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2024년 4월 3일 권력을 좇는 사람과 하나님 뜻을 좇는 사람
열왕기상 1장
사무엘서는 다윗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 사무엘상은 사울의 죽음까지를~ 사무엘하는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왕위에 올라 죽기까지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고
열왕기서는 다윗의 사후에 솔로몬이 왕이 된후부터 바벨론에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500년동안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상에 말년의 다윗은 늙고 병들어 아무 힘도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혹시 젊은 여자를 보면 성욕이 동하여 기력을 차릴까 싶어 그의 신복들이 그에게 아비삭을 후궁으로 주었지만 다윗은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았다. (4절)
다윗이 젊은 여자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만큼 기력이 쇠진하였다는 의미일수도 있지만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4절)
라는 문장이 다윗을 주어로 능동형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
다윗이 의지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좀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나이들어 쇠약하고 병들었지만 믿음의 사람 다윗은 세상의 방법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노년의 다윗이 의지하여 바라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이 왕상 1장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왕이 나이들어 쇠약하고 병이 들자 사람들은 다음 왕위를 누가 이을까~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다윗의 신하 요압은 간사한 자였다.
겉보기에 그가 다윗의 충신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요압은 다윗의 가장 큰 적이었다. (삼하 3:39)
밧세바와의 통간이후에 다윗의 왕권은 급격히 약해졌고 그것이 요압을 중심으로 한 신권(臣權)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지자 나단은 회개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원수에게는 큰 훼방거리를 얻게 하였다~라고 한탄하였다. (삼하 12:13~14)
이후에 다윗은 안팎으로 어려운 일들을 당하게 된다.
장자 암논이 셋째 아들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하면서 압살롬의 손에 암논이 죽고 이후 암살롬은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에게 대항하다 요압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상하게 둘째 아들 아비가일의 소생 길르압에 대한 기록은 없다.
건강에 이상이 있어 일찍 죽었든지, 왕위에 딱히 관심이 없었든지.... 어쨋든 왕위 계승을 위한 권력암투에서 길르압은 빠져 있었다.
이렇게 첫째, 둘째, 셋째가 다 죽고 왕위를 이을수 없는 상태가 되니.... 자연스레 사람들은 넷째인 아도니아가 왕위를 이을 것으로 생각했다.
거기에 다윗의 신하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앞장섰다. (7절)
요압은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요압은 다윗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의 시각에서는 항상 명분을 따라 다윗을 위하여 충성스럽게 행동하는 것같이 보이만
늘 그의 선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다윗의 생각과는 달랐고 그것이 다윗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다윗이 사울에게 쫒길때 제사장의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주어 다윗을 격려하고 도주를 도왔다가
사울이 심어놓은 첩자 에돔사람 도엑의 고발로 아히멜렉의 집안사람 85인이 도륙당할때 살아남은 자로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이었다.
그가 다윗에게 등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다윗으로 인하여 죽임당한 아버지와 형제들의 원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의 생각은 달랐다.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 나단의 멧세지는 항상 하나님의 인자와 용서 그리고 약속이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고자 할때 그때도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윗에게 전달하였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집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 다윗이 밧세바와 통간하였을때도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윗이 회개할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와 용서.. 그리고 약속을 성경을 말씀하고 있다.
밧세바와의 간통이란 범죄로 인하여 다윗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사람들은 다윗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의 나라와 그의 자녀들을 심판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범죄함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인자와 약속을 믿었다.
그러나 누구 알리요... 다윗의 그 생각이 옳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겠다는 그 약속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원수들의 공격과 참소로 왕권이 바닥에 떨어지고 육체적으로 병들고 노쇠해진 그때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를 의지하여 밧세바를 통하여 주신 마지막 아들 솔로몬을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세우시는 것으로 확인되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도니아에게 명분이 있었다.
그는 장남 암논이 죽고 압살롬까지 반역에 실패하여 죽고 난 후에 사실상 제일 왕위계승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왕의 용모를 가지고 있어 왕의 신하들과 제사장까지도 당연히 아도니아 그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왕상 1장을 얼핏 보면 조선왕조 건국기와 마찬가지로 서로 왕이 되기 위해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맞다.
우리의 겉모습은 조선왕조나 다윗왕조나 마찬가지다.
다 죄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멧세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아도니아는 장자의 명분과 자신의 능력으로 왕이 되고자 한 자로 그려진다.
반면 솔로몬은 다윗의 말째 아들로 실질적인 명분과 자격이 없었다.
성경은 아도니야는 용모가 준수하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솔로몬의 외모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보기에는 누가 보아도 아도니아가 왕재로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솔로몬에게는 왕이 될만한 자격도 용모와 공로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과 다윗 그런 솔로몬을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이유는
사람의 명분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에 의지한 그분의 약속 때문이었다.
다윗은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된 아도니아가 아닌 (5절)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을 내 생명을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고 있다. (29절)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다는 뜻은 그 약속이 영원히 변할수 없슴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있다가도 결국은 없어지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없어질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영원히 살아계신 그분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 약속은 없어질수도 변할수도 없는 영원한 약속인 것이다.
또 시편에서도 묵상했지만
|다윗은 아무것도 의지할데 없는 상황에서 수도없이 많은 위기 중에 목숨을 잃을뻔하였다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받아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제 다윗은 나이들어 쇠약하고 병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자기의 전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아는 자였다.
사람들은 젊은 여자를 통하여 힘을 내라고 아비삭을 늙은 다윗에게 주었지만 다윗은 아비삭과 동침함으로 힘을 내기 보다
자기의 전인생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힘을 내어 그 약속을 아들 솔로몬에게 이양해주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아도니아는 자신을 높여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지만
솔로몬과 솔로몬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그 약속을 의지하여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솔로몬의 군대장관 브나야는 대제사장의 아들이었다. (대상 27:5)
레위인인 그가 군대장관이 된 것도 참 특이한 이력이다.
브나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솔로몬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36~37절)
왕상 1장은 이제 다윗의 시대가 저물고 새롭게 시작하는 솔로몬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우리의 인생도 때가 되면 저물어지게 된다.
그때에 우리가 마지막까지 의지하야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식이요법에 각종 영양제와 운동...해외 휴양지에서 멋진 휴식과 여행, 안락한 노후를 보장하기 위한 복지환경과 돈...
그렇게 되면 참 좋겠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 인생에 참 안식이 되어질수는 없다.
그런 것들은 있다가도 없어질수 있고 인생의 허무함을 막아내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허무한 시간이 우리를 엄습해 올때 그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내 전인생을 통해 나와 함께 하시며 내 모든 인생의 위기에서 나를 건져내신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의 변함없는 약속이다.
교회는 다니지만... 믿음은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장하여 이끌어 가시는 그 경험과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내 생명을 내 인생 모든 환란 가운데서 구원하여 내신 여호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그 분의 살아계심을 두고 내가 맹세한다....
병약해진 다윗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침상을 붙잡고 서서 외치는 그 외침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다윗은 자신의 자산과 자신의 노력으로 길러진 아들이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왕이 될수 없슴을 알았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왕이 되시기 위해서는 그의 인자와 그의 신실하신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모시는 자가 왕이 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그의 전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약속이요 믿음이었다.
우리의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시간을 바라보며 다음 세대를 하나님의 약속위에 세우는 것이 노년의 인생에 우리가 해야할 마지막 사명이라 생각한다.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그의 도우심으로 지금 내가 여기 서 있슴을 계산하고 정리해본다.
그리고 살아계신 그가 내 전인생을 통해 말씀하신.... 그 약속을 붙잡는다.
나는 유한하지만... 내게 주신 그 믿음과 소망으로 주신 그 약속은 영원하심을 나는 믿는다.
그 약속이 다음세대 하나님 나라의 왕같은 우리의 자녀들을 통하여 영원히 이어져 나갈 것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