지금 댁에 계십니까?"
"지난 밤 외출했는데 아,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그, 그렇잖아도."
"사건입니다. 살인사건이 났는데 피살자가 바로 사
모님인 것 같습니다."
당황해 더듬는 박노걸의 말을 툭 자르며 수화기 속
의 남자가 말했다.
"네? 뭐, 뭐요?"
박노걸은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찔함을 느끼
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선 신원부터 확인하시죠. 이곳으로 급히 와 주시
는 것이 좋겠습니다."
"N경찰서로요?"
"아닙니다. 사건 현장이 P호텔입니다. 로비로 오시
면 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곧 와 주십시오."
박노걸은 사지가 굳어버린 듯 잠시 멍하니 서 있었
다. 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비서를 불러 총무부
장을 오게 하고 차를 대기시키도록 일렀다.
얼굴이 가면처럼 굳어버린 박노걸이 총무부장을 대
동하고 P호텔에 도착했을 때 출입구는 정복 경찰관들
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삼정개발 박회장님이시죠? N서 문반장입니다."
짙은 청록색 파커를 입은 몸집이 큰 중년 사내가 들
어서는 박노걸 앞으로 다가서더니 서둘러 현관에 세
워둔 패트롤카에 그들을 태우는 것이었다.
경광등을 번쩍거리머 패트롤카가 도착한 곳은 신촌
의 S병원이었다. 한발짝 먼저 그 곳으로 운반되어 영
안실 냉동고에 들어간 석혜리를 확인한 박노걸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날 석간들에서는 사회면 하단에 2단기사로 P호텔
여인 살해사건이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사건 현장인
P호텔 1305호실에 예약 투숙했던 사람은 이재성이란
이름의 40살 난 남자로 직업은 상업, 주소는 광주시
사직동으로 되어 있었으나 주지에 조회한 결과 허위
임이 밝혀졌다. 서울 시내 인명 전화부에는 같은 이
름이 백명도 넘게 기재돼 있었다. 수사반은 숙박 카
드에 기재된 이재성이란 이름이 사건과는 전혀 관계
없는 가명이라는 판단 아래 이름 추적은 더 이상 하
지 않기로 했다.
시체 검시 결과 석혜리의 사망 시간은 전날 밤 9시
에서 10시 사이로 추정되었다. 수사반은 그 시간을
전후해 근무한 프론트를 비롯해 13층 담당, 룸당번
등 관계 호텔 종업원들을 한 명씩 모두 만나 보았다.
전날 저녁 호텔 프론트데스크에는 남자 직원 두 명
과 여직원 두 명이 이쪽저쪽으로 다니며 손님들을 접
수했다고 했다. 이재성의 숙박 카드를 접수한 아가씨
는 몇 번이고 기억을 더듬었으나 확실한 인상 착의를
대지못했다.
1305호 숙박카드를 접수했던 무렵은 호텔 프론트데
스크로는 하루 중 가장 바쁜 때로 그 시간을 전후해
접수된 무숙객만도 40명이 넘었다. 특히 각 직장의
퇴근 시간 직후인 관계로 로비와 그릴, 커피숍까지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인지라 비록 접수를 직접
받았던 직원일망정 특정한 인물을 기억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사반은 피살자가 반항한 흔 적이 거의 없고 순간
적으로 교살된 것으로 미루어 면식범에 의한 계획 살
인으로 보았다. 현장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지문 한
개, 머리카락 한 올 나오지 않았다. 투숙객 카드도
면밀히 분석되었지만 채집된 지문 다섯 개는 모두가
그날 근무했던 프론트 담당자들의 것만 나타났을 뿐
이재성이란 가명을 쓴 사나이의 것으로 추정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수사반은 처음 사건을 별로 어렵지 않게 보았다. 면
식범이라면 십중팔구 치정에 의한 살인일 것이고, 그
경우 상대 남자를 탐색해 내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
서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실상은 의외로
막막했다.
석혜리가 어려서부터 첫결혼에 실패하기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을 미국에서 공부하고 성장한 관계로 국
내에서의 교제 범위가 의외로 좁고 단순했기 때문이
다. 대학의 시간 강사라는 직함이 있긴 했으나 1주일
에 겨우 1시간으로 그것도 교양학부에 베정돼 있어
학교에서도 교무처에서나 그녀를 기억할까, 가까이
지내는 교직원 한 명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장롱과 화장대 등 온 집안을 뒤집어엎듯 샅
샅이 뒤졌으나,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동창 몇
사람과 서울과 지방에 거주하는 친척 몇 명의 전화번
호가 기록된 수첩만 발견됐을 뿐 별달리 눈길을 끌
만한 물건은 없었다. 수첩에 적힌 그녀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한 사람 빠짐 없이 조사되었다. 그러나 며
칠 후 그들 모두는 사건과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
로 밝혀졌다.
두번째로 수사진은 그녀의 돈 많고 나이 많은 남편
박노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30년 가까운 나이 차이
가 있는데다 젊고 아름다운 부인과 부부싸움을 자주
벌였던 그는 보기에 따라 상당히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나던 날 밤 그의 알
리바이는 식사를 함께 한 예비역 친구들과 운전기사,
가정부까지 한 다스도 넘는 사람들이 증명해주었다.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면
자기와 죽은 아내가 동시에 아는 인물로 이재성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진은 환호
성을 올렸다. 그러나 그 이재성이란 사람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해 갔다. 그러나 이재성
특보의 알리바이 역시 완벽했다.
그 날의 프론트 담당직원 네 명도 이특보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 확률이 커졌다. 그러
나 이재성 특보의 기분은 엉망으로 구겨졌다. 며칠
전 서유란을 만난 이후 삼정에 대한 감정이 잔뜩 상
해 있었던 데다 이제 다시 하마터면 엄청난 사건에
휘말릴 뻔했다는 놀라움으로 그는 씨근덕거렸다. 그
와 함께 어쩌면 자신을 모함하기 위한 삼정의 책략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부인이 피해자라
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범인이 하필 이재성이란 이름
을 사용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삼정개발과 자기의 관계를 아는 것은 박
회장 부부를 비롯해 불과 다섯 손가락으로 셀 정도
의 사람들뿐인데, 우연의 일치라기엔 아무래도 개운
치가 않았다.
경찰은 그 다음으로 박회장의 아들 영준에게로 관심
을 돌렸다. 유일한 아들이면서도 젊은 계모 석혜리로
인해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찬밥 신세로 밀려나 있는
영준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가장 강력하고도 필연적
인 동기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건 당일
아침 비행기로 일본 출장을 간사실이 확실했으니 군
침이 도는 경찰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그는 사건이
난 다음날 회사의 연락을 받고 급거 귀국했다.
부검을 마친 석혜리의 장례는 미국에 있는 그의 친
정 어머니가 도착한 열흘 후 간소하게 치러졌다.
'전기줄에 의한 교살'이라는 간단한 부검 결과를 들
으며 아직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친정 어머니는 땅을
치고 통곡했다. 위로하는 박노걸을 향해 미국에서 잘
사는 아이를 여기까지 끌고 와 결국 이렇게 험한 죽
음을 당하게 했느냐고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정부와
놀아나다 그 손에 죽었다는 결과에만은 어쩔 수 없었
는지 크게 행패를 부리지는 않았다.
장례를 마친 그 날 오후 박노걸은 집에서 가까운 S
병원에 입원했다. 심부전증과 심한 불면증 때문이었
다. 박영준은 일본의 일이 바쁘긴 했지만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부득이 며칠 더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삼정개발 박노걸 회장의 젊은 부인 석혜리 피살사건
은 한화정밀 정상국회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미묘한 기대를 갖게 했다. 정부가 추진하고있는 국산
무기 업체 지정에 나선 기업 중 현재로선 삼정개발이
가장 유력하다. 그런 삼정의 사주가 당한 참사는 어
쩌면 회사 업무는 물론 경영상의 차질까지 빚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그럴 것 같다는 예상보다 비
슷한 업종의 기업들 모두가 은근히 바라고 있는 소망
사항이었다.
정성국 회장은 공식적으로 정중하게 문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문상이라기보다 패가망신을
당한 박회장이 충격으로 쓰러져버릴 수도 있을 가능
성 여부의 탐색을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