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서씨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는 몇 성씨 중의 하나다 . 기자(箕子)의 40세손 기준(箕準)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서신일(徐神逸)이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이며 동시에 모든 서씨(徐氏)의 도시조(都始祖)이기도 하다. 계미보(癸未譜)에 의하면 그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얻은 아들이 정민공 서필(貞敏公 徐弼)이며, 그가 곧 유명한 서희(徐熙)장군의 아버지라고 한다. 서필(徐弼)은 도필(刀筆)로서 등용되어 벼슬이 태사내의령(太師內議令)에 이르렀고, 항시 직언(直言)으로 왕을 보필했다고 한다. 왕이 하사(下賜)한 금주기(金酒器)에 관한 일화가 그의 인품을 나타낸다 할 것이다. 후에 광종묘정(光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 서필(徐弼)의 아들 서희(徐熙)는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 겸비한 名臣이다. 광종 11년 문과에 급제, 성종 1년에 송나라에 가, 그때까지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고 송태조로부터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의 벼슬을 받았다. 성종 12년, 거란(契丹)이 침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해줌으로써 강화하자는 의견이 들끓었다. 이미 중군사(中軍使)로 북계에 출병하여 싸우고 있던 서희(徐熙)는 조정의 이 같은 의견에 적극 반대, 단신으로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하여 거란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도원수(都元帥)로서 출정, 천주강(川州江) 이북의 여진족(女眞族)을 몰아내고 곽주 ㆍ 귀주(郭州 ㆍ 龜州) 등 6주에 축성(築城)하여 장차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외교관으로서, 장수(將帥)로서 조정의 중의에 굴하지 않고 단독으로 적군을 물러가게 하고 국토를 넓힌 공훈은 역사에 드문 일이라 할 것이다. 성종묘(成宗廟)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덕종 때 태사(太師)에 가증(加贈)되고 이천백(利川伯)으로 봉했으며 그 후 마전숭의전(麻田崇義殿)과 이천 설봉서원(利川 雪峰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서눌(徐訥)은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 서희의 아들이다. 성종 15년, 문과에 장원, 현종 7년에 중승(中丞)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宋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 상서이부시랑겸 좌간의대부(尙書吏部侍郞兼 左諫議大夫)와 국자제주 ㆍ 지리부사(國子祭酒 · 知吏部事) 등을 역임하였다 . 그의 딸이 현종(顯宗)의 비(妃)가 된 이후에 중추사우산기상시(中樞事右散騎常侍)에 오르고 내사시랑· 판서경류수사(內史侍郞· 判西京留守事) 등을 거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 뒤에 다시 삼중대광내사령(三重大匡內史令)이 되었으며, 자손들에게 영업전(永業田)이 하사되었다 . 시호는 원숙(元肅)이다 . 서희의 현손(玄孫)인 서순(徐諄)은 의종 5 년에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바 있고, 의종 17년에는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뒤에 상서좌복사· 판비서성사(尙書左僕射· 判秘書省事) 등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강직한 성품이 전해진다. 서순의 동생 서공(徐恭)은 지략(智略)과 무예(武藝)가 뛰어났다. 음보(陰補)로 영전판관(靈殿判官)을 지냈으며 합문통사사인·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閤門通事舍人· 兵部尙書· 同知樞密院事) 등을 거쳤고, 6차례나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를 역임하였다.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 서린(徐鱗)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중랑장(中郞將)을 거처 병부상서 대광내의령(兵部尙書 大匡內議令)에 올랐다. 권함(權咸)의 모함에 영평(永平)(南平의 구호(舊號))의 감무(監務)로 좌천되었다. 재임 중 혜궁관(惠窮館)과 유업관(儒業館)을 건립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어 향민(鄕民)들이 벽에 도상(圖像)을 해서 첨모하고 조정에서는 충수협모좌리공신(忠輸協謀佐理功臣)을 내리고 향유(鄕儒)들은 철천사(哲川祠)에 모시었다. 서릉(徐稜)은 고종 때 시중(侍中)을 지내고 장성(長城)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효도에 극진하여 많은 이적이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정려를 내렸다. 시호는 절효(節孝)이며 장성(長城)의 모암서원(慕岩書院), 순창(淳昌)의 화남사(華南祠)에 봉향하였다 . 서인(徐諲)은 공민왕 1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집의겸 지제교(執義兼 知製敎)에 오르고 국성전 교수(國成殿 敎授)로 천거되어 학문이 높아 많은 학도(學徒)들이 모여들어 당대에 주종(主宗)이라 일컬었다 . 여말(麗末)의 인물 서견(徐甄)의 호는 여와(麗窩), 안향(安珦)의 문인이었다. 공민왕 1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양왕 3년에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고,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다가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장류(杖流)되었다. 조선의 개국 후 풀려났으나, 벼슬하지 않고 금천(衿川)에 은거함으로써 여조(麗朝)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 “암반 설중고죽(岩畔 雪中孤竹) 반갑고 반가와라 ---"라고 여조(麗朝)의 망국을 읊은 그의 시조가 전해진다. 선조 때 대사간(大司諫)에 추증되었다 . 또 서보(徐輔)는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평산 적암(平山 積巖)에 은거하고 말았다 . 서유(徐愈)의 字는 遠之이며 호는 임강(臨江)이다. 공민왕 l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태조 3년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에 특진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있을 때 정종 2년 박포란(朴苞亂)을 平定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으며, 그 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오르고 외직(外職)은 광주목사(廣州牧使) 및 황해도 관찰사겸 병마절제사(黃海道觀察使兼 兵馬節制使)를 역임했다. 시강원(侍講院)에서 대학 연의(大學 衍義)를 지어 왕족(王族)의 교양지침(敎養指針)으로 삼았다. 태종이 친서훈권(親書勳券) 및 진영(眞影)을 내렸으며, 선조는 불조묘(不祧廟)를 특명(特命)했다. 월성 구산서원(月城 龜山書院)에 봉향하였다. 영정(影幀)은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3404號, 단서철권(丹書鐵券)은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3406號, 임강선생문집(臨江先生文集)은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3403號에 지정되었다 . 서진(徐晋)은 태종 1년 문과에 급제, 博士가 되고 춘추관기사관· 예조좌랑· 병조정랑 ㆍ 군기감사(春秋館記事官· 禮曹佐郞· 兵曹正郞 ㆍ 軍器監事) 등을 역임하였다 . 세종조에 형조판서· 좌군도총제(刑曹判書· 左軍都摠制)를 지낸 서선(徐選)은, 字가 대숙(大叔), 호는 해화당(海華堂)이다. 원천석(元天錫)의 門人이었으며, 태조 2년 문과에 급제, 의정부사인· 형조의랑(議政府舍人· 刑曹議郞) 등을 거쳤다. 태종 4년에는 설화(舌禍)로 여흥(驪興)에 유배되었고 이듬 해 풀려나 장령(掌令)으로 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다시 竹山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후에 우사간·부평도호부사(右司諫·富平都護府使) 등을 지냈고, 세종 1년 고계겸청시부사(告計兼請諡府使)로, 세종 11년 절일사(節日使)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공도(恭度)다 . 서강(徐岡)의 字는 후산(后山),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세종 29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 단종 1년에는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서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의 편찬에 관여하였다 . 이후 우헌납· 집현전응교(右獻納· 集賢殿應敎) 등을 거쳐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올랐을 때, 왕명에 의해 「잠서주해(蠶書註解)」를 찬진(撰進), 이듬해에는「손자(孫子)」의 주해(註解)에 참여하였다 . 대사성으로 있을 때 세조의 숭불(崇佛)을 비난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죽은 지 6년만에 신원(伸寃)되었다. 중종조의 인물로는 서지(徐祉)가 있다. 字는 수지(綬之), 號는 난정(懶亭)이다. 학문이 뛰어나 연산군 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전적· 이조정랑(典籍· 吏曹正郞)을 거쳤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서 공을 세웠으며, 수찬· 교이· 순천부사(修撰· 校理· 順天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 이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이때 서경왕후(瑞敬王后)의 복위를 주장 하다가 이행(李荇)과 충돌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며 그 뒤 공조 · 병조판서 , 이조판서 등에 천거되었으나, 다시 벼슬 에 오르지 않았다 . 서순(徐諄)의 7대손 서척(徐隲)은 스승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을 남겼다. 을축보 남계공사적(乙丑譜 南溪公事蹟)에 보면, 반곡장선생(盤谷張先生)이 죽자 3년간 선생의 묘를 지켰다고 한다. 대상(大祥) 전날에, 눈이 쌓여 영전(靈前)에 공육(供肉)하지 못하게 되자 밤새워 호곡(號哭)하였더니 호랑이가 노루를 잡아다 놓고 갔다고 한다. 세종이 이를 듣고 서척에게 사원(司員)을 제수하였다. 또한 후에 부모가 돌아가자 6년간 묘를 지켜 도리를 다하였다. 섬계서원(剡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서기(徐起)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자로서의 일생을 보냈다. 字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 구당(孤靑· 龜堂)이다. 서경덕· 이중호(徐敬德· 李仲虎) 등에게 사사(師事)하였고 이지함(李之菡)과 더불어 각지를 유량하기도 하였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고 특히 민속과 실용적 학문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 후에는 지리산· 계룡산 등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持平(持平)에 추증되었고, 공주 충현사(公州 忠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서호(徐皥)의 호는 거정(居正), 일찌기 금자수(金自粹)에게서 배웠고, 문종 때 사인(舍人)을 지냈으며, 단종 때에는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가 단종의 손위(遜位) 소식을 듣고 벼슬을 그만 두고 순절(殉節)하였다. 난세에 절의를 지킨 서응두(徐應斗) 역시 이천서씨(利川徐氏) 문중을 빛낸 인물이다 .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선조 2l년 무과에 급제, 곧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더불어 진주성(晋州城)에서 싸웠다. 城이 함락되었을 때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서례원(徐禮元)도 명종 22년 무과에 급제,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거쳐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있을 때 왜병(倭兵)이 침입, 진주성(晋州城)이 함락되면서 순절(殉節)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서의(徐誼)는 충북 영동(永同)에서 의병(義兵)을 모집, 지혈(指血)로 맹서하고 북상하는 왜군을 차단, 혈전(血戰)하다가 아들 서희복· 희우(徐希福· 希祐) 3父子가 순절하였다. 서득천(徐得天)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으고 아들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싸우다 父子가 모두 순절하였다 . 둘째 아들 서사적(徐思迪)도 아버지 서득천(徐得天)이 전사하자 장정 7백여명을 모집하고 선봉장이 되어 판관 박의장(判官 朴毅長)과 합세하여 금오산(金鰲山)에서 크게 무찔렀고, 다시 형산강(兄山江)에서, 그리고 곽재우(郭再祐)가 있는 화광산성(火狂山城)에서 싸워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후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 이밖에도 홍원(洪原)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서경충(徐敬忠)은 충무위좌부장(忠武衛佐部將)이 되었으며, 조헌(趙憲)의 문인 서응시(門人 徐應時)는 선비의 기개를 떨치고 순사(殉死)하였으며, 서덕용(徐德龍)도 창의(倡義)하여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으며 선무랑 서응린(宣武郞 徐應鱗)은 려산 금강(礪山 錦江)지역에서 남원병량유사(南原兵糧有司)로 종군(從軍)하다가 순사하였다 .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군자감판관 서흥효(軍資監判官 徐興孝)가 향군수대 공모(鄕軍數隊 公募)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로 대하(大賀)의 길을 열었으며, 월성(月城)의 선비 감역 서일원(監役 徐一元)과 중추부사 서일회(中樞府事 徐一會) 형제는 창의(倡義)해서 北上하다가 조령(鳥嶺)에서 인조의 항복을 듣고 병기를 던지고 하늘에 제사하였다. 한다. 서일(徐一)은 독립운동가로서 본명은 기학(夔學), 號는 백보(白甫)다. 1911년 만주 간도(間島)로 가 이듬해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을 기울였고, 3 · l 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였고, 김좌진(金佐鎭) 등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설치, l920년의 청산리(靑山里)싸움에서 승리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 뒤에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결성되었을 때 총재가 되었다. 흑하사변(黑河事變)에서 청년 다수가 희생되자 이에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40세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자손들이 번창하였던 만큼 벼슬한 사람도 많고, 역사에 크고 작은 이름들을 남겼으나, 특히 나라가 외침을 당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 많은 자손들이 문무를 가리지 않고 나아가 싸움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안보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군사(君師)에 대한 도리를 소중히 여겨 이를 몸소 행함으로써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선조들이 많았다. 이천서씨 문중에 이러한 선조들의 홍업(鴻業)을 기리는 후손들의 정신이 전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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