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0. 大膽公主(배짱 좋은 공주)
"넌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라, 내가 해볼 테니까......"
혁필이는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소제가 경솔하여 우리의 접근을 들키게 한 잘못이 있는 만큼 이번에는 소제에게 공을 세워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러고 싶다. 앞장서서 싸우다가, 싸우다가, 조용히 그냥 콱 뒈 져버리라고 백 번도 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저 꼴 보기 싫은 은혜미라는 계집애가 스스로 불에 타서 따라 죽으리라는 것이 명확한 마당에서, 혁필이는 지금 죽으 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개쉐......차 차 참아, 아우......뒤로 물러서서 노모님과 지켜보고 있게, 내게 계책이 있는데 그대가 나섰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거야."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아우라는 말을 듣자 남궁혁필의 눈에 반짝반짝 빛이 돌았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형님?"
"자네 친 형이라는 녀석도 상태가 별로 안 좋잖아? 청심환이라도 먹여주고 좀 달래줘, 여기 일은 곧 매듭지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남궁혁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얼굴의 윤곽이 영 판 수염 난 사내라고 보기에 묘한 것이 그대로 끌고 대한민국으로 가면 석 달 정도 공을 들여 꽃미남 스타로 만들고도 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소도 매력적이었고 수염도 그럴 듯 하고, 남자와의 사랑이라......
젠장, 나까지 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뒤로 가라고, 그리고 은성노모에게 구경이나 잘 하라고 전해,"
이 자리에 모인 마교도 중 최강이라는 동영호리를 단번에 물리치고, 마교도들을 파죽지세로 해치우고 나서, 나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다.
"예, 형님, 그럼 몸조심 하십시오. 사태가 이상해지면 소제가 즉시 달려오겠습니다."
"내가 싸우기 시작한 다음 이상하게 보여도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걸 테니까, 그냥 눈 감고 참아주길 바래......"
"하하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형님께 목숨을 한번 빚진 걸요."
남궁혁필이 뒤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부릅뜨고 행여 그에게 누구도 접근하지 못 하도록 경계했다. 당연한 일인지 다행스런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교도들은 절뚝거리며 뒤 로 걸어가는 남궁혁필을 쫓지 못했다.
"동영호리!"
내가 버럭 고함을 치자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동영호리가 움찔하며 뒤로 주춤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늘 네 놈을 죽여 이 자리에서 토막 치고, 몸통은 불에 굽고 팔과 다리의 살은 칼로 저며 살은 개에게 주고, 뼈다귀는 새에게 주며, 창자는 빼서 줄넘기를 하고, 부모님과 형제자매 사촌과 삼촌, 육촌 아우와 팔촌 조카의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난 강무태가 아니다!"
동영호리가 무언가 지껄이기는 했는데 마교에서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는 듯 했다. 은성 노모는 동영호리의 신법은 무척 쾌속하고 무척 겁이 많은 녀석으로 소문나 있기 때문에 일 단 접전에서 놈을 없애지 못했다면 포기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렇다. 나는 두 가지의 과제를 반드시 이행할 것을 은성노모에게 당부 받고 그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허접한 무공에 오직 잔 대가리 하나로 마교 서열 90위권을 맴 돌고 있는 십극자를 사로잡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납치 추종의 명수라는 동영호리를 죽이거나 쫓아버리는 것이다. 은성노모가 부탁한 일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동영호리에 관한 문제는 나와도 밀접하게 연관되는 문제였다.
천산은 이미 동영호리에 대한 천산연맹주추포령(천산연맹주추포령)을 발동하고 있었다. 물론 넘이 대공자를 납치했다는 명분에서이다. 역사상 적어도 마교 30위권 밖의 인물 중 이 명령이 발동하여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동영호리가 제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무술실력이나 서열로 본다면 언젠가는 붙들려서 이실직고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대공자라닙쇼? 소생 대공자님을 뵌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심 지어 꿈에서도 본 적이 없사옵니다......."
이렇게 되어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강무태와 천산대공자, 은성노모까지 모두 얼굴에 똥칠을 하게 되는 것이며 강무태와 유세엽의 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은성노모는 내 귀를 붙잡고 다시 한 번 다짐하지 않았던가?
'방법은 단 하나다. 강무태, 네가 천산의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구하고, 동영호리가 네 가문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어주게 되면, 너는 강무태의 모습으로 당당히 천산연맹주인 네 부친을 만나서 동영호리는 네 개인의 원수이기 때문에 천산의 추포령을 거둬 주십사 부탁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천산연맹주께서는 네 부탁을 반드시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심이다. 정파 무림 최강 천산이 전 제자를 동원하여 잡아들이려 하지 않는 한 동영호리는 결코 붙들리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나도 은성노모의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십극자의 경우는 다르다. 십극자가 낙양에 큰 누각을 세워 정파의 영역을 좀먹는다거나, 대가리가 워낙 좋아. 세력을 부쩍 키우 고 있다는 것 등은 나랑 별반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일진에서 짱이 되기 위한 투쟁을 치열하게 하는 동안 내 정신적 스승인 성렬이 형이 무어라 조언을 했던가? '니 일이 아니면 빠져라......' ...... 따라서 나는 십극자의 문제는 머릿속에 접어두고 있었다. 훼방만 놓지 않는다면 놈을 잡아도 상관없고 죽여도 상관없으며 달아나게 해도 상관없다. 은성노모가 놈을 잡고 싶으면 친히 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잡생각을 무지하게 많이 하고 있는데도 마교도들은 내게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불의 장벽 가까이로 갔고 나보다 월등히 시력이 떨어지는 천산제자들이 그제야 분분히 나를 알아보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묵공님의 말씀대로 귀하께서 우리를 구해주러 오신 겁니까?"
"소인이 강영웅의 풍모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온 정기당원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빨리 우리를 구하고 마교도들을 토멸하여 주십시오."
들려오는 애걸조의 목소리가 대부분 정기당원들의 목소리였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청수진당의 식구들은 조용히 내 처분만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역시 내 직할의 영웅 호 걸들다웠다.
묵공이나 묵수, 은혜미 등의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사람들도 이미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겠지만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빙화령은 물론 정기당원들 쪽에 상당히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뭐라고? 쟤가 강무태라는 거야? 정말 구하러 온 거야?"
"함부로 부르지 마시죠. 자선당주님......"
"내가 뭐라고 부르건 무슨 상관이야? 강무태 영웅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 게 맞느냐고 묻고 있잖아!"
빙화령의 뾰족한 목소리가 정기당원들의 응원과 어우러져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먼 곳에서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놈의 터무니없는 기술은 잘 보았다.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 노부 십극자의 독문비학인 화염지옥을 뚫고 나가겠느냐?"
십극자의 말이 끝나자 마교도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하 마교의 살아있는 제갈양! 십극자 님의 화염지옥을 뚫은 자는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성교주 만세! 만세! 만세!"
환호소리가 잦아들자 십극자가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네 놈이 단순한 대가리와 과분한 무예 실력으로 동영호리님의 피부에 살짝 흠을 내었다고 자신만만하고 있지만 이미 상황은 일변했다. 노부는 당장이라도 화염지옥의 기세를 올려 내 부에 있는 쓰레기 같은 천산의 개 놈들을 모조리......"
"조용히 해! 이 개 자식아!"
나는 내공을 담은 고함으로 십극자의 말을 간단히 자른 다음 불의 장벽 가까이 걸어갔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확연히 보였다. 모두 제대로 된 몰골이 아니었다. 불길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피하느라 은혜미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리카락이나 옷들이 많이 상해있었고 묵씨 형제들은 화상까지 입은 듯했다.
"천산대공자께서 나를 불러서 달려왔는데 천산의 영웅들이 이런 고초를 당하고 있구려! 다른 단체의 인물들이라면 몰라도, 소생 대공자와 의리로 맺어진 이상 천산의 위기를 저버릴 수는 없소이다. 곧 천산의 영웅들만을 불초 소생이 반드시 목숨을 걸고 구해드리리다."
나는 모두가 뚜렷이 알 수 있도록 내가 구하는 대상은 오직 천산의 제자들이라는 점을 분명 히 밝혔다. 묵공이 즉시 내 말을 받았다.
"그 말씀을 들으니 이미 불 밖으로 빠져나간 듯 합니다. 하오나 강영웅, 우리만을 구해주신 다는 것은 천산 이외의 다른 단체 소속자들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무지하게 어색한 연기였지만 적어도 천산대공자인 내게 명령 받은 자신의 배역을 잊지는 않고 있었다. 천산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더라도 참말만 하는 것 같은 묵씨 형제의 믿음직한 입과 빙화령의 독설은 필수였다. 빙화령이 재빠르게 자신의 역할을 기억해 냈다.
"호호호호호, 당연한 말 아닌가요? 강영웅은 무림인이며 오직 무림의 일만 관계하셔야죠. 무림과 황궁은 별개의 것으로 강물과 우물물이 다르듯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요. 소녀로서는 황궁의 인물들께서 재수 없게 이 불구덩이에서 타 죽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무림인인 강영웅은 우리를 구하고 황궁 어딘가에서 엄청난 고수가 북경성에서 달려와 황궁 분들을 구하시겠죠. 어쩌면 그 전에 불이 자연적으로 꺼질 수도 있을 테구요."
"사람이 불에 타 죽게 생겼는데 무슨 무림과 황궁을 구분하는 거냐! 어리디 어린 꼬마 아이가 마음 쓰는 것이 독랄하기 이를 데 없구나!"
고함을 치는 것은 아마도 비비니 미미니 하는 공주의 시녀들일 것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 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호오, 그 속에 명나라 황실 인사가 있었습니까?"
내 질문에 즉시 급박한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영웅, 소녀 미미 황상폐하의 금지옥엽 정란공주마마를 모시고 있다가 이런 끔찍한 사태를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마마를 구해주신다면 황실에서는 영웅에게 어떠한 상급이든지 내리실 것입니다."
나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불이 뜨겁기는 뜨거운 모양이로군요. 무척 조급한 목소리네요? 미안한데요. 그 제안은 거절합니다. 소생이 불을 뚫어 탈출구를 만들더라도 그 탈출구는 천산제자들을 위한 것이지 명황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그곳으로 함께 나오시지 말고 잠시 더위를 참고 기다리셨다가, 다른 곳에서 구해주러 오면 그때 빠져 나오던지 하십시오."
"어, 어떻게 그런 망발을 하시는 겁니까?"
무지하게 다급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황당하기는 대부분의 천산 제자들도 그런 모양이었지만 현재로서 유일한 희망인 내 말이었기 때문에 그저 조용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나는 조선인이요. 아가씨, 명나라가 우리 조선에 제멋대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했던 소행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황실 양반들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이오. 게다가 조금 전에도 남궁 첫째가 조선을 험담하며 속을 잔뜩 긁어놔서 짜증이 확 나는 참이란 말이외다!"
"대명제국이 조선과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은 초기의 일이다."
안에서 색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품과 품위, 바로 공주였다. 불구덩이 속에서도 공주의 목소리는 확실히 다른 맛이 있었다.
"지금의 조선은 명과 한 가족과 마찬가지, 명은 조선에 외적이 침입하면 즉시 파병하여 도와줄 것이며, 조선에 흉년이 들게 되면 즉시 쌀을 보내 빈민을 구휼할 것이다. 옛 감정으로 그대가 우리를 구하지 않겠다는 것은 상관없지만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 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공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짜증을 내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공주요? 엄청 어려운 소리 지껄이는 것 보니까 그렇기도 한 것 같은데......"
"무엄하도......무엄합니다. 어찌 감히......"
무엄하도다! 를 슬쩍 삼키고 어물거리는 것을 보니 비비인지 미미인지 모를 목소리도 많이 약해진 기색이었다.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외국인이니 법도에 어긋날 수 있겠지, 이해하겠다. 그러니까 그대는 명나라에 대한 감정 때문에 우리는 구해줄 수 없다는 말이냐?"
"그렇소. 알아서들 구해보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오."
난 매정하게 말을 끊으며 불의 장벽을 통해 공주를 바라보았다. 불빛에 비치는 공주는 담담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정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알았다. 미미, 비비, 너희들도 공연히 구해달라고 떼쓰지 말아라. 불이란 켜지면 결국 꺼지는 것이 아니더냐?"
미미와 비비가 펄쩍 뛰는 모습이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공주님! 이 불은 평범한 불이 아닙니다! 무슨 괴이한 기관이라도 설치된 듯,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거세지고 있습니다. 저 자가 구해줄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득해야 할 텐데 ......아......"
나는 혀를 차면서 공주를 힐끗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동영호리와 십극자를 응시했다.
꼬였다. 공주라는 기집애는 마땅히 살려달라고 애원 했어야만 했다. 그래야 슬쩍 천산이 그 녀에게 저지른 일과 내가 구해주는 일을 쌤쌤해서 계산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어찌되었건 무언가 계기를 만들어야만 했다.
다음 순간 어마어마한 속도감을 자아내는 쐐애애애액 하는 소리가 십극자와 동영호리의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고 무수히 많은 화살, 노포 따위가 나를 노리고 날아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자식들!"
쐐애애애애액 - 슈슈슈슈슈슈슉 - 파바바박 나는 내가 뛸 수 있는 가장 높은 점프를 했고 내 발을 스치다시피 날아와 땅속에 깊숙이 박 히는 숱한 화살들을 느낄 수 있었다.
"크하하하하! 좀 놀랐느냐? 이 십극자님의 말씀을 무시한 벌이다. 고슴도치......어 제기랄 맞지 않았나?"
십극자의 말은 내가 땅에 내려오기 전에 들려왔다. 열이 머리끝까지 받은 나는 그대로 십극 자란 넘을 향해 돌진했다.
"너 오늘 제삿날이다. 죽여버릴 테니 움직이지 마! 거기서 움직여도 죽여 버릴 거다!"
"거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너 같으면 가만히 있겠냐!"
내가 고함을 지르며 후다다닥 달려가자 십극자는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며 뒤로 다다다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십극자와 10여장 사이를 두고 있던 동영호리도 아직 석고가루를 다 털 어내지 못한 상태로 옆으로 게걸음치며(그렇게 빠른 게걸음은 처음이었다.) 달아나고 있었다.
"위험해, 멍청아!"
나는 듯 달리는 가운데 누군가 고함을 쳤다. 은혜미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빙화령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편이었고 위험을 경고해주는 소리였다. 본능적으로 뛰어오르기 위해 발돋움을 하는 찰나 땅이 풀썩 꺼져버렸다. 내 몸은 한 순간 균형을 잃었고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다음 순간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위에서 나를 덮어 내렸고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게 뭐야! 이 빌어먹을 자식!"
깜깜한 어둠 속에서 득의만만한 마교의 합창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크하하하하, 저 쥐새끼 같은 넘이 십극자님의 오행함정(五行陷穽)에 걸려들었으니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하하하"
"우하하하하, 멍청한 녀석이다. 이 십극자님의 이백쇠뇌 연환진을 피한 것은 운이 좋았지만 오행함정 때문에 운이 다하고 말았다. 하하하하"
날카롭고 무언가 구린내가 나는 것이 어둠 속에서 내 발바닥을 찌르고 있었다. 일종의 월남 전 부비트랩과 같은 구조인 모양이었다. 깊은 함정으로 빠지면 발바닥이나 몸통을 아래에 꽂아놓은 날카로운 창이나 대나무 같은 것이 찌른다. 그런데 그 창이나 대나무에는 병균을 옮길 수 있는 물소똥과 같은 것이 발라져 있다......
"니들 나가면 전부 죽었다고 복창해라!"
"우리를 죽인다는데요?"
"크하핫, 아직 덜 고통스러운 모양이군, 다시 담요 하나를 던져줘라!"
"옛!"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머리위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철푸덕......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넓은 물체가 다시 머리 위에 내리 덮였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의 무게로 내 머리를 누르며 아래로 내려왔다. 입김으로 불어냈지만 3갑자 내공을 가볍게 씹으며 다시 내려와서 덮였다.
짜증이 부쩍 솟았다. 눈에 안력을 돋구며 사방을 탐색했지만 기본적으로 불빛이 없는 곳에, 머리 위를 헝겊 같은 것으로 덮은 상황에서는 적외선 감지기라도 달더라도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 했다. 호흡은 점점 가빠지고 있었고 --- 농담이 아니다. 두 다리는 내가 갖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호신강기(반탄진기와는 조금 다르지?)와 가죽창을 덧댄 신발의 질김에 힘입어 날카로운 창날과 같은 곳을 딛고 있었으며, 두 손을 좌우로 저어가며 아슬아 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운기와 토납을 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니들 내가 나가는 순간......"
"함정의 깊이는 석장, 폭은 석장, 거꾸로 꽂은 창날은 길이가 두 척, 머리를 덮은 것은 두꺼운 삼베로 만든 거적과 같은 것이다. 조선인 청년!"
크지는 않았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바로 공주의 음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고함을 지른 것도 공주의 목소리였던 듯 했다. 공주가 무예를 익혔나 하는 의구심을 떠올리 기 전에 십극자의 음성이 메아리 쳐 들려왔다.
"크하하하, 정란공주 마마께서 계시는 줄 알았다면 우리들이 조금 더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무슨 준비라는 말이냐?"
공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묻자 십극자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건장한 사내들을 천명 정도 데려와서 개 같은 황제 영락제가 총애하는 공주마 마께 운우지정의 즐거움을 천 번 정도 선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십극자님, 우리 형제들만 동원해도 그 정도 횟수는 채울 수 있습니다. 캬하하하 하"
"닥쳐랏! 더러운 사마외도의 추잡한 무리들아! 그런 하늘이 무섭지 않은 말을 하고도 무사 히 살아갈 줄 알았더냐!"
미미인지 비비인지가 격분해서 고함을 쳤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마교에 대해 조금 더 화가 치밀었고 공주에 대해서는 조금 더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은혜미나 남궁혁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공주를 통하는 것도 꽤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다음 문제의 해결방법도 떠올랐다. 기분이 조금 엿 같아지겠지만 공주가 천산에 해꼬지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남궁혁필을 이용하는 것이다. 설마하니 정혼자의 부탁인데 공주도 매 정하게 "안돼 천산은 멸문이야!" 라고 외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만은 끝까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딛고 있는 두 개의 창날은 가늘고 날카로워서 자칫 잘못하면 살을 찢고 상처를 크게 입힐 것이다. 점 프를 하려 해도 발을 디딜 안전한 곳이 있어야 하며......
"두 발이 땅에 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물을 채워놓았으니까, 만일 운이 좋게도 두 다리로 창이나 칼끝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다면 몸을 거꾸로 세워 수파참의......"
공주의 말이 내 정신을 확 들게 만들었다. 발로 쉽사리 뛰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방해물이 있어서가 아니던가? 그 하나는 탄력이 있지만 날이 선 창이 발에 상처를 입힐까봐서 이고 그 다음 방해물은 위에서 덮어 누르는 질기고 무지막지하게 넓은 삼베이다.
해결방법은 확실히 떠올랐다. 하지만 실행하기에는 무지무지한 용기가 필요했다.
"하긴 어려운 방법이니 기다리며 남궁공자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걱정되는 건 놈들이 지금 운반해오는 통에 기름이 있을 경우이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게 되면 곤란해질 텐데 그런 잔학한 짓은 하지 못하도록 말려보겠다......"
공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나를 자극했다. 그러나 공주가 나를 자극하기 위해 그런 말 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래 한번 죽지 두 번 죽겠냐? 기름 붓고 불을 지르는 건 사양이다.'
나는 생각을 정하자 즉시 쪼그려 앉으면서 수파참을 사용해서 양손을 단단하게 만들어 발을 딛고 있는 두 개의 창날을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거꾸로 일으켜 세운 다음 두 발을 움츠렸다가 단번에 발로 넓은 삼베천을 박차며 두 손으로 창날을 밀어냈다. 창날이 조금 바스러지는 느낌이 들었고 내 두 다리는 강력한 힘으로 삼베천을 쳐냈다.
펑! 펄쩍!
삼베천은 위로 솟아올랐지만 완전히 날아가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몸은 낮지만 허공에 떠 있었고 나는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함정 가운에 날이 망가진 창이 보였고 나는 몸을 뒤집어 한 발로 내려섰다가 탄력을 이용해 옆으로 뛰어갔다.
투두둑!
창이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고 나는 긁어낼 수 있는 모든 진기를 긁어내서 몸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스르르르르르르......
"으가가가!"
아슬아슬했다. 내 손에 함정의 끝 부분이 잡혔는데 주루룩 밀려내려 갔던 것이다. 다행스럽 게도 튀어나온 돌에 내 발바닥이 부딪쳤고, 나는 다시 한번 진기의 운용을 변경했다. 다음 순간 나는 밖으로 나와 있었다.
"우왓! 정말 다행입니다."
정기당원들의 우뢰와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내가 함정에 있는 동안 마교에 대항해서 응원단을 조직한 모양이었다. 나는 쇠똥이 묻은 손바닥을 땅에 문질러 닦으면서 더 이상 오행함정을 자랑하지 않는 십극자를 노려보았다. 십극자와의 거리는 10여장, 30미터 가 량 떨어져 있었고, 몇 초만 걸음을 빨리 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올라오면 마교는 다 죽인다고 했지?"
잔잔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화가 날대로 난 상태여서 목소리에 감정이 담겨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앙! 니들 다 죽인다고 했지?"
십극자가 무언가 씨부렁거렸는데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이미 수파참을 운용하고 있었고, 양손에 나무통 하나씩을 들고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우왕좌왕 몰려서 있는 마교무 리들을 향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섬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희들이 먼저다!' 하는 표정 말이다.
"한번 함정에 걸린 자가 다시 걸리는 것은 바보짓이다."
내가 달리기 직전에 공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들이 달아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주의 말에 나는 다소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런데 공주 얘 꽤 눈이 좋은 가 보네? 하긴 궁궐에서 몸에 좋다는 것은 죄다 처먹었을 테니까......" 라는 빙화령의 목소리와 "이 요망한 어린 것아, 공주마마께 제대로 된 예절을 갖추지 못하겠느냐!" 하는 미미인지 비 비인지의 목소리도 제대로 귀에 들려왔다.
눈앞의 땅을 바라보았지만 과연 함정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십극자가 정말로 제갈량이 환생한 넘이라 하더라도 무지하게 많은 함정을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함정과 단 하나의 화살 매복진 만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난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려 조금 전에 출발한 불의 장벽 가까이로 재빨리 움직였다.
"오오, 강무태 영웅!"
정기당원들을 주축으로 한 천산 제자들이 환성을 지르는 가운데 나는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있는 것이 강무태의 몸을 오래는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젠장, 공주의 말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가는 그대로 천산대공자로 함정에 빠질 뻔 했겠다.'
"통로를 만들겠지만 제대로 될지 또 오래 유지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서 있는 방향에서 좌우로 물러서세요!"
내 고함소리를 듣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분분히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주만은 가운데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사이는 생각해보니 좋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소. 왜란이다 호란이다......이건 좀......황궁 분들도 모두 나오셔도 좋으니까 협조해 주시오."
그제야 공주가 비비와 미미의 손에 이끌려 옆으로 물러섰다. 천산제자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누워있는 황궁 무사들을 옆으로 굴리고 있었다. 담배 한 가치를 피우기 직전에 내가 계산한 가상의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진정한 통로를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도움닫기를 위해 뒷걸음질해서 멈춰 서자마자 마교도 쪽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려오기 시작했다. 예의 무지막지한 화살공격이 틀림없었다. 다시 한 번 현기증이 피어올랐고 이번에는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영웅 조심하시오. 화살진이 날아오고 있소! 사람이 쏘지 않고 미리 장치한 기계를 통해 ......"
뒷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벽력같이 소리를 치며 앞으로 뛰어가면서 두 팔에 반골장 의 12성 공력을 담아 그대로 땅을 후려쳤다.
퍼퍼퍼퍼퍼퍼퍼펑!
아마 스무 차례 정도는 땅을 때렸을 것이다. 뒤에서 화살이 우수수 내려 꽂히는 소리가 들 려왔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나는 그 속으로 뛰어들면서 양장을 모아 무지막지한 타력을 가상으로 그어놓은 좁은 길로 때려 넣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공중에 솟아오른 흙먼지는 내 장력에 맞자 비스듬한 각도를 그리며 화염벽을 때려갔고 화염 벽은 때리는 반대 방향으로 눕기 시작했다. 현기증이 다시 솟아올랐다. 이제 눈도 침침해지고 있었다.
"오오, 영웅!"
"젠장, 화살진을 다 썼으면 암기로라도 공격해라. 놈들이 빠져나오면 안 된다!"
천산제자들의 소리와 십극자의 고함이 한데 메아리치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거대한 불길 가운데 폭 좁은 통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불러일으키는 흙바람이 거세지면서 불을 제압하고 있는 것이었다. 은성노모는 미세하게 장력을 컨트롤하지 않으면 이 방법의 성공은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해야 하는 게 미세 컨트롤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양장을 사용해서 계속해서 흙먼지를 만들고 만들어진 흙먼지를 화염 속으로 뿌리는 말하자면 인간 소화기인 셈이었다.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누군가 누구를 데리고 튀어나왔다.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나온 걸로 보면 묵씨 형제중 하나가 빙화령을 챙긴 모양이었다. 그 다음에 여자 하나가 튀어나와 내 등 뒤로 쏜살같이 사라져갔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었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도 남기지 않는 여자가 누군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혜미뇬!'
그리고 다음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내 생각보다 제대로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영X 조XX십시오!"
천산제자들이 거의 동시에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격렬하게 내공을 운용하는 중이어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없었다.
퍼퍼! 펑!
다음 순간 누군가 어마어마한 공격을 내 등에 가했고, 난 그 장력을 반탄진기로 튕겨내는 대신 쏜살같이 앞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밀려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튕겨져 날아가는 듯했다. 틀림없이 동영호리나 십극자의 기습을 받은 것일 테지만 별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리는 동안 내 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흙먼지 속에 들어와있었고, 땅에 한번 퉁긴 다음 솟아올랐다가 다시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러갔다.
"대췌 어떻궤 당한......투아 퉤! 퉤!"
입을 열자마자 흙이 사정없이 들어와서 입도 열 수 없었다. 몸이 굴러가는 속도는 줄었지만 이상하게도 힘을 쓸 수 없어 멈춰 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 이치라는 것이 일단 구르게 되면 결국 언젠가는 멈추는 법, 잠시 시간이 지나자 나는 멈추었고 무언가가 나를 잡아 일으켰고, 곧 따뜻한 품에 감싸 안았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대공자?"
차분하고 나직하며 결코 존댓말을 모르는 음성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어어......꽁주......"
공주는 생각을 읽기 힘든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명을 해주어야겠다. 천산대공자, 유세엽...... 아니 강무태!"