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금)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자 (요 4:1-14)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묵상
◆ 사마리아 수가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오늘 본문의 수가는 세겜에서 동쪽으로 대략 2km 정도 떨어진 땅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 본문에서 세겜을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후에 여호수아가 요셉 족속에게 세겜 땅을 분배했는데(수 24:32), 아마도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후대에 후손들이 임의로 만든 이야기가 아닐지 추측한다.
예루살렘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는 길 중간에는 유대 족속이 아닌 사마리아 족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미워했기 때문에 피해 다녔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하기보다는 주로 예루살렘 동쪽 여리고를 통해서 사마리아를 피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우회 길을 택했다. 오늘날의 구글 지도에 의하면 그렇게 여리고로 우회하면 도보 길이 대략 12km 정도 늘어난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차라리 12km를 더 걸었으면 걸었지, 사마리아를 통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글 지도에 의하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발견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거쳐서 갈릴리호 부근 마을(엠크 HaYarden 이스라엘)에 도달하는 도보 길이 154km인데 비해 사마리아 수가를 거쳐서 갈릴리로 도착하는 길은 161km 정도 된다. 오히려 더 멀어진다. 물론 당시의 길은 달랐겠지만,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출발하신 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세례 주던 곳, 곧 요단강 부근이었다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 오히려 훨씬 더 먼 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구태여 사마리아 길을 택하셨을까? 왜 성경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라고 했을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 동네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가셨다는 의미다.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 길러 나올 그 시간에 맞추어서 수가 성에 들어선 예수님을 보라. 한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 여자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시작할지를 알고 계셨다.
◆ 오후 6시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수가는 오늘날 Nablus라고 알려진 지역 부근인데, 예루살렘에서 72km 떨어진 곳이다. 하룻길로 걷기에는 너무 먼 길이다. 요단강 부근에서 출발하셨더라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시간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에 도착한 시간이 '여섯 시'다. 이것을 대부분 번역본은 낮 12시로 의역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 대하여 학자들 간의 의견이 다르다.
나는 요한복음이 당시 유대 시간을 쓰지 않고 로마 시간을 사용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낮 12시가 아니라, 오늘날 시간처럼 오후 6시다. 내가 요한복음이 로마시간을 쓴 것이라고 주장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마가복음에서는 '3시'(막 15:25, 오전 9시)였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보다 앞선 재판받은 시간을 '6시'(요 19:14)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오전 6시에 재판받으시고, 오전 9시에 못 박히셨다.
앞선 복음서와 비교할 때 요한복음에서는 일관되게 로마 시간을 택하였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자가 나온 시간은 오후 6시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은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서일 것이다. 제자들이 사마리아 주막에서 묵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여행객들의 노숙은 일상적이었다.
우물가는 여인들의 정보교환 장소다. 온갖 수다가 벌어지는 곳이 우물가다. 수다를 떠는 시간은 당연히 오전일 것이다. 오후 6시는 거의 해가 질 녘이다. 저녁을 짓거나 가족들이 모일 시간이다. 그 시간에 나오는 여자는 없다. 우리나라 10월의 일몰 시각은 5시 40분인 것을 참고하면 물 긷기에는 정말 늦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 우물가에 나온 여인이라면, 그는 분명히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해서 나온 여인일 것이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 먼 길을 일부러 오셨다.
◆ 목 마르지 않는 물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이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온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신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면 둘 중의 하나다. 부도덕한 남자이거나 정말 목마른 남자다. 여자는 긴장하고, 거절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척 신기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생수라니! 생수는 원어로 보면 '생명의 물'이다. 오늘날에는 먹는 물에는 무조건 생수라는 말을 쓰는데 여기에서 언급된 '생'은 헬라어 '자오(ζαω)'를 번역한 것이다. 자오는 '살아있는, 생기있는' 이란 의미다. 한마디로 먹으면 생명을 얻게 되는 물이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목마르다.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모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진리, 평화, 인생의 목적, 영생에 대해 목마르지만, 사람이 만든 철학과 종교로는 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목마르지 않다. 그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는 샘물이 생긴다. 오, 이 놀라운 일은 경험한 자들은 모두 ‘아멘’으로 응답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 가지 P를 얻는다고 한다. 용서(Pardon), 평화(Peace), 목적(Purpose).
그런데 이런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생수를 주님께서는 주신다. 그러나 이 여자는 이 영적인 물을 오해했다. 여자는 정말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신비의 물로만 생각했다. 그래도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예수님의 모습이 절대로 농담이나 할 분이 아닌 것을 눈치챈 것 같다. 여자가 이런 물을 내게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다.
그러자 남편이 없다고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해하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앞에 있는 남자를 유혹할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 집에 남자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여자는 정말로 진지하다.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없다는 여자의 말에 수긍하면서 그의 과거를 말씀하신다. 남편이 무려 다섯이나 있었다고 하고, 지금 있는 남자는 남편도 아니라고 하신다. 이 말씀에 따르면 아무리 좋게 봐도 이 여자는 정숙한 여자는 아니다. 동네에서 손가락질받는 여자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와 동거하는 여자라니…. 어설프게라도 율법을 준수했던 당시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생활이다.
수많은 사람이 배척하는 여자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대하는 방식과 다르게 이 여자를 대하셨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이 여자를 일부러 찾아오셨다. 그 먼 길을 돌아서 기꺼이 찾아오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버려도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다. 비록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하여도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짚어내자 여자는 예수님의 정체를 깨달았다. 선지자다! 전설로만 듣던 선지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선지자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었다.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아직 그것까지는 모른다. 다음 본문에서 더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